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8권 - 15화
‘안 좋아.’
그리드가 눈살을 구겼다.
치우가 실시간으로 강해지는 속도가 자신의 인지 속도를 상회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까닭이다.
아수라의 양팔이 이미 잘려나간 뒤에야 치우의 검술이 얼마나 쾌속해졌는지 알 수 있는 식이었다.
무신.
한계를 모르고 강해지는 중이다.
‘아니, 강해진다는 표현은 틀린 것 같다.’
이제야 조금씩 본 실력을 드러내는 거겠지.
“...저렇게 생겼었구나.”
템빨단원들이 술렁였다.
의외로 평범한 외모.
별다른 특징이 없는 치우의 얼굴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
숭배 받지 않고자 존재감을 옅게 만들었던 치우가 조금이나마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만큼 아수라가 강했다는 의미다.
“아수라를 도와라.”
급기야 도미니언이 아스가르드의 신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여전히 점잖고 엄숙한 표정이었으나 속내는 편치 않으리라는 게 그리드의 생각이었다.
아수라를 탐탁찮게 여기면서도 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달가워할 리 만무했으니까.
콰르르릉!!
도미니언의 창이 치우의 검을 가로막았다.
아수라의 목이 꿰뚫리기 직전이었다.
안도하던 아수라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미간을 꿰뚫린 여파다.
도미니언에게 공격이 가로막히자마자 선회한 치우가 비스듬히 쑤셔 넣은 묵색의 칼집이 절대자의 두개골을 두부마냥 갈라버렸다.
“무신...”
전율한 크라우젤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그려봤다.
방금 전 상황에서 치우의 움직임을 재현하는 게 가능할까?
불가. 불가. 불가...
“관두게.”
누군가의 굳은살 가득 박인 손이 크라우젤의 눈을 가렸다.
집념과 노력으로 완성된 손.
크라우젤 자신의 것과 닮은 그 손은 검성 뮐러의 것이었다.
“저것에게 홀리는 순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걸세.”
무신에게 홀리다.
예전부터 존재해온 표현이다.
제라툴의 비급에 홀린 무신의 추종자들이 세상엔 많았기에.
그리고 치우의 영향력은 제라툴을 초월했다.
[템빨제국의 기사들이 무신의 무위에 매료되었습니다. 당신을 향한 병사들의 충성심이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하기 직전입니다.]
실력이 어중간하게 뛰어난 사람일수록 치우에게 빠르게 홀렸다.
비교적 안목이 낮은 병사들은 아직까지 멀쩡한 반면 기사들이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너희들. 이상하다.”
수상한 낌새를 읽은 쥬드가 기사들을 다짜고짜 공격했다.
진짜 죽일 기세로 대검을 휘두른 탓에 깜짝 놀란 기사들이 일부 정신을 차렸다.
덕분에 한층 더 개판이 될 뻔했던 상황이 조금이나마 진정됐다.
물론 모든 기사들이 정신을 차린 건 아니었다.
여전히 다수의 기사는 치우에게 홀려 그를 위해 몸을 던지려고 했다.
아스모펠과 전 적기사단이 그들을 저지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예상했던 범위다.’
그리드는 플레이어들이 치우에게 홀리지 않았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았다.
잡념을 버렸다.
자신이 해야 할 최선을 궁리하고 즉시 행동에 옮겼다.
“그리드 사마?”
템빨교인들과 함께 한쪽 길목을 수호하던 데미안이 당황했다.
그리드가 다짜고짜 달려온다 싶더니 전장을 이탈했기 때문이다.
곧.
따앙! 따앙! 따앙...!!
그리드가 뛰어 들어간 건물에서 망치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다.
그리드는 이곳이 라인하르트 즉, 자신의 영역이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굳이 성능이 떨어지는 휴대용 용광로를 꺼내지 않고 근처에 널린 대장간 시설을 이용해 무구를 만들었다.
덕분에 품질 좋은 무구가 빠르게 완성 됐다.
