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8권 - 11화
“투척이라. 패기 넘치는 말과 달리 태도에는 하자가 있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리드가 내린 무구의 비는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했다.
수만 개의 무기가 폭우처럼 쏟아진다 한들 치우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했다.
잠시 템빨계의 제약에서 벗어난 제라툴이 휘두른 역천.
빛살보다 빠르게 쏘아진 그것조차도 치우를 제대로 베지 못했었다.
그리드가 직접 휘두르는 검보다 느린 원거리 광역 스킬이 치우에게 상처를 입힐 거라고 기대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아니, 솔직히 기대야 했다.
무구의 비의 강점은 광역 스킬이라는 점에 있으니까.
다소 느릴지언정 범위로 상대를 압박한다.
피하고, 막는 것에 한계가 발생하도록 유도한단 말이다.
한데 치우는 붓을 칠하듯 유려하게 검을 한 번 휘두른 것으로 무구의 비의 공격 궤도를 모조리 빗나가게 만들었다.
‘느리고, 빠르고의 문제가 아니야.’
기술의 영역 또한 아니다.
‘권능.’
하지만 무슨 권능이지?
단순히 투사체에 면역하는 건가?
그렇게 해석하기엔 검을 휘둘러서 대응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한 순간 그리드의 시야에 가득 찼던 무구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각자의 주인에게 되돌아가는 그것들 틈새로 치우의 검이 비집고나온다.
마치 그리드가 만든 무구들 중 하나인 것처럼 몹시 자연스럽다. 풍경에 스며들었다고 표현해야 좋을 지경이었다.
“...?”
하여 그리드가 공격을 인식하기까지 찰나의 간극이 생겼다.
인공 감각들이 보내오는 경고가 무색하게도 잠시 대응하지 못했다.
쩌어어어어엉!!
바알을 레이드한 보람을 재차 느낀다.
마검의 잔흔이 그리드를 대신해서 치우의 검을 막아내 줬으니까.
그래, 분명히 막았다.
[5,129,1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도란의 반지>가 잃은 생명력의 절반을 즉시 회복합니다.]
“...?”
푸화하하하학!!
그리드의 가슴에서 선혈이 솟구쳤다.
마검의 잔흔을 ‘통과’한 치우의 검에 베인 여파다.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나 느껴온 고통이 불시에 엄습하며 그리드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입은 피해를 되돌려주려던 그가 멈칫했다.
“그대에게 자격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마검을 환영처럼 통과해버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세계를 납득시키지 못해. 나의 자격을 빼앗기 위해선 그대가 직접 휘두른 검으로 나의 목을 베어야할 필요가 있지.”
‘이거 설마.’
그리드가 깨달았다.
치우의 권능은 아마도 ‘순수한 대결’을 유도하는 것이다.
치우가 다른 사람들의 스킬과 마법을 손도 안 대고 무력화시킨 것도, 쏟아지는 무구의 비를 간단히 돌파하고 마검의 잔흔을 무용지물로 만든 것도.
치우의 권능이 그런 상황들을 ‘싸움’으로 인정하지 않아서였다.
“물론 저것을 활용하는 발상은 좋았다.”
치우의 시선이 저 멀리 있는 제라툴을 가리켰다.
제라툴의 모습은 처참했다.
잘려나간 오른 팔이 쥐고 있는 역천을 짐승처럼 입으로 물어 뽑고 있었다. 그리고 5미터 가량을 엉금엉금 기어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피투성이다.
다시금 템빨계의 제약을 받게 된 이후, 그는 치우에게 완전히 압도당해버렸다.
하지만 초라하지 않다.
제라툴은 필시 최선을 다해서 싸웠고, 치우의 몸에 적게나마 상처를 새겼다.
땅거미처럼 길게 늘어진 치우의 묵색 도포 곳곳이 찢겨지고 뜯겨나간 이유다.
“레베카가 빚은 무신. 그대와 충돌하는 모습을 보았을 땐 무가치한 불량품이라고 판단했으나 실상은 다르군. 하지만 부족해. 그대의 대행자로 삼기엔 손색이 있다.”
“...”
제라툴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템빨계의 제약을 받는 탓에 잘린 팔의 재생이 느렸고, 부서진 무릎 또한 여전히 덜그럭거리고 있었으나 시간을 지체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아마도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이다.
치우와 싸우기 위해선 직접 부딪치는 수밖에 없다는 걸.
그리드에게 역천을 빼앗기기 전에 어떻게든 결판을 지으려는 내색이었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건가.”
다가오는 제라툴을 잠자코 지켜보는 그리드의 태도가 치우를 실망시켰다.
