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8권 - 21화
<무신의 비급>
무신 제라툴이 배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저술하는 스킬북입니다.
매주 1권의 스킬북을 확정적으로 생산하며, 등급은 랜덤입니다.
여러 절대자가 제라툴을 ‘가짜’라고 조롱해왔지만.
시스템은 늘 한결 같다.
여전히 제라툴을 무신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치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개의치 않는 것이다.
“나는 치우와 다른 방법으로 숭배 받을 것이며 보다 나은 의미의 무신이 될 것이다.”
자신의 존재 의의를 깨달은 제라툴의 선언을 존중하는 느낌이었다.
아니, 제라툴이 치우와 다른 방향의 무신으로 성장할 거란 사실을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 같다.
‘결국 레베카의 안배대로 된다는 뜻인데.’
레베카는 대체 뭘까.
선인가, 악인가 따위의 근본적인 고찰은 배제한다.
선과 악의 구분은 모호한 것이며 때때로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은지 오래니까.
그리드는 몇 수 앞을 내다본 레베카의 혜안에 전율하고 경계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제라툴의 변화에 거부감을 느끼진 않았다.
그것이 레베카의 안배라고 할지언정 그리드에겐 긍정적이었으니까.
신뢰할 만한 마음가짐에 더불어 매주 1권 이상의 스킬북을 배포한다고 하지 않나.
지난 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무신의 비급이 모든 종류의 스킬을 망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대사건이다.
앞으로 템빨단원들은 템빨에 스킬빨까지 갖춰나갈 것이다.
그래, 마치 그리드처럼.
“흐음...”
그리드와 템빨단원들에게 둘러싸인 제라툴이 코를 긁적였다.
입 꼬리를 미세하게 씰룩거렸다.
어울리지 않게 겸양하려고 애쓰려니 힘든 눈치다.
칭찬에 목말라온 제라툴에게 사람들의 반응은 단비처럼 다가왔다.
다루기 쉽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후로이까지 참전했다.
온갖 미사어구는 다 붙여가며 제라툴을 찬양했다.
언변의 효과를 증폭시키는 스킬들이 중첩되며 제라툴을 말 몇 마디로 승천시켰다.
“입에 침은 좀 발라가면서 말해라... 그러다가 주둥이 헐겠다, 헐겠어.”
“전생에 이완용이었나.”
반트너와 극검이 탄식했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제라툴에게 아첨했던 주제에 밥그릇을 빼앗기게 생기자 후로이를 비난하는 것이다.
“굳이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없네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가운데.
“벌써부터 연회를 운운하며 여유를 부리기엔 시기상조 아닌가?”
검신 비반이 일침을 놨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여전히 치우를 핑계로 활개치고 있다는데.”
지혜의 탑의 기본 역할은 드래곤의 감시다.
필연적으로 대륙 전역을 실시간으로 살폈다.
끈질기게 살아남은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치우와 여전히 혈투를 벌이고 있단 소식이 라드볼프의 통신을 통해 비반에게 도착했다.
그리드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템빨계의 신들이 없는 것이다.
그리드에게 밀명을 받은 템빨계의 신들은 아스가르드의 신들을 뒤쫓으며 그들이 만든 파괴의 흔적들을 실시간으로 수복하고 있었다.
“전력을 드러낸 치우는 상상을 초월하는 강자였습니다. 도미니언을 필두로 삼은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분투한다 한들 곧 결착이 날 겁니다.”
도미니언은 필시 강했다.
순수한 무력만 놓고 보면 바알보다 몇 수 위로, 대 아스가르드전이 성립할 경우 무조건 그리드가 대적해야 할 상대였다.
하지만 치우가 너무 독보적이다.
차원이 다르다고 표현해도 무방했다.
하여 쉽게 승부를 예측하는 그리드에게 제라툴이 경고했다.
“도미니언은 전쟁의 신이다. 통솔하는 군단의 규모에 따라서 강해지지. 너라면 필시 아레스라는 인간을 알고 있을 터. 그놈의 능력이 수천수만 배 증폭된 것이 도미니언의 권능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인간들에게 신이라는 개념이 머나먼 것이었던 시절.
감히 전쟁의 신을 자처했던 인간이 있었다.
아레스.
플레이어 중 2번째로 국가를 세운 영웅으로, 발할라의 국왕이다.
한때 제라툴은 그에게 주목했다.
