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육식 토끼였다2021.12.08.
토끼…… 아니, 에이프릴은 내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갑자기 파르르 떨며 까만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렸다. 뭐, 뭐야. 왜 우는 거야. 나는 못내 당황해 어찌할 줄 모르고 허둥지둥했다. 그때, 웬 나이 지긋한 여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에이프릴 아가씨, 여기 계셨군요. 그런데…….”
여자는 엄한 눈으로 에이프릴을 훑어보더니 나를 향해 매서운 시선을 날렸다. 눈빛으로 살인하겠네! 나도 모르게 품 안의 토끼를 꼭 껴안으며 어깨를 움츠리는데, 나이 든 여자가 가시 돋친 말투로 물었다.
“왜 에이프릴 공녀님께서 울고 계신 거지요? 공녀님께 무슨 짓을 하셨습니까?”
“……?”
저기요? 지금 뭔가 오해하신 듯한데? 저는 아무런 짓도 안 했거든요?
‘댁이야말로 누구시길래…….’
인상을 찌푸리고 그녀를 노려보던 나는 순간적으로 퍼뜩 깨우쳤다. 이 사람은……! 원작에서 에이프릴을 스무 살이 넘도록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아가씨로 키운 장본인! 좋게 말해 순수함을 지켜 줬고, 나쁘게 말해 세상 물정 모르는 백치로 키웠다. 덕분에 순진한 에이프릴과 음흉한 남주들의 연애가 더욱 재미있어졌…… 아니, 이게 아니고. 큼큼, 작게 헛기침한 나는 그녀를 향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밀턴 부인. 뭔가 오해가 있으신가 본데, 난 아무런 짓도 안 했어요. 이 토끼…… 아니, 공녀가 나에게 먼저 뛰어든 거라고요.”
밀턴 부인, 풀네임은 아그네스 밀턴. 에이프릴의 가정 교사인 그녀는 고지식한 성격에 고집도 세고, 극도의 금욕주의자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늑대 수인이었다. 그렇다. 늑대에게 토끼의 교육을 맡긴 것이다……! 그야 이곳엔 토끼 수인이 에이프릴을 제외하곤 한 명도 없으니 어쩔 수 없었을 테지만! 늑대 손에, 그것도 엄한 늑대의 손에 교육받아야 하는 토끼가 얼마나 무섭겠는가? 나는 에이프릴이 도망쳐 온 이유를 단숨에 이해했다.
“……지금 저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공주님께서 아무런 짓도 하지 않으셨다면, 공녀님은 왜 울고 계신 거지요?”
나도 몰라요. 당신이 너무 엄격해서 무서웠나 보죠.
‘그나저나 오해 쌓이는 속도가 장난 아닌데. 에이프릴이 울기만 해도 나에게 혐의가 몰리는 거냐고…….’
이제 와서 ‘저 개과천선했어요.’ 하고 어필해 봐야 아무짝에 소용없겠지만…… 노력은 해보자. 나는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 맹세코,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밀턴 부인은 에이프릴에게 뭔가 잘못하신 모양이네요.”
“네? 그게 무슨…….”
그러자 내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밀턴 부인을 힐끗 훔쳐본 에이프릴이 내 품으로 더욱 파고들며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아 냈다. 얘가 지금 사람 모습이었더라면 분명 ‘흐아아앙―’ 하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내 옷은 삽시간에 비를 맞은 것처럼 축축해졌다……. 토끼가 원래 이렇게 우는 동물이었냐고……? 수인이라 가능한 거겠지?
“울지 마라, 뚝. 착하지. 그러다 눈 퉁퉁 부어요.”
정신 차리고 보니 나도 모르게 토끼를 달래 주고 있었다. 보송보송한 등을 토닥이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조그만 토끼가 엉엉 우는데 무시할 수가 있어야지. 글로리아라면 모를까, 나는 냉혈한이 아니었다. 토끼는 내 품에 폭 안겨 눈물을 퐁퐁 쏟아 내면서도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한편 밀턴 부인은 충격받은 표정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수인을 싫어하기로 악명 높은 ‘글로리아’는 이 집안에서 공공의 적일 텐데, 뜻밖에도 토끼 수인 에이프릴을 너그럽게 달래 주고 있으니.
