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8권 - 17화
쿠우우우우웅...!
천지가 흔들렸다.
광야 곳곳에 솟아난 산이 줄기를 이뤘고, 깊게 파인 구릉지들은 강과 같은 호수로 변모했다.
거대한 드래곤이 추락한 여파다.
고룡 중에서도 악룡이라 불리는 개체, 번헬리어.
최근 그리드를 도와 바알 토벌에 일조하고 영웅이라 숭배 받는 존재였다.
그를 무적이라 칭송하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모습이 처참하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드래곤에게 짓밟히길 반복했다.
[끄으윽...]
온갖 형태의 마법이 폭발한 여파로 쏟아지는 폭우.
그로 인해 형성된 호수에 잠겨가던 번헬리어가 간신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태양을 담은 것처럼 황금색을 띄는 그의 커다란 두 눈동자가 검게 물들어간다.
어느새 눈앞까지 날아온 새카만 브레스를 투영하는 것이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번헬리어가 보는 풍경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가 추락한 지점을 둘러싸듯 생성됐던 산맥을 초토화시키며 날아온 네바르탄의 브레스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까닭이다.
목이 몇 바퀴나 회전했다.
보통의 생물이라면 목뼈가 완전히 분쇄되어 절명했으리라.
[번헬리어. 네놈이 불쌍하고 딱한 신세임을 안다. 매번 오판하는 것은 열등감의 산물이오, 매번 실수하는 것은 무능한 탓이니 네가 저질러온 과실들을 일일이 지적하는 건 무가치한 행위지.]
광증을 앓고 방황한 세월.
네바르탄은 크게 아깝지 않았다.
스스로의 가치가 불변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 어떤 흉계도, 세월도, ‘나’를 훼손할 순 없다고, 그는 단언했다.
고룡의 마음가짐이다.
‘절대자들조차 우러러보는 존재.’
네바르탄의 심상을 읽은 메타트론이 전율했다.
고룡이 치우와 대립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에게 용기가 없어서가 아님을 눈치 챘다.
‘...그렇다면, 왜?’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날뛰며 아스가르드의 신들을 사냥했던 트라우카는 왜 치우와의 대립만큼은 피했던 걸까?
어떤 외력이 작용했던 건가?
고룡을 통제할 외력이라는 게 존재하는가?
새로운 의문에 휩싸여가던 메타트론이 문득 정신을 차렸다.
번헬리어가 일으키는 소란에 의해서였다.
호수에 잠긴 몸을 일으키기 위해 발버둥치는 번헬리어의 모습은 진흙탕을 뒹구는 미물과 닮아있었다.
저것이 어찌 같은 고룡이란 말인가...
저것이 나를 오판하게 만든 원흉이다...
급기야 번헬리어를 혐오하고 원망하게 된 메타트론에게 번헬리어가 소리쳤다.
[쓸모없는 천사 놈...! 언제까지 넋 놓고 있을 셈이냐!]
““...””
당최 무슨 염치로 협력을 요구하는가.
의아해하던 메타트론이 이내 결론을 내렸다.
낮은 자존감, 그로 인한 초조함과 피해 의식 따위가 번헬리어의 비상식적인 성격을 형성하는데 일조했음을 눈치 챘다.
‘제라툴과 닮았다.’
마침 제라툴이 템빨계에 합류하길 희망했다는 보고가 도착했다.
그리드는 그를 굳이 거부하지 않을 거라는 예측과 함께였다.
메타트론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가히 성부로다.’
결여 된 자들을 혐오하지 않고 거두어들이는 신.
메타트론은 그리드를 진정으로 존경했다.
저토록 하찮은 번헬리어에게 함께 바알을 물리칠 기회를 줬다는 점부터 몹시 높이 평가했다.
‘그러므로 여신께서도 그리드를 지탱해주신 거겠지.’
그리드를 처음 봤을 때.
메타트론은 즉시 알아봤다.
그리드에게 깃들어 있는 여신의 축복을.
그것은 그리드가 가장 낮은 존재에 불과했을 때부터 그리드를 지탱해온 힘이었다.
그리드가 겪어온 온갖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왔을 터였다.
그러므로 메타트론은 그리드에게 호의적이다.
단순히 그리드가 세운 위업에 매료됐을 뿐만 아니라 그리드를 자신과 비슷한 존재로 인식했다.
여신의 사도...
[저 빌어먹을 놈이...]
번헬리어가 으르렁거렸다.
도움 요청을 무시하고 다른 생각에 빠진 메타트론에게 증오심을 품었다.
메타트론은 그를 끝까지 무시했다.
