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전투 토끼였다2021.12.22.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마침내 사람 모습을 한 에이프릴은, 원작의 묘사보다도 훨씬 사랑스러웠다. 하얀 머리칼은 부드러운 실크 같았고, 분홍 눈은 보석처럼 투명하게 반짝였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긴 속눈썹,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귀여운 인상……!
‘세상에, 너무…….’
나는 감격으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너무 귀여워! 예뻐! 사랑스러워!
‘그런데 너무 말랐어!’
저게 사람 손목이야? 허리는 또 어떻고? 맙소사, 얘 진짜로 잘 먹여야겠다. 스테이크만 먹어도 이해해 줘야겠어! 이렇게나 말랐을 줄이야. 토끼 모습이었을 때는 털이 쪄서(?)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아무튼 너무 귀여워, 에이프릴! 나는 속으로 온갖 주접을 떨어대면서도 겉으론 침착하게 에이프릴을 마주 보았다. 에이프릴은 쭈뼛거리며 내 눈치를 보더니, 내가 살짝 웃자 왜인지 화들짝 놀랐다. 그 반응조차 토끼 같았다. 아니, 토끼 맞지. 역시 토끼로구나!
‘혹시 깜짝 놀라면 머리 위로 토끼 귀가 튀어나오는 건가…….’
……보고 싶다. 에이프릴을 놀라게 하고 싶다는 짓궂은 충동에 잠시 사로잡혔으나, 애써 진정하며 근엄한 체를 했다. 큼큼, 두어 번 헛기침하고서 내가 입을 열었다.
“에이프릴, 맞지?”
“…….”
에이프릴이 두 손을 아래로 내리고 꼭 모아 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소심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토끼일 때보다 사람일 때 더 소심해 보이는데, 표정 때문인가? 눈썹이 팔(八) 자야!
‘그래도 너무 귀엽다, 에이프릴! 한 번만 꼭 안아 봐도 돼?’
―라고 주접이 튀어나올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나는 여전히 고상하면서도 인자한 표정으로 에이프릴을 향해 물었다.
“그래, 아침 식사는 했고?”
“……네.”
꺄악! 목소리! 목소리 완전 귀여워! 미쳤어! 당장 아이돌 데뷔해! 네 주식은 내가 다 사줄게!!
‘지, 진정하자, 나 자신.’
하마터면 자제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방방 뛸 뻔했다. 나는 후우, 심호흡한 후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제 보니 너무 말라서 잘 먹어야겠다. 앞으로는 세 끼 고기를 먹어도 이해할게. 그래도 꼭 야채랑 같이 먹어야 해?”
내 당부에 에이프릴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기 얘기를 하니까 눈이 번쩍이는데……? ……진짜 육식 토끼로구나. 무시무시해!
“저기…….”
“……! 응?”
에이프릴이 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오며 말했다. 역시 목소리가 너무 예뻤다. 여기가 한국이었으면 100% 아이돌을 했을 거야!
“……부탁이, 있는데…….”
“부탁?”
무슨 부탁? 다 들어줄게! 말만 해!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에이프릴을 쳐다보았다. 에이프릴의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아아, 얼른 더 친해지고 싶어!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
“응, 응, 어디인데?”
“저 혼자서 가기는 좀, 힘들 거 같아서…….”
아하, 나더러 함께 가 달라, 이 말이로군.
‘그쯤이야! 뭐 별건가.’
나는 싱긋 웃으며 에이프릴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이프릴은 조금 움찔하더니, 내 눈치를 살피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좋아, 같이 가자. 내가 네 소원 들어주기로 했었잖아. 기억 나?”
양치 잘 하면 소원 들어주기로 했었지. 에이프릴도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서 잡으라는 의미로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정말…… 같이 가 주실 건가요?”
“그렇다니까?”
이 토끼가 속고만 살았나. 나는 이런 거로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에이프릴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아 왔다. 손이 정말 작았다. 토끼 앞발도 정말 작았는데. 나는 에이프릴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붕붕 휘저어 보았다. 그러자 에이프릴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하, 너 이런 거 안 해 봤구나?
“원래 엄마랑 손잡으면 이렇게 하는 거야.”
“그, 그런가요……?”
“그럼~.”
사실 꼭 그렇진 않지만. 에이프릴은 내 말을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확실히, 이맘때의 에이프릴은 무척 순진하구나.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친근하게 물었다.
“그래서, 우리 어디 갈 건데?”
에이프릴은 내가 정말로 함께 가 줄지 아직 확신이 안 서는 듯, 약간 망설이는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게, 어디냐면…….”
* * * 그리하여 에이프릴과 함께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검술 대회장이었다.
‘토끼가 뭐 이런 곳에…….’
음, 아니지, 에이프릴은 힘 세고 강한 육식 토끼이니까. 무예에 관심을 가져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이 전개, 왠지 익숙한데.’
곰곰이 생각해 보던 나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남주 후보 1과 에이프릴의 첫 만남이 성사되는 곳이…… 바로 여기였다!
‘하지만 그 이벤트는…… 2년 뒤에나 발생하는 거로 아는데?’
