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786화 (1,785/1,794)

템빨 88권 - 13화

리파엘 이전의 대천사장.

브라함에게 고하길, 그는 베리아체라는 이름을 모른다 하였다.

또한 지상에 강림해 그리드를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

이번 세계가 첫 번째 세계와는 다르다며 감탄했다.

메타트론은, 몹시 오랜 세월을 존재해온 것이다.

운 나쁘게도 고룡을 직접 목격하거나 체험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긴 세월이었다.

‘하필 네바르탄인가.’

레이더스는 여신을 섬기는 입장에서 봐도 신비롭고 품격이 있어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지만 대적할 만하다는 인상이었고, 번헬리어는 어떤 면으로 보나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었다.

반면 네바르탄은 가늠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광룡으로 전락하기 전부터 냉혹하고 강력하여 섣불리 접근하지 못했었는데 광룡이 된 이후엔 한층 더 강해졌다는 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광증이 치료됐다.’

바알의 죽음이 계기였다.

네바르탄의 뇌리에 새겨졌던 저주의 술식이 소멸했고, 술식의 발판이 됐던 야탄의 정수는 역할을 못하게 되자 증발했다.

제 죽음을 예측하지 못한 바알의 오만함이 만든 결과다. 철두철미하지 못했다.

덕분에 득을 보게 생겼다.

네바르탄의 거대한 두 눈동자가 현기를 품고 있음을 엿본 메타트론이 사납고 흉측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머금었다.

‘트라우카가 아닌 걸 감사하도록 할까.’

드래곤 슬레이어의 자격을 얻고 치우에게 대적할 힘을 갖추리라...

번쩍!

메타트론의 눈에서 광선이 쏘아졌다.

네바르탄이 내뿜은 콧김을 상쇄하기 위해서였다.

스파아아아아아앗!!

강맹한 기운의 충돌이 발생시킨 파괴의 연쇄 속에서 천사의 고리가 환한 광채를 내뿜는다.

네바르탄의 그림자가 드리워 어두워진 하늘 곳곳에 수백 개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네바르탄은 그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213개의 마법진.

그것들 전부 미리 준비 된 함정이니까.

메타트론은 자신이 고룡의 시선을 끌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마법진을 완성시켜놨었다. 마법진의 흔적을 완벽하게 감춘 채 함정에 빠질 드래곤을 내심 기다렸다.

수개월 전.

지상에 강림해 그리드를 처음으로 만났던 그날 대놓고 고룡을 언급했을 때부터 작금의 사태를 예견했다.

메타트론은 고룡의 청각이 지상 전체에 미친다는 점을 역이용했다.

의도적으로 고룡의 표적이 됐다.

그리고 오늘.

치우의 등장이 고룡들의 잠을 깨웠을 거라고 확신한 메타트론은 치우의 일격을 고스란히 허용했다.

곧 신들의 전쟁터가 될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이탈해 혼자가 됐다.

고룡이 자신을 노리기 쉬운 환경을 조성했단 말이다.

즉, 네바르탄의 출현은 메타트론의 예상범위 내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엄밀히 말하면 기대했던 전개였다.

““끝내 나타나지 않는 건가 싶어 포기하던 차인데 감사하군. 이 또한 여신의 은총이겠지.””

콰쾅!

쿠콰콰콰콰콰쾅!!

성속성 마법의 극의.

마법의 신 브라함조차 재현하지 못할, 오직 여신을 섬기는 자만이 구현할 수 있는 성스러운 마법이 네바르탄의 거구를 폭격했다.

마법 하나하나가 신앙이다.

여신을 섬기는 자의 염원이 담겼고, 교리였다.

일반적인 마법의 규칙을 압도하는 무게감을 지녔다.

꽈차차창!!

네바르탄이 마법으로 펼친 실드가 박살났다.

딱 거기까지였다.

드래곤의 호신강기는 마법뿐만이 아니니까.

메타트론이 미리 깔아놓은 마법의 숫자가 정확히 213개로, 삼위일체까지 이뤘다지만 고룡의 마력과 비늘을 단번에 꿰뚫기엔 위력이 다소 부족했다.