눈살을 찌푸리는 그를 보면서 그리드는 새삼 생각했다.
‘레베카도, 야탄도 마찬가지였지.’
높은 신들에겐 도리어 인간미가 느껴진다.
표정을 통해 표출하는 감정들이 사람 같아서 이해하기 쉬웠다.
과거에 직접 보았던 레베카의 인자한 미소와 야탄의 씁쓸한 표정, 그리고 눈앞 치우의 일그러진 얼굴을 통해서 그들이 ‘완전’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상기한 그리드가 심호흡했다.
일단 초조해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말하긴 다소 황당하지만.
치우는 적이 아니다.
거리에 남은 파괴의 흔적들이 증명하고 있다.
치우에게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무너진 건물들조차 인기척이 전혀 없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오직 그리드와 제라툴만이 치우의 검에 베였을 뿐이다.
‘이건 단지 시험에 불과해.’
치우의 입장에선 목숨이 걸린 시험이었지만 그리드 입장에선 불쑥 찾아온 쪽지 시험에 불과했다.
당황할 필요 없다.
반드시 최선의 결과를 노리지 않아도 대세에 지장은 없다.
‘...그래도 최선을 떠올려 보자.’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한 그리드가 한 가지 전제를 깔았다.
우선, 싸움을 피할 방법은 없다.
치우는 그리드가 시험을 치를 자격을 지녔다고 판단하고 있다.
승리, 혹은 패배라는 결과를 남겨야 시험은 끝난다.
‘그냥 처박고 죽으면 끝날 일이다.’
패배하고 실패해도 큰 페널티를 입을 것 같진 않았다.
실제로 이 사건은 퀘스트 판정도 못 받고 있었다.
실패할 경우 어떤 페널티가 발생한다는 명시가 없었다.
끽해야 치우와의 호감도가 떨어지는 게 전부 아닐까?
‘그리고 치우를 상대론 호감도가 아무런 영향도 없어.’
다만 소멸을 바랄 뿐인 특수한 존재.
호감도를 쌓아봤자 죽일 기회를 한 번 더 얻는 게 고작일 거다.
하지만 그리드는 이 상황을 단순하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흔치 않은 상황이다.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 옳다.
그게 최선이라는 거다.
‘...될까?’
그리드가 어떤 생각을 떠올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짧았다.
이미 너무 많은 힌트가 존재해준 덕분에 머리 회전이 수월했다.
힐끔.
그리드의 시선이 라우엘을 좇는다.
-차원 제약을 풀 거야.
-뜻대로 하소서.
그리드가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 듣는 라우엘이다.
그리드의 의도를 즉시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태도에 가까웠다.
그걸로 충분했다.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확신한 그리드가 차원 시스템에 개입했다.
‘차원 효과의 작동을 멈춘다.’
템빨계의 차원 효과는 타 차원에서 온 침입자를 억압하는 것이다.
치우를 상대로는 전혀 통하지 않고 있었지만, 본래 템빨계 소속이 아닌 신들은 템빨계에서 온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지상의 안전을 책임져온 안전장치였다.
한데 이 순간.
[템빨계의 차원 효과가 정지합니다.]
[침입자가 템빨계에서 얻는 페널티가 사라집니다.]
안전장치가 풀려버렸다.
가장 먼저 제라툴이 느꼈다.
재차 치우에게 도전하고 있던 그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네놈, 미친 거냐...!”
쩌엉!
치우를 떨쳐낸 제라툴이 하늘을 올려보았다.
떨리는 그의 두 눈이 찬란한 광채를 머금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에 물든 것이다.
“저건...”
“...장관이군.”
천상의 신들이 강림한다.
도미니언을 필두로 삼은 수백의 신.
과거.
제라툴 역시 신들을 이끌고 지상을 방문한 전력이 있지만 그때와는 행렬의 규모가 달랐다.
“기이하군. 어째서 그대가 얻은 기회를 다른 신들에게 양도하는 거지?”
완전히 압도당한 사람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치우의 의문이 울려 퍼졌다.
이 상황을 기회라고 표현하는 태도가 말해주고 있다.
그는, 정말로 그리드에게 아무런 악의가 없었다.
그리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제겐 아직 당신과 싸워서 이길 능력이 없으니까요.”
“...뭐든 처음은 힘든 법이지.”
반드시 이기지 않아도 좋았건만.
속내를 삼킨 치우가 그리드를 외면했다.
사실은 그도 내심 알고 있었다.
