8화. 내 딸은 못 준다2021.12.29.
……결국 제이드와 합석하고 말았다. 에이프릴이 너무나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봐서, 어쩔 수 없었다! 나, 에이프릴(토끼), 호위 기사 빌과 리처드, 그리고 제이드. 이 조합 대체 뭐야.
‘인간 둘, 토끼 하나, 개 하나, 늑대 하나라니…….’
그야말로 다양성이 넘치는 자리! ―는 개뿔, 제이드 너 이 자식, 대체 무슨 생각이야! 네가 아무 생각 없이 이러는 캐릭터가 아니라는 거 다 안다고!
‘혹시 글로리아를 알고 있나?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겠지? 그러면 어떡하지? 난 빙의 전 글로리아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고!’
제이드가 글로리아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서술 따위, 원작에선 단 한 줄도 없었는데……. 그런데 만일 내 기억이 잘못된 거라면……? 읽고 나서 잊어버린 거라면??
‘그럼 망한 거지, 뭐. 하하하…….’
하하하…….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제이드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 걸까?
“끼웅.”
“하하, 고마워요. 당신도 멋져요.”
“끼이웅.”
“아, 이름이 에이프릴?”
“웅꺗.”
……야, 너희 뭔데……. 대체 어떻게 대화가 통하는 건데?! 에이프릴과 제이드는 벌써 10분 전부터 저런 식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이게 일반적인 일인가? 나만 토끼 에이프릴의 말을 못 알아듣는 건가? 난 왠지 모를 박탈감을 느끼며 빌과 리처드를 살펴보았다. 두 사람도 ‘이게 무슨 일……?’ 싶은 표정으로 멍하니 에이프릴과 제이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만 못 알아듣는 게 아닌 모양이로군. 그렇다는 건, 제이드에게 토끼 에이프릴의 말을 알아듣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건데…….
‘이 자식 대체 정체가 뭐야? 드루이드야?’
원작에선 이런 설정…… 없었던 것 같은데……??
‘나도 못 알아듣는 토끼 에이프릴의 말을 알아듣다니……! 사위 후보 1 주제에!’
“음식 나왔습니다~.”
그때, 웨이터가 음식을 서빙해 왔다. 이 식당의 명물이라는 튀긴 닭 요리였다. 그냥 치킨이지만. 치킨이 치킨이지, 뭐 별맛 있겠어? 나는 냉큼 손을 뻗어 닭다리를 뜯어냈다. 그리고 접시에 담아 에이프릴 앞에 놓아주었다. 에이프릴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닭다리를 보더니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역시 먹보 토끼.
‘……그런데, 진짜 토끼 모습으로 먹을 생각인가?’
그럼 기름기에 털이 다 더러워질 텐데! 웬만하면 사람 모습으로 먹어 주면 안 될까? 그런 내 마음이 통했는지 어쨌는지, 닭다리를 앞에 두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토끼가 순식간에 모습을 바꿨다. 곱슬기 하나 없이 스트레이트로 찰랑거리는 새하얀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에이프릴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처럼 의자 위에 살포시 앉았다. 살짝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들어 올린 긴 속눈썹 아래의 홍채는 옅은 분홍빛이었다. 그 순간 식당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나는 물론이고, 식당 안의 사람들 대부분이 멍한 표정으로 에이프릴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 아니…… 너무…… 너무 예뻐! 미쳤다! 아악!!’
또다시 내면의 주접이 폭발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에이프릴이 너무 예쁘기 때문이다!
‘천사다, 천사야.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틀림없어……!’
늘 스마트폰을 놓아두곤 하던 테이블 위를 더듬거렸다. 당연히, 스마트폰이 거기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에이프릴…… 사진 찍고 싶은데!
“……그게 원래 모습이로군요.”
그때, 제이드가 에이프릴을 멍하니 응시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에이프릴을 보는 그의 눈빛이 어딘지 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서, 설마……!
‘그새 에이프릴에게 반한 거냐고……!’
아, 안 돼! 에이프릴! 얼른 닭다리 뜯어! 격하게 닭다리를 뜯는 야생의 모습을 보여 줘서 너의 청순미는 사기라는 것을 증명하자! 저놈 콩깍지 벗겨지게! 그러나 에이프릴은 닭다리를 두 손으로 살며시 집어 들더니 깔끔하게 먹기 시작했다. 그간 내가 보아온 야만적인 토끼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너 지금 내숭 떠니? ……라기보단, 생각해 보니 에이프릴이 사람 모습으로 식사하는 광경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렇다. 결론을 말하자면, 에이프릴은 먹는 것조차 예뻤다!
‘그렇구나, 예쁘니까 닭다리를 손으로 들고 뜯어도 예뻐 보이는구나…….’
에이프릴은 닭다리 하나를 깨끗하게 해치우더니, 나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남은 닭다리를 힐끔거렸다. 그러자 제이드가 설핏 웃고는 남은 닭다리 하나를 뜯어 에이프릴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그 순간 퍼뜩 정신이 든 나는 기가 막혀 입을 달싹였다. 저, 저 자식이……! 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인데!
