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8권 - 20화
제라툴을 향한 템빨제국의 원한은 깊다.
여덟 신을 거느리고 내려와 그리드에게 도전했던 사건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 이전에.
라인하르트를 침략해 그리드와 사도들에게 수모를 안기고, 황태자 로드의 목숨을 위협했던 사건을, 제국은 잊지 않고 증오했다.
“무지몽매한 것들.”
살벌하게 노려보는 사도들과 템빨단원들의 시선 속에서 잠자코 앉아있던 제라툴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와 그리드의 관계를 돌이켜보아라. 지난 몇 년 동안 그리드가 일으킨 수차례의 사건들이 내게 낭패를 안겼다. 과거의 내가 놈에게 원한을 품고 보복한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섭리로 비난 받을 만한 일이 아니란 거다.”
제라툴의 표정은 몹시 당당하고 오만했다.
“네놈들의 편협한 관점에선 설령 내가 죄인일지라도 지난 일에 불과하지. 나의 죄는 이미 사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나는 영원의 감옥에서 그리드를 탈출시켰고 오늘날에 이르러서 치우와 싸웠으니까.”
“...”
“결과적으로 그리드에게 도움을 줬단 말이다. 절대자를 상대론 그 무엇도 할 수 없어 손가락만 빨고 있던 무능한 네놈들과 달리 오직 나만이 유일하게 그리드를 의지하게 만들었지.”
제라툴의 말이 길어질수록.
템빨단의 기세는 차츰 누그러졌다.
제라툴에게 더 이상의 적의를 보이지 못하고 슬그머니 시선을 회피했다.
단, 하스터는 예외였다.
전장에서 직접 싸운 그는 당당했다.
지슈카, 유라, 크라우젤, 카츠, 유페미나 또한 전혀 동요하지 않았고.
“보통 자신이 저지른 죄를 자기 스스로 사하나?”
“난 언제라도 활을 쏠 수 있었는데? 내가 손가락 빨면서 구경만 한 건 치우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리드의 명령 때문이었어.”
카츠가 핀잔을 주는데 이어서 지슈카가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한낱 인간 따위가 망발...”
콧방귀 뀌며 지슈카에게 시선을 돌린 제라툴이 도중에 말을 멈췄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적발과 눈빛을 지닌 인간 여성.
그녀가 품은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신성을 ‘계승’한 인간은 처음 보는군. 과연, 그대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알겠다. 치우에게 치명상을 입히진 못했을지언정 어느 정도 위협은 줄 수 있었겠군.”
“당신처럼요?”
유페미나가 끼어들었다.
제라툴의 표정이 사늘하게 식었다.
“잠시 어울려줬더니 주제파악을 못하고 연신 기고만장해지는구나.”
“그만하세요.”
유라가 중재에 나섰다.
“제라툴 님을 동료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건 영우 씨에요. 도를 넘어서는 비난과 조롱은 영우 씨를 부끄럽게 만드는 일입니다.”
“...”
템빨단원들이 입을 닫았다.
“그리고 제라툴 님, 앞으론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셔야죠? 타인을 업신여기는 듯한 언행은 삼가주세요. 당신의 저의를 의심하게 됩니다.”
“...”
천상에서조차 거의 들어본 적 없는 훈계를 인간에게 듣다니?
무척 당황하는 제라툴이었지만 불쾌하게 여기진 못했다.
유라의 말에 틀린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이제 템빨계의 일원이다.
앞으로 더불어 살아가야 할 존재들을 멸시해선 안 된다.
이미 천상에서 한 번 경험하지 않았나.
나보다 낮은 신들을 멸시했다가 고립되고 말았다.
나 또한 멸시 당하게 됐을 때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데빌 슬레이어의 조언이다.’
지옥 정화에 가장 크게 공헌한 인물 중 하나.
그리드의 지옥 토벌 계획이 수립할 수 있게끔 밑바탕에서부터 도운 유라의 명성은 천상까지 닿았을 정도다.
일부 신들은 유라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대부분의 악마가 사라진 지금, 데빌 슬레이어는 바뀐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자연스러운 진화를 맞이할 거라고 추측했으니까.
존중할 만한 대상이었다.
“좋다. 그대의 조언을 마음에 새기마.”
“...허.”
