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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72화 (1,771/1,794)

템빨 87권 - 20화

“곧이다.”

아스가르드.

평소 엄숙했던 천상이 드물게 북적거렸다.

쥬다르가 신들을 소집한 여파다.

지옥의 상황을 주시하는 지혜의 신.

오랜 세월 무심했던 그의 두 눈이, 먼 과거의 신화가 묘사하는 것처럼 현기를 머금고 빛난다.

도미니언을 비롯한 다른 주신들 또한 상황에 집중했다.

그리드로 인해서 정화 된 지옥.

오늘 그곳에서 해방 될 존재 중 몇은 아스가르드의 입장에서도 탐나는 인재였다.

그들의 영혼이 윤회의 강을 건너기 전에 낚아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쥬다르가 신호한 순간.

촤르르르륵.

제1위 대천사 리파엘이 빛으로 가지를 빚은 뒤 줄을 엮었다. 끝에 날카로운 바늘이 달린 줄이었다.

“실패해선 안 된다.”

“예.”

평소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광경.

신들을 은근히 깔보는 것으로 유명한 리파엘이 몹시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물론 천하의 리파엘도 도미니언과 쥬다르 앞에선 겸손해지게 마련이었지만 오늘은 정도가 심했다.

이유야 간단하다.

빛의 힘으로도 즉시 치유하지 못한 멍투성이의 얼굴.

구출되기 전까지.

즉, 방금 전까지 ‘영원의 감옥’에 갇혀있던 제1위 대천사는 기세를 잃었다.

듣자하니 상당한 실책을 저질렀다.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와 그의 후임으로 지목됐던 천사 칸.

본래 감옥에 갇혀있던 죄수들을 그리드에게 빼앗긴 걸로 모자라 자기 자신이 감옥에 갇혀버린 것이다.

하물며 자격을 잃은 제라툴에게 죽기 직전까지 내몰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젠 그가 죄인이다.

천사장의 자격을 언제 빼앗겨도 이상하지 않은 신세였다.

‘제길.’

신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이를 악 문 리파엘이 감정을 추슬렀다.

어떻게든 만회해야할 때다.

지옥 너머를 비추는 우물을 잠자코 주시하다가 빛으로 엮은 낚싯줄을 집어던졌다.

표적은 바알.

놀랍게도 그리드에게 살해당한 놈의 영혼을 낚아채 천상으로 끌어올릴 계획이었다.

한데 실패했다.

낚싯줄이 지옥에 도달했을 땐 이미.

“...!”

바알의 영혼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윤회의 강으로 향하지 않고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스스로 만든 악신에게 제물로 공양되었나.”

내가 또 무슨 실수를 저질렀다고?

등골이 오싹해진 리파엘이 걱정하는 와중에 쥬다르는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면서 리파엘에게 채근하는 눈짓을 보냈다.

리파엘이 급히 움직였다.

바알이 남긴 힘의 잔재라도 낚아채기 위해 낚싯줄을 꺾었다.

늦었다.

불쑥 나타난 베리아체의 영혼이 바알의 힘을 취해버렸다.

그 잠깐 사이에 죽어버린 아모락트의 힘도 함께였다.

“저 콩알 만한 것이...!”

리파엘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노력해온 것이 무색하게도 금방 흥분했다.

이대로 실패했다간 정말로 위험하다고 생각한 그가 낚아 챌 표적을 베리아체로 바꿨다.

그러다가 문득.

“...”

베리아체와 시선을 마주쳤다.

빛의 낚싯줄을 육안으로 확인한 눈치였다.

흠칫 놀란 리파엘이 잽싸게 줄을 거뒀다.

‘명색이 야탄의 자식이라는 건가.’

빛의 낚싯줄.

본래 하위 세계의 존재들은 인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세계의 주인, 혹은 주인의 핏줄쯤 되면 인식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자칫 낚싯줄을 빼앗길 수도 있었다...

오싹해져서 다소 거친 숨을 헐떡이는 리파엘에게 누군가가 이죽거렸다.

“뭐 제대로 하는 일이 없네요?”

금전의 신 베니스다.

주신 중에서도 가장 볼품없는 존재.

물건을 사고 팔며 남긴 이윤을 명성과 신성으로 치환해 연명하는 장사치 따위, 본래 리파엘에겐 몹시 하찮은 대상이었다.

그녀가 뭐라고 지껄여봤자 리파엘에겐 개 짖는 소리에 불과했고 여태껏 감히 그녀가 리파엘에게 함부로 지껄인 적도 없었다.

지금은 정말로... 상황이 엄청나게 바뀐 것이다.

분해 주먹을 말아 쥐면서도 베니스에게 눈길조차 보내지 못하는 리파엘.

숙인 고개를 들지 못하던 그가 쥬다르의 혼잣말을 들었다.

