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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95화 (88권 끝) (1,794/1,794)

템빨 88권 - 22화

“제 제안이 마음에 안 듭니까?”

그리드의 얼굴이 굳었다.

제라툴에게 템빨이라는 칭호를 받아달라고 부탁한 것.

신뢰와 호의의 표현이다.

그리드는 제라툴의 가치를 몹시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세계관 최강자 반열에 오른 존재.

까놓고 말해서.

지상과 천상을 통틀어서 제라툴과 대적할 존재가 몇이나 될까.

심지어 스킬북 생산 스킬을 보유했다.

당연히 귀중하다.

과거의 은원 따위 깔끔하게 털어내고 진실 된 관계를 맺고 싶었다.

한데 제라툴의 반응이 영 떨떠름한 것이다.

호의를 거절당한 셈이라 유쾌하기 힘들었다.

“음...”

제라툴이 조심스럽게 반응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그리드의 눈치를 살폈다.

무신으로 지녔던 절대적인 자존심이 치우를 만나 꺾인 직후이기에.

하물며 템빨계의 일원으로 살아가겠노라 결심한만큼 그리드의 눈치를 살피는 건 당연했다.

“나는 템빨의 의미를 알고 있다.”

그리드가 템빨신이 된 시점부터.

아스가르드의 신들 또한 템빨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학습하고 이해했다.

무구에 의존하는 것.

제라툴의 입장에선 달갑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앞으로도 무신을 자처할 것이다. 한데 무구에 의존한다? 싫다. 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해.”

제라툴이 말하던 도중에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드의 <역천>을 떠올린 까닭이다.

치우와 대적하게 만들어줬던 보검.

필시 강력했다.

순식간에 매료되어 애병으로 삼고 싶었을 정도다.

하지만 도구는 어디까지나 도구여야 옳다.

의존해선 안 됐다.

독으로 작용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무신의 뜻이니 존중하겠습니다. 하지만 좀 충격이군... 난 자존심도 없는 놈이었나...”

그리드의 중얼거림은 몹시 희미했다.

제라툴의 뜻을 존중한다는 대답과 별개로 완전한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제라툴은 절대자다.

그의 압도적인 청각은 그리드의 작은 혼잣말조차 명징하게 포착했다.

‘어찌 반응해야하는 거지?’

본래 제라툴은 아스가르드에서도 안하무인이었다.

남의 기분 따위 헤아리지 않고 무조건 자신의 뜻을 우선시했다.

탄생 시점부터 무신이었던 자의 성정이다.

그리드의 눈치를 살펴야하는 현재 상황이 몹시 낯선 것이다.

“나의 사도들과 탑의 결사들, 그리고 길드 동료들과 제국의 군대... 죄다 자존심도 없는 얼간이들이었던 거야...”

“...”

심지어 그리드는 속이 좁은 편에 속했고 고집은 매우 셌다.

상대를 잘못 만났다는 의미다.

혼잣말로 자학하는 척 연신 핀잔을 주는 그리드를 상대로 버티기엔 제라툴의 내성이 아예 없었다.

“그런 우리를 믿고 따르는 백성들은 간도 쓸개도 없는 셈이고...”

“그만.”

그리드의 자학이 도를 지나치기 시작하자 결국 제라툴은 좌시하지 못했다.

“조금 더 고민해보도록 하겠다.”

“내키지도 않는데 그럴 필요는...”

“아니, 진심이다. 네 칼을 썼던 감각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아.”

진짜다.

역천으로 치우의 살을 갈랐을 때의 감각이 제라툴의 뇌리엔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애초에 자신은 무신이다.

모든 무예에 통달했고 다루지 못하는 무기가 없다.

무기에 의존해선 안 된다?

너무 일차원적인 생각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무예에도 의존하면 안 되는 거니까.’

...이건 너무 극단적인가?

‘아니.’

제라툴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상기했다.

무신.

무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리고 무기란 무예를 비로소 완성시키는 도구다.

“허...?”

제라툴의 심상에 벼락 한 줄기가 번쩍였다.

