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늑대의 마성은 위험해2021.12.15.
아침 식사를 거르고 옷을 대충 갖춰 입은 나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복도와 홀, 정원을 하인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공녀님!” 또는 “에이프릴 아가씨!” 하고 부르짖고 있었다. 그중에는 당연하게도 밀턴 부인도 있었다. 에이프릴을 무척 아끼는 그녀는 걱정이 깊은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두 눈을 표독스럽게 뜨는 것이…… 또 나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아니, 에이프릴이 갑자기 사라진 건 나랑 관계없다고!
‘망할 악녀 이미지, 어떻게 해야 벗을 수 있는 거냐.’
눈앞에 글로리아가 있다면 인생을 왜 이렇게 살았느냐고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며 따지고 싶었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걸음을 재촉했다. 에이프릴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이런 일이 자주 있는 편이니?”
내 옆을 종종걸음으로 따르는 시녀에게 묻자, 그녀가 겸연쩍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 왔다.
“에이프릴 아가씨께서 공부하기 싫으실 때나 기분이 안 좋으실 때…… 그리고 아가씨를 낳아주신 분의 기일이 다가오면, 이런 일이 자주 있곤 합니다…….”
에이프릴을 낳아 준 사람이라면…… 원작에서도 여러 번 언급됐었지. 에이프릴과 같은 토끼 수인 여성이고, 이름은 클로에 모르토. 그녀는 에이프릴이 4살 때 딸을 구하려다 눈앞에서 죽고 말았는데, 그 일은 에이프릴에게 커다란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 계속 토끼 모습을 하고 있었던 건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라서?’
일리가 있는 추측이었다. 수인들은 몸이 허약해지거나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지면 동물의 모습을 하기 때문이다.
‘가엾은 에이프릴…….’
아직 12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였다. 자연히 측은지심이 들어 가슴 한편이 쓰라렸다. 마음이 불안한 탓에 토끼 모습을 하는 거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좀 더 잘해 줬을 텐데.
‘어디 있니? 에이프릴. 위험한 곳에 간 건 아니겠지?’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에이프릴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상황을 지켜보니 그레이안이 기사들을 풀어 성 바깥도 수색하게 한 모양이었다.
‘나도 성 안을 뒤져보다가 에이프릴이 계속 안 보이면 밖으로 나가야겠다.’
일단은 정원 구석구석을 둘러볼 생각으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현관을 나서는데, 계단에 서 있던 그레이안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
나는 멋쩍게 웃으며 그의 시선을 스윽 피했다. 젠장…… 눈빛만 봐도 심장이 떨려. 저 남자는 너무 위험해. 알파 늑대는 세상에서 제일 위험해!
‘심지어 목소리도 쓸데없이 좋지. ……아아아, 청력을 포기할 수도 없고. 돌겠다, 진짜.’
이렇게 된 이상 자기 세뇌로 늑대의 유혹을 방어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원래 연애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모쏠이다, 나는 현실 남자보다 소설 캐릭터가 더 좋다, 근데 저 사람이 소설 캐릭터인데…… 아니, 제발 닥쳐, 나 자신.’
다시, 다시! 나는 저 남자가 나에게 뭘 어쩌든 조금도 영향받지 않는다! 정말이다! 나는 원작의 글로리아가 아니니까!
‘그래, 내 철벽은 튼튼해! 얼른 에이프릴이나 찾으러 가자!’
우리 토끼, 어디서 덜덜 떨고 있을지도 몰라. 가서 꼭 안아 줘야지.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그레이안의 곁을 민첩하게 스쳐 지나갔다. 민첩한 하루 보내시라고 외쳐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재빨리 내빼려는데, 별안간 등 뒤에서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뜨헉.’
까, 깜짝이야!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이상한 소리를 낼 뻔했다. ……그냥 못 들은 척 도망쳐 버릴까? 저 사람을 상대하는 건 너무 부담스럽단 말이야……! 나는 잠시 갈팡질팡하다가, 도망칠 준비가 만만한 자세로 한 발을 앞으로 뻗었다. 이대로 그냥 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레이안이 좀 더 분명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부인,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게다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래서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젠장……. 나는 눈물을 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레이안이 나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머리에…….”
그의 손이 내 머리에 닿은 순간, 나도 모르게 흠칫 떨었다.
“……깃털이 붙어 있습니다.”
