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8권 - 1화
우주 최초 1,000레벨 돌파.
쿨타임 없는 스탯 재분배 특전 획득.
탐식의 룬에 <바알의 힘>과 <아모락트의 힘> 귀속.
지옥까지 영역을 확장시킨 템빨계의 레벨 대폭 상승.
어떠한 소망이든 이뤄준다는 태초의 핵과 번헬리어와의 의리(?) 확보.
파그마의 검무 습득 등등.
망자들이 안식을 얻고 인류가 공포를 극복한 것과 별개로.
지옥 원정은 그리드에게 막대한 보상을 안겨줬다.
마지막에 가까운 시련의 보상답게 뭐 하나 거를 타선이 없었다.
스탯 재분배는 앞으로 그리드와 싸우는 적들에게 무지막지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능력치 탓에 그리드의 저력을 제대로 가늠한다는 건 이론적으로 불가능했다.
템빨계의 레벨 상승은 더 많은 천사를 임명할 수 있게 해준다.
템빨계에 속하는 반신들의 영향력이 커졌고 인간들에겐 이로운 확률을 높여줬다.
태초의 핵과 번헬리어는 든든한 보험이다.
아주 만약.
정말로 만에 하나 그리드에게 위기가 찾아온다면 의지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리드는 특히 바알의 힘과 아모락트의 힘에 매료됐다.
<마검의 잔흔>
제1위 대악마 바알이 남긴 힘의 잔재입니다.
전투 상태 돌입 시, 바알이 생전에 애용했던 마검의 형체가 떠올라 당신을 보좌합니다.
<기만, 교란, 유혹>
제2위 대악마 아모락트가 남긴 마력의 잔재입니다.
당신과 적대하는 대상은 당신의 생명력 게이지(혹은 상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베리아체가 바알의 힘과 아모락트의 힘을 취하기 전.
그리드가 먼저 그들의 힘을 얻었다.
물론 지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오래 전부터 그랬듯이, 탐식의 룬의 용량이 부족하다는 설정에 발목을 붙잡혔다.
바알과 아모락트의 위계가 너무 높아 그들의 힘을 온전히 흡수할 수 없다고 시스템은 설명했다.
그나마도 감지덕지였다.
여태껏 힘을 아예 못 얻은 경우도 허다했으니까.
제1위 대악마와 제2위 대악마의 힘을 조금이나마 얻게 됐다는 사실에 의의를 뒀다.
물론 큰 기대는 하지 못했다.
그나마 개털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위안을 얻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확인해 보니 개털이 아닌 정도가 아니었다.
바알의 힘과 아모락트의 힘은 그리드의 기대를 아득히 웃돌았다.
일단 두 스킬 모두 패시브다.
어떤 자원이나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그리드가 따로 의식하며 컨트롤하지 않아도 자연히 발동 됐다.
근데 이 효과가 굉장히 재밌다.
우선 마검의 잔흔.
‘전투 상태 시’ 발동하는 스킬이다.
절대자의 감각과 궁합이 무척 좋았다.
무언가가 그리드를 적대하는 순간 즉시 떠올라 요격했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리드가 적을 식별하기 전에 스킬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인공 감각과 닮은 셈인데 인공 감각은 그리드가 의식해서 펼쳐야하므로 마검의 잔흔이 훨씬 더 편리했다.
애초에 공격력 계수 자체가 갓 핸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았고.
아무튼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고 다닐 이유가 사라졌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엄청난 차이다.
절대자급의 적이 언제 자신을 위협할지 몰라 평소에도 집중력을 유지해야만 했던 그리드가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얻었다.
드디어 남들과 똑같이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있게 됐다.
다음은 아모락트의 힘.
기만, 교란, 유혹.
이 스킬 역시 원리는 단순했지만 효과가 컸다.
적대하는 대상에게 ‘현재 상태’를 혼동시키는 패시브 스킬.
유용할 수밖에 없다.
플레이어가 그리드를 적대할 경우.