그리드가 단번에 자신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단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이번 시련을 통해 배움을 얻으면 다음번에는, 또 그 다음번에는 점차 달라질 거라고 봤다.
괜한 기대였다.
순순히 포기해버린 그리드의 태도가 치우를 실망시켰다.
‘이건 내 잘못이다. 동경을 얻어선 안 됐다.’
다만 그리드를 원망하진 않는다.
자책하는 치우의 관심사는 이제 도미니언에게 향했다.
전쟁의 신.
도미니언은 거느린 무리가 많을수록 급격히 강해진다.
싸움의 규모가 커질수록 치우를 상대로 상성상 우위를 점하는 게 가능했다.
어디까지나 이론이다.
과거의 전쟁에서 도미니언은 끝내 치우를 넘어서지 못했다.
또한 설령 넘어설지언정.
그는 치우를 죽이지 못한다.
무신의 자격은 다수의 적에게 패배한다고 해서 훼손되는 게 아니기에.
“치우... 순순히 오라를 받아라. 그대를 여신이 계신 곳으로 호송하겠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지상에 강림하였습니다.]
[전쟁의 신 ‘도미니언’이 만인의 두려움과 존경을 삽니다.]
지상에 강림한 신들은 하나하나가 대단한 존재감을 발휘했지만 그중에서도 도미니언이 으뜸이었다.
지상까지 드리운 황금구름 너머에 존재하는 대군의 그림자.
모습을 감춘 수천수만의 병사가 도미니언의 말과 손짓에 일일이 반응하며 사람들을 숨죽이게 만들었다.
그리드와 라우엘을 제외한 사람들 전부가 불안감에 시달렸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외세가 제국의 심장을 발을 들인 상황이었으니.
“침착하라.”
[병사들의 혼란이 잦아듭니다.]
[병사들의 사기가 최대치를 유지합니다.]
전장 후방.
황태자 로드가 술렁이는 병사들을 진정시켰다.
저 멀리 계시는 아버지의 거대한 등을 향해 무한한 신뢰와 충절을 보낸다.
미약하게나마 치우의 흥미를 끌었다.
“혈통이라는 개념은 종종 무시하기 힘든 작용을 일으키지. 하지만 늘 그렇진 않아. 대체적으로 뛰어난 부모의 자식일수록 주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더군.”
“치우... 흡사 인간처럼 말하는군.”
“오랜 세월동안 인간들을 지켜봐온 영향일 테지.”
한울의 약속을 믿고 환국으로 이주한 이후.
치우는 인간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되 꾸준히 지켜봤다.
신들을 증오할 만한 환경에서 자라온 저들 중 누군가가 신살의 자격을 얻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기대감에서였다.
그리드를 만난 후엔 도리어 더 깊이 관찰했다.
그리드가 인간들과 더불어 살아갔으니까.
“아무튼 그대 또한 같다. 여전히 레베카보다 못하군.”
“여신과 비견 될 존재는 없다.”
대화는 무의미했다.
만약 그들의 대화에 의미가 있었다면 그들의 관계는 진즉 종지부를 찍었을 것이다.
꽈아아아앙!!
도미니언의 손짓이 신호가 됐다.
수십의 신이 불시에 치우를 덮쳤다.
온갖 권능이 상상해본 적 없는 형태로 작용하며 도시를 파괴했다.
사도들과 템빨단원들, 그리고 템빨계의 신들이 바빠졌다.
파괴의 범위를 축소하기 위해 혈안이 됐다.
그리드는 잠자코 상황을 지켜봤다.
아스가르드의 신들과 서로 개입하지 않기로 암묵적인 룰을 만든 느낌.
템빨계의 제약을 푼 시점부터 차라리 협력자에 가까워진 것이다.
“이 상태론 지상이 초토화되고 말 거다. 뻔히 알았을 텐데? 도대체 무슨 속셈이냐?”
“...”
그리드는 연신 꾸짖는 제라툴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역천을 되돌려 받을 뿐이었다.
“큭...”
치우의 무력이 빛나고 있었다.
상대방의 강함과 비례해서 강력해지는 듯했다.
일검에 권능을 파괴당한 신들이 큰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급기야 어떤 신은 쓰러졌다.
바로 그때 그리드가 움직였다.
벼락처럼 쏘아지더니 쓰러진 신을 참수했다.
신들의 전쟁.
한없이 성스러워야 할 성전에서 상스러운 일이 발생한 것이다.
“...?”
“...?”
적막.
상황을 섣불리 이해하지 못하는 신들의 시선을 슬그머니 외면한 그리드가 라우엘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이거 맞지?
-이이제이. 훌륭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