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8권 - 12화
그리드는 치우와 싸우고 싶지 않다.
하지만 치우는 그리드에게 집착하는 상황이다.
‘염치가 없어.’
승산이 있어야 싸우지.
이 뭣 같은 상황을 무슨 수로 타개해야 좋을까?
해결책은 의외로 쉽게 떠올랐다.
메타트론이 처음부터 힌트를 줬었다.
천상의 신들이 치우를 노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드가 템빨계의 제약을 풀게 된 경위다.
기다렸다는 듯이 강림한 천상의 신들이 치우를 표적으로 삼았고 치우는 더 이상 그리드에게 집착하지 못했다.
‘이제 좀 숨통이 트이네.’
무신 치우.
유일한 신의 무위는 그리드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온갖 권능을 펼친 수십 명의 신이 협공을 펼쳐도 상처를 입히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전투의 구도는 일방적이지 않았다.
전쟁의 신 도미니언이 균형을 맞춘 까닭이다.
그가 한 번씩 휘두르는 창이 다른 신들을 보호하는 한편 치우의 몸에 상처를 새겼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창격.
개세적인 위력을 품고 무신을 강제한다.
그리드 또한 압도당했다.
‘거대한 풍채와 창의 위력이 맞물려서 직관적으로 강한 게 느껴져.’
장담컨대 이 순간 도미니언의 신격은 실시간으로 상승하고 있을 거다.
저 자태를 목격하고도 숭배하지 않을 사람은 드물 테니까.
쩌어어어어어엉!!
심지어 도미니언의 창은 무조건 다단히트 효과를 일으켰다.
표적과 충돌할 때마다 하늘에서 거대한 창의 형상이 떨어져 표적을 수차례 더 공격했다.
단, 치우가 표적이라는 점이 나쁘게 작용하고 있었다.
치우의 권능은 ‘순수한 대결’을 유도하는 것.
도미니언의 공격이 발생시키는 부가 효과는 치우를 상대로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창의 형상이 치우에게 닿아봤자 유리조각처럼 흩어졌다.
치우의 몸에 생긴 상처는 전부 ‘도미니언이 직접 휘두른 창’에 베이고, 찔리며 새겨진 것이었다.
‘괴물들.’
그리드가 확신했다.
언젠가 저들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선, 단순한 무력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몰매.
그래, 속된 말로 다구리를 넣어야 한다.
1대1로 싸워서 이길 만한 존재들이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이 더 강해져야하는 이유다.’
아무튼.
그리드는 몰아의 경지에 진입해서 상황에 집중했다.
치우와 신들의 싸움을 부추겨서 숨통이 트였다지만 고작 이 정도로 만족해선 안 됐다.
그리드를 무시한 채 저들끼리 싸우는 신들.
이런 상황을 또 언제 마주치겠는가?
두 번 다신 없을 기회다.
그리드는 이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컥...”
치우에게 중상을 입고 쓰러져있던 신이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 심장을 꿰뚫고 나온 검과, 그 검을 찔러 넣은 그리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면서다.
“어찌 이리... 파렴치한...”
“...!”
다른 신들 또한 동요했다.
치우도 마찬가지였다.
“해선 안 될 짓이다.”
치우가 한탄하듯 말했다.
책망하는 느낌은 아니다.
그리드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걱정하는 게 당연했다.
지금 그리드는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비겁한 짓을 벌였으니까.
다른 신들의 싸움을 부추기고 기회를 틈타 기습하지 않았나.
위대한 존재가 저지를 만한 짓거리가 아니었다.
“당신을 향한 숭배가 약해질 겁니다...!”
급기야 사리엘이 경고했다.
충언이다.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신들의 관심사가 다시금 그리드로부터 멀어졌다.
사도의 경고까지 들은 마당에 그리드가 또 같은 짓을 벌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두 번 다신 없을 기회다.’
이번 상황을 기회로 여기는 건 그리드뿐만이 아니었다.
도미니언 또한 치우를 고립시킨 이 상황을 둘도 없을 기회로 여겼다.
여신의 영향력이 통하지 않는 변수.