‘원래 글로리아였더라면, 에이프릴이 품에 안겨든 순간 잡아서 던져 버렸겠지.’
‘이 끔찍한 괴물이! 내가 누군지 알고 엉겨 붙는 거야!’라고 소리치면서.
“……당신은, 수인을 혐오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밀턴 부인이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상당히 놀랐나 보다. 하긴, 그녀는 아닌 척해도 에이프릴을 무척 아끼는데, 에이프릴이 사악한 인간을 따르고 앉았으니 기가 막힐 노릇일 터다. 나는 한 손으로 계속 에이프릴을 쓰다듬으며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입을 열어 말했다.
“지난날을 돌아보니 내가 잘못한 일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앞으로는…… 새로운 사람이 되기로 했답니다…….”
“…….”
정적이다. 까마귀가 ‘까악, 까악―’ 하고 지나가야 할 것만 같은 정적. 젠장. 망한 것 같다. 씨알도 안 먹힐 개소리를 지껄임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가장 의심 많은 인물에게 더욱 의심을 사 버렸다! 역시 빙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뀌면 의심을 사기 마련인데, 어떻게 그럴싸하게 연기하냐고. 빙의물 주인공들은 연기 대상을 받아야 한다. 밀턴 부인은 날 향해 ‘네가 뭔가 속셈이 있어서 착한 척하는 거 다 안다’와 같은 눈빛을 보냈다. 억울합니다. 저는 정말로 선량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내 억울함 따위 알 리 없는 밀턴 부인은 ‘에이프릴 아가씨는 내가 지켜야 한다!’라는 사명감에 불타는 기색으로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에이프릴 공녀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방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토끼 에이프릴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밀턴 부인을 힐끗 보고는 다시 내 품에 얼굴을 폭 파묻는다. 에이프릴의 거절에 밀턴 부인은 어김없이 충격받은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얘 지금 공부하기 싫어서 이러는 거 같은데.’
그때였다. 지척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로 고개를 돌리자,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비현실적인 외모의 남자가 시야로 들어왔다. 에이프릴의 양아버지이자, 늑대 수인들의 수장. 그레이안 솔즈베리 공작이었다. ……확실히, 그에게서는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흘렀다. 저절로 위축하게 만든다고나 할까? 나도 모르게 긴장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레이안은 내 품에 쏙 안겨 있는 에이프릴을 보곤 놀란 듯 멈칫하더니, 이내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걸음걸이가 꼭 먹이사슬 최상위에 놓인 맹수 같았다. 그야 늑대들의 수장이니 당연한가…….
“……무슨 소란입니까?”
그레이안이 밀턴 부인이 아닌 나를 향해 물었다. 그래도 일단은 나를 이 집안의 안주인으로 대우해 주려나 보다. 나는 토끼 귀를 만지작거리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공녀가 놀랐나 봐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눈물을 펑펑 쏟아서 제가 달래 주고 있었죠.”
“……부인께서?”
“네, 제가.”
그레이안은 약간 믿기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이거 좀 슬픈데. 글로리아의 이미지가 그 정도로 개차반인 거냐고? 물론 그렇겠지……. 글로리아의 과거에 대해선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 지뢰가 가득한 흑역사일 게 분명해.
“……일단, 알겠습니다. 에이프릴은 제가 데려가도록 하지요. 에이프릴? 이리 오렴.”
그레이안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두 손을 뻗었다. 나는 활자로만 보았던 ‘아버님’의 아우라에 순간 멍해졌다. 하마터면 내가 저 손을 잡을 뻔했다. 이 늑대…… 여러모로 사람 홀리는데? 너무 위험하잖아!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 나겠어.
“에이프릴……?”
그레이안이 좀 더 다가오며 조심스럽게 불렀지만, 토끼 에이프릴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앞발로 내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 당황한 그레이안이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당장에라도 에이프릴을 집어 던지면 어쩌나 염려하는 표정이었다……. 무죄 추정의 원칙 좀 지켜 주시죠?
‘왠지 앞으로도 글로리아로 살기 힘들 거 같은데.’
한숨을 푹 쉬자 품 안의 토끼가 움찔했다. 고개를 살짝 들고는 나를 올려다본다. 매우 소심한 눈빛이었다.