‘벌써 에이프릴에게 점수를 따려 하다니!’
분노한 나는 닭날개 2개를 뜯어 기사들의 접시에 각각 놓아주었다. 이제 제이드 몫의 맛있는 부위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하하……! 하하……. 이런 소심한 복수나 하는 내가 우습고 유치해…….
“토끼일 때도 귀여웠는데, 사람 모습인 지금도 무척 귀엽네요.”
제이드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에이프릴을 향해 눈웃음치며 말했다. 퍽퍽한 닭가슴살을 분자 단위로 쪼개던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 자식이…… 남의 소중한 딸내미에게 끼를 부리다니……!
“제이드는 안 먹어요?”
에이프릴이 정말로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 순간 제이드의 표정이 살짝 멍해졌다. 안 봐도 비디오다. 에이프릴의 옥구슬 굴러가듯 맑은 목소리에 홀린 게 분명해!
“……먹어야죠, 그런데…….”
제이드가 에이프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싱긋 웃었다. 금빛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옅은 색의 입술에서는 봄바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이프릴에게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네요, 나도 모르게 말이죠.”
“……?”
고개를 갸웃한 에이프릴이 제 손에 들린 닭다리를 슬쩍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살그머니 제이드의 눈치를 보다가, 시선을 스윽 피하며 다시 다리를 뜯기 시작한다. 그 장면을 포착한 나는 마치 벼락 치듯이 에이프릴의 속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제이드도 닭다리를 먹고 싶었던 건가……?’ 하고 생각한 게 틀림없었다!
‘역시! 우리 원작 여주!’
연애 눈치라고는 단 0.1g도 없지! 나는 실실 웃으며 먼지만큼 작게 조각낸 닭가슴살을 입에 넣었다. 아주 좋습니다, 좋아요, 에이프릴 선수. 완벽한 철벽 수비를 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쭉 착각해 주길 바란다! * * * 치킨에는 역시 맥주지. 맥주가 너무나 마시고 싶었지만, 미성년자들이 있어서 참았다. 닭을 네 마리나 더 시켜 먹고서 식당에서 나오는 길. 만족스러운 표정의 에이프릴이 내 손을 꼭 잡고 옆에서 걷고 있었다. 그리고 내 등 뒤로 꽂혀오는…… 가시처럼 따가운 시선!
‘저 망할 놈이, 왜 나를 노려보고 난리야……!’
그 시선의 주인은 다름 아닌 제이드. 역시 그도 글로리아의 악명을 익히 아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친분은…… 없는 게 확실해 보이는데.
‘그래도 방심할 수 없지. 조심하자.’
“저기…….”
“응?”
그때, 에이프릴이 내 옷소매를 꼭 그러쥐며 ‘뭐든 들어주고 싶게 만드는 초롱초롱한 눈빛 공격’을 발사했다. 어김없이 심쿵한 나는 곧바로 ‘그래! 뭐든 말만 해!’ 상태가 되고 말았다. 나란 인간…… 자존심도 없는 얼빠…….
“시장 구경을…… 해 보고 싶어요.”
시장 구경? 난 쓰윽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서 제법 규모가 큰 저녁 시장이 열린다고 했던가? 아까 식당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로부터 주워들은 정보였다.
‘저녁 시장이라, 좋지. 근데…….’
그건 네가 한 18세쯤 되었을 즈음에 열리는 이벤트인데……. 게다가 그 이벤트에서 에이프릴과 데이트를 하는 상대는 남주 후보 2였다. 저기 뒤에서 계속 나를 노려보는 남주 후보 1이 아니라.
‘망할 제이드, 그만 노려봐라. 넌 이미 이 장모님 마음에서 점수가 실시간으로 깎여나가 마이너스에 도달해 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제이드를 한번 째려본 다음, 에이프릴에게 상냥히 웃으며 말했다.
“그럼 시장 구경하러 갈까? 간식도 사 먹고. 재밌겠다.”
“……! 네! 정말 좋아요!”
에이프릴이 분홍 눈을 반짝였다. 좋아하는 모습이 참 귀엽긴 한데, 얘가 닭을 얼마나 먹었더라? ……이러다 간식 먹고 배탈 나는 건 아니겠지?
‘아무래도 적당히 먹이는 게 좋겠어.’
그리 결심하고서 나는 에이프릴과 함께 저녁 시장으로 향했다. 호위 기사 두 사람이 우리를 따라오는 거야 당연한 일이었지만, 왜 제이드까지 따라오는 건지는…… 의문이다…….
‘내가 네 치킨 값까지 다 내줬잖아……! 먹고 떨어지라고!’
속 새카만 제이드가 에이프릴에게 자꾸만 관심을 보이니 마음이 못내 불안했다. 이러다 원작 루트대로 가면 안 되는데…… 그럼 에이프릴이 나중에 커서 피폐 로맨스를 찍게 된다고!
“앗, 저거……!”