어차피 곧 죽을 놈이라는 판단이었다.
실제로.
쿠오오오오...
네바르탄의 주둥이 앞에 마력이 응축하길 반복하고 있었다.
얼핏 헤아리기에도 ‘수십 개’ 이상의 브레스가 전조를 일으켰다.
[하지만 번헬이어여. 너는 명백히 선을 넘었다. 네가 잘못을 뉘우칠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만 설마 내게 직접 도전할 줄이야... 어떤 의미에선 나의 예측을 뛰어넘었으니 칭찬이라도 해줘야 좋을까.]
중첩을 거듭한 끝에 거대한 구체를 이룬 수십 개의 브레스가 출렁인다.
슬그머니 고개를 젓는 네바르탄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몰아일체.
네바르탄의 브레스는 그 수가 몇 개라도, 그 위력이 어디까지 치솟을지언정 네바르탄과 완전한 하나를 이룬다.
별개가 아닌 탓에 운용 속도가 무지막지했다.
[아니, 나를 상대로 수작을 부리지 않고 정면에서 도전한 네놈의 태도는 용서할 수준을 넘어섰다. 구제를 포기하마. 죽어라.]
번쩍!
거대한 행성처럼 응축된 새카만 마력의 구체가 발광한 순간.
‘진짜다. 이건 진짜로 죽는다.’
번헬리어는 죽음을 직감했다.
고룡 중에서 유독 약하게 태어났다고 한들.
자신의 최후를 구분 못할 정도로 번헬리어는 어리석지 않았다.
애초에 그리드와 함께 바알을 소멸시킨 대가로 그는 발전했다.
고룡 중 유일하게 한계에 봉착해있던 레벨을 상승시키고 모든 능력치가 올랐다. 체구도 전보다 조금 더 커져서 네바르탄과 어느 정도 눈높이를 맞추게 됐을 정도다.
빛살처럼 번지며 시야를 가득 채우는 브레스의 폭격을 자신이 감당 못하리란 사실쯤이야 쉽게 눈치 챘다.
[제길...]
레이더스와 같은 권능을 지녔다면.
시간을 되돌려 네바르탄에게 도전하지 않았을 텐데.
[제기일!!]
트라우카와 같은 육체를 지녔다면.
브레스의 폭격을 꿰뚫고 날아올라 네바르탄의 목덜미를 물어뜯었을 텐데.
[왜 나만...!!]
마지막 순간조차.
번헬리어는 자신에게 부여된 나약한 운명을 저주했다.
딱히 그리드를 원망하진 않았다.
놈의 성정을 생각하면.
의도적으로 내 도움 요청을 무시했을 가능성은 너무 낮았으니까.
‘끝내 치우를 뿌리치지 못한 거겠지.’
그렇다.
번헬리어는 그리드의 사정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를 쳤다.
발전한 힘을 과신하고 말았다...
‘개보다 못한 결사 놈들.’
끝내.
번헬리어의 원망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결사들에게 향하게 됐을 때.
키이이이이이이잉!!
전 방위에서 빛의 굴절이 발생했다.
번헬리어에게 쏟아지던 브레스 폭격의 궤도가 사방팔방으로 뒤틀려버렸다.
[...흐음?]
고개를 기울이는 번헬리어의 뺨에서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방금 역으로 되돌아온 자신의 브레스에 베인 여파다.
‘결사들인가?!’
피하지 못해야 할 죽음이 제멋대로 빗나갔다...
갑자기 펼쳐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잠시 어리둥절해있던 번헬리어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방금 전까지 원망하며 욕하던 결사들에게 무지막지한 호감을 품고 어렴풋한 미소까지 지었다.
‘비반? 아니다. 방금 그것은... 하야테가 직접 온 거라고 해석해야 옳아.’
무려 고룡의 브레스를.
그것도 수십 개의 브레스를 모조리 반사시킬 만한 인물.
드래곤 슬레이어 외엔 없다.
그리드도 못할 일이다.
[믿고 있었...]
그리드의 동료인 나를 결사들이 돕는 건 당연한 일.
기세등등해진 번헬리어가 하야테의 이름을 외치려다가 멈췄다.
그의 눈앞에 서서히 떠오르는 존재.
네바르탄의 브레스를 반사하여 고룡의 뜻을 무위로 만든 그 위대한 존재의 정체는 하야테가 아니었다.
투명한 유리와도 같은 비늘을 지닌 ‘동족’, 심지어 하위종 크란벨이었다...
[...무슨? 하야테가 크란벨이었다고?]
막 죽음을 각오했던 참이다.