메타트론도 알고 있었다.

마법의 전개와 동시에 18쌍의 날개를 힘차게 저은 그는 이미 네바르탄의 지척이었다.

고룡과 무신을 범한다.

이를 조건으로 쥬다르와 계약을 맺은 메타트론은 완전한 상태였다.

모든 날개를 해방하고 육신의 자유를 되찾은 그의 속도와 힘은 절대적이었다.

네바르탄의 심장에 칼을 꽂는 속도가 ‘존재감을 지우느라 다소 약해져 있는’ 치우와도 비견할 만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상대가 나쁘다는 점이었다.

[고룡의 위신이 어지간히도 떨어졌구나. 나 또한 사태에 일조했으니 다른 녀석들을 원망하고 싶진 않았으나 이쯤 되면 화가 치솟는군.]

적어도 네바르탄이 광증을 앓기 전까진.

고룡이란 무적을 상징했다.

두려워서든, 더러워서든.

콧대 높은 아스가르드의 신들조차 감히 고룡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급기야 여신이 직접 화친을 요청했을 정도로 고룡의 위엄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한데 네바르탄이 광증에서 깨어나고 보니 상황이 우스워졌다.

한낱 천사 따위가 고룡을 사냥감 취급할 정도로 고룡의 위엄이 떨어졌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네바르탄에게 있었다.

네바르탄 스스로도 자각했다.

내가 악마 따위의 수작에 넘어가 광증에 빠진 시점부터 고룡의 위엄에 균열이 생겼겠지.

번헬리어에게 속았다는 핑계 따위 소용없는 거니까.

그래, 내가 계기를 마련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계기에 불과하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내가 아닌 다른 놈들이 원인이라고 봐야 옳다...

[내 정신이 온전치 못한 동안 당최 무슨 일들이 벌어진 걸까. 설마 레이더스가 먹이에 집착하다 못해 신들과 겸상이라도 한 건가? 혹은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던 번헬리어가 바알의 현혹에 넘어가 악마 따위와 사랑을 속삭이며 의지하기라도 한 게냐.]

““...””

네바르탄의 심장에 꽂은 칼이 비늘의 틈새에 맞물려 부러지는 광경을 허망하게 지켜보던 메타트론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크게 감탄한 여파다.

과연 네바르탄이란 생각이 들었다.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답게 추론의 수준이 높다.

비록 현실은 네바르탄의 추측보다 개판이었지만 말이다.

[...상관없다. 무너진 위신이야 지금부터라도 되찾으면 된다.]

쏴아아아...

네바르탄의 새카만 비늘이 백열하기 시작했다.

단지 하얗게 물들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신성을 내뿜었다.

메타트론의 신성이다.

방금 전 네바르탄을 폭격했던 213개의 신성 마법이 네바르탄의 비늘들로부터 피어났다.

마력에 담긴 속성을 흡수하고 활용하는 블랙 드래곤의 특질이 네바르탄 고유의 권능으로 극대화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메타트론에겐 몹시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메타트론은 위축되지 않았다.

공포보다 더 큰 분노를 느껴서다.

““감히 신성을 모독하는가.””

메타트론이 생각하는 신성의 근원은 레베카다.

함부로 여신의 힘을 취하고 휘두르는 네바르탄에게 강한 증오를 품었다.

안 그래도 사나운 인상을 지닌 그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지만 네바르탄은 가소롭다는 듯이 콧김을 내뿜을 뿐이었다.

[계약의 천사여. 너는 너 자신을 모른다. 네가 계약에 묶여 여러 제약을 떠안은 이유는 네가 생각하는 것과 달라.]

““삿된 말로 현혹하려 드는군.””

메타트론이 조소했다.

그가 18쌍의 날개로 스스로의 눈과 귀를 가리고 사지를 봉인해온 이유는 단순하다.

너무나도 막강한 힘을 혹 통제하지 못할까 염려해서였다.