누구를 위한 무구인가.
템빨단의 상위 전력과 사도들은 이미 졸업급 무기를 거머쥔 상태.
지금 그리드가 만들 무구란 당연히...
“갖다 줘.”
아스가르드 신들의 것이었다.
방금 막 완성된 따끈따끈한 무기들을 갓 핸드들이 운반했다.
“...!”
치우의 검에 맥없이 부서지는 방패를 보고 치명상을 각오하던 어느 신이 전율했다.
그의 손에 불쑥 쥐어진 방패가 치우의 검을 온전히 감당한 탓이다.
“...”
마치 검의 귀신.
묵묵히 검을 휘두르며 신들을 도륙하던 치우가 한 걸음 물러섰다.
기세가 명백히 누그러진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본래 눈앞의 신을 패퇴시킨 뒤 다음 표적을 노리려던 계획이 어긋났으니까.
무신에게 있어서 ‘자신의 뜻과 다르게 흘러가는 싸움의 구도’란 몹시 낯선 것이었다.
벅차올랐다.
“...템빨신. 근원을 상기했는가.”
짤랑짤랑짤랑!
치우가 희미하게 미소 짓자 그의 귀에 달린 방울이 유독 요란하게 울렸다.
안면 근육이 미세하게 움직인 것에 반응하고 있었다.
치우가 제 몸과 옷에 주렁주렁 매단 방울들이 얼마나 민감한지 알려주는 장면이었다.
“저 훌륭한 GPS들이 무색하단 말이지...?”
휴렌트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방울들이 치우의 움직임을 알려주고 있건만.
정작 치우의 움직임에 제대로 반응하는 신은 드문 것이다.
신중신...
연신 마른 침을 삼키던 휴렌트가 문득 하스터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당신이 치우를 가장 잘 상대하지 않을까?”
사운드 플레이의 귀재.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는지 템빨단원들의 이목이 일제히 하스터에게 집중됐다.
“그럴 리가 있겠...”
하스터가 난색을 표하는 순간이었다.
갓 핸드 몇 개가 날아와 그의 목덜미를 덥썩 붙잡더니 전쟁터로 운반했다.
“허억!”
얼떨결에 전장 한복판에 떨어져 기겁하는 하스터에게 그리드의 귓속말이 꽂혔다.
-일단 해 봐. 스스로를 믿으라고. 당신, 재능만큼은 진짜잖아?
“...”
무려 그리드의 말이다.
어느새 본인보다 그리드를 신뢰하게 된 하스터는 이번에도 역시 그리드를 믿어보기로 했다.
의아한 시선을 보내오는 신들 사이에서 눈을 감고 집중했다.
“가엾게도 미친 인간인가.”
어느 신이 탄식했다.
인마대전 당시 아스가르드가 인간을 돕진 않았을지언정.
레베카의 실체가 사실은 사악할지라도.
신들은 확실히 악마와 다르다는 사실을, 신들 사이에 선 하스터는 실감했다.
신들의 축복이 쏟아졌으니까.
온갖 버프 효과가 그를 강화시켰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인간에게 축복을 내리는 건 숭배라는 대가를 얻기 위함이다. 어떤 특별한 호의를 품어서가 아닌 거지. 가엾게도 미친 인간아. 괜히 또 착각하여 헛된 믿음을 되풀이하지 마라.
풍요의 신 알드로.
제라툴과 함께 라인하르트에 강림했던 여덟 신 중 하나다.
피아로와 싸워서 승리했었다.
쓰러진 피아로에게 언젠가 밭일을 배우고 싶다며 손을 내밀었던 그의 의념이 이 순간 하스터에게 마구잡이로 흘러들었다.
다소 냉소적이었다.
하지만 악의는 엿볼 수 없다.
진정어린 충고로 다가왔다.
-너희가 믿고 섬길 만한 신은 그리드가 유일해.
“...어째서 그런 말을 해주시는 겁니까?”
