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8권 - 4화
던전 마스터 포식이불족발.
탑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손을 뻗은 그의 첫 작품은 몹시 작고 초라했다.
탑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수준으로 단 2층에 불과했다. 둘레를 통해 짐작컨대 층당 평수도 10평이 채 안 될 것 같았다.
한데 그 누구도 좌시하지 않았다.
올라가면 강해지는 탑.
워낙 자극적인 간판이 걸려있었으니까.
심지어 그리드조차 현혹 당했다.
“올라가면 강해진다라... 아직 완성조차 안 된 탑에 너무 거창한 이름을 붙여놓은 거 아닌가 싶은데...”
“이게 완성 된 걸세. 탑의 층수는 이용자가 높은 층수에 오를수록 자연히 추가될 거고, 내부 면적도 겉보기와 달리 제법 그럴듯해.”
“케를 옹이 울겠네.”
“안 그래도 조금 전에 찾아와서 거저먹는다고 욕하더군. 내가 만드는 시설물은 순전히 ‘던전’이라 케를 옹이 질투할 필요가 없는데.”
포식이불족발은 제국의 귀중한 보물 중 하나다.
여전히 수많은 병사와 기사들이 그가 만든 던전을 탐사하며 성장했다.
성장치가 던전의 허용량을 넘어선 템빨단원들도 종종 던전에 들러 스킬 경험치를 올리는 용도로 이용했고.
한데 이젠 탑까지 세우고야 말았다.
하물며 층수에 제한이 없다고 한다.
이용자가 시련을 극복할 때마다 상위의 층이 열리는 까닭에 이론적으로 무한한 확장이 가능했다.
그야말로 전설로 남을 건축물인 것이다.
아니, 그리드가 이용하면 신화로 숭배 될 가능성도 있었다.
또한 그리드는 템빨단의 수장이다.
기념비적인 시설에 처음으로 발을 들일 자격과 권리를 지녔다.
“좋아. 내가 오늘 100층까지 올려놓도록 하지.”
그리드는 라우엘이 바라는 것 이상의 의욕을 품고 등반을 시도했고,
“XX 안 해.”
그 결과가 이거다.
의욕 상실.
1층부터 9층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마검의 잔흔> 덕분에 그리드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시련을 돌파했으니까.
10층에 도달하기까지 채 5분이 안 걸렸을 정도다.
한데 10층에서 즉시 의욕이 꺾였다.
10층에 등장한 보스 몬스터.
다름 아닌 바알이었으니까.
그렇다.
탑에 10층 단위로 도사리는 보스 몬스터는 ‘도전자가 레이드한 보스 몬스터 중 가장 레벨이 높은 상대’를 기본 골조로 삼았다.
여기에서 층수가 오를 때마다 점점 더 강해지는 식이다.
도전자의 입장에 따라 무지막지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것이다.
“100층은 개뿔...”
이래서야 나만 불리하지 않나...
왜 매번 나한테만 이러는 거냐...
한탄하는 그리드에게 반트너가 위로를 건넸다.
“대신에 그리드 넌 부인이 계속해서 강해지잖아. 너무 상심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
...위로 맞겠지?
별로 위안은 안 되지만 팩트라 반박 못하는 그리드에게 포식이불족발이 질문했다.
“왜 바알하고 싸우지 않고 돌아온 거지?”
1층부터 9층까지 오르면서.
그리드는 탑에서만 적용되는 각종 버프를 획득했다.
탑에서의 그리드는 현실의 그리드보다 강하단 말이다.
10층에 나타난 바알의 수준이 얼마 전 그리드가 싸웠던 바알과 완전히 동일하다고 해도, 현재의 그리드라면 비교적 쉽게 필승을 노릴 만했다.
한데 싸워보지도 않고 퇴각했다.
포식이불족발 입장에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바알이 나오면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 보스의 수준이 높은 만큼 보상도 클 텐데.”
“똥이 무서워서 피하겠나? 더러워서 피하지.”
그리드를 대신해서 극검이 대답했다.
“바알이 얼마나 끈질겼는지 그새 잊었어? 그리드 입장에서 재차 놈과 싸운다는 건 진절머리가 나는 일일 거다.”
정확했다.
불과 며칠 전.
그리드는 바알과 무려 반나절을 넘게 사투를 벌였다.
죽여도, 죽여도 부활하고 진화했던 놈.
복기하는 것조차 싫을 정도로 뭣 같은 싸움이었다.
근데 또 곧바로 다시 싸우라고?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싫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싸워야하는 상황도 아니고.
단순히 보상 조금 얻자고 바알과 다시 싸운다는 건 미친 짓처럼 느껴졌다.
