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767화 (1,766/1,794)

템빨 87권 - 15화

따앙, 따앙, 따앙...

윤회의 강.

본래 영혼들의 절규가 메아리쳤던 그곳에 쇠를 두드리는 망치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대가 바뀌었음을 실감시키는 소리다.

흑기사 엘리고스가 묘한 감회에 젖은 그때였다.

“...잠깐.”

마드라의 영혼이 대별왕의 영혼을 제지했다.

대별왕 입장에선 납득하기 힘든 방해였다.

전투 도중 갑자기 망치질을 시작한 훼방꾼.

기고만장하기 짝이 없는 작자를 제압할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으니까.

마드라가 설명했다.

“파그마는 타인을 기만하고 이용하는 게 특기인 자요. 쉽게 말해서 상놈이라 할 수 있지. 저자가 대놓고 드러낸 빈틈을 신용했다간 도리어 화를 입을 거란 말이오.”

““허... 아버지께선 어디까지 타락하셨단 말인가...””

파그마가 부친 한울께서 빚은 존재란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대별왕이 탄식했다.

마드라의 말만 들어선 악마에 가까운 존재를 탄생시킨 한울의 죄가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쳤을지 염려했다.

“...”

두 존재의 대화 내용은 크라우젤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당연히 파그마에게도 들렸단 말이다.

크라우젤은 자신에게 빙의해 있는 파그마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슬픔, 회한, 고독...

그러면서도 후회는 없는.

다시 과거로 돌아갈지언정 나의 선택과 행동은 바뀌지 않을 거라는 고집마저 느껴졌다.

이미 한 번 세계를 구한 영웅의 고집이다.

꺾여선 안 될 고집이었다.

“끝났소.”

마드라의 경계심이 기회로 작용했다.

덕분에 황혼과 백호검을 하나로 합치는데 성공한 파그마가 크라우젤에게 뒷일을 맡겼다.

“공교롭게도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요.”

겸양 따위가 아니었다.

[파그마의 검무보다 당신의 검술 등급이 더 높습니다.]

[파그마의 검무에 담긴 모든 의도는 당신의 검술로 충분히 이룰 수 있습니다.]

[파그마의 검무가 비활성화 됩니다.]

시스템은 크라우젤이 파그마의 검무를 사용하는 걸 손해라고 판단했다. 강제로 사용을 막아버렸다.

그리드의 손에선 무지막지하게 강력하게 펼쳐졌던 스킬이 무용하다는 것이다...

‘그리드 넌 도대체 어떤 싸움을 해온 거지...?’

파그마의 검무도 그렇고, 아이템 합체 스킬도 그랬다.

둘 모두 원본은 완벽과 거리가 멀었다.

그리드의 손에서 진화를 거듭하기 전까진 하자가 심했다.

심지어 파그마는 능력치조차 낮은 편이었다.

손재주를 제외한 근력, 체력, 민첩성, 지력 등의 주요 능력치 대부분이 크라우젤보다 못했다.

크라우젤이 전대 전설들을 진즉 초월했다는 점을 고려해도 아쉬운 수준이다.

만약 그리드가 ‘파그마의 후예’에 머물렀다면.

그리드의 궁극은 파그마였을 테고 지금과 같은 업적들을 결코 이루지 못했으리라.

새삼 깨달은 크라우젤은 그리드가 생각보다 더 대단한 인물이란 걸 알게 됐다.

한계를 몇 번이나 초월한 끝에 운명마저 바꿔버린 셈 아닌가.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늘었군. 지상에 오를 방법과 더불어 파그마의 영혼을 내놓게나.”

무패왕 마드라가 검을 쥔 오른팔의 근육을 부풀리며 말했다.

아까도 느꼈지만 몹시 기이한 존재다.

전설도 아니고 하물며 영혼에 불과하면서 어찌 저토록 고강할까?

특히 크라우젤은 ‘무패왕의 검술’이 갖는 딜레마를 수차례 목격해왔다.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나머지 시전자의 팔을 박살내는 검술.

과거의 그리드는 물론이고 몇 달 전의 바알조차도 무패왕의 검술을 사용할 때마다 팔이 넝마가 되곤 했었다.

한데 마드라의 영혼은 무려 팔십만대적검을 아무렇지 않게 구사했다.

검술의 본래 주인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납득이 안 됐다.

‘도리어 영혼이기 때문에 제약을 받지 않는 건가?’

아니, 그렇게 해석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당장 파그마의 영혼만 봐도 크라우젤과 빙의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소멸했을 정도로 위태로운 상태였다.

윤회를 앞둔 망자는 영체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뜻이다.

한데 마드라는 무리 없이 해내고 있다.

절대자 대별왕처럼.

“타고나길 강한 존재다.”

크라우젤과 같은 의문을 느끼던 엘리고스가 마침 결론을 내렸다.

“단순히 육신과 영혼이 강하게 태어난 존재. 저놈은 그런 거야.”

“...”