과거 한울을 피신시키는 치우를 막지 못했던 천상의 신들은 처음으로 무력감을 체험했다. 재앙이라는 개념을 학습했다. 치우가 건재한 이상 아스가르드는 완전할 수 없음을 알기에 치우에게 집착했다.
단, 제라툴은 예외였다.
그는 다른 신들과 달리 그리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예측을 빗나가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그리드의 특기라는 사실을 직접 체험해봤기 때문이다.
‘말을 들어먹을 놈이 아니다.’
역시나.
“크악!”
또 하나의 신이 치우에게 중상을 입은 즉시 그리드에게 참수 당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치명상을 입었단 말이다.
대가로 격이 크게 훼손되어 맥없이 천상으로 피신했다.
“...뭐하는 짓이지?”
도미니언이 더 이상 좌시하지 못했다.
묵직한 손짓으로 신들의 공세를 멈춘 뒤 그리드를 노려봤다.
“그대에게도 손해 아닌가?”
제아무리 유일한 신이라 한들 평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당장 치우가 증명하고 있었다.
치우의 생김새가 흐릿한 이유.
사람들에게 혹 숭배 받을까 저어해서였다.
그렇다.
신은 결국 인간의 영향을 받는다.
지옥 정화라는 무지막지한 위업을 쌓아올린 그리드라고 해서 오만해선 안 된단 말이다.
그가 벌이는 비겁한 짓들이 이 순간 만천하에 목격되고 있다.
그를 숭배해온 인간들이 의심하고 실망할 터였다.
안 그래도 이미 치우에게 패배한 신을 그리드가 참수해봤자 득보다 실이 컸다.
얻는 격은 미약하나 잃는 격은 클 것이었다.
실제로.
[환희의 신 파앙테를 패퇴시켰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그리드가 신을 참수한 대가로 얻은 것은 대량의 경험치 뿐이었다.
격은 조금도 오르지 않았고 도리어 경고창을 마주했다.
[당신의 비겁한 행동을 목격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이 당신에게 실망하고 신앙을 버릴 경우 당신의 격이 하락할 우려가 있습니다.]
“실망할 게 남았나?”
그리드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정말로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
무재를 타고난 대신 오성이 떨어지는가.
신들이 수군거릴 때였다.
“이미 수차례 실망시켜왔다...?”
그리드의 말을 곱씹어본 도미니언이 인간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리고 즉시 결론을 내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신들과 다르군. 치우와 다른 의미로 유일한 신이 될 만하다.”
그리드의 비열한 행각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인간들.
전혀 술렁이지 않는다.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드는 본래부터 비열한 존재였다는 듯이.
“사실 굳이 따지면 최근의 그리드가 이상한 거였지. 쟤가 언제부터 정정당당했다고.”
우선 템빨단원들.
그리드에게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도리어 본색을 드러낸 것을 반기는 눈치였다.
“약속조차 지키지 않는 놈이었다.”
사도 브라함이 증언했다.
‘그릇’을 만들어주겠노라는 약속을 어기고 파브라늄만 챙겨갔던 과거의 그리드를 떠올리면서다.
“본디 볼품없는 분이셨지.”
피아로의 증언이 뒤따랐고,
“크라우젤 공과 둘이서 협공을 가하셨지요...”
미르도 조심스레 한 마디 보탰다.
“소 몇 마리에 인색하게 굴었노라.”
네펠리나는 아주 신나서 떠들었다.
“...”
지크가 침묵으로 긍정했다.
심지어 그리드를 가장 사랑하는 메르세데스조차 그리드를 변호하지 못하고 시선을 외면했다.
“그, 그런...”
사리엘이 말문을 닫았다.
돌이켜보니 그리드가 공명정대한 존재는 아니었던 까닭이다.
다만 꼭 필요한 순간마다 위대한 모습을 보였을 뿐, 평소엔 도리어 쪼잔한 구석도 있었다.
아이린 황후를 만날 때마다 반드시 여성체가 되라고 으름장을 놓던 그리드의 모습을 떠올린 사리엘이 드디어 깨달았다.
“제, 제가 섬겨온 신께서 비열하고 속이 좁은 분이셨다니...!”
