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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68화 (1,767/1,794)

템빨 87권 - 16화

하나의 세계를 구한다는 것.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리드는 이미 동대륙에서 체험한 바 있다.

사방신의 봉인을 풀기까지 기간으로만 따지면 족히 5년 이상은 걸렸다. 동대륙과 서대륙을 오가는 동안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일을 경험했었다.

하물며 이번 원정은 지옥과 지상 2개의 세계를 동시에 구하는 일이다.

고단한 게 정상이었다.

‘바알 하나 죽인다고 모든 게 끝날 거라고 믿었던 내가 순진했던 거지.’

돌아오지 않는 브라함과 크라우젤.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불안해하던 그리드가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 불만을 품기보단 납득하고 타개할 방법을 찾았다.

레라지에가 큰 도움을 줬다.

“엘리고스는 여전히 윤회의 강에 있는 것 같아요. 켈베로스의 기척이 느껴지거든요.”

지옥의 수문장 켈베로스.

멤피스야말로 지옥 최강의 마수라는 노에의 주장을 부정하는 듯한 존재다.

바알과 싸우는 내내 아무런 도움도 안 됐던 노에와 달리 켈베로스는 상대가 누구라도 위축되지 않는 기상을 보였다.

엘리고스의 뜻에 따라 그리드에게 덤볐던 게 증거다.

레라지에가 켈베로스의 기척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 보면, 실제로 대악마들 역시 켈베로스를 높이 평가해온 눈치였다.

“단순히 커서 눈에 잘 띄는거다냥.”

켈베로스의 행방을 토대로 엘리고스와 크라우젤의 위치를 추적하는 레라지에.

그녀의 태도가 어떤 경쟁심을 부추긴 것인지, 쭉 침묵해온 노에가 염치도 없이 떠들었다.

그리드는 무시했다.

딱히 노에에게 실망하지도 않았다.

노에가 비록 바알이나 드래곤 같은 대적들 앞에선 하등 쓸모없는 모습만 보였다곤 하나.

그건 상대가 너무 나빠서였다.

당장 지상으로 돌아가는 순간 노에는 템빨제국의 수호신으로 군림하는 게 가능했다.

그래, 강함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노에는 충분히 강하고 큰 도움이 되는 동료였다.

‘...취소.’

노에에게 애틋한 시선을 보내던 그리드가 눈살을 구겼다.

노에가 입에 물고 있는 검은 생쥐를 발견한 까닭이다.

악룡 번헬리어.

검은 생쥐로 폴리모프해 그리드의 망토 속에 숨어있던 그가 노에에게 뒷덜미가 물린 채 축 늘어져있었다.

‘이런 미친.’

기껏 동료로 맞이한 고룡하고 척을 지게 생기자 등골이 서늘해지는 그리드였다.

당황해서 잠시 할 말을 잃고 있는 그에게 번헬리어가 말했다.

“신경 쓸 필요 없다. 한낱 미물이 본능에 이끌리는 건 섭리에 불과하니까. 찍.”

‘...이상한 부분에서 너그러운 구석이 있네.’

아니, 저건 너그러운 게 아니다.

하찮은 일에 신경 쓰지 않는 태도에 가깝다.

신발을 밟고 가는 개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처럼.

그런 것치고 모양새가 영 별로이긴 했지만.

그때였다.

“...!”

세계가 흔들렸다.

흡사 반으로 갈라진 느낌.

무지막지한 힘의 파동이 윤회의 강이 있는 방향에서부터 전해졌다.

그리드는 그 힘의 정체가 뭔지 대번에 눈치 챘다.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다.

역대 전설 중에서 파그마와 브라함을 제외하고 그리드와 가장 깊은 인연이 있는 존재.

무패왕 마드라다.

그리드가 구현해온 까닭에 익숙한 검술의 파장이 윤회의 강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후배가 발이 묶인 이유가 있었군.”

그리드와 마찬가지로 상황을 이해한 비반이 중얼거렸다.

어째선지 마드라와 충돌을 겪은 듯한 크라우젤의 상황을 뻔히 알고도 일말의 긴장감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리드도 마찬가지였다.

마드라가 존중 받아 마땅한 이전 시대의 강자임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크라우젤의 가치는 마드라를 아득히 초월했으니까.