“어차피 아수라가 가장 큰 표적 중 하나였으니 차라리 잘 됐다.”

쥬다르의 시선을 쫓아.

주신들과 리파엘이 우물 너머의 지옥을 다시금 주목했다.

새로운 악신 아수라.

몹시 고강했다.

자신의 근원. 즉, 붉은 살덩어리와 하나를 이루게 되면 얼마나 더 강해질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통제할 수 있겠나?”

지친 그리드가 과연 아수라를 감당할 수 있을까...

일부 신들은 그런 의문을 품는 가운데 전쟁의 신 도미니언은 아수라의 패배를 당연하게 예견했다.

쥬다르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통제할 이유가 있을까.”

그 순간.

잠시 쥬다르의 눈길을 받게 된 리파엘은 깨닫고 말았다.

그간 자신이 누려온 모든 자유는.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단지 쥬다르가 묵인했을 뿐이다.

자신이 어떻게 날뛰든 대세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태도로.

‘이런... 제기랄...’

나는 울타리 안에 풀어진 개에 불과했구나.

깨달은 리파엘이 엄청난 수치심에 휩싸이는 그때였다.

“오를 것이다.”

쥬다르가 말했다.

‘자신의 기술을 고스란히 학습’하는 그리드의 기괴한 천사에게 허를 찔린 것을 계기로 비반에게 크게 베인 아수라가 마침 허물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데빌 슬레이어에 의해 근원인 붉은 살덩어리조차 소멸하자 저력을 상실한 아수라는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스스로의 의지로 빛의 낚싯줄을 향해 영혼을 쏘아 올렸다.

쥬다르가 친히 신탁을 내린 눈치였다.

새로운 악신을 취했다.

이와 같은 사실에 신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아수라가 제라툴의 공백을 메우고도 남을 거라는 반응과 사악한 존재를 여신의 영역에 들여도 되는 거냐는 반응.

전자는 아스가르드의 방위에 집착했고 후자는 아스가르드의 본질에 집착했다.

다 부질없었다.

그들의 반응은 의견이 되지 못한다.

레베카가 주기에 들었을 때 모든 선택권은 쥬다르와 도미니언에게 있었으니까.

다만 나서는 경우가 드물어 리파엘이 활개를 쳐왔을 뿐이다.

“리파엘.”

“예.”

“무엇보다 대별을 반드시 손에 넣어야한다.”

대별왕.

태초신 한울의 자식으로 쥬다르, 도미니언과 위계가 같다.

물론 위계만 따지면 소별왕과 태초의 3악 역시 같았지만, 대별왕은 몹시 특별했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잊지 못한다.

칠악성이 감히 반기를 들었을 당시.

그들을 돕기 위해 활의 시위를 당겼던 대별왕의 신력은 가히 일품이었다.

여신께서 빛으로 직접 빚으신 가장 큰 태양이 떨어져버렸으니까.

쥬다르가 경각심을 느꼈을 정도다.

그 순간만큼은 천상의 모든 신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었다.

오직 대별왕을 토벌하기 위해 하나로 뭉쳤다.

심지어 도미니언이 필두에 섰다.

안 그래도 지옥에 떨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잊히고 약해진 대별왕은 신들의 공세를 감당하지 못했다.

끝내 수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고 바알의 손아귀에 들어가 붉은 살덩어리로 전락해버렸다.

쥬다르는 그의 저력에 집착했다.

대별왕이 순순히 윤회의 과정을 겪고 부활할 경우.

언젠가 반드시 천상에 독이 될 거라고 보았다.

차라리 천상으로 불러들여 꼭두각시로 삼을 계획이었다.

“친히 내려가는 게 좋을 듯한데.”

지옥의 일부가 템빨계로 편입되어가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일부에 불과했다.

도미니언이 창을 쥐었다.

고맙게도 윤회를 거부하며 그리드의 부하들과 다투는 대별왕을 직접 포획하겠노라 선언했다.

잠시 고민해본 쥬다르가 고개를 끄덕였고,

파앗...

빛 무리에 감싸인 도미니언이 현장에서 사라졌다.

베리아체에게 눈이 먼 그리드가 없는 틈에 그가 대별왕을 확보하리라.

신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

도미니언은 지옥에 나타나지 않았다.

쥬다르가 즉시 상황을 파악했다.

“역시... 지상에서 발목을 붙잡혔나.”

천상에서 지옥에 도달하기 위해선 지상을 경유해야한다.

도미니언의 도착이 늦어진다는 건 지상에 발이 묶였다는 뜻이 됐다.

하지만 감히 그 누가 도미니언을 훼방 놓을 수 있단 말인가?

비록 지상은 템빨계의 영역으로 도미니언을 크게 약화시킨다고 하지만, 그리드가 아닌 존재가 도미니언의 앞길을 가로막는 건 불가능했다.