그때, 에이프릴이 손을 들어 음료를 파는 노점상을 가리켰다. 달달한 과일 주스였다. 얘도 참, 액상과당 좋아한단 말이지. 당뇨 조심해야겠어…….
“단 거 너무 마시면 안 좋으니까, 딱 한 잔만 마시자?”
내 말에 에이프릴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귀여워서 꼭 껴안아 주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나는 공작 부인이니까, 체통을 지키자, 체통을…… 이미 여러 번 실패한 것 같지만…….
“딸기 주스 하나, 오렌지 주스 둘, 청포도 주스 하나…… 그리고 레모네이드 하나 주세요.”
어쨌든 노점에 가서 음료를 시켰다. 레모네이드는 제이드의 몫이었다. 안 사주려 했는데……! 쟤 것만 안 사주면 내가 너무 나빠 보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
“음료 나왔습니다―!!”
얼마 후 음료가 나왔다. 딸기 주스는 에이프릴 거, 나는 청포도 주스, 오렌지 주스 두 개는 기사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제이드는…….
“감사히 잘 마시겠습니다.”
싱긋 웃으며 내게서 레모네이드를 받아 갔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예법에 선량한 미소. 소년치고는 여러모로 어른스러운, 이런 제이드를 싫어할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겠지. ……겉만 봐선 말이다.
‘속으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뭐…… 가식은 나도 떨 줄 아니까. 어디 해보자고. 나 역시 제이드를 향해 그린 듯이 웃어 주었다. 내 딸은 못 준다, 이놈아.
“공작 부인……! 우리 저기로 가요!”
에이프릴이 신이 나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얘, 나를 ‘공작 부인’이라고 부르네? 흐음, 엄마라고 불러도 되는데…… 아직 내가 어렵나?
‘하기야 만난 지 며칠 안 됐으니까…… 앞으로 천천히 친해져 보자!’
그리하여, 나는 에이프릴과 친해지기 위해 12살과 같은 정신 연령이 되어 열심히 놀았다. 활쏘기도 해보고, 주사위 굴리기도 해보고, 이런저런 놀이를 다 해봤다. ……그러다 보니 금세 지쳐 버렸다. 반면 에이프릴은 여전히 쌩쌩했다. 젊음이란 좋은 것이로구나…….
‘아이고, 힘들다…….’
힘들어서 조금 뒤처져 있는데, 그 틈을 타서 제이드가 에이프릴 곁으로 샥 다가갔다.
“……!”
저 녀석이!
‘뭐 저런 요망한!’
너 인간 맞냐? 여우 수인 아니야?!
“에이프릴, 불꽃놀이 하러 가지 않을래요?”
“불꽃놀이……?”
제이드의 제안에 에이프릴의 눈이 초롱초롱 반짝였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크게 절망했다. 아, 안 돼……! 불꽃놀이는 나랑 할 거였단 말이야……!
‘제이드, 이 나쁜―.’
그 순간이었다. 움찔한 제이드가 나를 홱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그것도 몹시 아프도록. 명백히, 악의가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공작 부인!”
어느새 달려온 기사들이 괴한에게서 나를 떨어트려 놓았다. 그럼에도 괴한이 재차 나에게 달려들려 하자, 제이드가 내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뭐, 뭐야, 이게 다 뭔 일이야…….’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눈을 깜박거렸다. 에이프릴도 어느 틈엔가 내 곁에 다가와서 꼭 달라붙어 있었다. 울먹이는 걸 보니 놀란 것 같았다. 괜찮아, 나는 에이프릴을 조그만 목소리로 다독여 주었다.
“어르신, 이게 갑자기 무슨 짓입니까?”
‘……어르신?’
어르신이라니, 설마? 나는 고개를 빼꼼 들고 괴한을 살펴보았다. ……설마가 맞았다! 나를 습격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 검사 어르신이었다! 아까 경기장에서 제이드와 맞붙었던!
“제게 감정이 안 좋으시다는 거 압니다. 그럼 저에게 장갑을 던지시면 될 일이지, 왜 관계도 없는 분에게…….”
“비켜라! 네 녀석에겐 볼일 없다! 내가 볼일 있는 건 저 여자야! 글로리아 아인스턴!”
검사 어르신이 내 이름을 큰 소리로 호명했다. 삽시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확 쏠렸다. ……생각해 보니, 그들 대부분이 수인이었다. 그리고 나는…….
‘……수인에게 몹쓸 짓을 많이 한 걸로 악명 높은, 아인스턴 왕국의 공주……이지…….’
이거…… 느낌이 안 좋은데. 검사 어르신이 나를 습격한 것도, 다 원래 몸 주인의 업보 때문인가? 빌어먹을 글로리아. 대체 얼마나 원한을 쌓으며 살아온 거야?
“다들 비키십시오!”
“워, 워, 길 좀 터 주십쇼.”
그때, 크게 외치는 소리들이 들려오더니 몰려 있던 인파가 파도처럼 갈라졌다. 그 사이로, 이 장소에서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입을 달싹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레이안이 날 향해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기 계셨군요,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