아레스를 홀려 발할라의 강력한 군대가 통째로 자신을 숭배하도록 만들려고 시도했다.
물론 실패했다.
특정 분야에선 그리드 다음가는 업적들을 쌓아온 아레스가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으니까.
“도미니언의 권능은 저도 잘 압니다. 아스가르드에서 거느리고 온 신들의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실시간으로 약화되는 모습을 아까 실제로 목격하기도 했고.”
“전장에 나섰던 신들은 군단의 일각에 불과하지.”
“...?”
“황금구름 너머에 도사렸던 그림자들. 그 8천의 발키리가 도미니언의 진짜 군단이다. 군단과 협력하게 된 도미니언의 파괴력이야말로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야. 도미니언이 마지막 순간까지 발키리를 전장에 투입하지 않았던 건 라인하르트가 잿더미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결국 발키리까지 나와 버렸나.”
온갖 신과 천사가 난무하는 상황이다.
발키리라는 집단이 불쑥 등장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다.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반트너를 다소 의아하게 쳐다본 제라툴이 설명을 이어갔다.
“그렇다고 한들 도미니언이 치우를 제압할 순 없겠지. 하지만 놈들의 추격전이 일으킬 후폭풍을 좌시해선 안 된다. 놈들이 지나는 모든 길이 이 순간 쑥대밭이 되고 있을 터. 양측 모두 인명을 해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한들 반드시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라우엘이 질문했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새삼 사람들을 해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이유가 뭡니까?”
단순히 숭배 받기 위해서?
그럴 리가 없다.
아스가르드는 이미 한 번 인마대전을 외면한 전력이 있다.
심지어 쥬다르는 간접적으로나마 악마들의 편에 섰었다.
이제 와서 새삼 숭배 받길 바라고 사람들을 해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처음에야 그리드 전하의 눈치를 보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치곤 과한 느낌인데요.”
혹시 ‘나’의 분노를 살까 저어하는 것인가...
손등 위로 흑염룡을 피어 올리며 자의식 과잉 증세를 보이는 라우엘.
그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라툴이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신이란 인간을 아끼는 본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또는 개인의 감정이나 욕심에 따라서 본성 따위 언제라도 외면하게 마련이지만 적어도 지금의 아스가르드는 치우에게 집중하고 있다. 굳이 인간을 해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인마대전을 외면한 자들이 그런 본성을 지녔다는 게 믿기지 않는군요.”
“그때 인간을 돕지 않은 건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합리적인 이유?”
“인간들의 행보를 신을 향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던 시기다. 돌이켜 봐라. 본래 미약하여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가야 할 너희 인간들이 언젠가부터 상위의 존재들을 참살하고 생태계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무조건 감사하며 섬겨야 할 대상인 여신을 의심하고 급기야 레베카교를 붕괴시키기도 했지. 신들에겐 그 모든 것이 반기의 조짐으로 보였다. 인간을 돕기보다 경계하고 벌해야 할 시기였다.”
이기적인 잣대.
라우엘이 즉시 반박했다.
“지금의 인류는 대놓고 아스가르드를 적대하고 있습니다만.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신들은 지금이야말로 인간들을 경계하고 벌해야하는 거 아닙니까?”
“전혀 다르다.”
제라툴의 시선이 그리드에게 꽂혔다.
“이제 대부분의 신들은 그리드를 자신과 동등하거나 상위의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지상의 태도를 ‘인류의 도전’이 아닌 ‘그리드의 의지’로 해석한단 말이다.”
무슨 의미인지.
대부분이 사람들은 섣불리 이해하지 못했다.
숫제 궤변으로 취급하며 눈살을 구겼다.
라우엘은 달랐다.
“...즉, 반역이 아닌 전쟁으로 인식한단 겁니까?”
“그래, 그러면서 절대다수의 인간에겐 죄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일곱 신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들에게 죄가 없듯이.”
지크에게 시선을 돌리며 의미심장하게 말한 제라툴이 피식 웃었다.
구석에서 움찔, 다소 위축되는 헥세타이아의 기척을 느낀 까닭이다.
“신들에겐 지상과 템빨계가 별개야. 순전히 그리드의 영향력 탓에 지상이 템빨계에 강제로 종속된 것으로 보고 해방시킬 계획을 짜고 있다. 하지만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템빨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선 지상에 거점을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고, 그러므로 치우에게 한층 더 집착하는 것이다.”
“치우가 환국의 수문장이기 때문입니까.”
