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783화 (1,782/1,794)

템빨 88권 - 10화

치우로 추정되는 존재가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가운데.

불쑥 난입한 제라툴이 그리드를 등진 채 싸우기 시작했다.

내가 무신이다.

나야말로 무신이다.

봉두난발을 한 채 연신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꼴을 봐선 필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얼핏 그리드를 보호하는 형태로 싸우는 태도부터가 기이했다.

제라툴은 여태껏 몇 번이나 그리드를 위협했던 존재니까.

템빨단원들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아야한다고 판단했다.

치우로 추정되는 존재와 제라툴을 동시에 경계하며 그리드를 구출할 기회를 엿봤다.

바로 그때.

“제라툴!”

그리드가 제라툴에게 검을 던졌다.

정확히는 건넸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제라툴이 아군이란 의미였다.

섣불리 믿기지 않았다.

그리드가 잠시 귀신에 홀린 게 아닐까 의심했을 지경이다.

하지만 이내 납득했다.

악룡 번헬리어조차 동료로 삼은 그리드 아닌가.

귀신에 홀린 건 그리드가 아니라 제라툴일 확률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뭐가 어찌됐든 제라툴을 아군으로 인식하게 됐단 의미다.

“웨폰 인챈트! 정화!”

루비가 제라툴을 보조하기 시작했다.

온갖 버프 마법을 부여하는 한편 지혈을 시도했다. 동시에 힐을 퍼부었다.

효과는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장막.

그리드와 제라툴, 그리고 치우를 둘러싸고 있는 그것이 외부에서의 간섭을 모조리 차단했기 때문이다.

“내 마법도 안 통한다.”

브라함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신 치우.

태초신들조차 어쩌지 못했다는 유일한 신.

압도적이다.

그 어떤 개념보다 자신의 뜻이 우선시 되도록 만드는 힘을 지녔다.

놈을 상대로 펼치는 마법은 결코 기적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아니면 달리 방도가 있나? 무무드.’

브라함은 제라툴에게 묻어있는 ‘마력의 기척’에 주목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질투와 죄악감 따위의 부끄러운 감정들을 느끼게 만들었던 존재.

마법과 관련해선 역대 최강의 재능을 타고났던 인간, 무무드.

그의 마력은 독보적이었다.

몹시 신비롭고 강렬해서 자연스럽게 사로잡히고 만다.

그 기척을, 브라함이 잊었을 리 만무하다.

브라함은 제라툴이 지상에 난입한 배경에 무무드의 개입이 있었다고 확신했다.

“...?”

상황을 살피던 브라함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제라툴에게 묻어있는 마력의 기척.

그것은 한낱 잔재에 불과했다.

심지어 제라툴에게 직접적인 마법을 행사한 흔적조차 아니었다.

아마도 제라툴이 갇혀있던 감옥을 무무드의 마법이 파괴했고, 그 과정에서 어렴풋이 남은 마력의 기척이 제라툴에게 묻어난 게 아닐까.

고작 그 정도의 추측을 하게 만들 정도로 무무드의 마력 잔재는 미약했다.

한데 마법의 형태를 갖춰나가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표적을 지정하고 뭔가를 시도했다.

표적은 유페미나였다.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마력이 당신을 관조합니다.]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당신의 레벨과 스탯, 그리고 당신이 습득하고 있는 마법 목록을 열람합니다.]

“...!”

불시에 자신을 노출하게 된 유페미나.

몹시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녀는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파악했다.

자신을 허락 없이 관조할 만한 대상은 상식적으로 무무드밖에 없었으니까.

‘무무드. 내 마법의 근원... 필시 천사로 존재하고 있을 거랬지. 언젠가 만나게 되면 엄청난 난적이 되겠네.’

최근.

유페미나는 엄청난 피로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남들과 달리 탑 콘텐츠를 즐길 겨를도 없이 베티와 아그너스의 행적을 쫓는데 혈안이 됐던 까닭이다.

전 바알의 계약자들.

바알이 죽은 뒤로 행적이 묘연해진 그들이 어딘가에 무사히 살아있을 거라고 유페미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리드의 생각 또한 그녀와 일치했다.

바알이 죽는 순간 함께 소멸할 거라고 했던 베티.

그녀의 죽음을 그 누구도 확인하지 못했으니까.

그녀는 바알이 그리드에게 패배하기 직전에 아그너스와 함께 사라졌다.

그리드는 그 부분에 희망을 걸었다.