“휴식이 필요할 때야.”
극검이 그리드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휴식.
지친 그리드의 마음을 관통하는 단어였다.
그래, 나는 쉬고 싶은 거구나...
깨달은 그리드가 전율에 휩싸였다.
파그마의 후예가 된 뒤로 여태껏.
제대로 쉬어본 날이 드물다는 사실을 상기한 까닭이다.
이건 사람이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니지 않나?
그간 어떻게 쉬지 않고 달려온 건지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탑의 등반은 너희에게 맡기마.”
지옥을 정화하고 인류에게 평화를 안긴 지금.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마음 놓고 쉴 수 있을까?
당장 페이커와 템빨그림자단이 신선 벤타오를 찾아 동분서주하는 중이다.
신들이 미처 지우지 못한 일곱 선인의 업적을 수색하기 위한 도움을 얻기 위해서였다.
페이커가 실적을 남기는 순간 아스가르드가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부터 그리드는 또 다시 치열한 전투를 각오해야했다.
지금밖에 없다.
지금이야말로 충분한 휴식을 취해 놓아야한다...
본능적으로 느낀 그리드가 미련 없이 현장을 떠났다.
쉬는 동안 해야 할 일들이 떠올랐다.
일단 파그마의 영혼을 찾는 것이다.
크라우젤의 증언에 따르면.
크라우젤과 빙의한 채로 브라함을 마주친 파그마의 영혼은 그 즉시 기척을 지웠다고 한다.
한데 브라함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창 결혼식을 준비할 때 들은 이야기라 한 귀로 흘려들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브라함의 반응이 마음에 걸렸다.
파그마가 그냥 떠나버렸는데 브라함이 태연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파그마의 영혼은...’
윤회한 게 아니라 브라함에게 붙들린 게 아닐까?
애초에 파그마와 나눈 대화가 너무 짧아 아쉬웠던 차다.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쟤 쉬러가는 거 맞지?”
걸음을 재촉하는 그리드를 극검과 동료들이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
얼마 전까지.
라인하르트 주변엔 산이 없었다.
브라함이 모조리 때려 부순 까닭이다.
당연히 악의는 없었고, 그리드의 탐욕을 마법으로 단조하는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벌어진 현상이었다.
하지만 최근.
라인하르트 서쪽으로 높은 산 하나가 우뚝 섰다.
브라함이 석화 마법으로 만든 인공 산이었다.
라인하르트를 굽어보는 위치에 브라함의 공방이 있었다.
“브라함, 당신...”
브라함의 공방을 찾아온 그리드가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파그마의 영혼.
설마 했던 그것이 정말로 브라함의 공방에 갇혀있었다.
사방팔방에 널브러져 있는 각종 도구가 끔찍한 상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영혼을 고문한 겁니까?”
아무리 깊은 원한을 지녔다지만.
그래도 파그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나?
한데 이제 와서 영혼의 윤회를 막고 고문을 일삼다니...
브라함의 성격이 이 정도로 개차반일 줄은 몰랐던 그리드가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헛다리짚지 마라.”
쯧, 혀를 찬 브라함이 어울리지 않게 톱을 쥐고 그것을 파그마의 영혼에게 겨누었다.
“브라함...!”
파그마의 영혼을 잔인하게 갉아버릴 셈인가.
그리드가 말리려다가 멈췄다.
슥슥. 슥슥슥.
어떤 마법적인 효과가 깃든 듯한 톱은, 필시 파그마의 영혼을 가르기 시작했지만 영혼에 직접적인 위해를 끼치진 않았다.
철컹, 철컹...
파그마의 영혼은 멀쩡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긁히고 출렁이는 소리만 연신 울렸다.
“바알 그놈은 마지막까지 악의로 가득 찬 놈이었다.”
며칠 전.
크라우젤에게 빙의해있는 파그마의 영혼을 마주한 브라함은 소름이 돋았다.
파그마의 영혼이 크라우젤의 영혼과 은밀하게 결속되어 있었던 탓이다.
처음엔 당연히 파그마가 벌인 짓인 줄 알았다.
뒤통수치기를 즐기는 저 빌어먹을 놈이 크라우젤의 몸을 빼앗으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곧 냉정해졌다.
파그마는 자신 같은 대마법사가 아니다.
한낱 대장장이가 영혼 상태에서 저만한 주술을 발동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마 바알은 네가 파그마의 영혼에 담긴 힘을 빼앗을 거라고 생각한 듯하다.”
파그마의 영혼에 새겨진 저주.
바알이 남긴 그것은, 파그마의 영혼이 어떤 대상과 결합할 경우 파그마의 영혼을 주체로 만드는 구조를 지녔다.
