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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82화 (1,781/1,794)

템빨 88권 - 9화

아스가르드.

거대한 대전에 모인 신들의 관심사는 오직 치우였다.

영원의 감옥에 있어야할 제라툴이 현장에 난입하기 전까진 그랬다.

무슨 수로 감옥에서 탈출한 거지?

이번만큼은 그리드의 소행이 아니다.

그리드는 지상에서 치우와 마주보고 있던 상황이었으니까.

“고하라.”

즉시 한 명의 천사를 소집한 신들이 추궁했다.

“어째서 자물쇠를 열었지?”

“한낱 천사에게 어떤 권한이 있어 죄수를 풀어놓았느냔 말이다.”

신들이 범인으로 지목한 천사.

유독 가녀린 그는 기이한 구석이 있었다.

머리 위에 달린 고리가 광채를 발하지 않고 시시각각 색을 바꿨다. 색이 바뀔 때마다 풍기는 기운도 달라져서 하나이되 여럿 같았다.

잠자코 끌려와 신들의 추궁을 듣던 그가 고개를 조아린 채 답했다.

“마법이란, 무가치한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힘입니다.”

딱 거기까지였다.

이걸로 대답은 충분하다는 듯이.

천사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일부 신들이 술렁인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제대로 대답하라고 고성을 내지르는 신마저 있었다.

‘진심인가.’

천사가 실망하는 순간이었다.

“나의 생각 또한 너와 일치한다.”

이 모든 상황에 일체 관심도 없다는 듯이 구석에 잠자코 있던 쥬다르가 말했다.

지혜의 신.

그는 오만한 천사의 심상을 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였다.

“잘했다.”

쥬다르의 치하.

그 드문 태도가 좌중을 침묵시켰다.

다른 신들은 더 이상 천사에게 죄를 묻지 못했다.

***

단전까지 내려오는 흰 수염과 벼락처럼 너울거리는 백발.

눈매가 치솟을수록 흐릿해지는 눈동자로 인해 백광을 내뿜는 눈.

단단하고 거대한 풍채를 지닌 제라툴의 생김새는 여러모로 압도적이다.

사람들이 상상해온 무신의 형상 그 자체였다.

한데 지금은 달랐다.

철컹철컹.

도대체 얼마나 무거운 걸까.

무게가 짐작조차 안 되는 사슬에 사지를 구속당한 제라툴의 모습은 과거와 달리 초라했다.

봉두난발에 가까운 두발과 빗질 안 된 수염.

잔뜩 구겨진 먼지투성이의 무복.

심지어 상의는 없어 반쯤 나신이다.

무엇보다 양손과 양발에 채워진 족쇄가 그의 신세가 얼마나 영락했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제라툴의 표정은 과거와 같았다.

오직 자신만이 특별하다는 듯이 오만하다.

“당신... 무슨 수로 감옥에서 탈출한 거지?”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잠시 당황하던 그리드가 질문했다.

죄수의 신분을 벗어난 건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니다.

제라툴의 생김새는 영원의 감옥에서 만났을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제라툴은 그리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여전히 치우를 노려본 채로 대답했다.

“운명에 이끌려왔을 뿐이다.”

허세다.

진실은 달랐다.

무무드였나?

인간 태생임에도 대천사 후보로 거론되는 천사.

제라툴은 놈이 무슨 의도로 감옥의 자물쇠를 풀어줬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쓰레기를 배출하는 행위에 가까웠지.’

놈은 알고 있었다.

내가 현재 상황에서 자유를 얻을 경우 무엇에 집착하게 될지.

놈의 의도는 분명했다.

‘나를 통해 치우의 무력을 짐작하는 한편.’

나라는 골칫덩이가 치우에게 소각되길 바랐겠지.

“...큭큭.”

촤르르륵.

똬리를 튼 뱀마냥 제라툴의 발밑에 얽혀있던 쇠사슬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제라툴이 기수식을 취한 여파다.

양 손을 비운 기수식.