“……?”
그레이안이 내 눈앞에 대고 깃털을 흔들었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웬 깃털이…… 이게 대체 어디서 붙은 거지?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 저런 게 붙어 있는 줄도 몰랐네. 민망해라…….’
나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작게 헛기침했다. 그러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그레이안을 향해 말했다.
“고마워요. ……그 깃털은, 이리 주세요. 제가 가져다 버릴 테니.”
그레이안은 작게 웃더니 깃털을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왔다. 그의 손이 무척이나 뜨거워서 나는 내심 놀랐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얼굴에 열이 확 오르는 것만 같았다. 내 손을 뒤집어 손바닥이 보이게 한 그가 그 위에 하얀 깃털을 올려놓았다. 은회색 눈이 나를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정직하고 올곧으면서, 동시에 묘한 야성을 품고 있어 위험하게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그 모순이 그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레이안의 손이 미끄러지듯 움직여 내 손을 놓아주었다. ……무슨 손을 놓을 때도 평범하게 놓지를 않냐! 왜 은근히 쓰다듬듯이 놓는 거냐고! 사람 헷갈리게! 나는 망할 깃털을 재빨리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그레이안의 시선을 쓱 피했다. 그와 계속 눈을 마주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체하며 내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전 이만. 지금 매우 바빠서.”
“부인.”
아, 왜 또! 그가 나를 ‘부인’이라고 부를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왠지 좀 닭살이 돋는 것 같기도 하고, 커플들이 ‘자기야, 여보.’ 하고 부르는 뉘앙스처럼 들려서……. 물론 나의 착각일 테지만!
“에이프릴을 찾으러 가시는 겁니까?”
“아, 네에, 뭐…….”
나는 그를 피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지만, 그레이안은 내가 한 걸음 물러나면 두 걸음 다가왔다. 그래서 도저히 거리를 벌릴 수 없었다.
‘으아아…… 너무 가까워!’
심장 떨리게 잘생긴 얼굴이지만 이렇게 가까이서는 보고 싶지 않은데……! 나도 모르게 홀려서 멍한 표정을 지을 것만 같다고!
‘저 얼굴만으로도 유죄, 저 몸매도 유죄, 눈빛이랑 목소리는 더 유죄. 걸어만 다녀도 풍속을 해치는 남자…….’
이러니 원작의 글로리아가 어떻게든 그레이안을 함락하려고 했던 거겠지. 장렬히 실패했지만. 아디오스, 글로리아. 혹시 유령이 되어 내 곁을 떠돌고 있는 건 아니겠지?…….
“……부인, 왜 저를 피하십니까.”
“……?”
……황당한 나머지 할 말을 잃었다. 저기, 첫날밤에 새 신부와 손만 잡고 잔 사람이 할 말이세요? 입만 달싹이는데, 그레이안이 사람을 살살 구슬리듯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께서 에이프릴과 잘 지내시는 듯하여, 소문과는 다른 분이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가만 보니 저 목소리가 이 남자의 전매특허인 것 같다. 방심하면 홀리는 거다. 정신 바짝 차리자……!
“사실은 말이죠, 에이프릴을 본 순간 너무 귀여워서 수인을 싫어하는 마음이 싸악 치료가 되었어요.”
정신을 못 차렸다. 또 헛소리를 지껄이고 말았다. 이게 다 그레이안 때문이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어! 뭔가 좋은 향기도 나고…… 이거 설마 페로몬은 아니겠지?
“……에이프릴이 무척 귀엽긴 하지요.”
그레이안이 세심한 눈길로 나를 살펴보았다. 내가 정상인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급기야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기까지. 나는 기가 막혀 속으로 ‘하하하.’ 웃으며 무의식중에 뒷걸음질 쳤다.
“……!”
그런데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뒤로 넘어갈― 뻔했지만 민첩하게 자세를 바꿔 무사히 착지했다. 나의 순발력에 감탄하는데, 그레이안이 허공에 대고 몇 차례 헛손질하더니 이내 팔을 쓱 내렸다. ……나를 붙잡아 주려 했나 보다.
“크흠…….”
괜스레 민망해진 나는 작게 헛기침하며 그레이안을 훔쳐보았다. 그레이안도 민망한지 나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곁눈질하고 있었다. 대화를 끝내기 적절한 타이밍이라는 생각에, 나는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말씀드렸다시피, 에이프릴을 찾아야 해서.”