의외의 태도에 놀란 템빨단원들이 술렁였다.
몇몇은 미소 지었다.
애초에 템빨단은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다.
성격이 개차반이었던 인물이 무척 많았고 그들 대부분 개과천선에 성공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제라툴을 신뢰했다.
그의 과거가 아닌 미래에 주목하는 편이 좋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많았다.
물론 전부는 아니다.
특히 사도들이 여전히 제라툴을 곱지 않게 봤다.
“앞으로 넌 뭐지?”
잠자코 앉아있던 브라함이 묻는다.
“만천하가 치우를 알게 됐다. 너는 더 이상 무신을 자처하지 못해. 아스가르드의 신이라는 이유로 누렸던 특권 역시 모조리 상실했다. 빈털터리가 된 네가 템빨계에 속하게 됐다고 해서 우리에게 이로울 게 있나?”
제라툴이 피식 웃었다.
브라함.
그리드가 자신을 받아들이겠노라 선언했을 때 가장 심하게 반발했던 놈이다.
기껏 고집을 꺾었나 싶었는데 그리드가 없는 틈을 타 또 다시 분란을 조장하는 꼴이 우스웠다.
“상위의 절대자가 그리드나 템빨계를 위협할 경우 내가 나서서 저지할 수 있지. 전혀 활약하지 못할 네놈을 대신해서 말이다.”
“...”
브라함이 고집을 꺾었던 이유다.
치우를 상대로 그는 조금도 활약하지 못했었다.
물론 치우의 권능이 ‘정정당당한 대결’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긴 불상사였지만, 아무튼 치우의 발목이라도 붙잡았던 제라툴과 크게 비교됐다.
하여 제라툴을 템빨계에 받아들이겠다는 그리드의 뜻을 꺾지 못했다.
‘위계나 확실히 정하도록 할까.’
괜히 끼어들었다가 본전도 찾지 못한 브라함이 부들부들 몸을 떨며 살의를 피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또한 나는 여전히 무신이다.”
제라툴이 망언을 일삼았다.
비웃어주려던 브라함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제라툴의 눈동자에 깃든 확신을 엿본 까닭이다.
제라툴은 템빨단원들이 모인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레가스를 쳐다봤다.
“재능 있는 자들이 마냥 강해지길 바라며 잠재력이라는 이름의 가능성을 강제로 앞당기는 치우 따위와 달리, 나는 배움을 갈구하는 자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가르침을 줄 수 있다.”
제라툴을 상징하는 것 중 하나가 ‘비급’이다.
그가 쓴 비급은 그것을 얻는 자에게 ‘반드시’ 배움을 주고 발전시킨다.
하지만 여태껏 그의 비급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사람을 홀렸기 때문이다.
철저히 제라툴의 의도였다.
제라툴은 사람들의 숭배를 받기 위해 비급을 미끼로 이용했고 자신의 추종자를 양산했다.
하지만 오늘.
제라툴은 깨달았다.
자신의 근원 즉, 아수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배움을 갈구했던 레가스를 목격한 여파다.
세상엔 배움을 갈망하는 자들이 저토록 많다.
그리고 나에겐 그들을 도울 능력이 있다...
“나는 치우와 다른 방법으로 숭배 받을 것이며 보다 나은 의미의 무신이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배움을 주는 비급을 쓴다는 것.
당연히 권능이다.
오직 소멸만을 꿈꾸며 재능 있는 자들의 미래를 빼앗는 치우는 지니지 못한, 제라툴 고유의 권능.
제라툴은 돌이켜봤다.
여신이 내게 이와 같은 권능을 내린 이유.
만인에게 진실 된 도움을 주고 치우를 넘어서는 숭배를 받길 바라서였겠지.
‘하지만 몰랐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었었다.
비급으로 재능 있는 자들을 홀려 추종자를 만들고, 그들을 이용해 당장의 명성을 올리기 급급했었다.
비급의 제작엔 시간이 걸렸으니까.
활용할 수 있는 자원에 한계가 있으므로 초조했던 것이다.
비급을 널리 베풀어 서서히 숭배 받는 것은 너무 긴 세월이 걸린다고 제멋대로 판단했었다.
오판이었다.
천천히 나아가야 옳았다.
“...”