이뤄온 업적도, 무력도.

크라우젤이 모든 면에서 마드라를 웃돈다는 사실을 그 누가 부정하겠는가.

애초에 마드라는 검사로 분류된다.

설령 백만대적검을 난사할지언정 그것이 검술인 이상 크라우젤의 상대는 될 수 없었다.

다만 마냥 안심하기엔 문제가 있었다.

마드라의 영혼이 활개치고 있다는 건 윤회의 강에 어떤 문제가 생겼다는 증거니까.

마드라 외의 다른 존재가 크라우젤과 엘리고스의 발목을 잡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특히 그리드는 붉은 살덩어리의 소멸이 만든 결과가 신경 쓰였다.

붉은 살덩어리의 원료는 태초신의 아들이었기에.

“고작 전설의 영혼이 윤회를 거부하고 활개 칠 정도면... 절대자의 영혼쯤 되면 주제 파악을 전혀 못하고 날뛰겠군. 찍.”

마침 번헬리어도 대별왕을 떠올린 눈치였다.

그리드가 유라에게 부탁했다.

“사람들을 데리고 윤회의 강으로 가줘.”

크라우젤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건 부차적인 문제다.

그리드는 난리에 휩쓸린 윤회의 강이 자칫 붕괴되는 사태를 걱정했다.

“네.”

유라도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윤회의 강이 있는 방향으로 군말 없이 경로를 바꿨고 다른 사람들도 곧바로 뒤따랐다.

비반과 사도들도 함께였다.

그들 역시 일의 경중을 따져본 것이다.

윤회의 강이 붕괴되는 순간 지옥은 또 다른 형태로 왜곡될 우려가 있다.

바알과 붉은 살덩어리를 없애고 아수라를 막은 모든 일들이 헛수고가 될 수도 있단 의미다.

지금은 윤회의 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옳았다.

애초에 브라함을 수색하는 건 그리드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신과 사도의 관계란 그 어떤 개념보다 우위에 있을 정도로 끈끈한 것이니까.

“이번에야말로 완벽하게 마무리 짓자고.”

그리고 근심걱정 없이 다시 만나자.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동료들의 인사말을 뒤로하고.

파앗, 파앗, 파아앗...

순보를 쓴 그리드는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바꿨다.

어둠과 용암이 걷힌 지옥.

지상처럼 거대한 규모를 드러낸 그곳 전역을 모조리 돌아볼 기세로 순보를 멈추지 않고 연속 사용했다.

그로 인해 세상이 노을로 뒤덮여갔다.

그리드가 나타났던 구역마다 주황색 신성의 잔재가 남은 여파다.

마족들은 그 광경을 신의 축복으로 받아들였다.

마족.

개인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악마, 마물과 달리 이성을 유지한 채 안전지대에서 살아온 지옥의 주민들이다.

그들은 지옥에 평화를 되찾아준 지상의 신이 자신들의 미래를 축복하고자 아름다운 신성을 뿌려주는 것으로 해석했다.

[지옥의 주민들이 당신을 숭배합니다.]

[왜곡이 풀린 지옥에서 당신의 이름이 갖는 무게가 태초신 야탄의 이름과 동등해집니다.]

[정화 된 지옥의 일부가 템빨계로 편입되기 시작합니다.]

바알이 죽은 뒤로도 끝없이 발생하는 사건들과 별개로.

지옥은 계속해서 올바른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느끼는 피로감과 긴장감이 무색하게 상황은 안정되어가는 것이다. 머잖아 그리드가 바라는 완벽한 결과가 찾아올 터였다.

한데 점점 커지는 이 불안감은 뭘까?

순보의 전개 속도를 가속화하는 그리드의 얼굴이 구겨져갔다.

휙휙 바뀌는 주변의 풍경 탓에 멀미를 느끼기도 했고, 브라함의 기척이 전혀 포착되질 않아 초조함에 휩싸였다.

‘...결계다.’

이쯤 했는데도 브라함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브라함 본인이 그리드를 거부하고 있다.

그리드가 자신을 찾는 걸 원치 않고 어떤 수를 쓴 게 분명했다.

굳이 왜?

그야 당연히.

‘베리아체와 함께 있구나.’

안 그래도 행방이 묘연해진 베리아체를 의심하던 차다.