“그렇다. 아스가르드 입장에선 치우를 어떻게든 처리해야만 환국을 점령하고 거점 확보가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드에겐 천운이 따른 셈이지. 그리드의 탄생 시기가 다소 빨라 치우가 여전히 아스가르드 소속이었다면, 혹은 도리어 늦게 탄생해 환국이 이미 아스가르드에 점령당한 뒤였다면. 템빨계는 힘을 축적할 새도 없이 토벌 당했을 테니까.”
“본래 영웅은 시대가 만드는 법이죠. 애초에 이런 시대가 아니었다면 그리드 님께서 여기까지 노력하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아닌데.’
똑같이 열렙했을 텐데...
뭐라고 반박하고 싶은 그리드였지만, 라우엘이 워낙 진지했다.
Satisfy라는 ‘세계’를 살아가는 하나의 존재로서 몰입하고 있었다.
“템빨계의 탄생과 작금의 구도는 천운으로 완성된 게 아니라 시대가 그리드 님께 강요한 것이고 그리드 님의 헌신으로 완성된 겁니다. 이제 와서 온갖 핑계로 궤변을 늘어놓는 당신들이 바알을 방관했을 때부터 그리드 님은 홀로 애쓰실 수밖에 없었고 지금에 이르신 거죠.”
“...뭐 하나 틀린 말이 없다. 함부로 천운 운운한 것을 사과하지.”
불과 얼마 전까지.
제라툴은 아스가르드 소속의 신이었다.
아스가르드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았다.
하지만 이젠 바뀌었다.
그리드 곁에서 그의 입장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몹시 높은 곳에서, 매우 멀리서 그저 관찰했을 때와는 여러모로 느끼는 바가 달랐다.
그리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번헬리어와는 달라서 다행이다.’
제라툴은 의외로 최소한의 염치와 상식이 있는 존재였다...
안도하는 그리드를 보고 묘하게 기분이 나빠지는 번헬리어였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그의 심정 같아서야 어서 목걸이를 만들어달라고 재촉하고 싶었다.
하찮은 연회 따위보다야 매번 크게 공헌해온 내게 보답하는 게 그리드의 급선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인내했다.
자신보다 늦게 합류한 제라툴에게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가 묘했기 때문이다.
어떤 위기의식을 느꼈다.
분하지만 자중해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성장한 것이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최소한의 눈치를 학습했다.
“신들이 자칫 사람들을 해치지 않도록 내가 나서도록 하지.”
혀에 가시가 돋는 감각.
정말로 싫었지만, 번헬리어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었다.
제라툴보다 자신이 유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어서였다.
“내가 놈들을 추격해서 전장의 범위를 조절하겠다.”
“오오...!”
“과연 고룡...”
곳곳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치우와 도미니언 군단의 전장 범위를 ‘조절’하겠다는 비현실적인 선언.
순전히 고룡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번헬리어가 같은 편이라서 다행이라고 기뻐하는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반면 그리드는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무슨 꿍꿍이지?’
대체 어떤 개수작을 부리려고 어울리지 않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까...
그리드의 의심을 읽은 비반이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내가 하야테 공과 함께 가서 감시하도록 하지.
그제야 안심한 그리드가 번헬리어와 나란히 서있는 비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훗, 그래.”
이제야 제대로 된 경어를 쓰는군...
흡족해서 미소 지은 번헬리어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거대한 용의 모습을 되찾고 순식간에 현장에서 사라졌다.
하야테와 비반이 그를 뒤쫓았다.
제라툴이 눈살을 찌푸렸다.
‘감시하는 수준을 넘어서 치우와 도미니언 둘 중 하나를 패퇴시킬 작정인가? 섣부른 판단 같은데.’
드래곤 슬레이어, 검신, 악룡.
제라툴에게도 무지막지한 전력으로 비쳤다.
애초에 드래곤 슬레이어와 드래곤이 서로 협력한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나?
여러 가지 의미에서 혀를 내두르는 그에게 그리드가 제안했다.
“치우와는 다른 의미의 무신이 되겠노라 선언했다죠.”
“그래.”
“그럼 템빨무신은 어떻습니까?”
“템빨계의 무신? 확실히... 쉽게 숭배 받겠군.”
“아니요. 템빨무신 말입니다.”
“...?”
섣불리 이해하지 못하는 제라툴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싫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라우엘이 나라 잃은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쥬다르가 지상을 침공한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