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네가 왜 자꾸 나와?2021.12.25.
“……어딜 갔다고?”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그레이안이 물었다. 채 갈무리되지 않은 살기가 그의 눈동자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검술 대회장에…… 가셨다고 합니다.”
말을 전하러 온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리며 대답했다. 알파에게 복종하는 것은 늑대의 자연스러운 습성이었으나, 이럴 때면 그레이안을 향한 경외심마저 들곤 했다. 기사는 주변을 슬그머니 둘러보았다. 오늘, 아인스턴 왕국과의 접경 지역을 순찰하러 나온 그레이안을 죽이고자 달려든 암살자는 모두 마흔두 명. 분명 아인스턴 왕가에서 엄선해낸, 최고의 실력자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레이안은 아주 손쉽게 그들의 목숨을 거두었다. 그 자신은 조금도 다치지 않고. 비록 그가 늑대들의 수장이라고는 하나…… 그런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괴물 같은 강함이었다.
“보나 마나 에이프릴이 같이 가달라고 부탁했겠지. 그 애는 강해지고 싶어 하거든.”
“……공녀님께서요?”
“뭐…… 안 될 것도 없지. 하지만 나는 그 애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자라길 바라는데 말이야.”
기사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리만 긁적였다. 민첩성과 순발력은 뛰어나지만 다른 수인에 비해 연약한 토끼 수인이, 무술을 익힐 수 있나……? 활 정도는 가능할 테지만, 무거운 검을 드는 건 힘들지 않을까. 그래서 토끼 수인들은 대대로 마법이나 연금술에 몰두하곤 했다. ……지금은 토끼 수인 마법사를 찾아보기 힘들어졌지만.
“저…… 화가 나진 않으십니까? 공작 부인께서 각하의 허락도 없이 공녀님을 데리고 나가셨는데요.”
“왜 화를 내야 하지? 그녀는 나에게 아무것도 허락받을 필요가 없어.”
“그렇지만, 아인스턴 왕가의 사람이지 않습니까…….”
기사가 그레이안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거렸다. 어떻게 보면 과한 참견일 테지만, 그레이안은 노여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대체로 늘 이렇게 너그러웠다.
“아인스턴 왕가의 사람이라고 해서 다 악인은 아니겠지.”
“……‘글로리아 아인스턴’인데도요?”
“……그녀가 악명이 높기는 하지. 하지만 소문과 진실은 다를지도 모르고,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믿어.”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너무 걱정됩니다. 그분이 공녀님을 이용해 각하를 난처하게 만들면 어떡하죠? 애초에 아인스턴 왕가에서 그녀를 보낸 이유가…….”
“그만하지.”
그레이안이 기사의 말을 뚝 잘랐다. 이 이상은 월권이라는 의미였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으나 부드러웠고,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마저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예, 실례했습니다.”
기사는 재빠르게 꼬리를 내렸다. 그레이안이 평상시에 온유한 편이긴 해도, 선을 넘으면 싫어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케인 경은 기사단으로 바로 복귀하도록 해라. 나는 조금 늦을 것 같군.”
“……검술 대회장에 가시려는 겁니까?”
그 물음에 그레이안이 설핏 웃었다. 다분히 재미있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아내와 딸이 나만 빼고 놀러 나갔는데, 안 가볼 수가 있나.”
* * * 제이드는 정말로 굉장했다.
‘빈말로 천재라고 하는 게 아니었구나…….’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그에게 열광할 만했다. 어린 나이에, 성인보다도 작은 체구임에도 상대를 빠르게 제압하는 동작에서는 노련함마저 느껴졌다. 역시 남주 후보 1이라는 건가? 대단한 사람은 떡잎부터 남다르다고…… 제이드가 딱 그 경우였다.
‘이제 결승전이네.’
나는 옆자리를 슬쩍 보았다. 토끼 에이프릴이 까만 눈동자를 초롱초롱 반짝이고 있었다. 내 귀여운 토끼가 알고 보니 전투광일 줄이야……! 심지어 제이드에게 깊은 감명을 받은 것 같은데? ……설마 반한 건 아니겠지?
