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8권 - 3화
<그리드가 없었다면, Satisfy에서 위로 받아온 사람들 전부 희망이 아닌 좌절감을 맛보게 됐을 것>
<임철호 회장은 반사회적 인격장애?>
여론의 시선을 끌기 위해 선정주의에 호소하는 3류 언론사들은 본래 S.A그룹을 쉽게 건드리지 못했었다.
S.A그룹의 법무팀이 워낙 거대한 힘을 지닌 탓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정확한 이유는 ‘굳이 S.A를 건드리지 않아도’ 표적으로 삼을 대상이 지천에 널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황색 언론들은 그리드와 템빨단을 들쑤시고 싶었다.
지구와 Satisfy.
말 그대로 온 세상의 이목이 그리드와 템빨단의 활약에 집중 됐으니 그들만큼 맛 좋은 표적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감히 건드릴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꿩 대신 닭으로 S.A그룹을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우리 그룹이 방파제 역할을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Satisfy가 서비스를 개시한 이래.
S.A그룹의 영향력은 미국, 중국과 비견되어왔다.
다른 개인이나 집단이 S.A그룹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였고 그 반대의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영원한 건 없는 법이지. 다만 개인의 영향력에 밀려 이런 꼴을 당하게 된 건 상당한 충격이군.”
그리드.
또한 그리드가 이끄는 제국과 템빨단.
Satisfy가 탄생시킨 영웅이 도리어 S.A그룹의 강력한 경쟁자가 된 셈이다.
“...그레이트.”
“그리드도 참 대단하다니까. 허허.”
“바알을 죽여 없애줄 줄이야. 큰 골칫덩어리 하나가 사라졌으니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일세.”
“그리드에게 도움이 된다면 방파제 역할쯤이야, 뭐.”
고작 언론 따위에 휘둘릴 이사진이 아니었다.
애초에 언론은 바람 앞의 갈대와도 같은 존재다. 일일이 반응할 가치가 없다.
황색 언론의 도발이 무색하게도, 그룹 내 분위기는 사실 엄청나게 좋았다.
S.A 또한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는 중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 일부 임직원은 직접 라인하르트에 방문해서 축제를 즐기고 왔다.
바알.
Satisfy의 세계관을 디스토피아로 만든 이레귤러.
S.A그룹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놈을 증오해왔다.
회사는 Satisfy에 개입하지 못한다는 규칙에 발목이 붙잡혀 방관했을 뿐이다.
“앞으로도 응원하는 것밖엔 우리가 할 일이 없군.”
Satisfy 내부에서 가장 큰 권한을 지닌 건 빛의 여신 레베카다.
워낙 강력한 인공지능을 지닌 탓에 그룹의 의지와 별개로 진화해온 존재.
그녀가 무슨 생각을 품고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에 따라서 바알 같은 이레귤러가 탄생하는 것인데 그룹 입장에선 대처가 불가능했다.
우주라는 대자연, 혹은 신이라는 초월적인 존재가 인간을 창조한 뒤 다만 지켜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드 같은 플레이어들에게 의지하며 오랜 세월 응원했다.
레베카 등의 절대적인 존재들이 연달아 악수를 두고 Satisfy를 파멸로 이끄는 것은 S.A그룹에게도 최악의 전개였으니까.
만약 그리드가 이번 원정에 실패했다면.
당장 S.A그룹의 주가는 폭락했을 거다.
정말로 진지하게 시즌제 도입을 논의했으리라.
“...”
급등한 주가를 재차 확인하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 임원들.
그들 사이에서 윤상민 운영이사의 표정만이 유독 어두웠다.
태초부터 존재해온 핵.
어떤 소망이든 이뤄주는 까닭에 대상의 욕망을 자극하는 그 돌은, 이미 한 번 바알이라는 괴물을 탄생시킨 전력이 있다.
한데 플레이어의 손에 들어가 버렸다.
물론 오랫동안 그리드를 지켜봐온 윤상민 이사는 그를 잘 안다.
그리드가 태초의 핵을 써서 Satisfy에 위해를 끼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악의 없이 끼치는 해악이라는 게 존재한다.
그리드에겐 그럴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드가 내린 어떤 선택이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부디 심사숙고해줘야 할 텐데...’
불안한 나머지 손톱을 물어뜯던 윤상민 이사가 이내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드에겐 늘 감사를 느껴왔건만 매번 의심하고 경계할 수밖에 없단 사실이 안타까웠다.
뭐 어쩌겠나.
이런 게 운영자와 유저의 관계라는 거겠지.
“한데...”
윤상민 이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갓리드 팬 1호를 자처해온 임철호 회장.
다른 임원들과 함께 그리드의 결혼식을 지켜보며 축복했어야할 그가 끝내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까닭이다.
“혹시 회장님의 상심이 크신가?”
윤상민 이사가 비서실장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황색 언론들에게 가식적인 인물이라고 비판 받는 상황.
누구보다 Satisfy를 아끼고 사랑하는 임철호 회장 입장에선 서운할 법도 했다.
홀로 집무실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는 회장의 쓸쓸한 모습을 떠올린 윤상민 이사의 마음이 무거워지는 그때였다.
“아니요.”
비서실장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회장님께선 어디에 계시지?”
“외출하셨습니다. 30대 남성이 선호하는 선물 리스트를 뽑아오라고 지시하셨던 걸 감안하면 그리드를 만나러 가신 게 아닐까 싶군요.”
윤상민 이사는 회장의 최측근이다.
하여 솔직하게 말해주는 비서실장 덕분에 윤상민 이사는 안도할 수 있었다.
