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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80화 (1,779/1,794)

템빨 88권 - 7화

“무신... 무신이다.”

무신.

Satisfy에선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오직 단 하나의 존재에게만 허락된 칭호인지라 무게감이 엄청났다.

한데 이 순간.

탑 아래 모인 인파가 저마다 무신을 입에 담았다.

등반 첫날.

단 15시간 만에 201층에 오른 그리드의 랭킹을 확인하면서다.

애초에 그리드는 무신을 꺾은 이력이 있다.

그리드가 아닌 그 누구를 무신이라 칭하겠나.

“멋지다! 갓리드!!”

“항상 응원하고 있어!!”

마침 탑에서 나온 그리드에게 열렬한 환호가 쏟아졌다.

그리드를 향한 사람들의 호감도는 역대 최고다.

요즘은 그리드 안티카페마저 그리드를 칭찬하는 게시글로 도배되고 있을 지경이었다.

‘오늘은 이 정도로 충분해.’

바알은 높은 층에서 만날수록 고강해졌고 특히 100층 단위부턴 생명력 게이지의 단위가 달라졌다.

아쉽지만 오늘 등반은 여기서 멈추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아이린을 밤새 기다리게 만들고 싶진 않았고, 오늘 밤을 샌다고 해서 랭킹을 더 올리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사람들에게 손인사로 화답해준 그리드가 랭킹 목록을 확인했다.

‘7등부터는 수준이 달라.’

유라, 지슈카, 크리스, 카츠, 하스터, 휴렌트, 그리고 크라우젤.

7명 전원 260층을 돌파했고 절반은 300층마저 넘어섰다.

그들의 등반 속도 역시 나날이 빨라지는 것이다.

고작 하루 이틀 만에 따라잡을 수준이 아니었다.

물론 그리드는 그 7명 외의 템빨단원들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간단한 예를 들어서 극검.

만약 누군가 내게 극검의 스펙으로 대별왕을 레이드 해보라고 한다면.

무조건 싫다고 할 거다.

탑을 계속 올라 충분한 버프를 얻은 뒤라면 또 모를까.

거의 순수한 상태나 다름없는 10층에서 대별왕을 만나면 승산을 장담하기 힘들었다.

물론 계속해서 도전하다보면 언젠간 레이드에 성공하겠지만 상상만으로도 진절머리가 났다.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의 공격을 되도록 허용하지 않고 10시간, 20시간씩 걸려 갉아먹는 일.

그리드는 죽어도 못한다.

애초에 그러고 싶지 않아서 템빨을 갖추고 의지해왔다.

스르륵.

아이린이 기다리고 있을 성을 향해 천천히 날아가는 그리드의 몸과 마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여유.

그리드가 지옥을 정화한 대가로 얻은 가장 큰 선물이다.

며칠 전까지.

매일 큰 불안감에 시달리며 어떻게든 강해지기 위해 발악했던 그리드는 사실 하루하루가 괴로웠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색하지 못했을 뿐, 내가 어쩌다 이만한 책임을 떠안게 됐는가에 대해 자주 생각하며 종종 회의감을 느꼈을 정도다.

하지만 이젠 다 끝났다.

인간으로 위장해 사람들을 기만하고 다툼을 부추겼던 악마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죽은 인간들의 영혼을 구속한 채 공포의 근원으로 군림했던 악마들의 왕 또한 마검의 잔흔만을 남긴 채 소멸했다.

완전에 가까운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아스가르드와 환국이라는 변수가 존재하긴 했지만 당분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신들은 악마와 다르다.

인간으로 위장해 지상에 잠입하거나 대놓고 침략하기엔 잃을 게 너무 많은 존재들이었다.

한 번의 실패를 겪는 순간 위신을 잃고 격이 훼손되니까.

급기야 신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됨을 알기에 그들은 소극적이다.

‘게다가.’

지상이 곧 템빨계이며, 템빨계는 또 다른 신계다.

이곳에서 천상의 신들이 받는 페널티는 무지막지했다.

지금보다 한참이나 약했던 그리드를 제라툴도, 도미니언도 어쩌지 못했던 게 증거다.

어떤 형태로든 신들에게 침략당할 가능성은 적다고 봐도 무방했다.

“...!”

여유를 만끽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점차 옅은 미소를 지어가던 그리드가 허공에 우뚝 멈췄다.

수백 개의 갓 핸드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신성의 궤적을 쫓아 달려오는 어린아이들의 머리 위로 방패를 펼치고 시장의 상인들을 안전한 곳으로 인솔하는 등.

마치 전쟁에 대비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덕분에 거리 곳곳을 순찰 중이던 병사들이 즉시 이변을 눈치 챘다.

갓 핸드들을 쫓아 사람들을 피신시키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기마의 소리가 울렸다.

기사들이 현장으로 달려오는 소리다.