크라우젤도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엔 달리 마드라의 강함을 설명할 길이 없었으니까.

그래야 허망한 최후에 관한 의문도 다소 풀렸다.

소국 루반나의 왕.

압도적인 무력으로 제국의 진격을 홀로 막았던 인물.

마드라는 그 시대의 최강자였다.

하지만 제국은 그의 명성이 루반나 바깥으로 번지지 못하도록 정보를 은폐했고, 그 탓에 전설이 되지 못한 마드라는 아들이 꽂은 비수에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었다.

몹시 많은 의문을 남기는 죽음이었다.

비록 전설이 아닐지언정.

그토록 고강했던 인물이 아들의 손에 허무하게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으니까.

마드라의 죽음과 관련 된 진실은 따로 존재할 거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진실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드라는 아들에게 허무하게 죽은 게 맞다.

마드라의 본질은 ‘단순히 강한 인간’에 불과했으니까.

그저 강할 뿐 압도적인 감각을 지니지 못해 허망하게 급소를 찔렸고, 죽음에 이르는 치명상을 입었을 때 면역하지 못했다.

결론은.

‘다른 의미의 괴물이라는 거군.’

보통의 전설이나 초월자와 결이 다른 강자.

마드라를 분석하는 크라우젤의 표정이 진중했다.

윤회를 거부하는 존재.

엘리고스의 말대로 기껏 되찾은 지옥의 법칙을 무너뜨리려는 변수다.

좌시해선 안 됐다.

지옥의 법칙을 되찾은 인물이 그리드인 이상 크라우젤에겐 법칙을 수호할 의무가 있었다.

그것이 동료의 역할이었다.

“기필코 싸울 작정이군. 그래... 지상에 다시 오르는 일이 쉬울 리 없겠지.”

마드라의 기도가 바뀌었다.

무형의 검을 쥔 손과 팔의 근육들이 꿈틀거리며 핏대를 세운다 싶더니 일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치 세계에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주변의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킨다.

윤회의 강을 흐르던 영혼들이 잠시 멈춰 절벽 위를 올려보게 만들 정도였다.

“백만대군 몰살검.”

바알이 앞서 선보였던 궁극기.

원작자의 손을 통해 행해진다.

개세적인 위력의 검기가 횡으로 뻗어졌다.

크라우젤을 포함해 그가 등지고 선 배경을 모조리 양단 낼 기세였다.

‘이런 미친.’

엘리고스의 등골이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

파스슥.

작은 파열음이 울린다 싶더니 세상을 뒤덮어가던 검기가 걷혔다.

크라우젤의 우주 검이 백만대적검을 베어버린 여파다.

그건 몹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본래 검성이란 무엇이든 베는 검기와 최강의 검술을 겸비한 존재니까.

‘역대 최강의 재능’으로 분류되며 절대자들의 입을 통해 거론되어온 마드라라 할지언정 크라우젤을 검술로 이길 순 없었다.

크라우젤의 검술이 마드라의 검술보다 무조건 우위의 판정을 받았다.

파그마 덕분에 손에 넣은 최강급 보검도 물론 큰 보탬이 됐다.

마드라는 당황하지 않았다.

“애초에 백만의 적을 죽이려고 만든 검술일세.”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쿠오오오오!!

우주 검에 베이고 반으로 갈라졌던 백만대적검의 검기가 궤도를 비틀었다.

마치 풍차를 닮았다.

회전하며 모든 범위를 표적으로 삼고 초토화시키기 시작했다.

백만의 적을 죽이기 위해 만든 검술.

검로가 하나로 국한 될 리 없는 것이다.

백만대적검이 만드는 검로는 가히 무한에 가까웠고, 바로 이게 바알조차 간과했던 백만대적검의 진수였다.

한 번 막아서 제압할 수준이 결코 아니란 말이다.

파직! 쩌저저저정!!

다가오는 검기를 베어 없애고, 혹은 검막을 펼쳐 막으며 퇴보하는 크라우젤의 등 뒤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솟구쳤다.

지옥의 수문장.

여러 대형 신화에 등장하는 마수 켈베로스였다.

백만대적검의 검기에 난도질당하면서도 화염과 독을 토해내는 녀석 덕분에 마드라의 진격이 막혔다.

악마에 이은 마물과의 협력.

파그마가 살았던 시대에선 결코 볼 수 없던 광경이다.

파그마는 번헨 열도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바알과 계약하고 얻은 힘으로 악마들과 싸웠을 무렵의 기억이었다.

당시 파그마가 체험했던 악마와 마물들은 오직 적의와 살의로 똘똘 뭉친 괴물들이었다.

그들과 인간이 협력하는 날이 올 거라고 상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영원히 그들의 표적이 될 인류에게 희망이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드 님께서 내가 아닌 다른 자의 힘을 계승하셨더라면... 세계는 조금 더 일찍 구원 받았겠지.”

하필 나의 힘을 계승하는 바람에 성장이 더뎠고 세계의 구원도 늦어졌다.