‘회장님이 가장 신나셨구나.’
하긴, 회장님이야말로 언론에 휘둘릴 리 없지.
“...!?”
흐뭇하게 미소 짓던 윤상민 이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른 임원들 또한 술렁거렸다.
그리드의 결혼식이 끝난 후.
라인하르트와 신들의 무덤의 야경을 비추던 화면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 까닭이다.
[플레이어 ‘그리드’가 REX-001001을 사용하였습니다.]
REX-001001.
윤상민 운영이사는 그 코드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태초부터 존재해온 핵.
“설마 그리드가 소망석을 사용한 거요?”
한 발 늦게 상황을 눈치 챈 다른 임원들이 윤상민 이사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한 방 크게 얻어맞은 반응.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리드가 태초부터 존재해온 핵, 즉 ‘소망석’을 이토록 빨리 사용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었다.
윤상민 이사가 중얼거렸다.
“고민이 짧았다는 건... 설마 모르페우스의 우려대로 망자들이 부활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건가...?”
23.9퍼센트라는 비교적 높은 가능성.
모르페우스는 그리드가 소망석으로 ‘망자들을 부활시킬 가능성’을 예측한 바 있다.
칸과 전 적기사단을 예시로 들었다.
일찍이 젊은 아들을 잃은 칸.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동료와 가족을 잃은 전 적기사단원들.
그리드가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기 위해 망자들을 즉시 부활시킬 경우.
세상엔 온갖 혼란이 발생할 거라고 경고했었다.
‘악의 없는 해악.’
윤상민 이사는 어서 상황을 파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운영팀으로 이동하기 위해 즉시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 시스템 메시지가 이어졌다.
[플레이어 ‘그리드’의 소망은 Satisfy에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습니다.]
“...??”
“...???”
그리드쯤 되는 인물의 소망이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니?
좀처럼 믿기 힘든 일이었다.
“소망의 내용이 뭐기에?”
다소 얼빠진 표정을 지은 윤상민 이사와 임원들에게 시스템이 대답했다.
[이용약관 제3조 제9항에 의거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
이용약관 3조 9항.
회사는 플레이어의 사생활을 존중한다는 부분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사생활이란, ‘운영팀의 권한으로도 모니터링하지 못하는 부분’을 뜻했다.
즉, 인간의 존엄이 걸린 몹시 은밀한 부분이란 말이다.
이쯤 되자 윤상민 이사와 임원진 전부 눈치 챘다.
하필 그리드가 마리로즈와 혼인한 직후였기에 추측이 더 쉬웠다.
“이건 인정이지...”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
진짜다.
그리드는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침실에서 나왔다.
그리드를 오랫동안 섬겨온 라우엘도 처음 본 모습이었다.
지난 세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리드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서 대장간이나 사냥터로 떠나곤 했었으니까.
“뭐죠...?”
라우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래간만에.
아니, 이제야 ‘처음으로’ 근심걱정 없이 푹 쉬셨구나.
늦게까지 침실에서 나오지 않는 그리드를 흐뭇하게 여기면서 기다렸던 라우엘이다.
그리드의 개운한 모습을 기대했었다.
한데 어이없게도 그리드는 평소보다 훨씬 더 피로에 찌든 몰골이었다.
밤새 마리로즈 님께 시달렸다고?
불가능하다.
그리드는.
아니, 모든 플레이어는 Satisfy에서 성적으로 불구에 가까운 존재니까.
당연하다.
플레이어는 한 달에 한 번밖에 거사를 치르지 못한다.
엄청난 제약을 받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첫날밤을 보낼지언정.
플레이어가 밤새 사랑을 나눈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칫 타이밍을 잘못 맞췄다간 단 한 번도 사랑을 나누지도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물론 라우엘은 총각인지라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지만...
아무튼 지식과 정보를 근거로 삼는 그의 이론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설마... 밤새 흡혈이라도 당하셨나요?”
“비슷하지...?”
“마리로즈 님은 뱀파이어이시다 보니 인간과 다른 면이 있군요. 신혼이라고 너무 배려하시기 보단 밤에는 멀리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안 그래도 떠났어.”
조금 전.
그리드가 침실 문을 나서기 바로 직전에, 마리로즈는 창문을 통해 성을 떠났다.
마치 도망치듯이.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가혹하구나...”
그런 말을 남긴 채였다.
그리드는 반성했다.
어젯밤부터 오늘 낮에 이르기까지 마리로즈가 혼절한 횟수가 27번이었으니까.
‘내가 너무 흥분했다.’
마리로즈의 아름다움에 매혹 된 상태로 리미트가 해제되자 눈이 돌아가고 말았다...
어제의 난 한 마리 짐승에 불과했다...
재차 반성하며 한숨 쉰 그리드가 마음을 강하게 다잡았다.
‘앞으론 나 자신을 잘 다스리도록 하자.’
태초부터 존재해온 핵의 영향으로 시스템이 제약을 주지 못하게 된 상황이다.
그리드 스스로 자중해야만 했다.
정말로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탑이라고?”
“네, 제가 추측하기론 하늘까지 닿을 만한 탑입니다. 아시다시피 포식이불족발님이 만든 던전 중 유니크 이상의 판정을 받는 던전들은 탐사율에 따라 자연히 규모가 확장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탑도 오르면 오를수록 높아질 거다? 어쩌면 아스가르드에 닿을 정도로?”
“그렇죠. 물론 그러기 위해선 탑을 계속해서 등반할 만한 실력자가 필요합니다.”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자.”
잠시 후.
“XX 안 해.”
탑에 그리드의 욕설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