이래선 안 된다.
신이란 무결해야 옳다.
초조함에 휩싸인 사리엘이 문득 사람들의 면면을 보았다.
도시 길목마다 방진을 구축하고 있는 제국의 병사들과 기사들, 그리고 한 발 더 멀리서 숨죽인 채 현장을 지켜보고 있는 백성들.
하나 같이 표정이 담담했다.
그리드에게 실망한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오랫동안 그리드를 지켜봐온 사람들답게 그리드의 본질을 아는 것이다.
그럼에도 존경하고 숭배해왔다.
“아아...”
사리엘이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신이란, 반드시 무결할 필요가 없다.
도리어 결함이 있기에 공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애초에 결함은 죄가 아니다.
무결하지 못함이 죄라면, 그건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저 또한 제가 섬기는 신께서 손색이 있으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섣불리 실망하지 않겠나이다.”
나야말로 가장 부족한 존재다.
신의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활약해본 적이 없다.
이런 나를 신께선 온전히 받아들여주셨다.
나 역시 그래야 옳다...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사리엘이 망설임을 버렸다.
여러 대천사의 깃털이 달린 날개를 펼치며 그리드의 곁에 섰다.
“저도 비겁해지겠습니다.”
“...”
뭔가... 일이 예상대로 풀리고는 있는데 기분이 나쁘다...?
사도들의 반응을 보고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도미니언을 돌아봤다.
등장 이후부터 지금까지.
거대한 풍채에 걸맞게 쭉 근엄한 표정을 유지해온 그가 처음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사도들에게 그런 취급을 당하고도 존엄을 지킨 신은... 여태껏 없었다.”
“...”
칭찬인지 욕인지 모호해서 섣불리 반응하지 못하는 그리드였다.
그 침묵조차 도미니언에겐 특별하게 다가왔다.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개입하지 않는가. 스스로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 본받고 싶은 태도다.”
“...!”
천상의 신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여신의 아들.
아스가르드에서 가장 높은 존재 중 하나가 여신이 아닌 다른 대상을 본받고 싶다 말한 것이다.
곧바로 신벌이 떨어졌다.
꽈르르릉!!
명확한 형태를 지닌 신벌.
대해와도 같은 도미니언의 어깨를 짓뭉개며 강림한 그것은, 지옥에서 태어난 악신 아수라였다.
“반가운 얼굴들이 많군. 하지만 공교롭게도 회포를 나눌 여유는 없겠어. 쥬다르의 면박이 두렵거든.”
아수라의 본질은 투신이다.
조금도 지체 않고 치우에게 달려들었다.
말 그대로 개판 오 분 전.
무질서하고 난잡한 상황 속에서 그리드는 경거망동을 삼갔다.
불길한 변수 덩어리인 아수라를 이참에 처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으니까.
한데 의외로.
치우가 아수라를 압도하지 못했다.
1대1 상황에선 최초로 뒷걸음질 쳤다.
제라툴에 이어 천상의 신들과 도미니언을 연달아 상대하느라 지친 까닭도 있겠지만, 아수라의 무위가 워낙 출중했다.
놈을 노려보는 도미니언의 눈빛이 살벌했다.
‘아수라가 어지간히 싫은 눈치인데...?’
순간.
그리드와 도미니언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얽힌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시선 교환이다.
“지랄 나겠군.”
제라툴이 직감했다.
같은 시각.
‘아수라까지 참전했는가.’
템빨계의 제약이 풀리자 완전한 기감을 되찾은 메타트론은 라인하르트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어서 현장으로 돌아가 치우 토벌에 공헌 할 셈으로 18쌍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한데 그대로 날아오르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일전에 너의 목소리를 들었다. 스스로를 고룡에 비견하더군.]
주변이 검게 물들었다.
몹시 거대한 그림자가 태양을 가린 탓에 불쑥 밤이 찾아왔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확인해 볼까.]
스산하게 읊으며 거대한 2개의 눈을 치켜뜨는 존재.
광룡.
아니, 바알이 죽고 저주에서 해방 된 고룡 네바르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