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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87화 (1,786/1,794)

템빨 88권 - 14화

‘균형이 중요한 상황이다.’

아스가르드 소속 신들과 치우의 전쟁.

그리드는 어느 한쪽의 승리를 바라지 않았다. 양쪽 다 극한까지 내몰릴 때까지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길 바랐다.

물론 전쟁이 길어질수록 도시의 피해는 커지겠지만 감당 가능하다.

템빨계 소속 신들이 어느새 집결한 덕분이다.

무후총의 정보력을 기반으로 대륙 각지에 흩어진 반신들을 찾아 회유해온 신들.

그들은 특출한 능력을 하나씩 지니고 있다.

대지의 신 가리온을 주축으로 도시의 피해 규모를 최소화시키는 게 가능했다.

‘백성들은 이미 전부 피신한 상태고.’

매스 텔레포트가 활용됐다.

스틱세이와 템빨마탑의 마법사들이 활약해줬다는 연락이 진즉 도착했다.

사실 굳이 피신시키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었을 거다.

치우와 아스가르드의 신들 모두 인명 피해가 나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었으니까.

‘지혜의 탑이 반응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겠지.’

지혜의 탑 역시 템빨계 소속이다.

결사들은 라인하르트의 안위를 몹시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다.

자신들이 나설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듯했고 그리드는 그들의 판단을 존중했다.

‘지금 결사들이 개입했다간 구도가 도리어 틀어질 우려가 있다.’

기껏 치우와 아스가르드의 대결 구도를 만든 상황이다.

활용해야 한다.

‘우선... 메타트론이 재차 합류하기 전까지 아스가르드측의 전력을 최대한 손실시켜야 돼.’

한데 치우의 발이 묶인 상태다.

아수라가 워낙 출중했다.

일단 능력치 자체가 치우와 비견되는 느낌이다.

새로운 방울소리가 채 울리기도 전에 치우의 움직임을 쫓고 도리어 선공을 가할 때가 종종 있었으니까.

짤랑짤랑짤랑짤랑...

방울소리가 쉬지 않고 울렸다.

치우와 아수라가 충돌하는 횟수가 중첩될수록 더욱 요란하게 날뛰었다.

“그나마 저놈에 방울 덕분에 뭐가 뭔지 알겠네...”

한 동안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던 극검이 중얼거렸다.

치우와 아수라의 싸움.

그의 눈엔 ‘아무 것도 없는 전장’에서 가끔씩 빛이 번쩍이는 걸로밖에 안 보였다.

초월자의 신분으로도 두 신의 움직임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나마 방울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충격파에 영문도 모른 채 휩쓸렸을 터였다.

‘이상한데.’

그리드의 표정이 묘했다.

그는 치우와 아수라의 움직임을 정확히 쫓으며 그들의 표정까지 읽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질적인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치우의 표정이 어둡다.

도미니언과 싸웠을 때만 해도 문득문득 희미한 미소를 그렸던 그가 지금은 조금도 즐겁지 않은 눈치였다.

아니, 도리어 불쾌해하는 듯했다.

아수라와 공방을 교환할 때마다 더러운 것을 털어내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했다.

치우는 본래 강자를 존중하고 아낀다.

강한 존재일수록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셈이니까.

즉, 치우에게 있어서 강자란 염원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도구란 말이다.

한데 정작 자신과 호각을 겨루는 아수라에겐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정말로 죽을 것 같으니까 내키지 않는 건가?’

바알이 그랬었다.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기에 갈망했던 놈.

놈은 정작 죽음이 다가오자 어떻게든 피하기 위해 발버둥 쳤었다.

치우가 그토록 추한 놈과 닮았다고...?

그리드가 실망하는 순간이었다.

“너를 천상으로 들인 것은 필시 쥬다르겠군.”

아수라의 주먹을 칼등으로 밀쳐낸 치우가 입을 열었다.

스륵.

날카로운 칼날이 아수라의 가슴에 닿는다.

주먹의 궤도가 비틀리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난 가슴이었다.

“놈은 여전히 깨닫지 못했나. 자신의 욕심 탓에 고룡들이 나를 좌시하였고 끝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걸.”

푸화하하하하학...!

솟구치는 선혈이 검다.

석양을 등졌다는 점을 감안해도 너무 어두웠다.

아스가르드 소속의 신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수라의 피는 여전히 불길한 색을 띄는 것이다.

“...큭큭.”

아수라는 웃었다.

처참하게 망가진 육신을 도리어 무기로 이용했다.

가슴이 반으로 갈라진 탓에 바닥까지 닿을 정도로 늘어진 양손으로 치우의 발목을 낚아챘다.

“애쓸 필요 없다. 네가 내 무예를 체득한다고 해봤자 결국 쥬다르에게 빼앗길 뿐이다.”

“글쎄. 그건 모를 일이지?”

아수라가 이를 악 물었다. 기이한 각도로 낚아챈 치우의 발목을 사력을 다해서 휘둘렀다.

그리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치우가 처음으로 균형을 잃었기에.

물론 미세한 수준에 불과했다. 아주 약간 휘청거렸을 뿐이다.