자신을 속박하는 쇠사슬을 무기로 삼겠다는 의도가 담겨있었다.

“진정한 무신의 힘을 목도하고 전율하라.”

제라툴의 말과 행동은 하나하나가 진심이었다.

그는 당연히 치우가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격 자체가 자신을 압도하고 있음을 실시간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축되지 않는다.

격의 차이?

중요하지 않다.

과거, 나보다 격이 낮았던 그리드가 나를 쓰러뜨림으로써 증명했다.

게다가 나는 충분한 수양을 쌓았다.

영원의 감옥에 갇힌 상태로 육체와 정신을 연마해왔다.

장담한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초월한다...

“제라툴 당신, 죽을 셈입니까?”

질문에는 대답도 않고 혼자 중얼거리는 제라툴에게 그리드가 다급히 물었다.

우습게도 그는 제라툴을 걱정하고 있었다.

적잖은 인연을 쌓은 까닭이다.

물론.

그리드 입장에서 제라툴은 악당에 가까운 존재다.

재능 있는 인간들을 비급으로 홀려 노예처럼 부렸고, 로드를 비롯한 소중한 사람들을 해치려 한 전력까지 있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해치지 못했다.

또한 최근엔 영원의 감옥에서 그리드를 도와줬다.

제라툴 덕분에 칸과 헥세타이아를 무사히 구출할 수 있었다.

순수한 호의가 아니었음은 안다.

제라툴은 다만 그리드보다 리파엘을 더 증오했었을 뿐이다.

알고 있지만... 아무튼 인연 아닌가?

제라툴은 이미 충분한 죗값을 치렀다.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리드에게 패배한 대가로 격을 잃고 죄수의 신분으로 전락했다.

제라툴을 향한 그리드의 원한은 희미해진지 오래였다.

한데 이 순간 또 도움을 받게 생겼다.

일방적인 호의로 다가왔다.

무겁게 가라앉은 그리드의 마음을 읽은 제라툴이 눈살을 구겼다.

“같잖다. 착각하지 마라.”

신력을 크게 잃은 제라툴.

신성으로 무기를 빚는 일조차 못하게 된 그는, 그러므로 쇠사슬을 무기로 삼는 기술을 연마했다.

몹시 초라해 보이는 기술이지만 제라툴은 도리어 당당했다.

노력으로 연마한 기술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그리드를 통해서 배웠다.

“나는 나를 위해서 싸울 뿐이다. 이에 대해 네놈이 어떤 감흥을 느낄 자격은 없다.”

제라툴은 더 이상의 대화를 원치 않았다.

자신을 마주하고도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는 치우의 낯짝을 당장 박살내기 위해 곧바로 몸을 날렸다.

무신 대 무신의 격돌.

경천동지의 대사건이었다.

사도들과 템빨단원들이 숨을 죽였다.

단, 한 발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검성 뮐러는 앞으로 펼쳐질 전개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힘의 차이는 명확하다.’

그리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제라툴의 패배를 당연하게 예측했고, 결과는 그들의 예상보다 처참했다.

쿵.

치우는 검을 뽑지도 않았다.

발로 지면을 밟는 단순한 동작으로 제라툴의 돌진력을 억제하는 한편, 휘장을 펼치듯 느긋한 손동작으로 제라툴의 목덜미를 낚아채 지면에 꽂아버렸다.

“레베카가 빚은 작품 중에 그나마 봐줄만한 것은 이 땅과 세계수, 그리고 쥬다르 정도라고 생각한다.”

치우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제라툴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경악한 표정으로 움찔거리는 제라툴에겐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그리드를 바라봤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그대를 탄생시킨 이 땅. 그대라는 존재가 지상의 가치를 높인 셈이지.”

기다려주는 건 여기까지다.

치우가 제라툴의 목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뿌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현장에 적막을 불러왔다.

인간의 형상을 한 무언가.

그리드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겐 제대로 인식조차 되지 않는 무신 치우의 무력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검을 뽑아 그리드에게 겨누는 동작만으로 절망이라는 단어를 세계에 새겨버렸다.