바알이 죽고, 지옥이 정화되어 평화가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라인하르트의 군기는 여전히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라우엘이 적재적소에 배치시킨 인재들을 중심으로 상황에 신속하고 유기적으로 대응했다.

“인명 보호에 집중해.”

그리드가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사리엘에게 명령하는 순간.

번쩍!!

하늘에서 빛이 쏟아졌다.

오직 그리드를 겨냥하는 빛이었으나 워낙 밝아 라인하르트 전체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리드가 역천을 뽑아 쥐었다.

빛이 지면에 닿기 전.

한 발 앞서 지상에 떨어진 존재를 노려보면서다.

““템빨신 그리드.””

메타트론.

여태껏 사람들이 상상하고 목격해온 천사들과는 생김새가 많이 달랐다.

아름다운 미형의 몸과 얼굴이 아닌 각진 얼굴과 거구를 지녔다. 그 큰 몸집에 어울리게 무려 18쌍의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그렇다.

메타트론의 날개가 총 36장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한 눈에 알아보았다.

현재 메타트론은 모든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었으니까.

완전 해방 상태.

일전에 그리드와 만났을 때완 전혀 다른 것이다.

““쥬다르 신의 전언이다. 아스가르드의 표적은 치우이며, 지상과 적대할 의지는 없다. 괜한 탑을 세워 아스가르드를 자극하지 마라.””

“...”

아스가르드는 이미 탑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계하고 있다.

포식이불족발이 세운 저 탑이 정녕 아스가르드에 도달할 가능성을 지녔다는 의미가 됐다.

불쾌함과 기쁨을 동시에 느낀 그리드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이었다.

““또한 이건 내 사견이다. 템빨신 그리드. 그대 또한 알고 있듯이 대부분의 신들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감사한 존재다. 그대가 모든 인간의 숭배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지. 대부분의 신은 인간에게 기억되고 회자되어야 가치를 지니는 법이니까.””

다만 기억해주는 것만으로 고맙게 여기는 신들이 많다...

재차 말하는 메타트론의 태도는 명확했다.

그리드를 설득하려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천상의 신들이 인간에게 해악을 끼칠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굳이 아스가르드를 자극하고 적대하는 행위를 관둬라. 괜한 화를 자처할 뿐이다.””

벌집.

메타트론이 말하는 아스가르드는 벌집과 닮았다. 괜히 들쑤셔봤자 이로울 게 없는.

그리드는 공감하기 힘들었다.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너희가 역으로 지상을 들쑤실 거라고 생각하는데.”

지상과 아스가르드가 서로에게 개입하지 않게 될 경우.

결국 잊히는 신이 생기게 된다.

아스가르드가 일방적으로 불리하단 말이다.

잊힌 신들은 초조해져서 뭔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지상에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리드의 속내를 읽은 메타트론이 고개를 저었다.

““신은 간단히 잊히지 않아.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살아감에 있어서 반드시 절망을 품게 마련이며, 필연적으로 무언가에 기대고자 하는 습성을 지녔다. 그들에게 작은 신탁을 속삭이며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만으로 신들은 연명할 수 있지.””

“...즉, 인간은 절망해야 옳다? 악마들이 지상을 침략했을 때 사람들을 돕기는커녕 도리어 악마들을 도왔던 이유를 알겠다.”

““비약하는군.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닌 듯한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그리드의 말을 곱씹어본 메타트론이 이내 결론을 내렸다.

““생리다.””

“뭐?”

““자연의 이치 같은 거지. 감정적으로 대응할 이유가 하등 없는.””

“말을 참 불쾌하게 하는 재주가 있네.”

““그대가 명심해야할 사실이 하나 있다.””

사절을 자칭하는 침략자.

허락도 없이 지상에 발을 들인 눈앞의 천사가 그리드는 여러모로 불쾌했다.

하지만 함부로 칼춤을 추지 않고 연신 헛소리를 지껄이도록 놔두고 있다.

메타트론의 기파가 워낙 강력했기 때문이다.

전(前) 대천사장.

달리 ‘계약의 천사’라 불리는 놈은, 평소 자신의 날개로 양팔과 다리, 눈과 귀, 입을 스스로 봉인하는 눈치였다.

자기 자신을 무지막지한 위험물로 취급하는 태도.

한데 지금은 모든 날개를 활짝 펼친 채다.

어떤 강력한 계약을 맺은 건지 몰라도 온전한 상태란 말이다.

실제로 라인하르트의 봉인을 손쉽게 허물고 그리드의 눈앞에 당도했고.

강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 한복판에서 어찌하기엔 부담이 큰 상대였다.

‘노린 거겠지.’

그리드가 눈살을 구기는 이때도.

추가 지원은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제국의 병사들과 기사들은 물론이고 사도들과 템빨단원들이 도처에서 몰려왔다.

든든했다.

동료들의 지원을 달갑게 여기지 못하고 역으로 불안해했던 시절과 달랐다.