아니, 휘청거렸다는 표현도 애매했다.

치우는 딱 한 걸음을 옆으로 이동하게 됐다.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한 걸음을 유도한 건 아수라다.

푸욱!!

아수라의 갈라진 가슴에서 튀어나온 늑골 하나가 치우의 허벅지를 찔렀다.

대가를 크게 치르긴 했다.

치우의 검이 아수라의 얼굴을 관통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수라는 집요했다.

치우의 허벅지에 꽂은 늑골에 매달려서 치우에게 밀착했다.

한 손으론 두개골에 박힌 치우의 검을 붙잡고 늘어진 채였다.

“우선 다리.”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부글부글!

아수라의 상처 부위들이 수포처럼 끓어올랐다.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시선을 돌리게 만들 정도로 역겨운 광경.

그리드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수라의 상처가 순식간에 회복하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했다. 아수라의 두 다리가 달라졌다는 사실까지도.

이상적인 신체를 조각하면 저럴까.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길게 뻗은 치우의 다리를 꼭 닮았다.

치우가 휘청거렸다.

이번엔 진짜로 균형을 크게 잃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

그의 두 다리 역시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조금 굵어진 느낌이다.

통통.

머리에 박힌 치우의 검을 뽑아 부러뜨린 아수라가 발을 몇 번 굴러보면서 씨익 웃었다.

“한층 더 가벼워진 느낌이군.”

“...진짜로 빼앗긴 건가?”

그리드가 중얼거렸다.

방금 두 눈으로 직접 상황을 목격하고도 반신반의했다.

애초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잠시 헛것을 본 게 아닐까 의심할 만했다.

“쥬다르... 어째서 이렇게까지...”

공교롭게도 헛것을 본 건 아니었다.

눈살을 찌푸린 채 이를 가는 도미니언의 반응이 증명했다.

그리드가 대놓고 물어봤다.

“아수라의 저 능력, 쥬다르가 부여한 건가?”

“...아마도 그렇겠지.”

대답하기 싫어 외면하려던 도미니언이 도중에 생각을 바꾸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옥에서 직접 체험해봐서 알겠지만 아수라의 신체는 기이한 가변성을 지녔다. 쥬다르의 입장에선 큰 흥미가 생겼겠지. 연구를 빌미로 어떤 수작을 부렸어도 이상하지 않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아수라의 어떤 점을 믿고 아수라를 무신으로 만들려는 거지? 치우조차 통제하지 못했던 아스가르드가 무신이 된 악신을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치우는 무수히 많은 존재의 염원으로 탄생한 신이다. 처음부터 아스가르드에 소속되지 않았던 탓에 통제하지 못했던 거야. 반면 아수라는 쥬다르의 손아귀에 있다.”

“쥬다르가 통제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쥬다르의 생각에 불과하다.”

“...”

아스가르드가 아수라를 통제할 수 있든, 없든.

사실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드는 아수라가 치우의 육신을 빼앗고 대체하게 되는 사태를 좌시하지 않을 거니까.

제라툴에게 진즉 돌려받은 역천을 고쳐 쥐는 그의 곁으로 도미니언이 나란히 섰다.

그리드를 방해하려는 게 아니었다.

방금 그가 진실을 설명한 이유는, 그리드와 협력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스파앗!!

어떤 대화도 없었다.

동시에 도약한 두 신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아수라의 지척에 떨어졌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칼과 창을 꽂았다.

“이건 무슨 경우지?”

본래 치우의 것이었던 다리를 접어 도미니언의 창대를 낚아챈 아수라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궤도가 바뀐 창날이 그리드의 역천을 튕겨낸다.

“도미니언. ‘우리’는 오로지 여신을 위해 싸우는 거 아니었나? 우리끼리 다퉈선 안 되는 걸로 아는데?”

“치우의 힘을 탐내는 건 여신을 위하는 일이 아니다.”

“쥬다르의 생각은 다른 눈치다만.”

“너무 큰 욕심을 품은 거겠지.”

아수라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도미니언이 창을 들어 올린 여파다.

그리드가 뒤쫓았다.

[모든 스탯이 근력에 재분배 됩니다.]

촤르르르륵...

6융합 검무의 검로가 화려하게 연계됐다. 역천이 그리는 온갖 궤도가 마치 연꽃이 피어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음.”

치우와 싸우면서 습득한 발기술을 치우에게 빼앗은 두 다리로 구현하려던 아수라가 생각을 바꿨다. 힘껏 뒤로 물러나 그리드와의 충돌을 피했다.

“지금 상태론 부족한 느낌이군.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안 될까?”

“...그러지.”

“허? 고맙다고 해야 하나...”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리드의 모습에 오히려 당황하던 아수라가 흠칫 놀라며 상체를 크게 젖혔다.

즉시 반응했건만 어째선지 늦었다.

턱이 반으로 갈라졌다.

의아해하는 아수라의 눈앞에 치우가 있었다.

한쪽 다리를 치켜세운 채다.

치우의 발끝에 방금 찢겨나간 아수라의 살점이 걸려 있었다.

