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7권 - 19화
“그랬군...”
마리로즈를 낳은 이유.
놀이 죽게 된 경위.
베리아체가 저지른 만행을 모조리 알게 된 그리드의 표정은 냉담했다.
그녀의 소멸에 대해서 일말의 동정심도, 아쉬움도 느끼지 못했다.
나름 장모님이란 생각에 존중하려고 노력했던 몇 시간 전의 자신을 원망할 정도였다.
단, 브라함이 마음에 걸렸다.
필시 슬퍼할 테지.
‘...하지만 금방 극복할 거야.’
누구보다 먼저 베리아체의 앞길을 막았던 사람이 바로 브라함이다.
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하면서도, 마리로즈를 원망하고 증오하면서도, 그는 어머니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녀가 잘못 된 길을 걷고 있단 사실을 가장 먼저 눈치 채고 부정했다.
“혹시 다른 직계들도 부활시킬 수 있습니까?”
놀의 어두운 표정이 마음에 걸렸던 그리드가 화제를 바꿨다.
뱀파이어 백작 엘핀스톤, 크레이, 에티마, 루쏜, 그리고 후작 펜릴과 자작 티라멧, 라티나.
죽어 각자의 아티팩트에 귀속 된 그들 또한 놀처럼 완전한 부활이 가능할지 궁금했다.
“물론이란다. 하지만 낭군에게 이로울 게 없으니 관두도록 하렴.”
마리로즈는 직계들이 그리드와 악연으로 얽혔음을 신경 쓰는 눈치였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작 그리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전 괜찮습니다. 교육도 잘 끝냈고...”
직계들의 콧대는 브라함마냥 높지만, 그리드를 상대로는 예외였다.
이제 그들은 그리드의 손만 봐도 몸을 부르르 떨며 겸손해졌다.
완전히 부활해도 새삼 그리드에게 반기를 들 가능성은 적었다.
설령 반기를 들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놀과 다른 뱀파이어들이 좌시하지 않을 테니까.
이 세상 모든 뱀파이어의 도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리드의 영토였다.
“교육?”
순진한 놀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그리드에게 마리로즈가 말했다.
“나와 놀의 기분을 헤아리는 거라면 관두렴. 낭군의 재산인 그들을 굳이 빼앗고 싶지 않단다. 낭군이 곁에 두고 요긴하게 쓴다면 우리도 그걸로 만족해.”
이제 마리로즈는 ‘우리’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썼다.
오늘.
베리아체를 통해서 고독과 슬픔을, 그리드와 놀을 통해서 사랑과 희생을 경험한 그녀는 많은 걸 느꼈다. 온갖 감정을 깨우쳤다.
사람다워진 느낌.
변화한 마리로즈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요긴하게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습니다. 애초에 그들은 제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걸요.”
직계 뱀파이어들.
과거에는 그리드에게 위기를 선사했던 대적들이나 지금은 달랐다.
그리드의 적수들과 비교했을 때 한없이 약했고 실전에서 전혀 도움이 안 됐다.
한 마디로 쓸모가 없다.
차라리 부활시켜 뱀파이어 도시의 발전에 이바지하게 만드는 편이 훨씬 좋아보였다.
지금 부활하면 네임드 NPC 보정을 받는데다 나태의 저주도 극복할 테니까.
나태의 저주.
뱀파이어들의 혈통에 새겨져 그들을 억압해온 강력한 저주는, 지옥이 정화되면서 자연히 소멸됐다.
“그래, 이해가 되는구나.”
마리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드의 솔직한 고백에 일말의 과장도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나 또한 그들을 경험해봤다. 생전에도 쓸모가 없었지.”
“...”
그리드와 마리로즈의 대화가 놀을 자꾸 뜨끔하게 만들었다.
급기야 자리를 피하려던 그가 멈춰 섰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부활해 저주와 의무가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전과는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유.
브라함을 제외한 뱀파이어는 평생 누려보지 못한 개념이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일족에서 추방당했던 브라함이 도리어 축복을 받았던 셈이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지상의 절대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직계들은 새로운 운명을 부여받았다.
아티팩트라는 작은 공간 안에 갇혀있던 의식이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졌고 완전한 육신을 되찾았다.
마리로즈가 피로 만든 기적이었다.
