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7권 - 14화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윤회의 강.
엄청난 소음이 벌써 수십 분째 이어지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던 댐이 무너진 여파다.
지옥의 왜곡이 만든 댐이었다.
강물과 함께 영혼들을 가둬놨던.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해방 된 영혼들.
영겁의 세월 동안 겪은 슬픔과 고통을 드디어 벗어던지고 환생 길에 오르기 시작한 그들이 크라우젤에게 감사를 표했다.
“당신들의 마지막 인사, 잊지 않고 그리드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이 자리에 없는 그리드에게 전하고 싶은 인사를 내게 대신 전하는 거리라.
그렇게 생각한 크라우젤이 약속했고 영혼들은 잠시 당황하다가 미소 지었다.
크라우젤의 생각과 달리, 영혼들은 그에게도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드가 반드시 바알을 쓰러뜨려줄 거라고 외치며 희망을 안겨줬었으니까. 덕분에 잠시나마 고통을 견뎠고 그것은 영혼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축복이었다.
“우리의 다음 생이 당신을 비롯한 그리드 님 일행의 공덕으로 돌아갈 게요.”
어떤 영혼이 남긴 말이었다.
워낙 빠르게 흐려진 까닭에 생김새를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깔끔하게 깎인 민둥머리와 심유한 눈빛만큼은 똑똑히 목격했다. 생전에 몽크 같은 수행자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윤회.
환생.
크라우젤은 이와 같은 개념이 어떤 가치를 지닌 건지 어렴풋이 깨닫고 말았다.
그리드 덕분에 환생을 준비하기 시작한 영혼들.
저들이 언젠가 지상에서 살아가는 짐승으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을 때.
어쩌면 막연하게 그리드와 원정대의 용사들을 사랑해주지 않을까.
그런 감정들이 모이고 모여서 그리드와 템빨국을 축복하게 되는 거 아닐까.
“불멸의 제국.”
마침 엘리고스가 운을 뗐다.
“다시 태어날 저들의 무의식이 전생의 사건을 티끌만큼이라도 기억하는 이상 그리드의 제국은 영원하겠지. 비단 국가뿐만 아니라 그리드가 만들고 일으킨 모든 것을 저들은 좌시하지 않을 거다. 본능적으로 지켜내고자 할 거야.”
역사상 위대했던 국가들은 강력한 무력과 뛰어난 정치가의 치세에 더불어 시기적으로 운때가 맞아서 탄생하곤 했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줬다고 표현해야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어느 국가도 영원하진 못했다.
결국엔 쇠락하고 무너졌다.
한데 템빨제국은 영원할 거란다.
비록 악마의 주장에 불과했지만... 크라우젤은 공감했다.
“그럴 것 같군.”
환생한 영혼들의 축복과 도움은 둘째 치고.
당장 템빨단을 위협할 만한 세력이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굳이 꼽아보자면 고룡들과 환국, 그리고 아스가르드 정도?
그중 고룡들은 그리드와 깊은 교류를 맺은 눈치였고 환국의 한울과 소별왕은 손색이 큰 느낌이다.
아마 아스가르드만이 그리드의 앞길을 훼방 놓을 수 있겠지.
크라우젤이 생각할 때였다.
“...”
절벽 위에 가만히 선 채 해방되는 영혼들의 행렬을 지켜보던 엘리고스가 고속 이동으로 위치를 바꿨다. 어느새 켈베로스의 위에 올라타 검까지 뽑아 쥐고 상공의 저편을 올려보았다.
“...”
크라우젤은 굳이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가까워지는 기척을 그 또한 느낄 수 있었기에.
곧.
““나는... 전생을 잊어선 안 되오. 이 상태론 성불할 수 없소이다.””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기파가 현장에 떨어진다 싶더니 음침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별왕.
여전히 소용돌이치는 강물에 빠지기 직전 멈춰 선 영혼의 이름은 크라우젤도 익히 알고 있었다.
태초신 한울의 아들.