그때였다.

철컥!

치우의 검 끝이 앞으로 비스듬히 기울었다.

순식간에 검날을 감싼 쇠사슬에 당겨진 여파였다.

그리드가 만든 결과다.

[당신의 권한으로 ‘제라툴’을 침입자가 아닌 손님으로 규정합니다.]

템빨계의 제약.

제라툴이 지상에 강림한 시점부터 그를 억압했던 차원 제약이 소멸했다.

그리드가 영원의 감옥에서 만났을 때처럼.

이 순간의 제라툴은 온전했다.

무신으로 군림했던 시절과 비교하면 분명한 하자가 있겠지만.

적어도 그리드가 기억하는 ‘가장 강력한 상태의 제라툴’은 바로 지금이다.

“내가...!”

콰드드득!!

치우의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그를 잡아당기며 허리를 세우는 제라툴과 처음으로 시선을 마주하게 됐다.

“무신이다...!!”

꽈아아아아앙!!

소음의 형태가 복잡했다.

몸을 일으킨 제라툴이 쇠사슬을 활용하는 방법이 워낙 다양했던 까닭이다.

그의 손목과 발목에서부터 이어지는 쇠사슬은 무척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치우의 검과 몸을 묶고, 때리고, 집어던지는 행위가 제라툴이 뜻하는 즉시 행해지길 반복했다.

“저 정도였나...?”

뮐러가 감탄했다.

쇠사슬을 활용하는 기술의 깊이와 쾌속함.

양면에서 흠잡을 곳이 없다.

덕분에 기술이 연계될수록 위력이 무한히 증폭한다...

제라툴의 예상치 못한 선전에 현혹된 뮐러가 무신이라는 이름을 되새겨보는 순간이었다.

“하찮지 않구나.”

쇠사슬에 사지를 구속당한 채 목을 조여져가던 치우가 입을 열었다.

그가 말하는 대상, 처음으로 그리드가 아닌 제라툴이었다.

“훌륭하다.”

치우가 순순히 인정하는 이유는, 제라툴의 탄생 배경을 상기해서다.

레베카가 나를 대체하기 위해 만든 존재.

필시 심혈을 기울인 역작이란 뜻이다.

훌륭해야 옳다.

“다만 부족해.”

콰차차차차차차차차창!!

치우를 옥죄던 쇠사슬이 일제히 산산조각 났다.

덕분에 치우는 물론이고 제라툴 역시 구속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고 말았지만, 이 상황에서 그건 아무런 이점도 아니었다.

쇠사슬을 무기로 삼기 위해 연마해온 제라툴 입장에선 무기를 잃은 셈이니까.

“자격은 여전히 그리드에게 있다.”

스아악.

무색의 검기가 솟구친다.

무기를 잃고 빈손이 된 제라툴이 저항하기엔 무척 강맹한 위력이 담겼다.

이건, 무슨 수를 써도 베인다.

직감한 제라툴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또 다시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패배를 겪고 재차 약해질 미래를 떠올렸다.

지금 막 정해진 운명이다.

유일한 신이 부여한 운명.

그 거역하지 못할 운명을,

“제라툴!”

그리드가 비틀어버렸다.

그가 다급히 집어던진 역천.

치우가 누차 말했던 ‘그리드를 근원으로 삼는 힘’이 제라툴의 손에 쥐어진 시점에서, 유일한 신이 부여한 운명은 더 이상 강제성을 띄지 못했다.

쩌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

소멸을 염원해온 치우.

아득히 먼 이상을 꿈꾸며 빛을 잃어온 그의 두 눈이 영겁의 세월을 지나 활기를 되찾았다.

무신의 자격으로 그리드의 역천을 온전하게 휘두른 제라툴에 의해서다.

“...”

제라툴의 표정은 복잡미묘했다.

그리드가 던져준 검 덕분에 죽음을 모면한 상황.

이래서야 ‘그리드의 무신’을 자처하는 셈이지 않나 싶어서였다.

새로운 족쇄를 찬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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