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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89화 (1,788/1,794)

템빨 88권 - 16화

“헛짓거리 관둬라.”

파장이 컸다.

치우에게 정정당당한 대결을 요청하는 그리드에게 반발하는 존재가 몹시 많았다.

“상대는 치우다. 홀로 감당하려는 건 제아무리 그대라도 교만에 불과해.”

제라툴과 도미니언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그리드를 말렸다.

그리드의 안위를 걱정해서가 아니다.

치우가 그리드마저 집어삼키고 한층 더 강력해질 사태를 우려하는 것이었다.

“너희에겐 그리드에게 의견을 낼 자격이 없다.”

“...!”

콰창!

치우가 휘두른 검이 도미니언의 몸을 창과 함께 통째로 날려버렸다.

충격파가 엄청났다.

그리드가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도미니언의 지척에 있던 제라툴은 물러서다 못해 쓰러졌다.

“내게 이런 치욕을...”

주저앉은 제라툴이 이를 갈았다.

하지만 감히 치우를 노려보진 못했다.

본신을 드러낸 무신.

빛의 여신 레베카와 전혀 다르되 닮았다.

여신께선 따뜻한 자애로 고개를 조아리게 만드신 반면, 치우는 압도적인 힘으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으니까.

제라툴은 부끄러웠다.

무신을 자처해온 그간의 삶을 송두리째 기억에서 지우고 싶어졌다.

“꼴사납군.”

그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은 비록 협동하고 있으나 명백한 적.

심지어 제라툴이 가장 싫어하는 놈 중 하나다.

하지만 제라툴은 알고 있다.

여태껏 수많은 존재들이 종족과 신분, 성향을 구분하지 않고 저놈에게 매료되어왔단 사실을.

‘놈... 어떤 달콤한 말을 속삭일 작정이냐.’

이참에 나마저도 아군으로 회유하려는 거겠지.

제라툴은 뻔한 전개를 예상했다.

그리드가 세치 혀로 자신을 위로하고 현혹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뻔히 알면서도 귀를 열고 기다렸다.

지금은 작은 위로조차 아쉬운 순간이었으니까.

치우와의 격차를 실감한 지금.

그는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외면해온 진실을 마주한 탓에 정신이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상대가 누구라도 좋으니 의지하고 싶었다.

내심 기대하는 제라툴에게 그리드가 이죽거렸다.

“늘 자신이 최고인 양 설치더니 정작 진짜를 만나고 좌절하는 꼴이 우습다. 자신이 가짜에 불과하단 사실을 지금이라도 인정하고 겸손해지게 됐으니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이놈!”

울컥한 제라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힘이 풀렸던 두 다리가 다시 꼿꼿이 섰다.

진실을 외면하며 연마해온 자존심이 꺾이기 직전에 다시 일어선 것이다.

“그래야 제라툴이지.”

그리드가 피식 웃었다.

영원의 감옥에서 신세진 일을 조금이나마 갚았단 생각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대결에 한층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안하다.”

소란이 일단락 된 이후.

재차 치우를 마주보고 선 그리드가 의외의 말을 들었다.

사죄.

치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내가 이기적인 염원에 집착한 까닭에 그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음을 알고 있다.”

스윽.

치우가 검을 거뒀다.

여태껏 사용해온 검을 왼 손에 쥔 묵색의 칼집에 회수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싸움을 관두려는 건가?

사람들이 내심 기대하는 그때였다.

콰착!

치우가 칼집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그러자 아수라의 두개골을 두부처럼 박살냈던 묵색의 칼집이 도미니언의 창을 수백 차례 받아냈던 검과 함께 통째로 우그러졌다.

본신을 드러낸 무신은, 절세의 보검조차도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짤랑-

치우가 도포를 젖히자 새로운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검이라고 부르기엔 적합하지 않다.

차라리 몽둥이에 가까웠다

순수한 금속으로 만든 길고 얄팍한 몽둥이.

울퉁불퉁 조악했다.

“기껏 사과해놓고 매로 다스리겠다는 겁니까?”