과거 아그너스를 쫓아다닌 이력이 있는 유페미나에게 두 사람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하여 온 대륙을 떠돌던 유페미나는 피로가 누적 된 상태로 라인하르트에 귀환했다.

위급 상황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다.

그 결과가 이거다.

무무드에게 정체를 간파당하고 낱낱이 해부됐다.

이게 나중에 어떤 스노우 볼로 작용할지 몰라 걱정이 됐다.

내심 불안해하는 그녀에게 어느새 다가온 브라함이 속삭였다.

“걱정할 필요 없다. 놈의 상대는 내가 될 테니까.”

파창...!

브라함의 마력이 유페미나를 해부하고 있는 무무드의 마법을 파괴시켰고,

“...흐음.”

천상의 천사가 감탄했다.

무지개처럼 다양한 빛깔을 품은 고리가 한 순간 느낌표를 만들 정도였다.

‘지혜와 마법의 신인가.’

그리드처럼 지상에서 태어난 신, 브라함.

무려 2개의 이명을 지녔다.

그래선지 자꾸 흥미가 생기던 차에 실력을 제대로 확인하게 됐다.

차원과 차원.

물리적으로 가늠하기 힘든 거리에서 은밀하게 작동시킨 마법을 즉시 파악하고 파괴할 줄이야.

언젠가 실력을 겨룰 기회가 온다면 제법 공부가 될 듯하다.

“템빨계의 제약이 약해졌네요?”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천사가 표정을 굳혔다.

방해꾼 때문이다.

금전의 신 베니스를 우연히 마주쳤다.

“천사 무무드. 쥬다르 신이 당신을 비호한 이유가 있었군요.”

마법이란 무가치한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힘이다...

제라툴을 감옥에서 멋대로 풀어놓은 무무드가 신들 앞에서 했던 주장이다.

그가 말하는 무가치한 것이란 당연히 제라툴을 뜻했다.

그대로 놔뒀다면 영원의 감옥에서 무의미하게 썩어갔을 존재.

하지만 무무드의 마법이 감옥의 자물쇠를 푼 순간 제라툴에게도 가치가 생겼다.

지금 막 템빨계의 제약이 약해졌음이 증거다.

유일신 그리드.

인연이라는 것에 굉장히 집착한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설마 제라툴을 템빨계의 손님으로 맞이할 줄이야?

여기서 제라툴이 조금만 더 선전해준다면.

치우의 저력마저 밝힐 수 있겠지.

“여전히 지옥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는 대천사장보다 당신이 몇 배는 더 유능하네요. 이러다가 언젠간 당신이 대천사장이 되는 거 아닌가요?”

“관심 없습니다.”

천사 무무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설령 리파엘 님께서 탄핵 당한다 한들 메타트론 님께서 지위를 되찾는 식으로 빈자리를 채우시겠죠.”

메타트론.

그는 치우에게 단 한 번의 공격을 허용한 여파로 전장에서 이탈하는 추태를 보였다.

현재 파악되는 그의 위치는 극동.

라인하르트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다.

하지만 무무드는 메타트론의 저력을 간파하고 있었다.

어떤 변수를 마련하기 위해 잠시 물러난 것으로 추측했다.

“헤에, 내가 봤을 땐 전 대천사장 역시 썩 믿음직하진 않은데.”

“필요 이상의 조롱.”

“...?”

“단순한 불신을 넘어 분란을 조장하려는 의도로 해석되는군요. 베니스 님께선 템빨계에 소속되길 희망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혹시 이미...”

“한낱 천사가 신을 의심하는 건가요?”

정곡을 찔린 베니스가 역으로 성을 냈다.

태연한척 노력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무무드가 고개를 저었다.

“뭐가 됐든 상관없겠군요. 당신이 어떤 의도를 품든 대세에는 지장이 없을 테니까.”

“...”

전생에도, 현생에도.

무무드는 한없이 선에 가까운 존재였다.

하지만 재능 있는 자 특유의 독선과 오만을 지녔다.

과거의 브라함이 그를 질투할 수밖에 없던 원인 중 하나다.

***

“멋진 해석이다.”

역천.

그리드의 역작이다.

그리드가 쌓아온 지식과 기술, 인연과 의지가 담겼다.

사방신 따위의 오물이 섞이지도 않았다.

순수하게 그리드를 근원으로 삼는 힘.

즉, 치우를 위협하는 유일한 개념이란 말이다.

그것을 굳이 그리드가 직접 다룰 필요는 없었다.

“그간 그대가 만들어온 무수히 많은 작품들 하나하나가 나를 끌어내릴 자격이고, 나를 소멸시킬 무기인 거군.”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속에 멍하니 선 사람처럼.

