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8권 - 19화
“괜한 욕심을 부려서 일을 그르쳤구나.”
아스가르드.
메타트론을 응시하는 쥬다르의 눈빛이 서늘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내까지 낱낱이 파헤치는 느낌.
압도당해 고개를 조아리는 메타트론을 쥬다르가 비난했다.
“그대가 고룡을 사냥하겠다는 교만을 부리지만 않았어도 치우는 비교적 빠르게 전력을 드러냈을 테지.”
치우의 기습에 당했다는 핑계로 전장에서 이탈해버린 메타트론은 네바르탄이라는 변수를 만나 끝내 전장에 복귀하지 못했다.
덕분에 치우는 여력이 있었고 아수라는 치우의 전력을 관찰할 시간을 충분히 벌지 못했다.
이번 치우 원정이 실패 원인은 순전히 메타트론에게 있는 것이다.
““면목이 없습니다. 고룡의 강함을 충분히 학습했으니 두 번 다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나이다.””
“물러나라.”
쥬다르는 굳이 분노하지 않았다.
축객령을 내린 뒤 상황을 가늠했다.
비록 치우를 어쩌진 못했으나 손실이 크다고 볼 순 없었다.
그리드가 만든 무구를 상당수 확보했으니까.
하나 같이 강력했고, 천상의 풍경과 어울릴 지경으로 아름다웠다.
그리드를 상징하는 금속으로 만든 장신구.
무구마다 그 흑금색의 장신구가 장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낮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자들의 태생적 한계인가. 그리드 그대 또한 오만하구나. 메타트론의 실책은 그대의 실책으로 무마하도록 하지.’
***
“스스로의 위치를 자각해라. 그리드 넌 고작 상위룡에게 고개를 숙일 위계가 아니야.”
번헬리어가 참지 못하고 지적했다.
크란벨에게 정중히 인사하는 그리드의 모습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했다.
“관계에서 신분은 중요하지 않아.”
그리드가 즉시 반박했다.
하야테와 비반이 미소 짓는다.
크란벨은 늘 그랬듯이 표정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무한한 우주처럼 깊은 눈동자에 그리드의 모습을 담을 뿐.
분위기를 읽은 번헬리어가 한 발 물러섰다.
“위대한 고룡인 내가 너의 동료가 된 시점부터 그렇긴 하지.”
어깨를 으쓱이자 등까지 내려오는 흑색의 장발이 물결친다.
윤기가 흐르는 고운 머릿결.
발끝부터 머리털에 이르기까지, 정말이지 생긴 것 하나만큼은 흠잡을 곳 없는 녀석이다. 말 그대로 겉만 멀쩡했다.
‘크란벨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나.’
[나야말로 신세를 졌소. 그대가 중재하지 않았다면 난 필시 번헬리어 님께 살해당했겠지.]
속으로 혀를 차는 그리드에게 크란벨이 화답했다.
몹시 자연스럽게 경어를 사용하면서.
“과언이십니다. 당신의 용언이라면 충분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죠. 제가 괜한 참견을 해 혹 기분이 상하시진 않을까 걱정입니다.”
“어처구니가 없군.”
번헬리어가 고룡 중 최약체라곤 하나 상위룡을 상대로는 가히 무적이다.
크란벨을 비현실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그리드가 황당할 따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리드는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그리드는 자기주장이 확실했다.
몇몇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라툴을 템빨계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을 정도로.
“또한 더욱 더 걱정인 점은 당신과 네바르탄의 관계입니다. 네바르탄이 당신께 자칫 원한을 품고 해코지하진 않을까 저어되는데 혹시 당분간 라인하르트에 머물 생각은 없으십니까?”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비반이 그리드에게 실시간으로 설명해주고 있었다.
언어를 이용하는 설명이 아니다.
비반이 목격한 광경들이 그리드의 머릿속에서 고스란히 펼쳐졌다.
플레이어는 불가능한 의념의 활용법.
그리드는 생각했다.
이건 정신 공격으로도 활용할 수 있겠다고.