-그냥 보고 느낀 것을 말할 뿐이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미친 인간에게서 시선을 뗀 알드로가 멀리 선 제라툴을 바라보았다.
독기를 버린 얼굴.
증명하고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 치던 시절과 비교하면 그나마 지금이 보기 좋다.
제라툴에게 무예를 배운 기간에 정이라도 들은 걸까.
그리드에게 내심 의지하는 제라툴을 나쁘게 보지 못하고 도리어 응원하게 된 알드로가 기수식을 취했다.
방금 막 갓 핸드에게 전달 받은 건틀렛을 양손에 무장한 채다.
“큭...!”
하스터가 황급히 검을 뻗었다.
알드로의 왼쪽 측면을 향해서였다.
알드로가 호응했다. 자신을 찌르는 하스터의 검은 무시하고 왼쪽으로 주먹을 뻗었다.
짤랑.
하스터가 앞서 들은 방울소리가 아주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알드로의 귓전에도 울렸다.
꽈아아아아앙!!
알드로의 주먹이 치우의 검과 충돌했다.
“호오?”
치우가 감탄한다.
제 검을 막은 알드로가 아닌 하스터에게 시선을 보냈다.
“제대로 듣고 읽었나.”
“...흐랴아아앗!!”
하스터가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칼을 휘둘렀다. 그의 칼등을 짓누르고 있는 치우의 발을 들쳐 올리기 위해서였다.
불가능했다.
태산을 짊어진 느낌.
신들의 축복을 등에 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이 꼼짝도 안 했다.
하스터가 계획을 바꿨다.
붉은 현자의 권한으로 알드로에게 버프를 뿌렸다.
덕분에 치우의 검을 떨쳐내는데 성공한 알드로가 공격을 연계했다.
제라툴에게 배웠던 무술을 정확하게 구사했다.
짤랑.
주먹에 스친 치우의 옷깃이 구겨진다.
아니, 구겨지는 수준을 넘어서 찢겨나갔다.
알드로가 장착하고 있는 건틀릿의 손등부분에서 튀어나온 크로우가 원인이었다.
하스터의 도움, 제라툴의 무예, 그리드의 작품.
알드로는 삼위일체를 체험하고 있었다.
완성 됐다.
순간적으로 한계를 초월해서 치우의 가슴을 주먹으로 강타했다.
“어느 순간에나 꽃피는 재능은 존재하는군.”
마치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듯하다.
즐겁게 읊조린 치우가 어느새 낚아챈 알드로의 손목을 가볍게 부러뜨리고 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
알드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스슥.
치우의 검이 그대로 사선을 그렸다.
무릎 꿇은 알드로의 목으로 파고들었다.
그때였다.
팅.
어떤 씨앗이 날아와 치우의 검과 부딪쳤다.
동시에.
“급성장.”
콰르르르르르륵!!
급격히 자라난 콩나무가 치우를 밀쳐냈다.
때마침 꽂혀온 도미니언의 창이 위력을 보태자 치우는 자리를 이탈하고 말았다.
“농사, 어서 배우고 싶군.”
힘겹게 몸을 일으킨 알드로가 슬그머니 엄지를 치켜세웠다.
전장 구석에서 느껴지는 피아로의 기척을 향해서였다.
브라함이 눈살을 찌푸렸다.
“언젠가 죽여야 할 놈들을 상대로 하찮은 소꿉놀이를 하는 건 관둬라.”
극성까지 끌어올렸던 자연지기를 거둔 피아로가 씁쓸한 얼굴로 답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같은 편 아닙니까.”
“맞기야 하지. 몇 분 뒤엔 또 적이 되겠지만.”
“그때는 베겠습니다. 이래 뵈도 농부입니다.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하죠.”
“...”
농부는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가?
지혜의 신 브라함도 모르는 영역이어서 군말하지 못했다.
전투는 심화되고 있었다.
