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8권 - 8화
무신 치우.
신을 존경하지도, 존중하지도 않는 지크를 저절로 고개 숙이게 만들었던 존재다.
첫인상부터 강렬했던 그는 그리드에게도 각별하게 다가왔다.
양반이 아닌 그리드에게 시련을 치를 자격을 주고, 끝내 시련을 돌파하자 엄청난 호의를 베풀었으니까.
결과적으로 그리드는 치우 덕분에 잠재력을 개방하고 몇 번이나 한계를 극복했다.
“그대를 지켜봐왔다.”
애초에 눈빛에 깃든 감정이라는 게 있다.
그리드를 바라보는 치우의 눈빛은 한없이 따스해서, 그리드는 깊은 애정과 감사를 느꼈다.
그간 변해온 본인의 신분과 관계없이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저 또한 당신을 자주 떠올렸습니다. 강녕하신 모습을 보니 마음이 한결 놓입니다.”
“멋진 도발일세.”
“...?”
두 사람의 대화는 외부로 전달되지 않았다.
무색 신성.
힘을 갈망하는 모든 생물의 염원을 원천으로 삼는 치우의 신성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장막을 펼친 여파다.
숭배 받길 거부하는 치우의 의지가 만든 현상이었다.
효과가 컸다.
메타트론 탓에 집결한 인원이 수천, 수만 단위건만.
그들 중 현재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떤 대화를 나누는 거지?’
그리드를 제외한 사람들에게 치우는 흐릿하게 보였다.
분명 인간의 형태를 닮긴 했지만 안개에 둘러싸인 느낌.
그리드가 치우라는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면 정체조차 몰랐을 것이다.
“...아무튼 같은 편인 거지?”
템빨단원들이 안도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들은 메타트론이라는 거대한 천사를 목격하고 다소 위축 됐던 상태다.
무려 18쌍의 날개를 지닌 천사.
심지어 놈은 다수의 빛의 링마저 보유하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천사의 고리.
Satisfy의 천사들은 그 고리를 수축, 또는 확장시켜서 빔을 쏘거나 칼날처럼 활용해 대상을 처참하게 도륙한다.
고리가 많을수록 뛰어난 파괴력을 발휘할 확률이 높다는 의미다.
저런 괴물이 도시 한복판에서 날뛰었다간 피해가 클 거라고 걱정하던 와중에 치우가 나타났다.
연신 헛소리를 지껄이는 메타트론을 일격에 도시 바깥까지 날려버렸고, 그리드는 그에게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조아렸다.
아군으로 해석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장막 속 상황은 사람들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대가 도미니언의 투창을 막았을 때도.”
짤랑.
치우의 방울은 몹시 민감했다.
치우가 고작 입을 열었다는 이유로 울려댔으니까.
그리드가 뒤늦게 눈치 챘다.
옷깃과 소매에 가려져 있어서 몰랐을 뿐.
치우가 몸에 매달고 있는 방울은 여러 개다.
“섬기는 신을 잃고 방황하던 태초신의 사도를 쓰러뜨렸을 때도.”
짤랑.
그리드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치우가 저토록 많은 방울을 몸에 매달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새삼 눈치 챈 까닭이다.
“염룡의 사죄를 받아냈을 때도.”
짤랑.
“나는 드물게도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네.”
저 방울은, 배려다.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자들을 위한 배려.
나는 이곳에 있다.
나를 놓치지 말라.
그 검을, 내게 제대로 겨눠라.
“당장 그대에게 달려와 그대의 검에 내 목을 겨누고 싶었지.”
짤랑짤랑.
방울 소리가 점차로 요란해졌다.
치우가 걷기 시작한 탓이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은 느린 듯 빨랐다.
평범한 보폭을 지녔을지언정 두 사람의 거리 자체가 워낙 짧았으니까.
그리드가 충분한 생각을 할 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참았다네. 매번 시련을 겪고 지친 그대를 재촉하는 건 도리어 일을 그르칠 확률을 높일 거라고 판단해서였지.”
묘하게 뒤틀린 말이다.
그리드가 눈치 챘다.
치우는 내게 어떤 애정을 느끼지 않는다.
순전히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를 배려하며 기다려줬을 뿐.
그게 전부이건만, 그리드 혼자서 치우의 호의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오해해왔다.
상식이라는 게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인정해야했다.
눈앞의 존재는 상식과 거리가 멀다.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즉, ‘죽기 위해서’ 타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이기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끝내 그대가 바알을 죽였을 때.”
짤랑짤랑짤랑!
방울소리가 미친 듯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드의 간격으로 들어와 천천히 검을 뽑는 동작이 만든 소란이었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했네.”
“...”
“그리고 지금, 드디어 종지부를 찍을 순간이 찾아왔군.”
무신을 참칭해선 안 됐다...
그리드는 헛소리로 치부했던 메타트론의 외침을 곱씹어봤다.
탑에서 나왔을 때.
나를 무신이라고 불렀던 사람들.
그리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게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하지만 치우라는 존재를 간과해선 안 됐다.
적어도 그리드만큼은 무신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잊지 말았어야 한다.
물론 억울했다.
‘누가 그런 걸 복선으로 여기겠냐고.’
후회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람들에게 무신을 함부로 언급하지 못하도록 막았어도 결과는 똑같았을 테니까.
치우는 언젠가 반드시 그리드 앞에 섰을 것이다.
애초에 무신을 참칭했다는 이유만으로 치우의 표적이 되는 거라면, 제라툴은 이미 수백 번도 더 치우에게 살해당했으리라...
스릉.
서슬이 시퍼런 치우의 장검이 완연한 모습을 드러낸다.