‘안 돼……! 제이드 칼윈은 360도 돌아서 정상처럼 보이는 미친놈이라고! 이 엄마는 결사반대야!’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토끼를 덥석 안아들었다.
“?!”
놀란 토끼가 발버둥 쳤다. 나는 토끼를 품으로 당겨 꼬오옥 껴안았다.
“끼앵!”
“우리 토끼! 저런 놈에게 홀랑 넘어가면 안 돼!”
에이프릴이 앞발로 내 뺨을 후려쳤다. 이제는 심지어 패륜 토끼였다. 근데 내가 잘못하긴 했지…….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성난 토끼님을 제자리에 공손히 놓아드렸다.
“미안……. 우리 소중한 에이프릴이 저 위험해 보이는 놈에게 반했을까 봐, 나도 모르게 그만…….”
“…….”
에이프릴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이고는 앞발을 꼼지락거렸다. 토끼 모습이라 저 반응이 무슨 의미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사람으로 돌아와 주면 안 될까……?
“……!”
그때였다. 폴짝 도약한 토끼가 내 품으로 쏙 뛰어들었다. 반사적으로 토끼를 받아든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에이프릴을 바라보았다. 에이프릴은 앞발로 내 옷자락을 꼬옥 잡더니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뭐, 뭐지? 괜찮다는 뜻인가?’
하지만 용서의 표현치곤 과한데? ……좋아하는 것 같은데?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에이프릴이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먼저 다가와 주니 무척 기뻤다.
“고마워, 에이프릴.”
“낑.”
나는 에이프릴을 두 손으로 소중히 감싸 안고 보드라운 털에 뺨을 비볐다. 너무 귀엽고 소중한 우리 에이프릴. * * * 얼마 후 시작된 결승전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헝×게임이냐…….’
무식하게 큰 철퇴를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놈, 가시 박힌 채찍을 쓰는 놈, 독을 뿌려대는 놈, 그야말로 막장이었다. 이거 검술 대회 아니었어?
‘무슨 시합이 이따위야. 이거 이래도 돼?’
에이프릴도 어이없는지 내 무릎 위에 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겁먹어서라기보단 극대노해서 그런 것 같았다. 역시 정통파 주인공……!
“끼웅!”
에이프릴은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은 하찮은 울음소리를 내며 씩씩거렸다. 나는 극대노 토끼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내 손바닥이 닿을 때마다 뾰족한 귀가 알아서 스르륵 접혔다. 쓰다듬 받을 때는 자동 접기 기능이 생기는 귀였다. 경기가 점점 더 난장판이 되어갈 즈음에는 분노한 에이프릴이 뒷발을 쿵쿵 굴렸다. 내 허벅지만 아팠다. 아니, 거짓말이다. 사실은 하나도 아프지 않다. 공격력 0이다.
‘솜방망이…… 하나, 둘, 셋, 넷…….’
나는 허공을 향해 샥샥 휘둘러지는 에이프릴의 앞발 하나를 슬그머니 잡아 보았다. 보송한 감촉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에이프릴이 앞발을 쏙 빼냈다. 그러고는 다시 휙휙 휘두르기 시작한다. 기세만큼은 자못 매서웠으나, 손가락 하나를 슬쩍 가져다 대고 맞아 보니 역시 안 아팠다.
‘내가…… 그 뭐냐, 복싱 샌드백이 되어 주마.’
딸 공부시키는 엄마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노력은 가상한 에이프릴을 위해 손가락 하나를 앞발 앞에 놓아 주었다. 에이프릴이 내 손가락을 열심히 때리기 시작했다. 계속 맞으니 조금 따갑긴 하다.
“와아아! 제이드!!”
갑자기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토끼 앞발에 집중하고 있던 나는 그제야 경기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예의 무식하게 큰 철퇴를 휘두르던 놈을 제이드가 제압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한 건지는 자세히 못 봤지만, 놈이 제이드의 발아래 깔려 있었다.