동생 소별왕의 흉계에 빠져 지옥으로 추락했고, 급기야 바알의 농간에 넘어가 붉은 살덩이로 전락해버렸던 존재.
그와 관련 된 에피소드는 소상히 밝혀진 바 없다.
하지만 간략하게 알려진 내용만 봐도 얼마나 큰 고통에 시달려왔을지 예측하기 쉬웠다.
무척 깊은 원한을 품었으리라.
““절대자인 내가 소멸하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으니... 나는 이 상태로 지상에 올라 동생을 만나야겠소.””
“절대자의 소멸이 이치에 맞지 않다? 바알도 죽은 마당에 헛소리를 하는군.”
켈베로스가 도약했다.
절벽에서 뛰어내려 순식간에 대별왕을 덮쳤다.
쩌어어어어어엉!!
흑기사 엘리고스.
그리드를 잠시나마 곤경에 빠뜨린 전력이 있는 그의 기이한 검술이 안 그래도 상처투성이인 대별왕의 영혼에게 새로운 상처를 입혔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대별왕을 어서 강물에 빠뜨리기 위해 쉴 새 없이 몰아붙였다.
“본래의 역할을 되찾은 강의 흐름에 거역하는 건 내가 용납 못한다. 네 사연이야 나 또한 안타깝게 여기는 바이나 네 뜻대로 하게 놔둘 순 없어. 또 다시 규칙이 무너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엘리고스의 염원은 지옥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누구라도 지옥을 떠올리는 순간 자신을 떠올리길 바랐다.
지옥의 주인이 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일종의 명예욕이었다.
그러므로 바알은 그의 염원을 꺾으려고 굳이 애쓰지 않았던 거고.
아무튼 바알이 죽고 지옥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지금.
지옥의 표상이 되길 꿈꾸는 엘리고스는 지옥의 수문장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한층 더 집착했다.
드디어 되찾은 지옥의 법칙을 수호하기 위해 애썼다.
콰앙! 콰앙! 꽈아아아앙!!
엘리고스와 대별왕이 충돌할 때마다 강물이 연신 솟구쳤다.
본래 지옥에 없던 무지개가 떠올랐다.
지옥 달이 사라지고 떠오른 태양 덕분에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
크라우젤은 굳이 개입하지 않았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경거망동하는 건 몹시 어리석은 짓이었으니까.
대별왕이 깊은 원한을 품었다는 게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그는 필시 선한 존재였으나 이대로 지상에 올랐다가 어떤 변수를 초래할지 솔직히 예측이 안 됐다.
‘...기왕이면 엘리고스가 이기는 게 좋아 보이긴 하는데.’
악마를 응원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묘한 기분을 느끼던 크라우젤의 표정이 이내 딱딱하게 굳었다.
“윤회의 강을 건너지 않고 지상에 오르는 방법이 있는가 보군.”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이동하는 영혼들 사이에 유독 꼿꼿이 선 존재가 있었다.
형태 또한 뚜렷했다.
순식간에 흐려지는 다른 대부분의 영혼들과 달리, 마치 대별왕마냥 산 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마드라?”
영혼의 이름을 재차 확인하고 서서히 커지는 크라우젤의 두 눈에 급격히 가까워진 영혼의 모습이 투영됐다.
“현재의 기억과 영을 유지한 채 지상에 오르는 법을 알려주면 고맙겠구나.”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 마드라의 부탁이었다.
유독 발달한 전완근이 그가 어떤 형태의 검술을 구사할지 예측하도록 도왔다.
마드라가 어떤 존재인가 돌이켜보는 크라우젤에게 엘리고스가 소리쳤다.
“짧게는 수 년에서 길게는 수천 년 동안 고통 받아온 존재들이다. 타고난 심성이 어지간히 곧고 강하지 않은 이상 무조건 뒤틀렸다고 봐야 옳아. 상종하지 말고 무시해라.”
생전의 모습과 겹쳐 보지 마라.
경고의 핵심이었다.