깨달음을 얻은 여파다.

나에겐 다수의 무기가 필요하고 그리드에겐 최강의 무기를 만드는 재주가 있다.

말인 즉, 나와 그리드의 관계야말로 떼려야 뗄 수 없다...

“...그랬군. 그랬던 건가.”

지난 날 나는.

어째서 그토록 그리드를 혐오했는가.

매번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리드에게 집착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드가 내게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정하지 못했다.

고고한 무신인 내가 낮은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무지막지한 수치심을 느꼈을 테니까.

“여러모로 어리석었군...”

이놈 이거 일부러 이러나...

연신 혼잣말로 핀잔을 주는 그리드에게 한 순간 품었던 의심이 말끔히 지워진다.

세상을 바라보는 제라툴의 눈빛은 종전과 달리 맑고 투명했다.

그 변화를, 오직 헥세타이아만이 눈치 챘다.

긴 세월 제라툴을 지켜봐왔고 자신 역시 이 순간의 제라툴과 같은 변화를 맞이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뭐지?’

하지만 제라툴이 변화한 이유까진 파악하지 못한다.

그의 입장에서 봤을 땐 연신 투덜거리는 그리드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제라툴이 갑자기 혼자 변한 거니까.

‘...취향이 독특하군.’

깊이 오해한 헥세타이아의 시선이 제라툴을 좇는다.

제라툴은 그리드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좋다. 템빨무신이 되어보도록 하지. 나는 치우와 명백히 다르다는 걸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서라도 그러는 편이 좋겠어.”

“...!”

라우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유페미나는 남 몰래 주먹을 불끈 말아 쥐는 그때.

“단, 대가를 치러야겠지.”

저벅저벅.

제라툴이 발걸음을 옮겼다

장내의 끝자락.

수백 명의 젊은 미녀가 밀집해 있는 구역을 향해서였다.

“어? 안 되는데...”

주변이 술렁였다.

제라툴이 ‘대가’ 운운하며 갑자기 눈독을 들인 미녀들.

이미 임자가 있는 몸들이기 때문이다.

수백 명 전원 로드 황태자의 호위이자 연인이었다.

안 그래도 로드를 죽일 뻔한 전력이 있는 제라툴이 이젠 로드의 연적이 되려하는 것이다.

긴장감이 엄청났다.

“...”

로드가 여인들의 앞으로 나섰다.

제라툴의 부리부리한 두 눈을 똑바로 마주봤다.

마른 침을 삼키거나 다리를 떠는 등의 추태는 보이지 않았다.

자신보다 머리 2개는 더 큰 절대자를 상대로 두려움 따위가 아닌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다.

제라툴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드 네가 내게 템빨을 주는 대가로 나는 네 자식들에게 가호를 내려주마.”

사실.

그리드야말로 제라툴에게 갚을 빚이 있었다.

제라툴의 도움이 있었기에 헥세타이아와 칸을 구출할 수 있었으니까.

만약 제라툴이 그리드를 외면했다면.

최악의 경우 그리드 본인까지 영원의 감옥에서 한동안 신세를 져야했을 수도 있다.

애초에 제라툴은 템빨계 최강의 전력이 되어줘야 한다.

그리드는 당연히 제라툴을 무장시킬 계획이었다.

대가를 받을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한데 제라툴이 거부한다.

합당한 값을 치르겠노라며 로드의 머리 위에 솥뚜껑 같은 손을 얹었다.

“새카만 머리와 날카로운 눈매. 의외로 아비를 닮은 구석들이 있긴 하구나.”

의외로는 뭐냐...

로드가 저렇게 키도 크고 예쁘고 잘생긴 이유는 애초에 내 아들이기 때문인데.

어이없어서 혀를 내두른 그리드가 로드에게 눈짓했다.

불안해하지 말고 기다려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로드는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과거 자신을 죽이려했던 절대자의 손에 머리를 통째로 붙잡히고도 침착함을 유지했다.

제라툴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나는 치우와 다르다.”

치우는.