태어난 순간부터 당연히 그리해왔다.

여신께서 친히 만드신 안전장치였다.

다른 이유가 존재할 리 만무했다.

믿어 의심치 않는 그에게 네바르탄이 진실을 전했다.

[아니, 네놈은 깊이 착각하고 있다. 레베카가 네게 계약이라는 조건을 걸고 제약을 가한 이유는 네놈이 주제파악 못하는 머저리기 때문이다. 레베카의 성정을 고려컨대 자신의 피조물이 제멋대로 날뛰다가 한심하게 나가 죽는 광경을 두고 볼 수 없던 거겠지.]

““큭큭...!””

메타트론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도 명백한 조소였다.

한울의 편에 선 치우가 아스가르드를 떠났을 당시.

메타트론을 해방하지 않고 굳이 제라툴을 빚은 여신의 선택에 일부 신들이 의문을 품었었다.

그 반응들을 통해서 메타트론은 확신했다.

자신에게 치우와 대적할 자격이 있음을.

오늘 직접 치우를 마주하고도 흔들리지 않은 믿음이다.

그러므로 네바르탄이 뭐라고 지껄여봤자 헛소리로밖에 안 들렸다.

““고룡... 트라우카가 실컷 날뛰던 시절에도 치우와 대립하는 일 만큼은 피했었지. 고룡의 위신은 그때부터 하락세였다. 레이더스가 인간들의 식당을 순회하고 번헬리어가 인간과 사랑을 나눈 사건 따위는 결정적인 원인이 아니란 말이다.””

메타트론은 아주 긴 세월을 두문불출했다.

대천사장의 지위에서 탄핵을 당한 뒤로 세상을 등졌다.

하지만 고룡들의 행적은 알고 있었다.

최근 세상 밖으로 나온 뒤로 철저히 조사한 까닭이다.

그렇다.

메타트론은 고룡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여신께 협정의 수모를 안긴 트라우카를 척살하는 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표 중 하나였기에.

““내 말의 뜻을 알겠나? 그대의 저열한 말투를 응용하자면, 주제파악 못하는 머저리는 내가 아니고 그대라는 거다.””

[...?]

안 그래도 거대한 네바르탄의 두 눈이 더욱 커졌다.

2개의 만월을 가까이서 보는 느낌이다.

쿠르릉...

네바르탄은 고개까지 비스듬히 기울였다.

파장이 컸다.

구름이 흔적도 없이 흩어졌고 무지막지한 폭풍이 휘몰아쳤다.

[더 이상 미뤄선 안 되겠다. 트라우카와 결판을 내야겠어.]

““...?””

어째서 그렇게 귀결되는 거지?

이번엔 메타트론의 고개가 기울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네바르탄의 관심 밖이었다.

그의 심정 같아선 저 날개 많은 벌레를 단숨에 짓뭉개 죽이고 눈앞에서 어서 치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다.

메타트론이 천사답지 않게 고강한 것은 진실이니까.

놈을 죽이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시간을 소비해야 할 정도였다.

현재 상황에선 불필요한 손해다.

계산을 마친 네바르탄이 선회했다. 메타트론에게 등을 보였다.

순간 드러난 빈틈을 노리려던 메타트론이 멈칫, 주저했다.

네바르탄.

번헬리어와는 격이 다른 마력과 무력을 겸비했다.

레이더스보다 위엄은 다소 떨어질지 몰라도 좌시하기 힘든 카리스마를 지녔다.

직접 체험컨대 트라우카와 비견할 만했다.

지금 단계에서 섣불리 싸워봤자 무조건 손해다.

진실을 고하자면 승산을 엿보기 힘들었다.

[내가 네놈을 죽이겠다고 선언하지 않은 것을 감사히 여겨라.]

드래곤은 언약을 무척 중요하게 여기는 생물이다.

만약 네바르탄이 메타트론에게 실력을 ‘확인해보겠다.’ 정도로 말하지 않고 해하겠노라 선언했었다면.

네바르탄은 메타트론을 반드시 죽였을 것이다.

