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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73화 (87권 21화) (1,772/1,794)

템빨 87권 - 21화

망겜일 뻔했다.

그리드의 지옥 원정을 지켜본 사람들의 전반적인 반응이었다.

바알을 죽여도 끝나지 않고 사건이 거듭됐던 이번 원정.

만약 그리드가 실패를 겪었다면.

사람들은 진짜 뭣 같은 게임이라면서 단체로 S.A그룹에 항의했을 거다.

이런 염병.

최종 보스를 해치웠는데도 끝나지 않고 연달아 위기가 찾아오는 건 무슨 개 같은 경우란 말인가?

응원하는 입장에서도 조마조마했다.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당사자들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단체로 시위하면 뭐해. 어차피 게임을 접진 못했을 거면서. 안 그래?”

“대체제가 없으니까요.”

“바로 그게 Satisfy의 무서운 점이지. 만약 그리드라는 구심점이 없었다면 유저들은 기업을 상대로 항상 을이었을 거다.”

템빨제국의 수도 라인하르트.

그리고 라인하르트 상공에 떠올라있는 초거대 비행선, 신들의 무덤.

하늘과 땅에 나란히 자리 잡은 ‘지상 최대의 도시’와 ‘천공 최대의 도시’에서 성대한 축제가 열렸다.

성공적인 원정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열린 축제다.

템빨단 스스로 자축하는 규모를 아득히 넘어섰다.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찾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라인하르트와 신들의 무덤에 몰린 인파는 무지막지했다.

실로 유래가 없는.

또한 앞으로도 없을 규모의 축제인 것이다.

근심걱정 없이 축제를 만끽하는 군상들을 지켜보면서, 세계 각국의 3류 언론사 기자들은 확신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그로를 끈답시고 그리드와 템빨단에게 악의적인 기사를 작성했다간 누군가에게 반드시 테러를 당할 것이다...

이번만큼은 투철한 직업 정신을 버리는 게 옳다...

본래 ‘카더라’나 ‘아님 말고’식의 찌라시를 밥벌이로 삼던 삼류 기자들이 함부로 나대지 못하자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국경과 인종, 사상을 초월하는 언론 대통합이 이뤄진 것이다.

전 세계에서 무조건 그리드와 템빨단에게 호의적인 기사만 쏟아졌다.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위인도, 집단도 이루진 못한 일이다.

물론 그에 따른 반동이 발생했다.

이대론 밥벌이를 잃을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일까.

세계 각국의 찌라시와 황색 언론이 S.A그룹을 표적으로 삼고 집요하게 물어뜯었다.

만약 그리드와 템빨단이 없었다면 그 누가 바알과 숨겨진 보스들을 연달아 격파하고 지옥을 정화시켰겠냐면서.

S.A그룹은 사실 Satisfy의 엔딩을 배드 엔딩으로 정해놨던 거 아니냐며, 평소 Satisfy가 사람들의 희망이 됐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수차례 내놨던 임철호 회장을 가식적인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속이 다 후련하네.”

극검이 껄껄 웃었다.

대부분의 템빨단원들이 같은 반응을 보였다.

사실 그들이야말로 가장 S.A그룹을 비난하고 싶은 입장이었다.

특히 ‘바알의 죽음이 아수라를 탄생시켰다.’는 전개를 맞이했을 땐 진짜... 평생 입에 담지 못했던 욕설을 토한 사람도 많았다.

한데 평소 증오했던 삼류 언론사들이 똑같은 증오의 대상을 표적으로 삼고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완벽한 이이제이군.”

슬며시 미소 지은 하오가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여전히 금색 가면을 뒤집어 쓴 채다.

이벨린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 가면은... 대체 왜 쓰고 계신 거예요?”

레가스가 가면을 쓰고 있던 이유는 밝혀졌다.

아수라 레이드 당시.