그리드가 실시간으로 보급하는 무구를 거머쥔 신들이 치우의 공격을 감당하는 횟수가 늘어났고, 덕분에 도미니언이 날뛰었다.
온전히 공격에 집중하며 치우를 몰아붙였다.
그 틈에 회복을 마친 아수라까지 가세하자 치우의 도포가 찢겨나가길 반복했다.
쩌엉!!
급기야 치우의 심장으로 파고드는 도미니언의 창대를 아수라가 발로 후려치자.
푸욱!!
무지막지한 가속력이 보태지며 치우의 몸을 꿰뚫었다.
“...”
솟구친 창대가 만인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전장에 서서히 깔리는 석양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찬란한 광채를 내뿜는 도미니언의 창은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유일한 신이 오늘 이곳에서 종말을 맞이했노라고.
“...준비해라.”
거대한 창에 꿰뚫린 채 축 늘어진 치우를 물끄러미 살피던 브라함이 사도들에게 명령했다.
치우에게 홀렸다가 그리드의 활약을 보고 정신을 차린 기사들, 그리고 템빨단원들 역시 각자 이끄는 병력과 함께 전투를 준비했다.
그들의 표적, 아스가르드의 신들이다.
대장간에 틀어박힌 그리드가 신들의 무구를 제작하는 사이 치우가 패배했고 균형은 무너졌다.
절대자간의 싸움은 늘 그랬듯 순식간에 결판이 난 것이다.
아마 그리드의 예상 밖일 터.
수습해야한다.
현장의 모두가 각오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잘생겨졌다고?”
마치 배신을 당한 것 같은 표정을 지은 극검과 반트너가 동시에 외쳤다.
여전히 창날에 꽂혀 축 늘어져있는 치우의 얼굴을 보면서다.
드디어.
그리드를 제외한 사람들 역시 치우의 본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숭배 받을 것을 각오한 무신이 모든 제약을 풀었다.
“작은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를 여기까지 몰아붙이는가.”
서서히 고개를 드는 치우의 시선이 그리드가 있는 건물에 꽂혔다.
제 심장을 꿰뚫은 창과, 그것을 움켜쥐고 있는 도미니언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이를 악 문 도미니언이 창을 크게 휘둘렀다. 치우를 땅에 메어 쳐 곤죽으로 만들 기세였다.
하지만 그의 창이 지면에 꽂혔을 때, 치우는 창대 위에 고고히 서있었다.
경악하는 도미니언을 등지고 선 치우가 검으로 섬광을 일으켰다.
그러자 몸이 수십 갈래로 갈라진 아수라가 황급히 패퇴했다.
신들이, 그리드의 사도들이, 템빨단원들과 제국의 용맹한 병사들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뒷걸음친다.
오직 쥬드만이 돌진했다.
상어의 모습을 닮은 쥬드의 대검이 치우를 표적으로 커다란 횡을 그렸다.
하지만 쥬드는 칼끝에서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
갑자기 시야가 지상에서 멀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의아해할 뿐.
그의 귓전에 그리드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목숨을 소중히 여기라고 했잖아.”
콰아앙!!
쥬드의 거구가 한쪽 건물에 처박혔다.
그리드가 목덜미를 끌어당겨 집어던진 것이다.
엄청나게 쾌속했다.
제라툴과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물론이고 도미니언조차 다소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신 치우.”
스탯을 민첩성에 올인해서 한계 속도를 극복했던 그리드.
치우 앞에 도착한 그가 이번엔 체력에 스탯을 올인했다.
전신에 드래곤 아머를 빈틈없이 무장하고 느긋하게 두 팔을 들어올렸다.
“먼저 베십시오. 대신 다음엔 제가 벱니다.”
“재미있는 겨루기가 되겠군.”
치우가 흥미를 보였고,
“아.”
템빨단원들은 탄식했다.
안도하며 빙그레 웃는 그리드의 길고 두꺼운 손가락 사이에서 쿨타임이 돌아온 도란의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