쉽게 말해서 ‘파그마의 영혼이 빙의한 대상의 신체를 빼앗도록’ 설계 됐단 뜻이다.
만약 그런 사태가 벌어졌다면.
신체를 빼앗긴 피해자는 물론이고 빼앗은 파그마조차 큰 충격에 휩싸였을 것이다.
‘깊이 절망했겠지.’
파그마의 특기가 타인을 이용하고 배신하는 거라지만.
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보신을 위해 타인을 배신한 적은 정작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바알의 의도대로 사건이 진행됐을 경우 그 누가 파그마를 신뢰했을까?
파그마는 당연히 사건의 배후로 지목됐을 것이다.
그리고 다름 아닌 브라함 자신이 파그마의 목을 베어 죽였으리라.
“바알...”
내막을 알게 된 그리드가 이를 갈았다.
안 그래도 탑에서 바알을 만나고 온 직후라 예민해진 상태여서 욕설까지 뇌까렸다.
파그마의 영혼이 당황하는 기색을 느낀 브라함이 피식 웃었다.
“저 녀석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이지만 가식을 모른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솔직하지.”
너와는 다른 것이다...
-...
자신을 향한 비난과도 같은 말에 파그마의 영혼이 침묵했다.
파그마가 느끼는 감정이, 그의 영혼에 깃든 저주를 갈라내고 있는 마법의 톱을 매개로 브라함에게도 고스란히 전달 됐다.
후회.
그 누구도 신뢰하지 못해 홀로 싸웠던 전 시대의 영웅은.
대의를 명목으로 타인의 존엄을 훼손했다.
혼자서는 감당 못할 악마들과 대적하기 위해 다른 영웅들을 해치고, 무덤을 파헤치고, 영혼을 속박하는 등, 온갖 악랄할 짓을 셀 수 없이 저질렀다.
그 결과가 이거다.
끝내 악마들의 왕과 계약하고 수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저주에 시달리고 있다. 당대의 영웅들에게까지 민폐를 끼칠 뻔했다.
-내가... 내가 자네를 신뢰하고 의지했다면...
파그마의 떨리는 음성이 공방에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브라함을 바라보는 두 눈에 깃든 슬픔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
브라함은 대꾸하지 않았다. 묵묵히 톱질에 집중했다.
어색한 침묵이 공간을 지배하는 그때.
파스슥.
파그마의 영혼에 깃들어 있던 저주가 드디어 완전히 파괴됐다.
톱을 내려놓은 브라함이 입을 열었다.
“후회한들 어떤 의미가 있지?”
-...
브라함과 시선이 마주친 파그마가 처음으로 깨달았다.
브라함의 붉고 투명한 눈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보고 있다.
과거의 은원 따위, 하찮은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내 감정과 별개로 과거의 너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당대의 그리드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구해졌지.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니냐? 무의미한 후회에 얽매이지 말고 썩 꺼져라.”
거친 말.
매도에 가깝다.
하지만 그리드는 브라함의 성격을 잘 안다.
그가 하는 말에 담긴 진심을 해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심을 보태 대신 전했다.
“과거의 당신이 내린 선택들을 옳다고 말할 순 없을 겁니다. 하지만 과거의 당신 때문에 지금의 저와 브라함이 존재하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죠. 잘 했노라, 못 했노라 감히 평가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전 당신의 생애를 존중하고 존경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젠 부디 편히 쉬세요.”
이미 앞서 만났을 때도.
그리드는 파그마에게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전달했었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전한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었다. 도리어 부족하다고 느꼈다.
-...
파그마에겐 충분한 위안이 되었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그의 영혼이 형태를 잃고 흩어져갔다.
[전설의 대장장이 ‘파그마’가 승천하였습니다.]
[새로운 생을 부여받고 세상 어딘가에 다시 태어날 그의 앞날을 축복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지상의 신이라는 지위와 파그마의 후예라는 과거의 신분이 맞물려 생긴 히든 효과 같았다.
그리드가 일고의 여지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축복한다.”
미안하고 고맙다...
파그마의 영혼이 남긴 마지막 인사가 브라함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응어리져있던 원한마저 달래주었다.
하나의 은원이, 드디어 완전한 결말을 이룬 것이다.
그리드의 마음이 따스해져가는 가운데 브라함이 말했다.
“딸이든, 아들이든.”
“...?”
“조카는 내 손으로 키운다. 본인밖에 모르는 마리로즈 그것에게 육아마저 맡길 순 없다.”
“아니 뭔...”
갑자기 웬 헛소리냐고 따지려던 그리드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브라함의 감각쯤 되면 어젯밤 내 침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소상하게 파악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사생활을 존중해달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