그간 <아수라>라는 직업에 발목을 붙잡혀 성장하지 못했던 레가스가 아수라의 스킬을 실시간으로 복제하며 폭발적인 발전을 이뤘다.

몇 년 동안 억압 받아온 한을 풀 기세였다.

그래, 가면을 쓴 이유가 충분히 납득이 됐다.

만약 아수라가 레가스의 얼굴을 알아보고 경계했다면.

레가스는 아수라의 기술을 복제하지도 못했을 거고, 허를 찌르지도 못해 비반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을 거다.

레가스는 정체를 숨길 필요가 있었다.

반면 하오는?

그가 가면을 써야했던 이유는 여전히 의문이다...

씁쓸하게 웃는 하오를 대신해서 레가스가 설명해주었다.

“지금 저 언론사들의 태도를 봐. 만약 하오 님이 우리와 함께 활동하는 게 밝혀졌다면 중국에서 아주 난리가 났을 걸.”

“아.”

바로 이해됐다.

국대전에서 그리드에게 패배를 인정했다는 이유만으로 중국의 역적이 됐던 하오다.

감당하기 힘든 비난을 너무 많이, 오랫동안 받아왔다.

정체를 숨기고 싶어 했던 마음이 십분 이해됐다.

“저들이 비난하는 대상이 S.A가 아닌 하오 님이 될 뻔했네요. 유명하다는 것도 참 힘든 일이에요.”

이벨린 본인도 유명인사다.

지금은 S.A그룹을 부모 원수마냥 물어뜯고 있는 저 삼류 언론사들에게 이벨린 역시 엄청나게 시달려왔다. 하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단 말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그리드가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하오가 실소했다.

지옥 원정 성공.

인류 구원이라는 엄청난 업적을 세운 직후다.

막말로 모든 인류의 시선이 그리드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하물며 지금은 ‘템빨단이 쏜다.’는 자극적인 홍보문구를 사용한 축제가 열리는 기간이었다.

축제 기간 동안 라인하르트와 신들의 무덤에 방문한 관광객은 음식과 음료를 ‘무료’로 무제한 즐길 수 있다.

라우엘의 계산에 따르면 그래도 남는 장사였다.

아니, ‘그래야 더 많이 남는 장사’였다.

음식과 음료를 무제한으로 제공한다는 홍보 문구 덕분에 엉덩이 무거운 사람들조차 축제를 방문하게 됐다.

그리고 라인하르트는 Satisfy 최고의 도시답게 온갖 진귀한 물건을 판매하고 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라인하르트에서 가장 작은 시장의 구석에서 장사하는 가판대 퀄리티가 중소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상점이 구비하고 있는 물품의 퀄리티와 맞먹을 정도다.

지갑을 열 수밖에 없는 구조란 뜻.

게다가 이번 축제 관광객 중에는 마족도 엄청나게 많았다.

평생 안전지대에 갇혀 지내다가 자유를 되찾고 처음으로 지상에 올라온 선량한 마족들.

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땐 라인하르트에서 파는 평범한 물품들이 평생에 한 번도 못 본 진귀한 보물이었다.

행복해서 울부짖는 라빗 행정관의 모습이 자연히 상상 될 지경이었다.

아무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찾은 이곳에서.

오늘 그리드는 깜짝 혼인식을 올릴 예정이다.

그리드가 종종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이유가 ‘여성 편력’ 단 하나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엄청나게 과감한 결단이 아닐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리드에게 무조건 호의적인 언론과 여론 중 일부가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겠지.”

현재 그리드는 3명의 부인을 두고 있다.

물론 어지간한 작위를 얻은 플레이어만 되도 다수의 남성이나 여성과 혼인을 올리는 실정이라지만, 그리드의 문제는 현실에도 2명의 연인을 뒀다는 점이다.

이 상황에서 새로운 부인을 맞아들인다?

지금은 S.A그룹을 물어뜯기 바쁜 언론이 그리드에게 시선을 돌려버릴 것이다.