그러면 오늘은 남주 후보 1이 검술 대회장에 나타나지 않는 건가? 흐음…….
“와플 팝니다! 맛있는 와플 드셔 보세요!”
그때, 웬 행상인이 와플 마차를 끌며 우리 곁을 지나쳐 갔다. 고소한 와플 냄새가 훅 끼쳐 왔다. 먹음직스러운 와플을 목격한 에이프릴의 눈동자가 자체 발광하듯이 반짝거렸다. 에이프릴의 작은 손이 내 외투 자락을 꼬옥 붙잡았다. 꿀꺽, 에이프릴이 침을 삼키는 게 보였다. ……먹고 싶은 거로구나!
‘식성이 남다른 토끼. 호랑이보다도 잘 먹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에이프릴의 손을 꼭 잡고 와플 상인에게 다가가자니, ‘정말로 사줄 거냐’는 에이프릴의 눈빛이 부담스럽게 박혀 왔다.
‘먹보 토끼.’
나는 속으로만 에이프릴을 놀리면서 상냥하게 물었다.
“무슨 맛 먹을래?”
“……! 사, 사과잼이랑, 생크림 바른 걸로…….”
이 녀석, 클래식이로구나. 와플은 역시 사과잼+생크림 조합이지! 뭘 좀 아는데? 나는 에이프릴에게 빙긋 웃어 준 후, 와플을 두 개 주문했다. 값을 치르며 팁도 두둑이 얹어줬더니 와플 상인은 신이 나서 싱글벙글 웃으며 와플을 굽기 시작했다. 흠…… 돈을 마구 쓰는 건 재미가 있구나……. 돈이 많다는 건 좋은 거였어……!
“저기, 공작 부인.”
“……?”
우리와 함께 온 호위 기사 세 사람 중 한 명이 불쑥 말을 건네왔다. 나는 얼굴에 의문을 띄운 채로 그를 쳐다보았다. 갈색 머리에 초록 눈을 지닌 기사는 내 눈치를 살피면서 조금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에이프릴 아가씨께선 이런 시장 간식류는 드시면 안 됩니다. 밀턴 부인께서 금지하셨거든요. 공작 각하께서도 밀턴 부인의 뜻에 동의하셨고요.”
‘뭐래.’
나는 대놓고 기사를 흘겨보았다. 시장 간식류는 먹으면 안 된다니, 그런 게 어디 있어? 원래 어렸을 때는 먹고 싶은 간식 다 먹고 커야 하는 거라고! 난 짐짓 팔짱을 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밀턴 부인은 가정 교사이고, 난 에이프릴의 새어머니잖아요.”
“……그, 그렇죠. 그건 저도 압니다만…….”
“아는 사람이 왜 딴지를 걸어요? 밀턴 부인에게는 내가 잘 말할 테니 더는 참견하지 말도록 해요.”
“그…… 알겠……습니다…….”
제법 패기롭게 나섰던 것치고는, 기사는 몹시 쭈뼛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이 기사도 늑대 수인인가? 나 방금 늑대 앞에서 나댄 거? 허허허, 제법 용감했어! 나 자신!
‘겉모습만 봐선 평범한 인간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서, 수인인 줄도 모르겠네.’
나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회장 근처는 오가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나 많으니 누가 수인인지, 평범한 인간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수인끼리도 무슨 수인인지 구분이 안 되고…….’
물론 인간 모습일 때도 동물의 특징이 크게 나타나는 수인도 있다지만. 지금 여기에 그런 특별한 종족은 없는 듯했다.
‘애초에 수인과 인간이라거나, 늑대 수인과 토끼 수인이라거나 하는 구분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이로구나.’
내가 보기에는…… 그냥 다 같은 사람이었다. 수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노예로 삼아 부리고 박해한 아인스턴 왕국인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와플 나왔습니다―!”
그때, 와플 상인이 씩씩한 목소리로 외쳤다. 와플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에이프릴이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어김없이 나오고야 마는 토끼의 습성! ‘빙키(binky)’라고 하던가? 기분 좋은 토끼가 폴짝폴짝 뛰는 것 말이다.
‘아우, 귀여워.’
에이프릴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와플을 건네받더니, 이내 경건한 자세로 한 입 베어 물었다. 앵두처럼 작은 입술 위로 하얀 생크림이 꽃처럼 피어났다. 와플을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린 에이프릴이 격하게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너무너무 귀여워서 심장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사람 모습을 보니 알겠다. 맛있는 걸 먹을 때 표정이 다양해지는구나.’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내 몫의 와플을 크게 한 입 베어먹었다. 음, 너무 달아. 그래도 맛있긴 하다. 두 개까지는 도저히 못 먹겠지만. 에이프릴과 나는 한 손에는 와플을, 다른 한 손에는 음료가 든 잔을 들고 대회장 관중석에 착석했다. 솔즈베리 성 인근에서 열리는 이 검술 대회는 제법 규모가 큰 모양이었다. 대회장도 상당히 넓은 편이고, 참가자 수도 무려 백 명에 육박했다. 대회는 토너먼트식이었는데, 하루에 다 몰아서 하는 게 아니고 14일간 스케줄이 정해져 있었다. 하기야, 100명의 결투를 하루 만에 다 치르면 보는 사람도 좀 지겹지…….