“이런...”
모든 상황을 즉시 파악한 직계들이 당황했다.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그리드와 마리로즈를 증오하거나 질투했다는 것이다.
한데 그들의 호의로 되살아났다.
기분이 여러모로 복잡했다.
기뻐하며 호들갑을 떠는 놀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침묵을 깬 건 의외로 엘핀스톤이었다.
브라함에게 연인을 잃은 뒤로 혈족의 운명 전체를 증오했던 존재.
직계 중에서도 가장 회의적인 시선으로 삶을 마주했던 그가,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머금었다. 악의로 뒤틀린 미소가 아니라 편안하고 상냥한 미소였다.
그리드는 물론이고 그의 형제들 또한 처음 보는 표정이다.
“고맙다. 또한... 고생했다.”
오래토록 증오해온 상대들에게 진정어린 존경과 감사를 보내는 엘핀스톤.
고아한 귀족의 자태다.
다른 형제들 또한 본받기로 했다.
펜릴을 포함한 모든 직계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리드와 마리로즈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폭력 따위에 굴복해서가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존경심이 만드는 행동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어머니가 자처한 죽음이기도 했고, 본래부터 그들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그리워했었으니까.
베리아체의 복수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직계는 브라함이 유일했었다는 게 증거다.
[지옥이 정화되고 저주를 극복한 뱀파이어들이 당신에게 깊은 감사를 느낍니다.]
[직계 뱀파이어들과의 호감도가 최대치가 됩니다.]
[모든 뱀파이어 도시의 발전 속도와 생산량이 대폭 증가합니다.]
[재상 ‘라우엘’이 뱀파이어 도시의 세율을 37퍼센트로 올렸습니다.]
‘라우엘 반응 속도 뭐냐...’
정화 된 지옥은 여전히 실시간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아직 다 풀지 않은 선물보따리와 같다.
앞으로 그리드에게 더 많은 걸 내어줄 것이었다.
***
아주 먼 과거.
일곱 선인과 신들의 전쟁이 한창 심화됐을 무렵.
전쟁의 여파로 지상이 멸망할 것을 우려한 거인족은 천상에 오르고자 했다.
진귀한 보물들을 진상해 신들의 분노를 달랠 의도였다.
하지만 거인족이 만든 비행정조차 태양의 열기를 감당할 순 없었고, 끝내 거인족은 천상에 오르지 못했다.
바로 그때 도움을 준 신이 대별왕이었다.
대별왕이 쏜 화살이 3개의 태양 중 가장 큰 태양을 쏘아 맞춰 떨어뜨렸다.
덕분에 거인족을 태운 비행정은 천상에 오를 수 있었다.
당대의 인류는 모르는 신화.
이것은 거인족의 생존자 파일볼프가 직접 보고 겪은 실화다.
파일볼프의 말에 따르면 대별왕은 몹시 선한 신이었다.
신들 중 유일하게 지상의 위기를 좌시하지 않고 인류에게 도움을 줬다.
대가는 참혹했다.
모든 신이 대별왕을 비난하고 적대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그를 해쳤다.
그 결과 힘을 잃은 대별왕은 바알에게 고스란히 노출되어 붉은 살덩어리로 전락했던 것이다.
‘가엾은 존재.’
대별왕의 신화는 여러모로 배드 앤딩이었다.
대별왕 본인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물론이고, 대별왕의 도움을 받아 천상에 올랐던 거인족 역시 신들을 달래기는커녕 도리어 화를 사 멸망해버렸으니까.
일곱 선인.
그러니까 칠악성 또한 전쟁에서 패배하고 봉인 당했다.
무엇보다도 당시 대별왕은 이미 지옥에 적을 둔 상태였다.
그러므로 약해졌을 때 바알에게 고스란히 노출 됐던 것이다.
신들 중 드물게 선한 마음을 타고난 까닭에 평생토록 고통 받은 셈이었다.
그러니까 더욱 더.
“막아야하오.”
선두에 선 지크가 확언했다.
상처투성이가 된 대별왕보다 도리어 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다.
지크에게 대별왕은 각별할 수밖에 없다.
칠악성 중 하나였던 자신보다 도리어 더 동료들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존재.
진심으로 존경하고 가엾게 여겼다.