“와아아!!”
“최고~!!”
사이다패스 관중들이 신이 나서 소리쳐댔다. 하긴, 저 철퇴 놈이 가장 문제였지. 덩치도 크면서 저보다 작은 상대만 골라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제이드에게 호되게 당한 거고.
“끼이~!!”
……토끼도 신이 나서 소리를 질러댔다. 눈빛이 아주 초롱초롱했다. 너, 너도 사이다패스니? 진짜로 제이드한테 반한 건 아니지? 아, 안 돼……! 저놈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
“이럴 수가! 이제 단 두 명 남았군요! 곧 우승자가 정해집니다!!”
사회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웬 미친놈이 자폭 마법을 쓰는 바람에 근처의 세 명이 한꺼번에 날아갔다. ……이거 검술 대회 아니었냐고…….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남은 참가자는 두 명. 제이드와…… 제대로 된 검사였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검을 들고 있었다! 자세도 그럴듯해!
“꼬마야, 좋은 말로 할 때 기권해라.”
하지만 어리다고 무시하는 졸렬한 사람이었다. 저기요, 어르신, 관중석까지 다 들려요.
“우우~.”
“늙을 거면 곱게 늙을 것이지~.”
제이드의 팬덤이 검사 어르신을 향해 야유를 날렸다. 가히 K―POP 아이돌에 맞먹는 인기다. 비난당한 검사 어르신은 울컥했는지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러고는 제이드를 향해 근엄하게 소리쳤다.
“크, 크흠! 나는 너를 걱정해서 충고하는 것이다! 내 검은 너 같은 어린애가 받아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야!”
“…….”
제이드가 서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나는 원작에서 수도 없이 묘사되었던 미친놈 1의 진한 아우라를 느꼈다. 저, 저 자식, 역시 웃는 얼굴로 칼 꽂는 무서운 놈이야! 스르릉― 말없이 검을 꺼내든 제이드가 어르신을 검 끝으로 겨누었다. 그에 움찔한 어르신이 괘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이드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어르신.”
‘방금 완전 무협지 대사 같았어!’
그래서 이 싸움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당연히 제이드가 이겼다.
“와아!!”
“제이드!!”
“멋져~!!”
가엾은 어르신은 두 동강 난 검을 든 채로 멍하니 서 있었다. 제이드는 마지막까지 어르신에게 공손히 인사했지만, 어르신은 핏발 선 눈으로 제이드를 노려볼 뿐이었다. * * *
“재밌었니?”
경기장에서 나오는 길. 에이프릴에게 묻자니 토끼 모습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왜 아직 토끼 모습이지……? 에이프릴이 토끼와 사람 모습을 하는 기준은 대체 뭘까? 하하……. 모르겠다. 그냥 마음대로 하게 놔두자.
‘우승은 결국 제이드가 됐군.’
그놈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은 제이드를 그저 ‘신비로운 소년 방랑 검사’ 정도로만 여기겠지. 그리고 에이프릴은…….
“…….”
가만 보니 제이드에게 반했다기보다는, 고수에 대한 동경심……인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원작에서 에이프릴은 연애 눈치가 1도 없었지. 실제로도 그런 모양인데.’
흠……. 그럼 에이프릴이 미친놈 1, 2, 3에게 홀랑 넘어갈 걱정은 조금 덜어도 되려나? 곰곰이 생각해 보며 에이프릴의 부드러운 토끼 털을 쓱쓱 쓰다듬던 때였다. 꼬로록― 어디선가 배고픈 위장이 자기주장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내 배는 아니고. 꼬로록―
“…….”
에이프릴과 눈이 마주쳤다. ……너니? 꼬로록―
“낑……!”
에이프릴이 몸을 동글게 말았다. 작고 하얀 공이 하나 완성되었다. 우리 토끼가 행위 예술도 할 줄 아는구나. 토끼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꼬르륵 소리를 부끄러워하고 있군.’
나는 훗 웃으며 에이프릴을 놀렸다.
“그새 또 배가 고프다니, 에이프릴은 정말 먹보 토끼로구나.”