그리드는 베리아체가 ‘적’이 된 상황을 가정했다.

그리고 브라함의 입장을 헤아렸다.

유일하게 존경하고 사랑하는 존재.

과거의 브라함이 어머니를 설명할 때면 사용했던 표현이다.

‘브라함은 내가 베리아체와 싸우는 걸 원치 않는 거야.’

온전히 자신이 감당할 셈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리드가 스탯을 모조리 지력에 분배했다.

이어서.

“매직 미사일.”

삼백 개의 갓 핸드와 함께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가장 기초가 되는 마법.

하지만 브라함식 강화 마법에 포함된다.

시전자의 역량에 따라 대마법과 비견되는 위력을 발휘하는 잠재력을 지녔다.

그리고 현재 그리드의 지력은 브라함을 초월했다.

그리드의 능력치를 일부 구현하는 갓 핸드가 무려 300자루나 존재하기도 했다.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유독 기척이 없는 지점들.

이상하리마치 고요한 지점들이 매직 미사일의 폭격 지점으로 설정되어 초토화됐다.

그중 한 곳이 바로 지옥 엘리베이터 근처였고,

[<브라함의 결계>를 파괴하였습니다.]

빙고였다.

식별되지 않던 결계가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러자 진실 된 광경이 그리드의 눈에 비쳤다.

엘리베이터 주변으로 파괴의 흔적이 가득했다.

또한 그 중심에 은발의 사내가 누워있었다.

브라함이다.

“이런... 무식한...?”

자신의 결계가 순수한 마법의 위력을 감당 못하고 파괴되는 광경을 목격한 브라함이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그리드를 괴물 보듯이 했다.

상처투성이가 된 채 널브러져 있는 그를 그리드가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방금 작동 된 흔적이 남은 엘리버이터를 확인하면서다.

“베리아체는 이미 지상으로 떠났군요.”

“조금 전에 떠나셨다. 분노할 필요 없어. 그분은 지상에 해악을 끼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으시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배신하지 않았다...”

“...”

그리드의 일그러진 얼굴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브라함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치솟는 화를 억누르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브라함 당신이야 베리아체를 믿고 싶겠지만 내 입장에선 그녀를 전혀 신뢰할 수가 없는데.”

그리드는 브라함의 상태를 돌보지도 않았다. 무시하고 지나쳐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구우우우우웅...

하강하는 승강기의 소음이 불편한 침묵으로 얼룩진 현장을 잠식해간다.

급기야 승강기가 도착했을 때.

“...미안하다.”

비로소 브라함이 입을 열었다.

사죄.

제법 긴 세월을 함께했지만 몇 번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이었다.

대답하지 않고 승강기에 올라타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확언했다.

“네가 도착할 무렵에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을 거다.”

브라함은 두 번 다시 트롤링을 하지 않을 거라고 맹세한 바 있다.

오늘.

그는 비록 그리드를 기만했을지언정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치열한 사투 끝에 어머니를 약화시켰다.

제아무리 바알과 아모락트의 권능을 흡수했을지언정 영체에 불과한 베리아체에겐 한계가 있었으니까.

애초에 브라함은 사람들의 생각보다 강하다.

마법과 지혜의 신.

무려 2개의 이명을 지닌 신답게 사도 중 최강을 자처하는 수준이었다.

“어쩌면 이미 마리로즈가 해쳤을 거야...”

간신히 말을 잇는 브라함의 음성이 떨렸다.

슬픔을 억누르기 위해 애쓰는 모습.

그는, 그리드의 반려를 지키고자 정녕 최선을 다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과 별개로 전력으로 그녀를 훼방 놓았다.

그 결과 약해진 베리아체는 결코 마리로즈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게 브라함의 판단이었다.

“만약... 아주 만약 마리로즈가 자비를 베풀어 아직 어머니께서 살아계신다면...”

“...”

“그땐 부디 고통 없이 보내드렸으면 좋겠다.”

드물게 부탁하는 브라함의 모습이 결국 그리드의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서서히 닫히는 엘리베이터의 문 틈새로 그리드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노력하겠습니다.”

그걸로 충분했다.

이제 브라함의 남은 바람은 단 하나였다.

부활에 실패하고 죽음에 이르실 어머니께서 다시 태어나셨을 때.

부디 내가 그분을 알아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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