“고룡이라도 개입한 건가...?”

신들이 술렁였다.

비현실적인 일이긴 했지만, 나름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얼마 전 천상에 잠입했던 그리드를 미식룡 레이더스가 도왔다는 정황이 있었으니까.

쥬다르의 생각은 달랐다.

“이브다. 긴 세월 행방이 묘연하더니 그리드와 연이 닿은 거군.”

야탄의 사도.

그녀는 사도 중에서도 특별하다.

야탄의 성격 때문이다.

대상을 직접 만들고 역할을 부여한 뒤 모든 걸 맡기는 레베카나 한울과 달리, 야탄은 지상에서 친히 이브라는 인간을 찾은 뒤 그녀를 애정으로 키웠다.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가르쳤다.

템빨계의 억압을 받아 약해진 도미니언이 즉시 제압하기엔 무리가 있는 상대였다.

“리파엘, 네가 해내야 한다.”

“...예.”

낚싯대를 거머쥔 리파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힘을 주지 않으면 덜덜 떨릴 것 같았으니까.

그는 직감하고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그리드의 부하들에게 발이 묶인 대별왕.

기회를 틈타 놈의 영혼을 낚아채지 못하게 될 경우.

쥬다르는 내게 두 번 다신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제길, 내가 어쩌다가 이런 꼴을.’

속으로 신세를 한탄하면서.

마른 침을 삼킨 리파엘은 온전히 대별왕에게 모든 감각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됐다!”

끝내 대별왕의 영혼을 낚아채는데 성공했다.

정말 한 끗 차이였다.

대별왕의 영혼이 윤회의 강에 빠지기 직전에 끌어올린 것이다.

“제가...! 제가 해냈습니다!”

이토록 큰 기쁨을 느끼는 게 얼마만인가.

오늘.

절대자답지 않게 온갖 감정에 휩쓸리던 리파엘이 급기야 환호하는 지경에 이른 그때.

“무용하다.”

쥬다르가 차갑게 뱉었다.

그와 동시에 리파엘 또한 눈치 챘다.

기껏 낚아 올린 대별왕의 영혼.

텅텅 비어있었다.

눈곱만큼의 신력도 남아있지 않은 껍데기였다.

만약 윤회한다면 어느 정도의 신력을 회복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봤자 큰 의미가 없을 터였고 이대로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쥬다르의 시선이 조금 전 대별왕이 쏜 화살의 표적이 됐던 인간 여성에게 꽂혔다.

“리파엘 네게 만회할 기회를 주지.”

***

“지슈카!”

“지슈카 님!!”

지슈카는 템빨단의 전신이 된 체다카 길드를 세운 인물이다.

지금도 템빨단 최강의 전력으로 군림하는 인물 중 상당수가 과거 그녀에게 섭외 된 인재들이었다.

상징성이 컸다.

그리드, 라우엘 다음으로 템빨단원들이 믿고 의지하는 존재가 바로 지슈카였다.

기껏 동료들을 위기에서 구한 그녀가 재차 죽음을 맞이하자 동요하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

유라와 크라우젤도 한달음에 달려왔다.

대별왕의 영혼이 쏜 화살에 제대로 적중당한 지슈카의 죽음을 어떻게든 막아보기 위해서였다.

갖고 있던 물약의 뚜껑을 따고 지슈카에게 왕창 쏟아부었다.

그 와중에 용케도 루비를 찾아 낚아채온 크라우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부활시키는 것조차 불가능한 건가?”

지슈카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아수라에게 살해당했다.

불사가 쿨타임에 걸려있단 의미다.

눈을 뜨지 않는 걸 보니 죽은 게 분명했다.

잿빛으로 산화하기 전에 부활시켜야 옳았다.

또한 루비의 궁극기 중엔 부활 스킬이 존재한다.

한데 스킬을 쓰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지옥 정화에 성공하고 축제 분위기를 만끽해야 할 이때.

지슈카는 연달아 2번의 죽음을 겪고 홀로 엄청난 손실을 겪게 생긴 것이다. 심지어 강제 로그아웃 당하고 축제를 멀리서 지켜보는 수밖에 없게 생겼다.

모두가 아쉬워하는 그때였다.

“어푸푸! 그만!!”

지슈카가 벌떡 일어났다.

코와 입으로 왕창 들어간 물약을 퉤퉤 뱉어내면서다.

어안이 벙벙해진 일행에게 루비가 뒤늦게 설명했다.

“죽지 않았어요. 오히려 멀쩡해요.”

“...?”

일행의 두 눈이 서서히 커졌다.

지슈카의 숨결을 따라 은은한 꽃향기가 번진단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혜양화의 향기였다.

대별왕이 남긴 한 줌의 신성이 지슈카에게 계승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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