[또한 명심해라. 만약 네놈이 그리드에게 해를 입힌다면... 그때 넌 죽는다.]

메타트론은 자신을 고룡에 비견했다.

그럼에도 해치지 않고 물러나겠다는 네바르탄이 그리드의 안위는 엄청나게 신경 썼다.

고룡의 명예보다 그리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듯한 태도다.

왜? 라는 의문 따위, 메타트론은 품지 않았다.

네바르탄의 광증은 결과적으로 그리드 덕분에 치료된 거니까.

또한 그것과 별개로 메타트론은 그리드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그가 치우처럼 여신의 명예를 더럽히거나 위협하지 않는 이상 나는 영원토록 그를 존중할 것이다.””

[곧 죽겠군.]

의미심장한 말을 뱉으며 콧김을 내뿜은 네바르탄이 현장을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죽어라! 네바르탄!!]

웬 외침과 함께 새카만 섬광이 날아왔다.

브레스였다.

악룡 번헬리어의 브레스.

이 순간 네바르탄과 메타트론이 짓는 표정은 닮았다.

꽈아아아앙!!

네바르탄과 충돌한 브레스가 강력한 폭발을 발생시켰다.

주변의 산과 강이 증발해버렸다.

[크하하! 예상대로 막지 않는구나! 오만한 놈! 내가 예전과 같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본래 브레스는 브레스로 상쇄시키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네바르탄은 몸으로 직접 부딪쳤다.

번헬리어를 자신보다 몇 수 아래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번헬리어의 예상대로였고, 엄청난 기회였다.

[거기 천사, 내 덕에 목숨을 건진 대가로 내게 협력해라.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네바르탄 저놈을 충분히 사냥할 수 있다. 저놈은 여전히 과거에 머무르는 까닭에 비교적 약하거든.]

오랜 세월 광증을 겪은 까닭에 네바르탄의 시간엔 공백이 생겼다.

수면을 취하지도, 마력을 축적하지도 못해서 발전하지 못했다.

반면 번헬리어는 크게 성장했다.

그리드와 함께 바알을 죽인 대가로 엄청난 격의 상승을 누렸다.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결론이다.

네바르탄의 보복을 마냥 두려워하며 기다리느니 먼저 기습하는 게 옳았다.

마침 제법 강력한 천사와 협력하기에 좋은 구도이기도 했고.

““...””

한데 천사의 반응이 영 떨떠름했다.

협력하기는커녕 피하고 싶은 눈치였다.

번헬리어가 비웃었다.

[네바르탄 저놈은 미쳐서도 집요했었다. 네놈이 여기서 이대로 도망쳐봤자 언젠가 반드시 추적을 당할 테니 차라리 내게 협력해라. 그것만이 네놈이 살 길이다.]

““...그냥 가면 안 되나?””

메타트론은 번헬리어를 굳이 상종하지 않았다.

자욱한 연기에 휩싸여있는 네바르탄의 눈치만 살폈다.

불쾌해진 번헬리어가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번헬리어여. 나는 네놈이 내게 저지른 죄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홀로 나약하게 태어나 자존감이 낮은 네놈의 입장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용서하진 못할지언정 죽일 생각은 없었어... 고작해야 네놈이 지켜보는 앞에서 네놈의 심장을 도려내고 씹어 먹을 계획이었다...]

음침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래곤 피어가 실렸다.

증발한 강물 탓에 메마른 대지 위에서 펄떡이고 있던 물고기와 괴수들이 즉사했다.

[한데 그 계획을 바꿔야겠군.]

꽈르르릉...!

장관이 펼쳐졌다.

태산보다 거대한 두 마리의 고룡이 뒤엉켜 싸우는 광경이었다.

그리드의 드래곤 웨폰마냥 벼려진 발톱으로 서로의 비늘을 부수고, 발톱보다 단단한 이빨로 서로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괴물들의 모습에 메타트론은 조금 압도당했다.

점차로 휩쓸렸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하건만, 전투의 파장이 워낙 강력해서 얼떨결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