장내가 일순 경직됐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제라툴의 강대한 체구에 압도당한 사람들이 긴장했다.
겁먹지 말라는 듯이.
제라툴은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레가스를 향해서다.
오늘 전장에서 직접 보고 겪은 체험을 토대로 작성한 비급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아마도 바알의 농간에 넘어간 거겠지. 아수라에 묶인 자여. 내가 그대를 해방시켜주마.”
“...!”
비급을 건네받은 레가스가 두 눈을 부릅떴다.
<무신의 비급>
등급:신화
아수라의 중요 패시브 스킬이 서술 된 비급입니다.
습득 조건:아수라
“이걸... 이걸 정말 저에게...?”
“오늘 비록 아수라가 크게 활약하지 못했다지만 놈은 필시 큰 위협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기술을 실시간으로 간파하고 습득하는 능력을 지녔다.
아니,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나보다 한층 더 뛰어나다.
‘나는 나와 격이 같거나 높은 상대의 기술을 체득하진 못하니까.’
하지만 아수라는 무려 치우의 기술을 빠르게 체득했다.
무지막지한 속도로 성장할 것이 자명했다.
“언젠가 큰 위협으로 발전할 놈을 막기 위해선 네 활약이 필요할 거다.”
이미 지옥에서.
레가스는 아수라를 저지하는데 큰 공헌을 했었다.
아수라의 기술을 일부나마 비슷하게 재현해서 아수라의 기술을 한 번 상쇄시키는데 성공했고, 그 단 한 번의 성공이 만든 기회가 비반의 역전을 가능케 도왔다.
아수라 클래스.
바알이 훗날을 대비해서 지상에 심어놓은 ‘아수라의 식량’이 역으로 아수라의 발목을 붙잡은 사건이었다.
“아아...! 무신이시여!!”
난리가 났다.
반트너와 극검이 제라툴에게 넙죽 절을 올린 게 시작이었다.
“위대하고 유일한 무신 제라툴 님이시여! 제게도 비급을 내려주소서!!”
“이놈 말고 저한테 주십시오! 버러지 같은 가짜 무신 치우를 제가 반드시 혼쭐내줄 테니까!!”
“...”
이게 정녕 그리드의 부하들이 맞나...
그 어떤 추종자보다 더 적극적으로 고개를 조아리는 반트너와 극검을 제라툴이 다소 황당하게 쳐다볼 때였다.
“소란스럽네.”
그리드가 돌아왔다.
불시에 장내가 진정됐다.
“조금 걱정했는데 서로 꽤 마음에 드나봐?”
그리드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방금 얼마나 큰 기적이 벌어졌는지 꿈에도 몰랐다.
그에게 라우엘이 귓속말로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드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변해간다.
제라툴은 다소 긴장한 상태였다.
‘하야테...’
고아한 몸가짐만큼이나 뛰어난 검술로 내게 패배를 안긴 인간.
그때보다 한층 더 강력해졌나...
“...”
하야테 또한 긴장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가 과거에 제라툴을 패퇴시킨 건 사실이지만 그건 제라툴이 엄청난 제약을 떠안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야테는 자신의 실력이 제라툴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또한 여전히 신뢰하지 못했기에 익숙한 풍경에 녹아있는 제라툴에게서 강한 이질감을 느꼈다.
언제라도 출수할 수 있도록 근육을 이완시켰다.
갈기갈기 찢겨나간 근육들이 여전히 회복되지 않아 고통이 의식됐으나 늘 그랬듯 내색하지 않고 참았다.
‘제라툴 놈. 나를 보고 긴장했나.’
묘한 기류를 읽은 번헬리어가 콧대를 세우는 그때였다.
“제라툴, 사실 나는 오래 전부터 당신을 흠모해왔습니다.”
“...?”
그리드가 다짜고짜 고백했다.
제라툴에게 성큼 다가서더니 두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었다.
“당신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 생각인데 어떤 술과 음식을 좋아하십니까? 음악은요? 뭐든 말씀만 하세요.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드리죠.”
“...”
황당해하는 제라툴과 사도들, 그리고 결사들과 번헬리어는 보지 못했으나.
그리드와 템빨단원들의 눈앞엔 실시간으로 알림창이 떠오르고 있었다.
[라인하르트 특산물 목록에 <무신의 비급>이 추가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