‘그리고 오늘은 준결승과 결승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나는 종이로 만든 빨대로 음료를 쪼르르 마시며 어서 대회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내 옆의 에이프릴은 어느새 와플을 다 해치우고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내 몫의 와플을 에이프릴에게 불쑥 내밀며 물었다.
“먹을래?”
“……!”
설마 내가 양보할 줄은 몰랐던지, 에이프릴이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난 빙긋 웃으며 재차 권했다.
“네가 다 먹어도 돼. 자.”
“……감사합니다.”
와플을 받아든 에이프릴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야금야금 먹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내 눈치를 보더니 갈수록 점점 와플에 심취해 갔다. 나는 너무 웃겨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 에이프릴만 보면 놀리고 싶어서 큰일이다. 에이프릴이 두 번째 와플까지 싹 해치우고 나니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맨 처음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준결승전 A팀이었다. 총 10개의 팀이 있고, 20명 중 승리한 10명만이 결승에 올라간다. 결승은 10명이서 난장판이 되어 구르는 서바이벌식이라고 한다. 서바이벌이라니……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막장이로구만.
‘흠, 근데…… 의외로 재밌네.’
남들이 피 터지게 싸우는 걸 보는데 재미있다니…… 글로리아의 사악한 본성이 나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건가! 하지만 주변을 쓱 보니 다른 사람들도 다 재미있게 보고 있어서 그건 아닌 듯했다. 에이프릴은…….
“……?”
아니, 얘…….
‘왜 또 토끼가 되어 있어?!’
그새 또 토끼로 변해 있었다! 혹시 겁먹어서 토끼 모습으로 변한 건가? 음, 아니다. 잘 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 뒷발로 서서 척추를 꼿꼿이 세운 채, 양쪽 앞발을 꼬옥 움켜쥐고서 마구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와 뺨을 씰룩거리며, 꽤 사나운 눈빛으로.
“…….”
뭘 하는…… 거지?
‘설마 참가자들의 동작을 따라하는 건가? 토끼 모습으로?’
왜 토끼 모습으로? 왜?? 토끼 모습으로 공격력이 있어??? 솜방망이 같은 앞발에 타격감이 있느냔 말이야????
‘아니, 네가 중세 토끼냐.’
근육질 중세 토끼라면 이해한다. 근데 넌 뽀얗고 조그만 토끼잖아! 대…… 대체 그 모습으로 어떻게 싸우겠다는 거야……! 하지만 에이프릴은 진지했다. 뒷발을 쿵쿵 구르더니 폴짝 뛰어오르며 앞발을 슉 휘둘렀다. 일종의 기술……인 것 같았다. 앞발이 너무 짧다는 크나큰 약점이 있긴 하지만…….
‘진지한 애를 놀릴 수도 없고…….’
원작 여주가…… 원작에서는 연약하고 순진하게만 나오던 토끼가, 알고 보니 육식 토끼였던 것으로도 모자라―.
‘전투 토끼…….’
전투 토끼였다니……!
에이프릴은 과연 강해질 수 있을까? 소년만화 브금을 깔아야 할 것 같다. 한참을 무협지 주인공 에이프릴에게 정신을 빼앗겨 있던 나는 겨우 시선을 떼고 경기장을 돌아볼 수 있었다. 어느새 준결승전 마지막팀 순서였다. 사회자가 참가자들의 이름을 크게 호령했다.
“도미닉! 그리고~!”
저렇게 길게 끄는 이유는 딱 봐도 하나였다. 인기인이 나오는 거다.
“~제이드으~!!”
‘제이드?’
익숙한 이름에 몸이 저절로 굳었다. 제이드…… 설마 제이드 칼윈?
‘에이, 맙소사…… 지금은 걔도 어린 나이일 텐……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그늘진 통로를 빠져나와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낸 참가자는― 아무리 봐도 ‘그’ 제이드가 맞았다! 원작의 남주 후보 1!
‘네가 왜 벌써 나와?!’
“우와와!!”
“와아아!!”
“제이드! 제이드!!”
사람들이 제이드를 향해 열렬히 환호했다. 13세쯤 되어 보이는 소년은 씩 웃더니, 한 손을 들어 인사해 주는 쇼맨십까지 보여줬다.
‘화, 확실해. 저 여유로움, 능숙함……!’
게다가 비췻빛이 도는 은빛의 머리카락. 저 머리색이 그가 제이드(Jade)라는 가명을 쓰는 이유였다. 본명은 그보다 긴 제이다이트(Jadeite). 마찬가지로 비취옥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황금빛 눈, 곱상한 외모에 호리호리한 체격…… 진짜 제이드야.’
나는 충격에 입을 달싹였다. 내 옆자리의 바보 같은 토끼는 신나게 앞발만 휘두르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에게 집착할 미친놈 1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