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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70화 (1,769/1,794)

템빨 87권 - 18화

점차 확실해졌다.

어머니는.

베리아체는 처음부터 나를 제 몸으로 삼기 위해 나를 낳았다.

나의 의지와 달리 베리아체에게 이롭게 작용하는 내 힘이 증거다.

베리아체의 영혼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내 육신 또한 증거였다.

““슬프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너는 나를 몹시 원망하고 증오할 테지만, 네 감정과 별개로 나는 네게 깊은 애정을 느낀다. 나의 생명을 바쳐서 낳은 너를, 나를 닮은 너를, 나를 위해 살아온 너를... 사랑한단다, 나의 딸아.””

소름 돋게 속삭이면서.

베리아체의 영혼은 마리로즈의 육신에 스며들었다.

애초부터 자신을 위해 태어나고 가꾸어진 육신을 지극히 당연하게 빼앗았다.

“...”

손이, 다리가, 입이.

급기야 심장마저도 내가 아닌 베리아체를 위해 뛰게 됐음을 깨달았을 때.

마리로즈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사실 마음의 준비는 진즉 끝났다.

지난 세월 동안 쌓아온 힘과 마력이 베리아체를 해치지 않고 도리어 이롭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눈치 챘을 무렵부터, 마리로즈는 자신의 저항이 무의미하단 걸 깨달았다.

강한 운명에 옥죄이는 감각.

허탈감이나 상실감 따위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그녀를 한없이 무력하게 만들어갔다.

포기하자...

급기야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들이 내가 보고자하는 것과 달라졌을 때.

마리로즈는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다.

희미해지는 정신을 굳이 붙잡지 않고 베리아체에게 ‘나’를 바쳤다.

“...왜.”

그러다가 문득.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온갖 감정에 뒤얽혀 떨리는 목소리였다.

어두운 궁궐에 홀로 앉아 음미했던 시의 구절들이 떠올랐다.

[지상의 신이 다시 일어섰다.]

무수히 많은 죽음을 극복했던 바알.

지옥의 왕이 지닌 무한한 저력에 좌절할 법도 했건만, 그는 매 순간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났다.

[지상의 신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노라 말했다.]

급기야 태초의 모습을 되찾고 거인이 된 바알.

태산보다 거대한 몸집으로 결코 쓰러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지옥의 왕이 지상을 절망시켰을 때도, 그는 홀로 담담하게 읊었다.

[지상의 신이 공포의 근원을 끊었다.]

그리고 끝내 증명했다.

꺾이지 않는 의지가 지닌 힘을.

[당신들을 위해 싸웠다.]

그의 의지가 꺾이지 않았던 이유.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했다.

약한 자들을 위해서.

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그는 이를 악 물고 버틴 끝에 이겨낸 것이다.

그래, 나를 위해서 싸운 게 아니었다.

나는 약자가 아니니까.

그에게 보호 받을 대상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분노, 슬픔, 고통으로 얼룩진 그의 짧은 한 마디가 깨닫게 해주었다.

‘그대는... 나를 위해서도 싸웠던 거구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순간.

스륵.

마리로즈가 손을 뻗었다.

베리아체에게 빼앗긴 그녀의 육신은 당연히 호응하지 않았다.

마리로즈는 베리아체와 입장이 역전 된 상태였다.

아니, 조금 전까지의 베리아체보다 도리어 상황이 나빴다.

베리아체는 영체 상태로도 자유롭게 활동했던 반면 마리로즈의 영혼은 빼앗긴 육신에 붙들려 있었으니까.

그 참혹한 현실을 알기에 꺾였던 의지를, 마리로즈는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반려가 될 사내의 의지를 고스란히 답습했다.

꽈드득!!

바알의 힘.

베리아체의 영혼에 깃든 강력한 힘이 마리로즈의 영혼에 붙들린다.

아모락트의 힘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리로즈가 베리아체에게 계승한 권능이 작용하는 것이다.

만마의 힘이다.

근원인 베리아체를 상대로는 무력했던 권능이 이 순간 제대로 작동했다.