그러므로 그를 방관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별왕이 이대로 환국이나 천상으로 향해봤자.
그는 더 큰 고통에 시달릴 뿐이다.
약해진 상태론 복수를 이루기는커녕 조롱을 받으며 죽어갈 테니까.
미르의 생각 또한 같았다.
환국 출신답게 대별왕의 신화를 잘 아는 미르.
지크와 나란히 대별왕에게 검을 겨누고 선 그는 눈시울마저 붉히고 있었다.
대별왕의 신성이 피어나게 만든 꽃들을 보면서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혜양초.
미르가 배우기론 소별왕의 신성이 만든 꽃이라고 했다.
소별왕이 지상에 혜양초를 가득 피운 덕분에 인간들이 신의 위대함을 깨닫고 존경하게 됐다고 배웠었다.
하지만 무능하고 욕심만 그득한 인간의 본질에 실망한 소별왕은 언젠가부터 혜양초를 모조리 시들게 만들었고, 인간들은 그때부터 신들을 향한 존경을 잊고 한층 더 무지해졌다고 들었다.
지금 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거짓이었다.
애초에 혜양초는 대별왕의 신성이 만든 꽃이었다.
대별왕이 지옥에 떨어진 까닭에 지상의 혜양초들이 사라졌던 것이고.
“차라리 모든 걸 잊고 다시 태어나소서. 골백번을 다시 태어날지언정 필시 당신은 늘 위대하실 겁니다. 또한 기필코 행복하실 겁니다. 다시 태어난 당신을 제가 반드시 찾아내어 보살피겠습니다.”
템빨계에서 더불어 살아가자는 말은 감히 하지 못했다.
대별왕이 몸과 마음에 입은 상처는 치유될 만한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드를 비롯한 많은 존재들이 그를 위로하고 달랠지언정 과거의 그늘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게 분명했다.
다시 시작해야하는 이유다.
““이대로 떠나기엔 너무 분하고 원통하구나...””
대별왕은 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지크와 미르가 어떤 존경과 호의를 보일지언정 거기에 대해선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이미 눈이 멀었다.
그는 오직 과거에 집착하고 있었다.
신이 아닌 원혼에 가까웠다.
“꽃가루를 조심하게.”
침중한 분위기 속에서 비반이 조언했다.
일행이 즉시 반응했다.
사방팔방으로 산개하며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을 멀리했다.
파직! 파지지지지직!!
광범위하게 흩어진 꽃잎과 꽃가루들이 대별왕의 신성을 잇는 전도제가 됐다.
대별왕의 몸 주변으로 흐르던 신성이 전장 전체를 장악해버렸다.
“이곳은 이미 대별왕의 영역이야. 물리적으로 구현한 심상세계라고 해석해야 옳겠군.”
참혹하게 망가진 심상.
대별왕은 자신의 심상세계를 본능적으로 멀리했다. 자칫 어떤 괴물이 태어날지 몰라서였다.
하여 꽃밭을 만들고, 그를 매개로 현실 한가운데에 심상세계와 비슷한 영역을 구축해버린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능력이었다.
대별왕이 비록 지옥에 떨어졌을지언정 온전했던 시절.
어째서 ‘모든 신’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그를 해친 건지 이해됐다.
무지막지하게 강력했기 때문에 경계했던 게 아닐까.
““우선 동생을 만나리라.””
선언한 대별왕이 대량의 신성을 내뿜었다.
전장을 가득 채운 꽃가루와 꽃잎을 향해 직선으로, 사선으로, 곡선으로 도달하는 신성의 범람이 전장을 수천수만 개로 분절시켰다.
“큭...!”
코앞에 다가온 신성을 검으로 갈라낸 크라우젤이 신음했다.
손이 불타는 듯한 고통은 둘째다.
경로를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날아온 신성을 미처 피하지 못한 템빨단원들이 중상을 입는 광경을 목격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해버렸다.
강하다...
거듭되는 전투를 겪고 지친 일행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사도들조차 스스로를 보호하는 게 한계였고 비반은 여전히 전투 불능 상태였다. 내색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곤 있지만 상당한 중상을 입은 것으로 추측됐다.
‘내가 해결해야 돼.’
크라우젤이 의무감을 느꼈다.