“……!”
“소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아.”
“……! ……!!”
에이프릴이 부들부들 떨면서 고개를 들었다. 눈이 살짝…… 구겨진 삼각형이 되어 있었다. 노려보는 거로군. 노려보는 것도 귀여워! 나는 참지 못하고 에이프릴을 꼭 안고 마구 쓰다듬었다. 화난 에이프릴이 앞발을 휘두르며 패륜 토끼 2를 찍었다. 그래도 귀여웠다.
“끄앵!”
“하하, 놀려서 미안.”
화난 토끼를 열심히 달래주던 나는 슬슬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이거라면 제아무리 극대노 토끼라 해도 화가 풀릴 수밖에 없지.
“흠, 나도 조금 출출한데, 뭐라도 먹고 들어갈까?”
“……!”
솔깃한 토끼의 귀가 쫑긋 솟아올랐다. 분홍 코가 벌름거리며 긴 수염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역시, 먹을 거라면 화난 것도 싹 잊고 좋아할 줄 알았지.
“뭐 먹고 싶어? 역시 고기가 좋겠지? 흠, 여기도 치킨이…… 튀긴 닭 같은 게 있나?”
스테이크에 이어 치킨을 먹는 토끼…… 으음, 웬만하면 사람 모습으로 식사해 주면 좋겠다. * * *
“공작 각하께서 아시면 화내실지도 모르는데…….”
여전히 에이프릴의 군것질을 반대하는 호위 기사가 쩔쩔매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저 기사, 이름이 뭐더라.
“물어볼 게 있는데요.”
“예……? 제, 제게 말이십니까?”
내가 말을 걸자, 기사는 흠칫 놀라더니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나는 짐짓 상냥하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
“네, 경은 이름이 뭐죠?”
“어, 저는…….”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이 갈색 머리 기사의 이름은 빌 홀랜드. 그리고 빌과 함께 온 다른 기사의 이름은 리처드 앤더슨으로, 이 사람은 채도가 낮은 금발에 진회색 눈이었다. 리처드는 빌에 비하면 말수가 적은 편이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를 지었다. ……근데 뭐랄까, 좀 가식적인 느낌의 미소였다.
“두 사람도 늑대 수인이죠?”
“아, 저는 그렇습니다만, 리처드는 개 수인입니다.”
“……그렇군요.”
개였구나……! 가식적이라고 생각했던 게 갑자기 미안해지려 한다. 왜냐하면…… 개는 착하니까…….
“…….”
나는 리처드를 힐끔 훔쳐봤다. 다시 보니, 골든 레트리버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나와 일행은 머잖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길 가던 사람에게 물어 찾아낸 치킨 맛집이었다. 여기선 그냥 ‘튀긴 닭 요리’ 정도로 불리는 모양이지만. 에이프릴을 안고 식당 안으로 들어선 나는 기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경들도 함께 먹죠.”
“아니, 저희가 감히 그럴 수는…….”
당황한 빌이 손사래를 치며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나는 눈썹을 쓱 치켜세우며 이야기했다.
“뭐 어때요? 내가 경들을 굶길 순 없잖아요?”
……라는 것은 반쯤 핑계고, 사실은 이 호위 기사들도 공범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찔려서 아무 소리도 못 하게 만들어 주지. 하하하!’
나는 식당 안을 쓱 둘러보았다. 앉을 자리를 찾아야 하는데…… 빈자리가…….
‘……없어!’
이럴 수가. 막 경기가 끝난 후라 그런가? 그 경기장의 관중들이 다 이리로 몰려왔나 보다.
‘다른 곳을 가야 하나……? 하지만 여기가 맛있다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하던 때였다. 내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온 웨이터가 넌지시 고했다.
“저기, 손님?”
“……?”
“저쪽 손님께서 합석도 괜찮다고 하시는데……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누가 그런 친절을 베푸는 걸까?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웨이터가 가리킨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 경악하고 말았다. 그 자리에는, 다름 아닌 제이드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네가 왜 또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