“…….”
무의식중에 미소를 지은 나는 토끼를 고쳐 안으며 그레이안을 향해 말했다.
“그냥 제가 데리고 있을게요.”
* * * 이 집안의 모든 사람이(어쩌면 세상 모든 이가) 나를 악당으로 여기는 것 같다는 지독한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원작과는 달리 에이프릴에게 공포스러운 존재로 각인되지 않았으니까.’
원작에서 에이프릴과 글로리아의 첫 만남이 어땠냐고……? 당장 경찰에 ‘여기 아동 학대범이 있어요!’ 하고 신고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원작에서는 감기에 걸린 에이프릴이 복도를 걷다가 글로리아와 부딪치고야 마는데, 그 순간 맥이 빠져 토끼로 변해 버린다. 그리고 이다음은…… 말 안 해도 뻔한 일이다. 글로리아는 징그럽다고 소리치며 토끼를 걷어차 버렸다…….
‘미친 거 아냐……? 다시 생각해도 진짜 또라이인 듯.’
그러나 ‘나’와 에이프릴의 첫 만남은 원작과 달랐다. 일단 에이프릴이 감기에 걸린 상태도 아니었고, 사람 모습으로 부딪친 게 아니라 처음부터 토끼였다. 그래, 토끼……. 얘는 대체 언제까지 토끼 모습일 작정이지? 왜 원작과 전개가 다른 것이냐는 의문은 둘째치고, 어디 아픈 것도 아닌데 사람 모습으로 변할 생각을 안 하는 에이프릴이 너무 신경 쓰였다.
“혹시 배고프니?”
소파 위, 푹신한 방석에 앉아 꼬물꼬물 움직이는 작고 새하얀 솜뭉치를 향해 물었다. 동그란 솜뭉치에서 뾰족한 귀가 불쑥 솟아나더니 머리가 생겨났다. 아니, 고개를 든 것이다. 귀를 펴고 고개를 드니 비로소 솜뭉치가 아니라 토끼 같아 보였다. 그래도 여전히 웅크린 자세인 채로 나를 훔쳐본다. 나는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당근을 손에 들고 흔들며 물었다.
“먹을래?”
“…….”
그러자 까만 두 눈으로 나를 빠안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홱 등을 돌린다. ……설마 지금 토라진 건가? 눈앞에 대고 당근 흔들어서? 아니, 당근이 어때서? 토끼잖아. 토끼는 당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토끼가 뭘 먹더라?’
심각하게 고심해 보았으나 생각나는 게 없었다. 토끼는…… 초식이라는 것만 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수인의 식성은 인간과 비슷했다. 작가가 ‘수인의 식성은 인간과 비슷하다.’라는 설명을 스무 번도 넘게 반복해서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흐음, 수인의 식성도 인간과 비슷하다면…….’
나는 종을 울려 하인을 불렀다. 그리고 내 방으로 두 사람분의 점심 식사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시녀 두세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와 상을 푸짐하게 차렸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가득했다. 고소한 냄새에 토끼도 고개를 들고 일어나 코를 킁킁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살포시 웃자, 토끼가 화들짝 놀라더니 아닌 척 등을 돌렸다. 나는 실실 웃으며 먼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토끼 들으란 듯이 ASMR 먹방을 시작했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 소리를 내며 과장되게 감탄사도 흘렸다. 그러자 토끼의 귀가 계속 쫑긋거렸다. 등을 보인 동그란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듯하더니, 뭔가 대단한 결심을 한 것처럼 비장하게 토끼가 방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폭소할 뻔했지만 입안에 닭고기를 욱여넣으며 참았다. 토끼가 살금살금 이쪽으로 다가왔다. 내 눈치를 보듯 힐끔대더니, 콩알만 한 눈을 빛내며 폴짝 도약한다. 단숨에 테이블 위로 올라온 토끼가 눈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그 사이로 작은 앞니가 보였다. 앞니……! 귀여워!
“이거 먹어 볼래? 진짜 맛있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로 만든 샐러드를 가리키며 권했지만, 토끼는 매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 네 취향껏 먹어라. 과연 뭘 집어 드는지 지켜보겠…….