다른 일행과 달리 마드라의 영혼 하나만을 감당한 그는 이곳에서 그나마 가장 멀쩡한 상태였다.
비교적 온전한 체력을 잘 활용해서 대별왕과 대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강해봤자 전성기엔 한참 못 미칠뿐더러 영체에 불과하다.’
절대신은커녕 무신 제라툴보다 한 급 아래가 아닐까.
신성을 광범위하게 퍼뜨리며 무기로 삼는 저 사기적인 능력에 현혹되어 너무 위축 될 필요가 없다...
거기까지 생각한 크라우젤이 즉시 몸을 날렸다.
대별왕과 거리를 좁혀 검광을 흩뿌렸다. 신성의 범람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노력하며 다른 일행이 기회를 엿보도록 의도했다.
푸화하하학...
연신 피가 솟구쳤다.
크라우젤의 몸에서 쏟아지는 피였다.
몇 번을 베어도 쓰러지지 않는 존재와의 싸움은 크라우젤을 일방적으로 지치게 만들었다.
그리드는 대체 어떤 심정으로 바알과 싸웠던 걸까?
한 몸이 된 크라우젤과 파그마가 동시에 숙연해지는 순간이었다.
-숙여!
누군가의 귓속말이 들려왔다.
정화 된 지옥이 플레이어의 강점을 부각시킨다.
소통의 자유와 이동의 자유.
죽어 지상으로 돌아갔던 지슈카가 원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엄청난 대규모 원군이었다.
템빨단 거의 전원과 이종족 왕들이 이끄는 이종족 연합군.
거기에 발할라의 깃발을 펄럭이는 아레스 군단이 함께였다.
“영웅들을 보호하라!”
병사들을 지휘하는 아스모펠의 외침이 들렸다.
전 적기사단원들 또한 템빨제국의 정예들을 이끌고 참전한 것이다.
푸욱!!
마침.
지슈카가 쏜 <파마의 화살>이 크라우젤의 귓등을 스치고 대별왕의 가슴에 꽂혔다.
대별왕은 미동조차 안 했다.
전혀 타격을 입지 않는 눈치였다.
그게 당연했다.
애초에 파마의 화살은 대별왕의 신성에서 비롯한 거니까.
과거 지슈카가 파마의 화살을 얻었던 ‘이름 모를 사당’은, 아주 먼 과거에 대별왕을 섬겼던 사당이다.
““이건...?””
가슴에 박힌 화살의 정체를 알아보고 놀라는 대별왕에게 지슈카가 소리쳤다.
“대별왕! 여전히 당신을 잊지 않고 섬기는 자들이 있어요! 그 화살을 쏜 내가 그중 하나구요!”
““...””
“우리가...! 우리가 반드시 당신의 복수를 해줄 테니까...!”
지슈카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쏴아아아아아...
아름다운 꽃잎과 꽃가루가 향기만을 남기고 사라져갔다.
거미줄과 같은 형태로 전장을 장악했던 신성 또한 거짓말처럼 걷혔다.
““고맙구나. 고마워...””
잊히지 않았다.
그것은, 의지와 달리 가장 추악한 형태로 타락했던 위대한 신에게 커다란 위안을 주었다.
이대로 환국이나 천상에 올라봤자 복수가 성공할 리 없다...
알면서도 스스로를 몰아세울 수밖에 없던 그에게 강력한 희망이 되었다.
““그대 덕분에 눈 감을 수 있겠다.””
파아앗...
가슴에서 파마의 화살을 뽑아낸 대별왕이 거대한 활을 꺼냈다.
태양마저 쏘아 맞췄던 궁사임에도 끝끝내 활을 꺼내지 않았던 그가 처음으로 ‘진짜 무기’를 꺼내 쥔 것이다.
끼릭-
파아앙...
대별왕이 당긴 활시위에 놓인 파마의 화살이 지슈카를 향해 쏘아졌다.
“어? 어라?”
뭐야? 고맙다며?
당황하는 지슈카의 심장을 파마의 화살이 관통했고,
“지슈카!!”
예상과 다른 전개에 놀란 동료들이 비명을 지르는 그때.
풍덩!!
모든 미련을 털어낸 대별왕은 윤회의 강으로 투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