마리로즈가 베리아체에게 집어삼켜진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베리아체의 내부에 뿌리를 내렸던 힘들이 마리로즈에게 고스란히 노출됐다.

“우리가 혼인해서 여식을 낳게 되면 그 아이의 이름을 마리로즈라고 짓는 것도 괜찮...”

머잖아 소멸할 딸아이를 기리는 의미에서.

인간과는 다른 감각으로 헛소리를 지껄이던 베리아체가 입을 닫았다.

자신의 안에서 희미해져가던 마리로즈의 영혼이 무지막지하게 강력해지고 있단 사실을 눈치 채면서였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기껏 지옥에서 취해온 바알의 힘과 아모락트의 힘이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내가 아닌 마리로즈의 영혼에게 호응하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자신이 무엇을 간과했는지 알게 된 베리아체가 다급히 권능을 일으켰다.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려는 바알의 힘과 아모락트의 힘을 붙잡으려고 애썼다.

무의미했다.

마리로즈가 베리아체를 이기지 못한 이유는 순전히 상성 때문이었다.

그녀는 모든 면에서 베리아체보다 우월했고, 권능 또한 훨씬 더 능숙하게 다뤘다.

바알과 아모락트의 힘이 마리로즈에게 고스란히 노출 된 시점부터.

그것들은 이제 완전히 마리로즈의 것이었다.

하물며 조금 전 죽은 놀의 힘마저도 그랬다.

‘어머니... 우리는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 하잖아요.’

놀의 영혼이 베리아체를 감쌌다.

안 그래도 힘을 빼앗기고 약해진 베리아체의 영혼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해치려는 태도가 아니었다.

단순히 함께하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자애의 힘이다.

강력한 독이 됐다.

당장 꺼질 듯 위태로워진 베리아체의 영혼이 놀의 영혼에게 제멋대로 의지했다.

베리아체 본인의 의사와 달리 자식의 사랑에 기댔다.

“킥...”

점차 아찔함을 느끼던 베리아체가 마리로즈의 조소를 듣고 번뜩 정신을 차렸다.

“기다리렴, 낭군.”

마리로즈에게 자신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미 모든 게 어그러졌음을 깨달았다.

““안 돼...! 안 된다!! 내게는 아버지의 세계를 지킬 의무가...””

간절히 외치던 베리아체의 영혼이 입을 닫았다.

노을로 물든 세계.

막 피어난 마리로즈의 심상세계 안에서, 그녀는 마리로즈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보고 있었다.

“야탄의 세계는 없어. 그곳은 이미 그리드의 세계란다.”

오물을 대하는 태도.

마리로즈는 더 이상 베리아체를 존중하지 않았다.

잔혹한 현실을 주지시키고, 나락까지 절망시킨 뒤,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드의 신성으로, 그리드를 향한 애정으로 가득 찬 세계에 베리아체를 덩그러니 남겨놓고 떠나버렸다.

““마리로즈...!!””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이곳 마리로즈의 이상향에서 점차 희미해지고 끝내 삼켜질 것이다...

자신이 받게 될 형벌을 깨닫고 절망하는 베리아체의 절규가 무의미하게 메아리치는 그때.

마리로즈의 의식은 오롯이 현실에 집중했다.

사뿐.

왕좌에서 뛰어내린 그녀가 그리드 앞에 섰다.

완전체.

태초의 3악의 힘을 모조리 집어삼키고, 타고난 운명마저 끊어낸 마리로즈의 모습은 전과 달랐다.

외모가 바뀌었다는 게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완벽하게 아름다웠고, 다만 거기에 따스하고 순수한 미소가 보태졌을 뿐이었다.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사람처럼 보이지 않던 얼굴.

그로 인해 그리드가 느꼈던 거부감을 씻은 듯이 사라지게 만드는 미소였다.

‘...엄청 예쁘다.’

그리드는 단지 그런 감상을 느끼는 게 한계였다.

전후 사정을 잊고 눈앞의 마리로즈에게 매혹되었다.