초점이 흐릿하던 치우의 두 눈이 명확한 초점을 찾았다.

촤르르륵...

외부의 간섭을 허락지 않던 무색의 장막이 걷힌다.

그리드, 역천, 제라툴.

또한 그리드가 만든 작품을 소유하고 있는 사도들과 템빨단원들을 모조리 시야에 담은 그의 양손이 축 늘어졌다.

왼 손에는 묵색의 칼집이, 오른 손에는 세월의 무게를 직격으로 맞아 녹슨 장검이 쥐어진 채 초월적인 예기를 품기 시작했다.

“오라.”

바알, 아수라, 대별왕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들과 싸우고 이긴 끝에 지옥을 해방시킨 집단.

그리드가 이끄는 최강의 템빨단을 향해서, 치우는 선언했다.

위축되기는커녕 한 수 양보하는 듯한 태도.

이쯤 되자 템빨단원들이 분기충천했다.

숫제 도발에 넘어간 사람들처럼 치우를 표적으로 삼아 스킬을 전개했다.

그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쿠궁...!

“...!”

“...!?”

흐름상 선두에 서야 옳은 제라툴.

그가 애꿎은 방향으로 검을 휘두른 것이다.

멀찍이 보이는 템빨신전을 향해서였다.

강력한 검기가 신전 앞에 우뚝 선 그리드의 신상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미친?”

“신용해선 안 됐다니까...!”

갑자기 뭔 지랄이란 말인가?

특히 데미안과 후로이가 격노했다.

치우에게 달려가다 말고 방향을 비틀어 제라툴을 포위했다.

그리드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오르고 있었다.

[‘제라툴’이 당신의 신상을 파괴하고 신성을 모독했습니다. 템빨계가 그를 침입자로 규정합니다.]

그리드가 제라툴을 손님으로 받아들였던 이유는 템빨계의 제약에서 해방시켜주기 위해서였다.

한데 스스로 다시 제약을 떠안았다.

왜?

당황하는 그리드의 뇌리로 제라툴의 의념이 흘러들어왔다.

-눈앞의 상대에게 눈이 멀어 외부의 적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마라.

꽈차차차차창!!

데미안과 후로이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몸을 날린 제라툴이 치우와 충돌했다.

역시나 선두에 선 것이다.

단, 제약을 떠안은 채였다.

힘과 속도, 심지어 격까지.

제라툴은 치우와 온전히 대적하지 못했다. 검을 교환할 때마다 몸에 상처를 늘려갔다.

하지만 역천이 빛을 발했다.

제라툴이 수십 번을 베인 대가로 치우를 한 번 벨 때면, 치우 역시 붉은 피를 흘렸다.

-이래 뵈도 내 소속은 여전히 아스가르드다. 네가 내 제약을 풀면 아스가르드에 있는 놈들 역시 템빨계의 제약에서 벗어날 빌미를 얻는단 말이다.

“...왜.”

급기야 허물어지는 제라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어째서 나를 배려하는 거지?”

그리드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난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믿고 동경해온 상대에게 위협을 당하고, 역으로 혐오해온 대상에게 도움을 받고 있는 상황.

안 그래도 이 상황이 혼란스럽던 그리드는 제라툴의 미묘한 태도가 몹시 거슬렸다.

답답해서 무슨 영문인지 알고 싶었다.

제라툴이 콧방귀 뀌었다.

-착각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네놈은 나의 의도를 호의로 해석하지 마라. 나는 단지 네놈보다 천상에서 거들먹거리는 놈들이 더 싫을 뿐이며, 순전히 나를 위해 싸울 뿐이다.

영원의 감옥에서도.

조금 전 이곳에 난입했을 때도.

제라툴의 태도는 한결 같았다.

마치 그리드가 만든 보검처럼 꺾이지 않는다.

그리드는 매료되었다.

본능적으로 이끌렸다.

“나, 당신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아.”

-뭐? 미친놈이...?

제라툴이 극도로 혐오하는 반응을 보였지만 그리드는 개의치 않았다.

“원덕구.”

치우를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동료들의 무기를 모조리 회수했다.

간신히 곧추세운 역천으로 치우의 검을 막아내고 있는 제라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한 채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혐오해온 대상에게 호감을 품었듯, 동경해온 대상에게 적의를 품은 채다.

“죽고 싶으면 곱게 죽어.”

쏴아아아아아...

비가 내린다.

금속의 비다.

하나하나가 역천처럼 그리드를 근원으로 삼는 힘이었다.

치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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