“부인, 저도…….”
“에이프릴을 찾으면 알려 주세요! 그럼 이만!”
그레이안이 무슨 말인가 하려 했지만, 나는 모른 체하며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그레이안의 시야에서 벗어나니 드디어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정말로 위험한 생명체야……. 하마터면 홀릴 뻔했다.
‘나의 철벽은 아직 굳건하다. 다행이로다.’
가만히 서서 눈을 감고 명치를 쓸어내렸다. 슬슬 본격적으로 에이프릴을 찾아다녀야 할 것 같은데…….
{글로리아.}
{글로리아!}
{우리가 도와줄게, 글로리아.}
갑자기 여러 목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왔다. ……환청인가? 내가 진짜로 미친 건가?
{환청이 아니야.}
{우리야, 글로리아.}
{꿈에서 만났었잖아?}
‘꿈? 그러고 보니…….’
뽑아다 팔지 못하는 게 아쉬운 커다란 보석 나무와 오팔 빛 나비들이 퍼뜩 생각났다. 그 이상한 꿈에서 나비들과 계약했었지.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들은 그 나비들의 것과 똑같았다. 높고 가느다랗지만 또랑또랑한 목소리들.
‘너희…… 그러니까, 세계수의 나비들?’
{맞아!}
{드디어 기억이 났나 봐.}
{글로리아는…… 기억력이 별로구나.}
아니, 이 녀석들이? 에이프릴을 찾아다니느라 잠시 깜빡한 것뿐이라고! 그리고 솔직히 개꿈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계약인가 뭔가를 한 거였구나. 어쩐지 실감이 안 났다. 그럼 나도 특별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건가? 내가 이런 치트키를 얻다니……?
‘이렇게 되면 더는 단순한 악역 계모가 아니잖아?’
음,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 말로만 듣던 원작 파괴☆를 하고 있는 듯싶었다. 상태창 없다고 슬퍼했는데 그보다 더 좋은 걸 얻은 것 같다! 역시 판타지 세계 하면 이능력이지!
‘좋아, 너희가 좀 도와줘! 그리고 궁금한 게 있는데, 너희 능력은 뭐야?’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어.}
{근데 글로리아와 너무 오래 떨어져 있을 수는 없어.}
{우리가 돌아다니면서 보고, 듣는 것, 글로리아도 알 수 있어.}
{우리는 땅을 비옥하게 하고, 싹이 트게 하고,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게 할 수 있어.}
{죽은 땅을 살릴 수도 있어!}
{마른 강물을 다시 흐르게 할 수도 있고―}
{그리고, 또…….}
뭐가 엄청 많았다. 대충 요약하자면, 이 나비들의 능력은 자연과 관련된 모든 것인 듯했다.
‘사기인데.’
성녀나 신의 대리자나 뭐 그런 거로 추앙받을 법한 능력이었다. 이 능력이 알려지는 순간, 분명 엄청나게 시끄러워질 거다.
‘여기저기서 땅을 비옥하게 해 달라, 농사가 잘 되게 해 달라, 비가 내리게 해 달라…… 난리도 아니겠는데.’
아무래도 나비들에 관해선 당분간 숨기는 편이 좋을 듯싶었다. 게다가 세계수라니…… 원작에서 그게 뭐였는지 좀 가물가물하긴 한데, 중요한 설정이었던 건 확실하다. 이름부터 ‘세계수!’ 그냥 나무도 아니고 앞에 ‘세계’가 붙는다. 겁나 핵심이라는 뜻이다. 나비들도 세계수란 이 세상의 근원이고 우주의 중심이고 어쩌고 했었지. 그런 ‘세계수의’ 나비들이라고 하니 범상치 않다고 봐야 한다. ……한 가지 의문인 점은, 그런 대단한 나비들이 왜 나와 계약했는가인데.
‘……저기, 그런데 너희는 왜 나랑 계약한 거야? ……나는…… 알다시피 평판이 별로인데.’
{너는 ‘글로리아’이니까.}
{네가 글로리아라서!}
{다른 애들은 다 이상해. 글로리아는 믿을 수 있어.}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나비들과는 말이 안 통한다.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기로 하고, 일단 에이프릴부터 찾아야겠다.