상대방은 그리드의 생명력 게이지를 착각하게 된다. 풀피를 개피로 오해하거나 그 반대로 인식하는 식이었다.
NPC나 몬스터에게도 똑같이 적용됐다.
상대방은 다 죽어가는 그리드를 멀쩡한 상태로 인식하거나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그리드를 다 죽어가는 상태로 인식하는 등 혼선을 겪고 오판을 내리게 된다.
‘이런 스킬을 초반부터 얻었어야 하는데.’
단순하고 편리하지만 강력한 스킬.
쿨타임이나 자원 소모조차 없다.
컨트롤 젬병이던 과거의 그리드가 갈망했던 스킬인 것이다.
너무 늦게 얻어서 아쉬울 지경이었다.
‘...아니, 애초에 너무 사기니까 지금에야 얻은 거지.’
무려 제1위 대악마와 제2위 대악마가 드롭한 스킬들이다.
이런 개사기 스킬을 초반부터 얻었으면 좋았겠다고 아쉬워하는 건 양심이 없는 거다.
마음을 달랜 그리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군악대의 연주가 마리로즈의 입장을 알리고 있었다.
예식장 입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그리드가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가 입장했다.
그녀 덕분에 삶을 되찾은 형제들의 배웅을 받으면서다.
물론 브라함은 그들 사이에 없었다.
브라함은...
“저게 뭐가 예쁘다는 거지?”
다른 사도들과 함께 하객석에 앉아있었다.
마리로즈가 나타나자 술렁이는 사람들의 반응을 몹시 불쾌하게 여기면서.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마리로즈보다 몇 수 위다.”
“...”
별로 상상하기 싫은 가정을 덧붙이는 브라함이었지만.
그리드는 그에게 마음 깊이 감사했다.
자신을 위해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를 훼방 놓은 걸로 모자라.
어머니를 해친 마리로즈의 입장을 헤아리고 원망하지 않았으니까.
사실 마리로즈를 대하는 태도는 예전과 똑같이 쌀쌀 맞았지만 순순히 하객으로 참가했다는 게 증거다.
어쩌면 브라함은.
베리아체가 마리로즈를 헤치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점부터 마리로즈를 가엾게 여긴 걸 수도 있다.
애써 외면해온 형제애를 상기하는 계기가 됐겠지.
‘언젠간 사이좋게 지내는 날이 올 수도...’
...아니, 그건 아닌가?
고아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그리드를 향해 다가오는 마리로즈를 노려보는 브라함의 두 눈에 적의를 넘어서는 살의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광경을 목격한 그리드가 헛기침했다.
“우와아...”
하객들은 반쯤 넋이 나가있었다.
인종, 종족, 국경을 초월한 사람들.
오늘 그리드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하객들 전부 입장과 무관하게 마리로즈에게 매혹당했다.
라우엘이 우스갯소리로 말하길.
만약 그리드와 마리로즈에게 압도적인 힘과 권력이 없었다면.
마리로즈의 미모에 홀린 사람들 탓에 제국에 망조가 들었을 거라고 했다.
마리로즈를 얻기 위해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있었을 거란 말이다.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마리로즈의 미모를 표현함에 있어선 경국지색이라는 말도 부족했으니까.
“와 씨. 기죽네.”
언제나 당당한 지슈카조차 그렇게 중얼거릴 정도였다.
심지어 메르세데스는 화장을 했다.
기사 중의 기사답게 치장에는 일체 관심이 없던 그녀가 마리로즈에게 위기의식을 느끼고 한껏 멋을 낸 것이다.
그리드에겐 그녀들 전부 예뻐 보였다.
아니,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마찬가지다.
아이린, 유라, 지슈카, 메르세데스, 바사라.
전부 경국지색이라고 표현할 만한 미인들이다.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그녀들이 어째서 그리드 한 명에게...
한동안 잊고 있던 질투심을 재차 품게 된 사람들이 그리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하나 둘씩 감정을 추슬렀다.