그리드가 불쾌해서 눈살을 구겼다.

대결을 눈앞에 두고 검을 버린다 싶더니 몽둥이를 꺼낸 치우의 저의를 의심했다.

의외로 도미니언이 오해를 풀어줬다.

“쌍아. 저것이야말로 치우의 애병이다.”

“쌍아...?”

“처음엔 단순한 쇳덩이에 불과했던 것이 치우와 함께 세월을 거듭한 끝에 지금의 형태로 변모했지.”

길고 조악한 쇠몽둥이엔 치우의 경험이 담겨있다.

여태껏 치우가 휘둘러온 궤적을 따라 완성된 형태였다.

다른 사람들의 눈엔 단순한 쇠몽둥이로 보일지 몰라도, 치우에게만큼은 최고의 맞춤형 무기인 셈이다.

“진심인 거야.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다.”

“...진심, 이란 말이지.”

그리드가 피식 웃었다.

여전히 양팔을 펼친 채다.

아무런 기수식도 취하지 않고 있는 치우보다 도리어 더 오만해보였다.

“나는 늘 진심이었다.”

[유일신 그리드가...]

“그만.”

그리드가 서사시를 멈췄다.

바알 토벌 이후.

그리드에겐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자신이 얻은 보상들을 면밀히 분석하고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가 주목한 부분은 의외로 1,000레벨을 돌파하고 얻은 ‘공용특성’에 있었다.

누구나 1,000레벨만 달성하면 얻게 되는 능력, <스탯 재분배>.

언젠간 필연적으로 희귀도가 떨어질 능력이다.

막말로 시간이 흐르고 흘러 1,000레벨이 흔한 것이 된 시점에선 흔한 능력으로 취급받게 될 것이다.

한데 그리드는 그것에 주목했다.

그것이 ‘시스템에 개입한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이미 분배한 스탯을 언제라도 재분배할 수 있는 능력.

기존의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규칙을 명백히 위반하는 능력이었다.

플레이어가 시스템이 만든 규칙에서 해방 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단순히 가능성에 그치는 수준이 아니었다.

힘, 속도, 체력.

절대자가 되고도 ‘시스템이 만든 한계’에 봉착했던 온갖 능력치들이 스탯 재분배를 활용하면 한계를 초월해버렸다.

아모락트가 그리드의 공격을 인지하지 못하고 죽었던 이유다.

그리드는 생각해보았다.

1,000레벨이라는 건 사실 엄청 이루기 힘든 업적이 아닐까.

그래서 1,000레벨을 달성한 대가로 시스템의 규제에서 완전하게 해방 된 것이 아닐까.

[당신의 뜻에 따라 서사시 작성을 멈춥니다.]

‘역시... 되는군.’

가설은 진실이 됐다.

그리드의 의지와 상관없이 특정 상황마다 떠올랐던 서사시조차 이젠 그리드가 뜻대로 조율할 수 있게 됐다.

“현명한 판단이다.”

치우가 치하했다.

아수라, 도미니언과 싸우며 에너지를 쏟아낸 치우는 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리드가 자신을 죽이기엔 아직 부족하단 사실을 엿봤다.

그리드 입장에선 패배가 자명한 싸움.

널리 알려봤자 이로울 게 없다.

도리어 치우의 격만 높아지는 대참사가 일어나리라.

“앞서 말했듯 그대에겐 사죄하고 싶다.”

무신의 사죄.

“사죄의 의미로 그대의 식견을 길러주지.”

치우가 그리드와의 간격을 좁혔다.

방울이 울리지 않는다.

그의 움직임은 고요했다.

그가 머리 위로 치켜세운 쌍아 또한 일체의 소음 없이 그리드를 표적으로 삼아 떨어졌다.

전력을 해방한 무신의 일격.

눈앞에서 펼쳐짐에도 인식을 불허한다.

“...!!”

두 눈을 부릅뜬 그리드의 입과 코에서 피가 솟구쳤다.

넓은 가슴이 드래곤 아머와 함께 통째로 뭉개졌다.