‘힘을 영리하게 쓸 줄 아는 절대자는 플레이어를 의념만으로 제압하는 게 가능하겠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의념으로 상대방을 압도하는 방법은 이미 과거에 가람이 보여줬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지기에 저항조차 못하고 얻어터진 경험이 그리드에겐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가람...’
가람을 떠올리자 여태껏 만나온 적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가여운 도살귀부터 시작해서 흑기사단과 적기사단, 암흑기 레베카교의 교황과 야탄의 종들, 온갖 괴수와 각 분야의 달인들, 대악마와 양반, 7대 길드와 블러드 카니발, 여러 왕국과 제국, 각 지역의 패자로 군림했던 초월자들과 그들조차 굽어봤던 절대자들...
당시엔 하나 같이 강력하게 느껴졌다.
내가 저걸 무슨 수로 이겼나 싶었을 때가 많았다.
한데 이젠 바알을 물리쳤고 천상의 신들과 겨루게 됐다.
무수히 많은 적들과 싸워온 끝에 ‘엔딩’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이다.
‘엔딩이라...’
그리드는 작은 혼란을 느꼈다.
해피엔딩을 보기 위해선 당연히 아스가르드를 정벌해야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오늘 겪은 일을 돌이켜보면 과연 그게 올바른 판단인지 의문이 들었다.
아스가르드에서 내려온 신들은 악마와 결이 달랐으니까.
물론 신들 또한 성인과는 거리가 멀다.
이기적이었으며 때때로 실수와 죄를 범했다.
하지만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다.
신들의 본질이 인류의 염원과는 다를지언정, 인류가 신들을 비난할 자격은 없는 것이다.
‘굳이 싸울 필요는 없지 않을까.’
물론 그리드의 의무는 바뀌지 않는다.
레베카가 초래할 멸망을 막는 의무 말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모든 신들을 적대할 필요는 없다.
보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레베카에게 접근할 기회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도미니언과 신들의 태도가 심어준 믿음이다.
온갖 만남을 겪어온 덕분에 자신만의 분별력을 갖춘 그리드는 도미니언에게 은근한 기대를 걸었다.
앞으로도 쭉 적으로 만날 가능성은 낮을 거라고 직감했다.
단, 마음에 심하게 걸리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지혜의 신 쥬다르.
도미니언이 전장의 책임자라면, 쥬다르는 레베카를 대신해 아스가르드 전체를 관장하는 느낌이다.
도미니언보다 더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을 확률이 높았다.
한데 치우가 했던 말을 돌이켜보면 쥬다르의 성향은 그리드와 맞지 않을 듯했다.
도미니언조차도 쥬다르를 다소 꺼려하는 눈치였고.
‘아스가르드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보단 그놈하고 결판을 짓는 게 현실적인 진행방법 같은데.’
게임에는 공략법이라는 게 존재한다.
Satisfy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계속 탑을 쌓다보면 뭐 어떻게든 되겠지.’
물론 그리드는 정석적인 공략법을 사용한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인물이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현재 시점에선 고룡의 도움 없인 접근하기 힘든 아스가르드.
본래 아스가르드는 플레이어에게 있어서 불가침의 영역이다.
한데 그리드는 아스가르드에 오를 수단을 확보했다.
포식이불족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포식이불족발의 공로가 즉 그리드의 공로이기도 했다.
만약 그리드에게 쥐어터지지 않았다면.
포식이불족발은 여전히 뒷세계에서 방황하고 있었을 테니까.
만약 그리드가 엘리자베스에게 장인이 될 환경을 제공해주지 않았다면.
포식이불족발은 던전 마스터의 특성을 강화하는 아티팩트를 구하지 못하고 온갖 한계에 봉착했을 거다.
그리드가 가장 큰 힘으로 삼는 ‘인연’이라는 이름의 무기는, 애초에 그리드를 근원으로 삼는 것이다.
아무튼 그리드는 인연을 극한까지 강화하고 싶었다.
크란벨 또한 아군으로 회유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크란벨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소. 또한 네바르탄 님께서 내게 보복할 가능성은 낮다고 보오.]
그리드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비반이 심어준 기억을 통해서 크란벨과 네바르탄의 대화를 엿들었기 때문이다.