재능 있는 자들의 잠재력을 강제로 끄집어내 대상의 성장속도를 증폭시킨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당연히 밟아야 할 수순들을 생략시켜버렸다.

‘어서 적수를 만나 살해당하고 싶다.’는 염원을 이루기 위한 이기심의 발로다.

물론 그것이 틀린 방법이라고 비난할 순 없다.

그리드 때문이다.

그리드라는 존재가 치우의 방법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버렸다.

하지만 정답이라고 볼 수 있을까?

제라툴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가 생각하는 무(武)란, 스스로 궁리하고 연마했을 때 비로소 빛나는 것이었으니까.

예를 들어 그리드의 검무들처럼 말이다.

현재 그리드가 사용하는 검무들은 파그마의 검무와 크게 달랐다.

그리드의 경험과 노력을 통해 강력하게 연마되길 거듭해온 덕이다.

그건 치우가 내린 가호와 별개로 그리드 개인이 얻은 성과다.

그렇다.

제라툴의 사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리드를 통해 완성됐다.

그리드에게 연거푸 패배하고 낭패를 겪으면서 깨달았다.

결정적인 계기는 베니스와 엮였던 비급 사건...

과거를 떠올리자 불쑥 화가 치솟은 제라툴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내 가호는 원하는 순간마다 ‘가능성’을 개화시키는 치우의 가호와 달리 편리하진 않을 거다. 너희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를 물리치는 저력을 발휘하진 못해. 하지만 너희들의 노력과 열정이 배신당하지 않도록 도울 것이며, 이는 너희가 지닌 가능성 자체를 확장시키는 발판이 될 것이다.”

번쩍!

제라툴의 두 눈에서 뿜어진 새하얀 안광이 로드의 몸을 감싼다.

동시에 기적이 일어났다.

[당신의 아들 ‘로드’가 <제라툴의 가호>를 얻었습니다.]

<제라툴의 가호>

모든 종류의 마스터리 스킬 개화.

모든 스킬의 마스터 레벨 3 확장.

스킬 경험치 획득량 300퍼센트 상승.

캐릭터 경험치 획득량 200퍼센트 상승.

“...”

영구히 상시 적용되는 효과.

제라툴의 가호에 깃든 힘을 느낀 로드가 전율했고 그리드의 만면엔 미소가 번진다.

로드의 머리에 얹었던 손을 뗀 제라툴이 몇 마디를 덧붙였다.

사죄다.

“지난 일은 미안했다. 네 아비를 향했던 원한을 네게 향해선 안 됐던 것인데 내 속이 좁았다.”

“...이해합니다.”

나였어도 아버지 같은 사람한테 매번 그렇게 당했으면 냉정하지 못했을 거다...

차마 뒷말은 잇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던 로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내의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의 시선이 메르세데스에게 못 박혔다.

“으, 응?”

메르세데스의 복부에서 아른거리는 빛 때문이었다.

이변을 감지하고 황급히 그녀에게 달려가는 그리드의 귓전에 제라툴의 음성이 스며들었다.

“뭘 당황하는 거지? 네 자식들에게 가호를 내리겠다고 미리 말했을 텐데.”

“...!?”

깜짝 놀라는 그리드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아이린’의 뱃속 아이가 <제라툴의 가호>를 받았습니다.]

[‘바사라’의 뱃속 아이가 <제라툴의 가호>를 받았습니다.]

[‘메르세데스’의 뱃속 아이가 <제라툴의 가호>를 받았습니다.]

[‘마리로즈’가 뱃속 아이에게 침투하려는 가호를 물리쳤습니다.]

“...”

사실 놀라운 소식도 아니다.

바알 레이드 이후.

<태초부터 존재해온 핵>으로 소망을 이룬 그리드는 매일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헌신해왔다.

그간 한 달에 한 번만 기능한 자신 탓에 외로움에 시달린 부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몸이 10개가 된 것처럼 활동했다.

노력과 사랑의 결실인 것이다...

감격에 휩싸인 그리드가 메르세데스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이날.

그리드 고자설이 종식됐다.

(88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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