그 사실을 뻔히 알 텐데도 그리드는 이번에 기필코 혼인을 올리겠다는 것이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 받고 싶다면서.

이쯤 되면 그리드는 언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단 의미가 됐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아온 까닭에 그 누구보다 더 언론에 시달려왔을 테면서.

하오나 이벨린 입장에선 정말 본받고 싶은 강심장이었다.

아니, 불가해에 가깝게 다가왔다.

한동안 그리드가 겪게 될 비난을 걱정하는 템빨단원들 사이로 라우엘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사실 지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

황제의 혼인식을 앞둔 만큼 휘황찬란한 예장을 갖춘 상태였다.

“어차피 올려야 할 혼인식입니다. 여론이 좋을 때 실행하는 편이 그나마 반발이 덜하겠죠.”

라우엘은 그리드의 혼인을 정치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다.

마리로즈의 무력이 그리드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모든 사태가 끝난 후.

다짜고짜 찾아와 마리로즈와 어서 혼인하겠다는 그리드를 사실 가엾게 여겼다.

마리로즈가 어떤 존재인지 수차례 목격했던 까닭이다.

키스를 빙자해 그리드의 입술을 물어뜯고 피를 핥았던 마리로즈의 사악한 모습을... 라우엘은 결코 잊지 못한다.

후로이도 마찬가지였다.

‘가엾은 주군...’

대체 무슨 협박을 받으셨기에 혼인을 그토록 서두르실까.

고룡을 웃으며 난도했던 괴물 같은 여자에게 앞으로 평생 시달리실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안타깝다. 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모두가 그리드를 걱정하는 그때.

“반갑구나.”

“안녕하세요.”

“...”

그리드는 조금 다른 이유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린에게 새로운 부인을 소개하는 순간.

어느덧 벌써 3번째건만 이때만큼은 늘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하물며 이번 상대는 절대자다.

사실 이번만큼은 아이린의 속내보다 마리로즈의 속내가 더 두려웠다.

자칫 아이린에게 해코지를 하는 건 아닐까.

걱정되어 신경을 곤두 세웠다.

그리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린은 언제나처럼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뱀파이어 공작 베리아체. 귀공에 대해선 저 또한 잘 알고 있어요. 명성이 워낙 대단하시니까요. 세상에 드문 절대자이면서 연배도 저보다 한참 위라고 알고 있어요. 제가 성심성의껏 섬겨야 옳은 대상이시죠.”

“잘 알고 있구나.”

귀공...?

예상치 못한 호칭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마리로즈가 서서히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낭군의 정실.

낭군이 가장 먼저 사랑하게 된 암컷이며, 낭군의 아이를 낳기도 했다.

어느 정도는 존중해줄 생각이었다.

물론 존중이라고 해봤자 정실의 지위를 보장하고 말을 섞어주는 정도겠지만.

마리로즈는 현실적으로 봤다.

절대자인 자신과 신의 반려일 뿐인 아이린.

두 사람의 위계는 하늘과 땅 차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얼굴을 맞댈 일 자체가 앞으로는 거의 없을 것이다.

생각할 때였다.

“하지만 폐하께서 귀공을 비(妃)로 맞이하시게 됐으니 섬기지 못하게 되었네요. 귀공보다 저의 위계가 높아졌음에 두렵고, 떨리긴 하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똑바로 처신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

마리로즈가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섣불리 반응할 수가 없었다.

아이린에게 그 어떤 악의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절대자의 감각이 전하는 진실이었다.

지금 아이린은 텃세 따위를 부리는 게 아니다.

마리로즈를 업신여기지도, 질투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리드의 정실로서, 제국의 황후이자 백성들의 어머니로서, 스스로를 자각하고 처신하고 있었다.

본인이 밝힌 그대로 용기를 쥐어짜고 있었다.

‘...본래 작은 소국의 백작 영애에 불과했었다던가.’

결의에 찬 아이린의 눈빛을 물끄러미 응시한 마리로즈가 그녀의 입장을 헤아려봤다.