‘네바르탄이 내게 호의적이라서 다행이군.’
사실 바알을 레이드하면서 가장 기대했던 부분이다.
바알이 죽어서 네바르탄의 광증이 치료 될 경우.
그리드는 네바르탄의 호의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네바르탄이 네펠리나의 부친이기 때문에 더 기대했었다.
물론 불안감도 컸다.
네바르탄의 광증이 치료되면서 탐욕에 깃든 광룡의 기운이 사라지진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다행히 탐욕에 깃든 증식 등의 성질은 소멸하지 않고 유지 중이다.
원하는 것들만 취한 셈이다.
“알겠습니다. 다만... 대신이라기엔 뭣하지만 한 가지 청을 들어주실 수 없겠습니까?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주섬주섬.
휴대용 용광로를 꺼낸 그리드가 망치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헥세타이아와 함께 드래곤 웨폰을 만드는 과정에서 제작 기술의 한계마저 초월해버린 그는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작품 하나를 완성시켰다.
형태만 놓고 보면 허리띠를 닮았다.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
무척 길다.
인간 수백 명을 묶어놓을 만한 길이.
그것의 정체는 의외로 팔찌였다.
<위대한 지상의 신이 고매한 용을 위해 만든 팔찌>
등급:신화
방어력:100 내구력:20,000/20,000
유일신 그리드가 목단룡 크란벨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만든 팔찌입니다.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가 창조한 특수 가죽에 탐욕을 장신구로 달았습니다.
착용 조건:드래곤
유일한 신이 드래곤을 위해 만들었다는 배경을 지닌 덕분일까?
아니면 대장장이의 신이 만든 특수한 재료와 그리드를 상징하는 탐욕을 재료로 쓴 덕분일까.
별다른 성능이 없는, 심지어 급조한 장신구가 온갖 수식언을 달고 신화 아이템 판정을 받았다.
예술성이 뛰어나서 드래곤답게 보물을 좋아하는 크란벨을 현혹했다.
하지만 크란벨은 팔찌를 섣불리 받지 못했다.
[청이 있다 하더니 도리어 선물을 주는 것은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소.]
“저는 탐욕의 위치를 식별할 수 있습니다. 크란벨 님께서 이걸 지니고 계신 이상 제가 언제라도 찾아뵐 수 있는 거죠.”
지혜의 탑은 드래곤 레이더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작정하고 숨은 드래곤을 찾기엔 기능적인 한계가 컸다.
“감히 당신을 감시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혹시 어떤 위험에 처하실 수도 있으니...”
[설명은 됐소.]
쿠르르르르릉...
크란벨이 거대한 손을 천천히 뻗었다.
그리드의 몸집보다 큰 손가락으로 팔찌를 조심스레 집어 올렸다.
[그대의 마음은 잘 알겠소.]
크란벨의 얼굴에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드와 비반은 드래곤의 표정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지만, 번헬리어와 하야테는 알아봤다.
저건, 명백한 미소다.
[소중히 간직하도록 하지.]
팔목에 팔찌를 감으려던 크란벨이 도중에 생각을 바꿨다.
마력으로 팔찌의 규격을 늘려 목에 걸었다.
비반이 흠칫 놀랐다.
“흡사 개가 목줄을 찬... 흠.”
비반의 말이 도중에 멈췄다.
하야테가 피어올린 용살의 기운이 유독 서늘하게 느껴져서 정신을 차린 것이다.
[그럼 언젠가 또 다시.]
“강녕하십시오.”
크란벨과의 만남은 늘 짧게 끝난다.
금세 멀어지는 거룡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느끼는 그리드에게 번헬리어가 말했다.
“나는 팔찌와 목걸이 세트로 부탁하마.”
“...”
도대체 얘는 얼굴에 철판을 몇 개나 깔아놓은 거지?
번헬리어보다 염치없는 생물은 세상에 드물 거라고 확신하는 그리드였다.
잠시 후.
그리드 일행은 라인하르트로 귀환했다.
제라툴 탓에 도시 전체가 소란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