인자한 미소를 짓고 신부를 맞이하는 그리드의 모습을 확인한 여파다.
전장에서와 달리 예장을 갖춘 그리드는 객관적으로 봐도 멋졌다.
여태껏 그가 이뤄온 업적들만큼이나 빛나 보였다.
어떤 면으로 보나.
질투할 만한 대상이 아닌 것이다.
다른 볼품없는 남자가 아닌 그리드가 저들과 맺어진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음 순서로...”
술렁이던 분위기가 완전히 진정되고.
순수한 호의와 축복으로 가득 찬 예식장에 진행을 맡은 후로이의 음성이 울렸다.
월드 스타 라엘라와 냥멍이가 축가를 불렀고 피아로가 축사를 맡았다.
어째서 이토록 급히 혼인을 올린 걸까.
다소 의아함을 느끼던 템빨단원들이 서서히 이유를 깨달았다.
세계가 구원 받은 날.
기뻐하면서도 얼떨떨해서 다소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던 민중이 하객으로 찾아온 영웅들의 면면을 확인하고 안도하는 광경을 수차례 목격한 것이다.
나는.
우리들은 늘 당신들의 곁에 있다...
아마 그리드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자기 결혼마저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도구로 활용하는 거냐... 속이 얼마나 깊은 거냐고, 갓리드.”
감동한 극검은 눈시울마저 붉혔다.
평소 사이가 가까운 기자들에게 그리드의 속내를 기사로 잘 살리라고 신신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급기야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그리드와 마리로즈가 입을 맞추는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환호하는 사람들 전부 그리드와 마리로즈의 앞날을 진정으로 축복해주었다.
‘...행복하다.’
고통 없는 키스.
비릿한 피 맛이 아닌, 마리로즈의 부드러운 입술 감촉을 느낀 그리드가 기뻐서 몸을 떨었다.
마리로즈는 다른 의미로 떨고 있었다.
온 세상을 통틀어서 고강한 절대자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드물게 동요했다.
자신의 뺨과 허리를 감싼 그리드의 손 때문이었다.
뭔가...
뭔가 여태껏 몰랐던 감각이 그녀의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진심으로 생소하고 무시무시한 감각이었다.
머리가 새하얘지면서 자칫 다리에서 힘이 풀릴 뻔했다.
아이린에게 처신을 잘하겠노라 맹세했던 게 부질없게도 사람들 앞에서 추태를 보일 뻔했다.
“...마리로즈?”
호흡이 미묘하게 가빠진 마리로즈의 반응이 그리드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설마 뱀파이어의 본능에 시달리는 건가?
어쩌면 또 입술을 물어뜯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해하는 그리드의 가슴에 이마를 기댄 마리로즈가 속삭였다.
“오늘 밤이 두렵구나.”
“...??”
***
성대한 축제를 벌린 그리드 덕분에 지상의 감시가 소홀해졌다.
제1위 대천사 리파엘에겐 기회였다.
은밀하게 지상에 내려온 그가 지옥으로 이동했다.
지옥.
영토의 상당수가 템빨계에 편입 됐다곤 하나 지상과는 사정이 달랐다.
왜곡의 잔재가 남아 일부 지역은 바알이 살아있을 때처럼 불안정했다.
여전히 악의로 물든 악마와 마물들을 의외로 찾기 쉬웠다.
리파엘은 방황하는 대악마들을 수색했다.
순백의 날개와 빛의 고리.
성스러운 천사의 자태에 어울리지 않는 음침한 공간들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끝내 찾아냈다.
짐승처럼 서로를 물어뜯고 있는 흉포한 악마들을.
“주인 잃은 짐승들아. 내가 너희에게 도움을 주마.”
“...그것 참 고맙네요?”
다른 대악마를 포식하고 있던 대악마들.
쌍둥이처럼 꼭 닮은 그녀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리파엘을 반겼다.
‘시작부터 일이 잘 풀리는군.’
리파엘 역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