안 그래도 손색이 큰 번헬리어는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상위룡이 고룡을 돕는다?
있을 수 없는, 인지를 초월한 사건 앞에서 잠시 착란을 겪고 말았다.
““...?””
번헬리어의 헛소리에 동요하는 건 메타트론 뿐이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하야테.
긴 세월 은거했던 그에게 ‘숙지해야 할 존재’로 다가온 이름 중 하나다.
한데 그의 정체가 드래곤이었다고?
““드래곤 슬레이어의 정체가 사실은 드래곤이었다...? 얼마나 많은 동족을 포식해온 거지?””
[...목단룡. 고결한 아이야. 그대가 무슨 일로 어른들의 일에 개입하는가?]
혼란에 빠진 번헬리어와 천사가 몹시 큰 추태를 보이는 가운데 네바르탄만큼은 체통을 지켰다.
크란벨이 자신을 훼방 놓았다는 ‘결과’에 매몰되지 않고 어째서 크란벨이 나서야만 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크란벨은 뜸 들이지 않았다.
[지상의 대부분이 그리드의 영토이기 때문입니다.]
간단명료한 설명.
그렇다.
지상 대부분은 템빨계에 속한다.
과장을 좀 보태면 드래곤 레어를 제외한 지상 전부가 그리드의 것이라고 봐도 좋았다.
물론 드래곤이 그것을 의식할 필요는 없다.
특히 고룡쯤 되면.
그들이 밟는 땅이 곧 그들의 것이니까.
하지만 네바르탄의 입장은 특수했다.
[네바르탄 님께선 그리드에게 빚이 있지 않으십니까?]
[...제대로 보았다. 내가 자칫 그리드에게 폐를 끼치고 후회할 뻔했구나.]
네바르탄이 방금 전 브레스의 폭발 범위를 가늠해보았다.
이곳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인간들의 마을 몇 개가 파괴됐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크란벨이여. 어째서 그대가 나를 돕는 거지?]
정작 목숨을 구원 받은 것은 번헬리어이건만.
네바르탄은 자신이 도움 받은 것으로 인식했다.
그만큼 그리드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
[신(神)의 힘을 사용하면서까지. 그대는 평범하게 살아가려는 게 아니었나?]
““...!?””
메타트론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드래곤이 ‘신’이라는 호칭을 명확하게 사용하는 경우는 몹시 드물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신이란, ‘그것’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용신.
혹은 굴절룡.
종말마다 태초신들에게 대적해온 ‘개념’이다.
안 그래도 네바르탄의 브레스를 굴절시킨 크란벨의 투명한 비늘을 봤을 때부터 그것을 떠올린 메타트론은 어떤 의무감에 휩싸였다.
당장 크란벨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무감이었다.
하지만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때마침 현장에 도착한 인물들 때문이었다.
“악룡 번헬리어. 명색이 고룡답게 목숨이 질기군.”
검신 비반과, 그의 곁에 나란히 선 금발의 사내.
진짜 하야테였다.
인간의 신분으론 최초로 절대자의 지위에 오른 인물.
비반이 검신에 등극하기 전까진 ‘유일’했었다.
하물며 지금은 그리드의 작품을 무장한 상태.
누구에게나 특별하게 다가온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눈치만 살피던 번헬리어가 기세등등해졌다.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간신히 수습해 비반과 하야테의 곁으로 날아올랐다.
망설이던 메타트론 역시 은근슬쩍 그들의 편에 섰다.
““용살자. 그대의 사냥감이 셋이나 있군. 나, 계약의 천사 메타트론이 그대를 경외하는 의미에서 힘을 보태도록 하지.””
[쓸모없는 천사 놈이 망발을... 셋이 아니라 둘이다.]
끝까지 부끄러움을 모르고 천사와 말다툼하는 번헬리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네바르탄이 결국 콧김을 내뿜었다.
[진절머리가 나는군. 됐다.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하야테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고룡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존중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들과 대적할 힘을 지닌 용살자인 것이다.
귀환 마법을 가동시키기 시작한 네바르탄의 시선이 크란벨에게 꽂혔다.
[다음에 만날 땐 답변을 기대하마.]
마지막 말이었다.
네바르탄의 형상과 기척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상황이 종결 될 일만 남은 것이다.
하지만 메타트론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혼자가 된 크란벨에게 빛의 광선을 쏘며 달려들었다.
““그대가 정녕 굴절룡의 후손이라면... 아니, 그것의 후손이 존재할 리 없지만, 그래도 살려둘 순 없다.””
[...저놈은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지?]
번헬리어가 눈살을 구기자 비반이 그를 똑같은 표정으로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