“……?”
토끼의 앞발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스테이크 조각을 집어 들었다. 야, 그거 레어 스테이크인데……. 뽀송한 앞발이 스테이크 소스와 핏물에 붉게 물들었다. 토끼가 과감하게 입을 벌려 스테이크 조각을 텁 물었다. 능숙하게 고기를 찢더니 찹찹 먹기 시작한다. 고기를 뜯고 씹고 맛보고 즐기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한두 번 먹어 본 솜씨가 아니었다. 평소에도 토끼 모습으로 고기를 먹어 왔던 게 틀림없었다. 토끼의 입가도 피로 붉게 물들었다…….
‘이건…… 시각적으로 좀…….’
내 뇌에 엄청난 시각적 오류가 생겨났다. 토끼가 고기를 먹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않나? 토끼는 초식동물 아니었어? 물론 수인은 대체로 잡식이지만―. 그때, 토끼가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들었다.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선심 베풀듯 스테이크 조각을 내민다. 까만 눈동자가 묻는 것 같았다. ‘먹을래?’하고.
“…….”
인간에게 스테이크를 권하는 토끼……. 나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으로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너나 먹어…….
* * * 이 세계의 수인 설정은 조금 특이했다. 동물이 인간의 모습을 하게 된 것도, 인간과 동물이 섞인 것도 아니었다. 이 세계의 수인은 ‘인간이 동물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이었다. 무슨 차이냐고? ……나도 모른다. 작가가 ‘동물 → 인간’과 ‘인간 → 동물’에는 차이가 있다고 했다. 원작자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 아무튼 그래서 수인은 동물의 모습을 할 수 있다 뿐이지 인간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종족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스테이크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
에이프릴은 아주 잘 먹었다. 누가 너 굶기기라도 했니? 뭐, 잘 먹는 건 좋은데, 이왕이면 사람 모습으로 먹어 주면 안 될까……. 마음 같아선 사람 모습 좀 하라고 참견하고 싶었지만,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고…… 아니, 수인이 있는 세계에서 이런 말은 좀 그런가.
‘그냥 먹게 놔두자.’
나는 흐린 미소를 지으며 에이프릴을 바라보았다. 벌써 세 조각째 스테이크를 해치우고는 네 번째 조각을 집어 든다. 작은 입으로 앙, 물어 먹는 모습이 정말로 귀엽다. 귀여운데, 스테이크를 먹는다는 게 좀 그렇다……. 너 토끼잖아.
‘……정말 돈 주고도 못 볼 진귀한 광경…….’
얼마 후 에이프릴은 스테이크를 한 그릇 깨끗하게 비웠다. 혹시 후식으로 샐러드를 먹어 주진 않을까 기대했지만, 샐러드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진짜 토끼 맞냐고…….
“……음, 목욕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에이프릴의 지저분한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했다. 새하얀 털 곳곳에 스테이크 소스와 핏물이 묻어 있어 엉망이었다. 에이프릴도 자신의 조막만 한 몸뚱이를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토끼 귀를 축 늘어뜨렸다. ……귀여워! 큽, 역시 귀엽다. 비록 육식 토끼지만 너무 귀여워!
‘그래! 내가 목욕을 시켜 주마!’
이래 봬도 애견 카페 알바 경험으로 동물 목욕엔 자신 있다고! 벌떡 일어난 나는 에이프릴을 냉큼 안아 들었다. 깜짝 놀란 토끼가 귀를 바짝 세우더니 내 품 안에서 마구 버둥거렸다. 나는 토끼가 무서워하지 않게 상냥한 목소리로 다독였다.
“괜찮아, 씻겨 줄게. 욕실로 가자.”
“…….”
토끼의 묘한 시선이 닿아왔다. 별이 박힌 듯 반짝이는 까만 눈이 알 수 없는 감정을 품고 나를 응시한다. 나는 빙긋 웃으며 토끼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까 말이야, 에이프릴. 내가 네 새엄마잖아. 원래 이런 건 엄마가 해 주는 거야.”
조금 뻐기듯 의기양양한 태도로 욕실 문을 열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에이프릴은 슬그머니 귀를 접더니, 두 앞발로 내 옷자락을 꼬옥 잡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