마리로즈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 좋은 태도구나. 낭군은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이 소중한 것들만 바라보고 보살피면 된단다. 그걸로 족해.”

“아...”

이상했다.

별거 아닌 것 같은 말에 그리드는 엄청난 위안을 받았다.

이유가 뭘까 돌이켜본다.

지옥 원정 기간.

그리드는 각오했던 것보다 힘든 상황을, 또한 예상치 못했던 상황들을 연달아 겪었다.

바알을 죽이고 지옥을 정화하는 등.

목적을 달성한 것에 성취감보다 피로감을 훨씬 더 많이 느꼈다.

온갖 훼방을 받아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생긴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

물론 남들에겐 배부른 소리로 들릴 것이다.

세상사람 대부분은 실패만 반복하다가 좌절하기 일쑤였으니까.

어찌됐든 목적을 이룬 그리드가 불만을 토로한다는 건 일반적인 관점에서 납득하기 힘들 터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입장 자체가 달랐다.

그가 이번 원정을 준비하면서 투자한 시간과 돈, 노력은 보통의 영역을 초월한다.

그리드 혼자서 준비한 게 아니니까.

조금 간단히 예를 들면.

원정대가 사용할 버프 물약 등의 소모품을 제조하기 위한 재료를 수급하는데 투자한 인력만 수천 명이다.

그조차 지극히 일부였다.

그리드는 황제다.

그가 짠 계획을 실행한다는 건 즉 제국을 움직인다는 뜻이었다.

라우엘과 템빨단원들이 지난 몇 달 동안 부린 인력은 무려 수십 만 단위였다.

그리드는 그들의 땀과 노력, 또한 그보다 많은 사람들의 열망과 운명을 짊어지고 싸운 거였다.

자칫 일이 틀어졌다간 너무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좌절시킬 입장이었단 말이다.

그러므로 작은 뒤틀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온갖 성과를 거두고도 함부로 기뻐하지 못했다.

한데 이 순간 마리로즈가 선언한 것이다.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하지 말라고.

설령 네가 실패할지언정 내가 수습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너무 오랫동안 짊어져온 부담감이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마리로즈는.

지금의 그리드가 ‘완전하게’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였으니까.

“결혼합시다.”

자신도 모르게 마리로즈의 손을 덥썩 붙잡은 그리드가 말한다.

간절하고 애틋한 시선을 보내면서였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결혼하죠, 우리.”

“...”

마리로즈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너무 낭만 없는 청혼이었나?

마음이 앞선 나머지 실수했음을 깨달은 그리드가 아차하는 순간이었다.

“...고맙구나.”

마리로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싶더니, 굳었던 입가가 재차 미소를 머금었다.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밝은 미소였다.

“나를 필요로 해줘서.”

낳아준 부모에 의해 존재를 상실할 뻔했던 여인.

자신의 존재 가치에 의문을 품던 그녀가 그리드를 통해 많은 걸 깨우치고 마음 속 그늘을 걷어내자 기적이 일어났다.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가 형제에게 자애를 베풉니다.]

[뱀파이어 백작 ‘놀’이 부활하였습니다.]

뱀파이어의 뼈와 살은 인간의 것과 다르다.

오직 피를 매개로 빚어진 것으로, 그들의 본체는 순전히 붉은 피였다.

그러므로 안개 따위로 몸을 흩어지게 만드는 권능을 부릴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마리로즈는 시조 베리아체를 명백히 초월했다.

만마의 힘에 붙잡혀있던 놀의 마력과 혈액을 이용해 그를 부활시키는 일이 그녀에겐 어렵지 않았다.

“...놀?”

얼떨결에 살아나서 두리번거리는 놀.

그리드가 친애하는 몇 안 되는 뱀파이어 중 하나인 소년이 영문을 모르고 있다가 그리드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네가... 네가 나를 살렸구나, 그리ㄷ...”

“뭐야? 너 죽었었어?”

“...드.”

감동이 깨진다.

곧바로 똥 씹은 표정을 짓는 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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