“훗날 그대가 나를 해함에 있어 이 순간의 배움이 도움이 되길 바라네.”

치우의 속삭임이 아득하게 들려온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불사 상태 돌입.

단 일격을 허용한 대가로 발생한 참사다.

체력에 올인한 스탯과 절대방어가 무색했다.

붉게 점철 된 그리드의 시야에 치우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그대로 떠나려는 낌새다.

그렇다.

자신의 일격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그리드의 수준을 파악한 치우는 깨닫고 있었다.

아쉽게도 현재 그리드의 수준으론 나를 벤다 한들 유의미한 상처를 입히지 못한다...

즉, 이 이상의 대결은 무의미하다.

어디까지나 치우의 생각이었다.

번쩍!

그리드가 떨리는 손으로 휘두른 역천이 반월을 그렸다.

베기에 최적화 된 형상.

이어서 찌르기에 곧추서고, 끝으로 가르기에 거검으로 변모한다.

“...!”

“...!!”

현장의 모두가 경악했다.

치우의 몸에서 수십 갈래의 선혈이 솟구쳤기에.

그리드가 발악적으로 휘두른 검.

화풀이에 불과한 줄 알았던 그것을 허용해준 대가를, 치우는 몹시 크게 치렀다.

“한 번씩 교환하자더니...”

완전히 난도당한 치우의 상태를 보고 아연실색한 브라함이 혀를 찼다.

치우 또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47회 베고, 9회 찔렀군...?”

“6융합 검무이기에 1회입니다.”

서로 1번씩 베자던 약속.

6융합 검무를 핑계로 어긴 그리드는 당당했다.

추가로.

번쩍!

하늘에서 일직선으로 떨어진 거대한 검광이 치우의 정수리에 꽂혔다.

<또 하나의 무덤>

신들의 무덤을 재현하여 주변에 대규모 폭격을 가합니다.

폭격의 종류와 피해량은 스킬 발동 전 20초 동안 입은 피해 내용에 따라서 다릅니다.

반사 데미지.

털썩!

무신이 무릎을 꿇었다.

현장의 모두가 경악하다 못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동안 이어지는 적막 속에서 그리드가 설명했다.

“이건 불가항력이고요.”

“...음.”

묘한 표정을 지은 치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제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묵묵히 관찰했다.

순식간에 회복되고 있었지만 몇 개의 깊은 상처는 몇 분쯤 흉으로 남을 듯했다.

영생의 저주가 잠시나마 약해진 느낌.

죽음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실례를 범한 까닭에 매를 맞은 거라고 생각하지.”

슬며시 미소 지은 치우가 결론을 내렸다.

그리드를 비난하기는커녕 달갑게 받아들이며 점차로 희미해졌다.

“다음 우리의 만남은, 오로지 그대의 의지로 행해지게 될 걸세.”

예언 따위가 아니다.

두 번 다신 경거망동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덕분에 안심하는 그리드였지만, 고맙다는 말 따윈 하지 않았다.

욕을 뱉지 않는 것만 해도 많이 참아주는 것이었다.

곧.

짤랑...

희미한 방울소리만을 남긴 채 치우는 현장에서 사라졌다.

“놓치지 마라!”

도미니언과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뒤쫓았다.

계단을 이룬 황금구름 너머에 대기하고 있던 수천수만의 군세도 함께였다.

전쟁의 신 도미니언이 직접 육성하고 통솔하는 군단이다.

자칫 인명을 해칠까 염려해 잠자코 대기하던 그들이 치우가 전장을 옮기자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이는 것이다.

“잠자코 보내줄 셈이냐?”

“서로 싸우면서 소모하겠다는데 굳이 방해할 필요는 없지. 근데 제라툴 당신은 왜 안 갑니까?”

“갈 곳이 없다만?”

“...?”

필요 이상으로 당당하지 않나?

황당해하는 그리드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영원토록 유일할 칭호, <무신을 벌한 자>를 얻었습니다.]

[갈 곳 잃은 신 ‘제라툴’이 템빨계에 합류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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