희망이 뿌리내리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파그마가 자책하는 원인은 당연히 크라우젤에게 있었다.

파그마의 후예가 다소 볼품없다는 감상을 품은 크라우젤 탓에 파그마도 자신의 부족함을 통감했다.

“...”

크라우젤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

제3자에 불과한 자신의 감상은 하등 쓸모없는 것이니까.

켈베로스와 협력해서 마드라의 팔을 벤 그가 덤덤히 말했다.

“당신의 힘을 계승한 덕분에 지금의 그리드가 있는 걸 수도 있습니다.”

괜한 위로 따위가 아니다.

파그마가 올려준 손재주 스탯 덕분에 전보다 크게 오른 치명타 확률과 약점 공략 확률의 가치를 확인하면서, 또한 백호검과 하나가 된 황혼의 위력을 재차 실감하면서, 크라우젤은 진실만을 고했다.

“당신의 힘을 그리드가 아닌 다른 사람이 계승했다고 상상하면 끔찍하군요.”

혹자는 말한다.

그리드가 자신이 만든 아이템을 오직 템빨단에게만 공급한 까닭에 플레이어들의 발전이 늦었고 인류가 위기를 겪어왔다고.

크라우젤의 견해는 달랐다.

그리드니까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을 판별하고 자신의 작품을 적절히 분배해온 것이다.

만약 그리드가 아닌 다른 사람이 파그마의 후예를 얻고 전설 아이템의 생산을 독점했다면...

돈과 권력만 있고 자격은 없는 사람들이 최강의 무기를 독점하고 인류는 수차례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무가치한 자를 위로하지 말게.”

마드라가 불쑥 끼어들었다.

파그마의 영혼을 달래는 크라우젤의 태도를 지적했다.

“그자는 삿된 악인이야.”

크라우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정확히 말하면 ‘크라우젤과 하나가 된 파그마의 얼굴’이 어두워진 것이다.

크라우젤의 육신을 통해 파그마의 감정이 표출됐다.

이참에 마드라에게 사죄하려는 파그마에게 크라우젤은 발언권을 넘겨주지 않았다.

“착각하시는 듯한데.”

무패왕 마드라.

천수를 누렸다면 최강의 인간이 됐을 거라는 평가를 받아온 인물이다.

과연 그럴까?

마드라의 평가는 ‘플레이어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쌓아올려진 것이다.

그리드도, 템빨단도, 크라우젤도 없던 시절 말이다.

“저는 파그마 님을 위로한 게 아니라 그리드를 높이 평가한 겁니다만...”

“...”

예전부터 할 말은 다 하는 크라우젤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파그마의 가슴에 재차 비수를 꽂은 그가 마드라의 남은 왼팔마저 베어버렸다.

수백 년 전에 죽고 발전하지 못한 마드라가 뮐러에게도 인정받은 당대 검성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하물며 크라우젤의 손엔 그리드가 만들고 파그마가 강화시킨 드래곤 웨폰이 쥐어져 있었다.

풍덩!!

절벽에서 추락한 마드라의 영혼이 윤회의 강에 잠겼다.

새로운 생을 맞이하기 위해 떠내려갔다.

“부디 다음 생에선 행복하시길 빕니다.”

루반나의 영웅.

조국과 백성들을 수호하기 위해 싸웠던 그에겐 더 나은 운명을 거머쥘 자격이 있다...

생각하며 진심으로 애도하는 크라우젤의 모습이 대별왕을 다소 소름 돋게 만들었다.

““처참하게 베어버린 뒤에야 영웅임을 인정하고 애도하는가... 지옥이 정화되기 시작하고 악마들은 선함을 되찾아가는 반면 인간은 도리어 잔혹해졌구나.””

“...”

크라우젤은 굳이 반박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비록 상처투성이일지라도 절대자.

대별왕이라는 대적을 어찌 감당할지 계산하기 바빴다.

그가 내린 결론은.

‘힘들다.’

절대자는 검성 뮐러보다 명백히 상위의 존재를 뜻한다.

엘리고스, 켈베로스와 협력한다고 해서 꺾을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크라우젤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지는 그때였다.

“...우젤!!”

저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두 명의 외침이 아니었다.

수많은 기척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드를 제외한 템빨단원들과 브라함을 제외한 사도들이었다.

비반도 함께였다.

“나는 더 못 싸우네.”

다만 비반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주저앉아버렸다. 잠이라도 잘 기세로 바위에 기대어 누웠다.

괜찮다.

비반을 제외해도 현장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은 화려했으니까.

“생긴 게 좀 더 기분 나빠졌는데...?”

“그러게? 뭐냐?”

파그마와 결합하고 한층 더 잘생겨진 크라우젤의 외모를 극검과 반트너가 품평하는 그때.

““어찌하여 나를 방해한단 말인가.””

한탄하는 대별왕의 주변으로 무수히 많은 꽃이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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