‘알았어, 아무튼 에이프릴부터 좀 찾아줘. 다른 사람들한테 너희 모습을 들키지 말고.’
{좋아!}
{맡겨 둬!}
나비들은 의기양양한 자태로 날갯짓해 멀리멀리 날아갔다. 그리고 약 10분 후, 나비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글로리아, 찾았어!}
{여기야, 여기!}
여기가 어딘데…… 알려줘야 알 거 아니냐고. 그때 나비 한 마리가 자신의 시야를 ‘공유’했다. 그렇다. 그건 정말로 공유하는 듯한 감각이었다. 내 머릿속에 어떤 영상이 떠올랐다. 솔즈베리 공작성의 후원 깊숙한 곳, 커다란 나무 위에…… 작은 토끼 한 마리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아니, 저긴 어떻게 올라간 거야?!’
토끼 주제에 나무 타기를 하다니! 원래 토끼가 나무를 타는 동물인가? ……모르겠다. 에이프릴은 보통 토끼가 아니라 토끼 수인이니까. 어쩌면 사람 모습으로 올라가서 토끼 모습으로 변신했는지도.
‘나무 위에서 떨고 있는 걸 보면 어찌어찌 올라가긴 했어도 내려오는 법은 모르는 모양인데…….’
바보 같은 토끼……. 나는 나비들이 알려준 장소로 서둘러 달려갔다. 그리고 머지않아 예의 장소에 도착했다. 머릿속에 펼쳐졌던 것과 똑같은 풍경.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위에 조그만 토끼 한 마리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나는 나무 아래로 천천히 다가가며 슬그머니 에이프릴을 불러보았다.
“……에이프릴?”
“……!”
토끼가 귀를 쫑긋하며 크게 움찔했다. 파르르 떨며 고개를 들더니 까만 두 눈으로 나를 응시한다.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울보 토끼, 또 우네.”
“…….”
에이프릴이 화난 듯 앞니를 드러냈다. 어쭈, 성질도 부릴 줄 알고?
“거긴 또 어떻게 올라간 거야. 내려오는 법은 모르는 거지?”
“…….”
토끼 귀가 아래로 축 처졌다. 생각보다 훨씬 오래 저 위에 있었던 모양이다. 꽤 의기소침한 상태인 걸 보면. 나는 에이프릴이 앉아 있는 두꺼운 나뭇가지 바로 아래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에이프릴을 향해 두 팔을 뻗으며 말했다.
“괜찮아, 내가 받아줄게. 여기로, 나한테 뛰어내리면 돼.”
하지만 에이프릴은 겁에 질린 듯 머뭇거릴 뿐이었다. ……확실히, 저 높이에서 뛰어내리기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소매를 불끈 걷어붙였다. 그리고 드레스 자락을 찢어 다리를 움직이기 편하게 만들었다.
“에이프릴, 내가 거기로 갈 테니 움직이지 말고 얌전히 있어. 알았지?”
“……!”
토끼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내가 저를 구조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나 보다. 에이프릴은 모를 테지만, 사실 난 나무 타기에 일가견이 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개발된 지 얼마 안 된 동네의 신축 아파트였는데, 근처가 다 논밭이고 산이라 맨날 자연을 탐방하며 놀곤 했다. 나무 타기 실력은 그때 길러진 것이었다.
‘이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성공적으로 나무에 오른 나는 빙긋 웃으며 에이프릴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작은 토끼가 품에 쏙 안겨 왔다. ……얼굴과 목덜미의 털이 축축했다. 얼마나 울었길래!
“이제 괜찮아, 에이프릴.”
“…….”
품 안에서 빼꼼 고개를 든 토끼가 동그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흑요석 같은 두 눈동자가 별을 담은 듯 반짝였다. 나는 토끼를 꼬옥 안아주고서, 조심조심 나무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거의 다 왔…… 헉!’
지상으로부터 얼마 남지 않은 거리,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나는 무언가를 붙잡는 것을 포기하고 두 팔로 토끼를 감싸 안았다. 내가 다치더라도 토끼는 무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곧 충돌의 고통이 찾아올 거라 생각해 눈을 질끈 감는데―
“……?”
느껴진 것은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좀 딱딱하긴 했지만, 땅에 부딪혔을 때와는 다른…… 어딘지 포근하기도 한 느낌이 몸을 감싸 왔다. 나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곧이어 시야로 들어온 사람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