‘사람들을 지킬 수단이 많아졌어.’

몇 년 동안 한솥밥을 먹었다.

극검의 집에 수저가 몇 개 있는지 꿰뚫고 있을 정도다.

그리드는 동료들의 스킬을 숙지하고 있었고, 그들이 현재 상황과 지형을 어떻게 활용해서 사람들을 보호할지 예측할 수 있었다.

믿고 움직여도 된다는 의미다.

“그때의 나는 만전이 아니었다.”

급기야 브라함까지 현장에 도착했다.

붉은 안광을 빛내며 서서히 하강하는 그의 양손에 맺힌 마력이 강력한 파동을 발산하자 메타트론의 거체가 미약하게 진동했다.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는 가운데.

““그대가 아스가르드에 품은 감정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메타트론이 경고했다.

““그대가 명심해야 할 것은 치우의 위험성이다. 일단 치우를 어찌하지 못하는 이상 아스가르드와 그대의 관계는 어떤 형태로든 결판 날 수가 없지. 뭐가 어찌됐든 천상의 최우선 표적은 치우니까.””

일전에 만났을 때 역시.

메타트론은 그리드에게 치우를 조심하라고 경고한 바 있다.

그리드는 당연히 한 귀로 흘렸다.

신들의 하수인에 불과한 메타트론과 그리드를 호의로 대접해줬던 치우.

둘 중 그리드가 신뢰해야 할 대상은 당연히 치우였다.

“그건 너희 사정이고.”

그리드가 드디어 발걸음을 옮겼다.

병사들과 기사들이 현장에서 사람들을 피신시키고 템빨단원들이 길목마다 방벽을 세운 것을 확인한 직후였다.

자꾸 헛소리만 지껄이는 눈앞의 침략자를 찢어 죽일 기회다...

달리 생각했을 때 이건 정말 엄청난 행운이었다.

아스가르드에서 만났으면 엄청난 난적이 됐을 천상 최강의 전력 중 하나가 제 발로 걸어와 줬으니.

저벅.

그리드의 발걸음이 춤사위로 승화되는 순간이었다.

““늦었나.””

메타트론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드 역시 행동을 멈췄다.

두 사람의 시선이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그대가 무신을 참칭해선 안 됐어.””

내가 언제?

연속되는 헛소리에 울컥하는 그리드였지만 대꾸하진 않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입을 열지 못했다.

엄청난 압박감에 짓눌려서다.

무언가 엄청난 게 다가오고 있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감각.

꿀꺽, 마른 침을 삼키는 그리드의 콧등을 타고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제야 한 발 늦게 상황을 눈치 챈 브라함과 지크 역시 시선을 돌렸고,

“비로소 나를 대체할 수 있게 되었나?”

짤랑-

맥락을 모르겠는 말소리에 이어서 방울소리가 울렸다.

“...무신.”

치우.

진정한 무신이 대륙을 뛰어넘어 그리드의 코앞에 당도해 있었다.

““템빨계의 제약을 풀어라...!””

메타트론의 다급한 외침이 점차로 멀어졌다.

치우가 휘두른 칼등에 얻어맞고 점이 되어 사라진 여파다.

그리드가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자칫 치우와 상종 하지마라. 여신께서 놈의 염원을 외면하고 떠나보낸 것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대의 위계에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

일전에 메타트론이 남겼던 의념.

그것이 재차 그리드의 뇌리에 새겨졌다.

-무시해라. 놈과 상종해선 안 된다. 터무니없는 놈이라는 게 명확해진 상황이야.

천사의 경고 따위.

본래 개 짖는 소리쯤으로 취급해야 옳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리드는 메타트론의 말을 좌시하지 못했다.

치우의 본질을 새삼 꿰뚫어 보았다.

소멸을 원하는 신.

치우는 그 어떤 의무도 짊어지지 않은 채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해왔다.

그릇됐다.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았다고 해서, 그리드에게 큰 힘을 쥐어줬다고 해서 마냥 신뢰해선 안 된다.

경계하는 그리드의 태도가 치우는 몹시 흡족한 눈치였다.

“진정으로 나를 대체할 셈인가.”

애초에.

죽기를 소망하는 자가 온전한 정신을 지녔을 리 만무하다.

사실 그리드도 알고 있었다.

다만 나를 위협할 리 없다는 막연한 믿음을 지니고 호의를 유지해왔을 뿐이다.

그래선 안 됐다.

콰작.

치우가 땅을 한 번 짓밟자 템빨단원들이 방벽처럼 전개해놨던 스킬과 마법들이 흐트러졌다.

마치 유리처럼 산산조각났다.

“현상이나 개념을 물질로 판정하는 건가? 아니... 그저 순전히 힘으로 부순 건가?”

경악성에 가까운 브라함의 목소리가 안 그래도 갑작스러운 전개를 맞이한 템빨단을 더 큰 혼란에 빠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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