칼날에 비치는 자신의 표정을 확인한 그리드가 문득 하늘을 올려보았다.
천상의 모든 신들이 지금 이곳을 주시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템빨계의 제약을 풀어라...
메타트론의 마지막 외침이 어떤 뜻을 지녔던 건지 깨달았다.
천상의 신들에게 지상에 발을 들일 자격을 주라는 의미였다.
‘아스가르드는 진심으로 치우와 싸울 작정인 거군.’
아수라도 말했었다.
천상의 신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건 치우와 대적하는 거라고.
‘승산은 있나?’
쓸데없는 의문이긴 하다.
제아무리 치우라도 아스가르드의 신들에게 협공을 받으면 버틸 재간이 없을 테니까.
그럼 또 여기서 궁금해진다.
치우는 왜 굳이 나를 찾아온 걸까?
“...저를 지켜봐오셨다면 아수라 또한 알고 계시겠군요.”
“바알이 탄생시킨 악신. 아스가르드에 오르더군.”
“놈은 신살의 기운을 지녔습니다. 당신께서 정녕 소멸을 바라시는 거라면, 제가 아닌 아스가르드의 신들과 대적하는 편이 쉽지 않겠습니까?”
“그대는 아직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나.”
치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나를 소멸시키진 못해.”
“그건 저 또한 마찬가지...”
“아니, 인류가 떠올리는 무신은 그대다.”
“...”
“오직 그대만이 나를 소멸시키고 나를 대체할 수 있는 거지. 나 역시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이다.”
쿵.
그리드는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간의 모든 노력이 지금의 결과를 만들었단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강해지고, 새로운 업적을 쌓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수록.
나는 자연히 치우와 대적하게 될 숙명을 짊어지게 됐다.
스스로 모르는 사이에 그물에 낚인 기분.
불쾌하기보다 괴롭고 안타까웠다.
“단, 그대가 나를 소멸시키고 대체하기 위해선 한 가지 전제 조건을 달성해야한다.”
우선 그리드는 치우가 좋았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치우가 너무 강했으니까.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나와 싸우고 이겨야한다는 거지.”
“...”
여태껏 잘 인내하던 그리드가 처음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수로 싸워서 이기라는 말인가?
치우는 신들 중에서도 각별한 존재다.
태생적인 차이를 언급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
만에 하나 그리드가 치우와 싸워서 이긴다?
그건 버그다.
세계관이 잘못 된 거다.
이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빠르게 결론을 내린 그리드가 거절하려는 순간이었다.
“물론 오늘 그대는 패배할 걸세.”
치우가 진실을 말했다.
자신이 미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충분한 경험을 제공하겠지. 그대는 늘 그래왔듯이 패배를 양분으로 삼아 한층 더 발전할 테고 그러길 반복한 끝에 반드시 나의 심장과 영혼을 처참하게 갈라놓을 걸세.”
상종해선 안 된다.
터무니없는 놈이다.
그대의 위계에 해악을 끼칠 염려가 있다.
등등.
그리드가 메타트론의 경고들을 떠올렸다.
그렇다.
치우가 미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는 것과 별개로, 그리드의 눈엔 치우가 미친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그리드에게 패배는 치명적이다.
그 또한 신이었으니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명백하게 패배하길 반복할 경우 격이 심각하게 훼손 될 염려가 있었다.
치우의 제안은 현실적이지 못한 것이다.
그리드가 재차 거절하려는 순간이었다.
“거부권은 없다.”
치우가 못 박았다.
또한 조언했다.
“방울 소리에 집중하게. 두 눈이 나를 놓칠지언정 검 끝은 소리를 쫓도록 해.”
‘이런 염병.’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치우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뒤틀려 있을 확률이 높긴 했다.
오직 죽음만을 염원하는 존재가 정상일 리 없었으니까.
애초에 초월자만 되도 대부분 미쳐있는 실정이었으니 치우가 미치지 않길 바라는 건 염치없는 소망이기도 했다.
‘일단 압도적으로 패배하는 일 만큼은 면해야...’
싸움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그리드가 백호 자세를 활성화시켰다.
저항력을 높여 치우의 공격을 감당할 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치우가 고개를 저었다.
“오직 그대여야만 의미가 있다고 했을 텐데?”
“...!”
그리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무신 치우가 <화염에 휩싸인 백호 자세>를 무력화시킵니다.]
스킬 캔슬.
치우가 자연히 행한 권능이었다.
“그대를 근원으로 삼는 힘만이 나의 격을 훼손시킬 수 있다.”
“없...”
그렇게 따지면 검무마저 파그마를 근원으로 삼으니까 무의미한 거 아닌가?
황당해서 뭐라고 대꾸하려던 그리드가 입을 닫았다.
치우에 의해서가 아니다.
[당신에게 허락 받지 않은 존재가 템빨계에 난입했습니다.]
백발 거한의 등이 그리드의 시야를 가로막고 나서야 떠오르는 알림창.
침입자가 워낙 쾌속한 까닭에 시스템이 뒤늦게 인지한 것이다.
철그렁.
묵직한 쇠사슬이 지면을 쓸어내는 소음이 치우의 방울소리만큼이나 요란하다.
“...제라툴?”
백발 거한의 정체를 눈치 챈 그리드가 영문을 몰라 당황했고,
“무신은 나다.”
거한은 선언했다.
“여전히 스스로를 무신이라 믿는 망령아. 네놈은 오래 전에 책임을 등지고 떠난 시점부터 자격을 잃었다. 그 썩어 빠진 두 귀에 새로운 무신의 이름을 똑똑히 새겨라. 나는, 제라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