아수라에게 강제로 신체의 일부가 바꿔치기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치우의 무위는 온전했다.

“바뀐 편이 도리어 좋군.”

애초에 아수라의 신체는 손색이 없었다.

지옥에서 그리드 일행과 겨룰 때 실시간으로 교정하고 재구축한 까닭이다.

마침 아수라도 깨달았다.

“돌려줘.”

‘미친놈.’

지가 바꿔치기 해놓고 이젠 또 돌려 달라니?

혀를 내두른 그리드가 뒤로 슬그머니 물러섰다.

치우와 아수라가 재차 싸움에 집중하도록 환경을 조성했다.

자칫 무너질 뻔한 균형이 다시 바로 잡혔으니까.

그에게 다가온 제라툴이 물었다.

“대체 뭘 어쩔 속셈이지?”

“어쩌긴 뭘 어쩝니까? 내 손으로 다 죽여야지.”

“그게 무슨... 아수라와 도미니언은 다른 어중이떠중이들과 다르다. 고작 빈틈을 공략하는 것으로 일격에 처리하는 건 제아무리 너라도 불가능해.”

“물론 나 혼자선 힘들겠지. 하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잖아.”

“네놈...”

내가 협력해줄 거라고 믿는 것이냐...?

제라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리드에게 신뢰받고 있음을 자각하자 가슴이 벅차오른 까닭이다.

콧대 높은 아스가르드의 신조차 감격하게 만드는 존재.

그것이 현재 그리드의 위치였다.

바알을 처단하고 지옥을 정화시킨 절대자의 위엄이었다.

그리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나의 사도들... 특히 브라함이랑 메르세데스라면 내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제때 협력할 테니까. 그들의 성격도 사실 나랑 별반 다르지 않거든.”

“...?”

내가 아니라 사도들을 믿는 거였다고?

내심 실망한 제라툴의 표정이 구겨지는 그때였다.

-...그리드.

그리드의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의념이 흘러들어왔다.

‘이건...?’

-그리드!

번헬리어였다.

‘의외로 의리가 있다니까.’

지켜보고 있었구나.

그래, 내게는 나름 고룡인 동료도 존재한다...

제법 든든해서 미소 짓는 그리드에게 번헬리어가 재촉했다.

-결사들은 뭘 하는 거지? 어서 이곳으로 결사들을 보내라.

“...?”

-네바르탄이 미쳐 날뛰고 있단 말이다...! 이대론 내가 위험하다!

“...”

어째서 용이 개소리를 할까.

무시하기로 결정한 그리드가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번헬리어의 말이 사실이라면 결사들이 알아서 잘 대응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콰직!

콰드득!!

치우가 아수라를 점차 압도하기 시작했다.

도미니언과 다른 신들은 사태를 방관했다.

정말로 수많은 존재가 현장을 지키고 있건만 아수라는 고립 된 것이다.

‘좋아. 이대로 기회를 엿보다가 아수라를 패퇴시킨다.’

그리드에겐 믿는 구석이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템빨계의 제약.

아수라가 약해졌을 때 제약을 부여하고 한층 더 약화시킨 뒤 변수 없이 처단할 요량이었다.

‘그리고 치우와 도미니언이 다시 싸우기 시작하면 그땐 둘을 한꺼번에 처리...?’

그리드의 생각이 멈췄다.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달은 까닭이다.

치우의 움직임.

처음과 달랐다.

지쳐서 둔해졌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빠르고 날카로워졌다.

실시간으로 강해진 느낌.

제라툴 또한 깨달은 눈치였다.

엄청나게 좌절한 표정을 짓고 중얼거렸다.

“저쯤은 돼야 한다는 건가... 마치 그리드 네놈 같군...”

라이벌(?)에게 솔직한 속내를 털어내고 말 정도로.

제라툴은 엄청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무신이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처음으로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리드가 그를 위로했다.

“내가 볼 땐 당신도 우리와 같습니다.”

제라툴이 예뻐서 좋게 말하는 건 아니다.

단지 전력을 보존해야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건넨 위로였다.

제라툴에겐 굉장한 힘이 됐다.

“...그거야 당연하다. 나야말로 진정한 무신이니까.”

‘그래... 기 죽어있는 것보단 낫지.’

그리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여러모로 꼬인 상황.

변수가 너무 많다.

이럴 때일수록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아군이 필요했고, 그리드의 처세술은 나름 훌륭했다.

“그래서 무슨 상황입니까?”

늘 그랬듯이.

누구보다 늦게 탑에서 나온 크라우젤이 현장으로 달려왔다.

올라가면 강해지는 탑은 인스턴스 던전이다.

외부와 반쯤 단절됐던 까닭에 상황의 설명을 요구했다.

반트너가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음... 치우가 그리드를 습격했는데 제라툴하고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내려와서 도와줬어. 그리드는 기회를 엿보다가 아스가르드의 신들을 죽였는데 곧 치우가 아수라에게 고전하기 시작했지. 그래서 그리드랑 도미니언이 협력해서 치우를 도왔고...”

“...”

크라우젤은 문득 과거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반트너의 건강 상태를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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