아이린.

그녀의 혈통은 사하란 제국의 귀족이자 제일기사였던 메르세데스보다 못하다. 황제였던 바사라와는 비교 대상 자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리드와 혼인한 이후 그녀의 신분은 계속해서 바뀌어왔다.

공작의 부인에서 왕의 부인으로, 황제의 부인에서 신의 부인으로.

본래 고개를 숙여야 마땅한 대상들에게 역으로 섬김 받게 되었다.

마냥 기뻤을까?

심성을 보아하니 기쁨보단 커다란 부담감에 시달렸을 눈치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겠지.

이 순간 몹시 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손끝 하나 떨지 않는 모습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을지 뻔히 보인다.

“마음에 드네.”

아이린의 잇달은 발언 이후.

침묵을 지켜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어가던 마리로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이린 황후 그대의 마음가짐은 잘 알았어. 나도 알맞게 처신하도록 할 테니 큰 염려마렴. 아, 그리고.”

생각보다 온화한 태도.

의외로 살갑게 말하는 마리로즈를 보고 안도하던 그리드가 재차 긴장했다.

혹시 앞으론 말조심 하라고 덧붙이려는 건가... 그런 걱정을 품었다.

아직 마리로즈에 대해서 잘 모르기에 하는 억측이었다.

“나 또한 잘 부탁한단다.”

어제까진 그리드에게만 보여줬던 부드러운 미소.

남녀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매혹할 만한 미소를 머금은 마리로즈가 아이린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드와 더불어 잘 보살펴줄게.”

네, 언니라고 대답할 뻔한 아이린이 황급히 입을 가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뭐? 그리드가 ‘또’ 결혼을 한다고?”

선전관 후로이의 대대적인 깜짝 발표가 라인하르트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아니, 전 세계가 난리가 났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기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심지어 공개 결혼식이네?”

무슨 배짱인지 예식장을 민간에까지 공개하는 그리드의 태도를 꼬집으면서였다.

“정말 거리낄 게 없다는 태도군.”

“그러게 말이야. 나중엔 궁녀 3천 명 들였다고 자랑이라도 할 기세군.”

여성 편력 부끄럽게 여기진 못할망정 도리어 과시하다니.

아무리 Satisfy라지만.

또한 세상을 구한 영웅이라지만 도가 지나쳤다.

물론 Satisfy의 주민들은 마냥 찬양할 테지만 현대인들의 관점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이때를 기회로 삼아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내기 위해 준비하던 기자들이 일제히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투명한 면사포를 뒤집어 쓴 여인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순백의 드레스보다 도리어 하얗게 느껴지는 피부를 지닌 여인.

홍옥 같은 눈동자로 오직 그리드만을 바라보는 그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마리로즈였다.

또한 그녀가 바로 신부였다.

신부 입장을 외치는 후로이와 경례를 올리는 기사들의 몸짓이 실시간으로 진실을 전달하고 있었다.

“...”

슥슥, 슥슥슥.

하객들 전부 마리로즈의 고아한 자태에 매혹되어 적막에 잠긴 예식장에 펜 소리만 울렸다.

죄다 빗금을 치는 소리였다.

기자들이 뭔가를 지우는 듯했다.

곧 속보가 쏟아졌다.

<그리드의 결혼을 축하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리드를 비판하기엔 신부가 너무 아름답다>

<이 결혼은 인정입니다.>

사람들이 마리로즈를 묘사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 있다.

모든 인간의 이상형을 집약시켜놓은 듯하다는 표현이었다.

기자들은 그리드를 도무지 비판할 수가 없었다.

무조건 그리드의 선택을 공감하고, 존중하고, 인정했다.

인간인 이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리드를 비판했다간 그리드를 질투하는 머저리 취급밖에 못 받기도 했다.

덕분에 그리드의 결혼식은 축복 속에서 평온하게 진행 됐다.

(87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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