크라우젤은 별로 공감하지 못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영혼들은 평온한 모습으로 강물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평범한 영혼들조차 저런 마당에 생전에 영웅이라고 불렸던 인물의 영혼이 뒤틀렸을 거라고 믿기 힘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드라를 마냥 신뢰하고 도울 생각은 없었다.
그럴 이유 자체가 없었고.
“저는 본래 지옥과 큰 인연이 없는 평범한 인간인지라... 원하시는 질문에 답을 드리지 못하겠군요.”
“그래, 딱 봐도 악마도, 망자도 아닌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는구나. 그래서 묻는 거다. 그대는 무슨 수로 지옥에 방문했지? 그대가 이용한 방법을 알려주면 그걸로 족하다.”
“이봐. 상종하지 말라니까?”
대별왕을 잠시 따돌리고 크라우젤의 곁으로 돌아온 엘리고스가 끼어들었다.
“생전에 고강하고 특별했던 존재일수록 콧대가 높아 원한에 집착하는 법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영혼보다 저런 놈이 도리어 뒤틀려...”
엘리고스의 말이 도중에 끊겼다.
무형지기.
무형의 기운으로 만든 검을 휘두른 마드라에 의해서다.
팔십만대적검.
마치 우주 검을 보는 듯했다.
엘리고스가 선 지점을 중심으로 대지가 반으로 갈라져버렸다.
“...도와라.”
어느새 쫓아온 대별왕과 마드라에게 포위당한 형국이 된 엘리고스가 대놓고 도움을 요청했다.
이쯤 되자 크라우젤도 좌시하기 힘들었다.
그리드가 준 임무를 떠올렸다.
엘리고스와 협력하라는 임무.
그리드는 엘리고스를 믿기 때문에 그런 임무를 내린 것이다.
크라우젤 또한 믿어야 옳았다.
게다가 지옥의 정화는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아직 사태는 끝나지 않았고 크라우젤의 임무는 현재 진행형이었다.
“...해보지.”
크라우젤이 자신의 황혼을 꺼내 쥐었고,
“범상하지 않군.”
대별왕과 마드라의 표정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그때였다.
“이 기운은?”
크라우젤의 정체가 검성이란 사실을 깨닫고 예의주시하던 마드라가 갑자기 강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긴 세월 그리워했던 기척을 느낀 까닭이다.
“파그마...”
반드시 만나고 싶었던 존재 중 하나.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놈에 의해 데스나이트로 부활하고 이용당했던 수모를, 그로 인해 겪어야했던 고독과 고통을 떠올린 마드라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작게나마 도움을 줘도... 되겠소?”
강물에서 떠오른 파그마의 영혼이 천천히 현장으로 다가왔다.
대별왕은커녕 마드라와 비교해도 초라한 행색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영혼들처럼 형태가 몹시 흐릿해져 있었으니까.
당장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파그마의 영혼은 미약했다.
목소리 또한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그를 신뢰했다.
그리드의 근원 중 하나였기에.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별개로 결코 약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현재 파그마는 자신의 후에가 어떤 활약을 펼쳤는지 목격한 직후였다.
굉장히 큰 영감을 얻고 심상을 단련했을 확률이 높았다.
“기꺼이 도움을 받겠습니다.”
크라우젤의 대답이 신호였다.
[전설의 대장장이 ‘파그마’의 영혼이 빙의하였습니다.]
[파그마의 검무가 활성화됩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 스킬이 활성화됩니다.]
과거 브라함의 영혼과 하나가 됐던 그리드처럼.
크라우젤 또한 전대 전설의 영혼과 하나가 되었다.
엘리고스의 두 눈에 기대감이 차오르게 만들 정도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현실은 참혹했다.
[파그마의 검무보다 당신의 검술 등급이 더 높습니다.]
브라함과 하나가 됐던 과거의 그리드는 <마법>이라는 능력의 개방과 더불어 강력한 지력 스탯을 얻었지만 크라우젤과 파그마의 결합은 별다른 시너지가 없었다.
바알과 계약하기 전까진 검호의 경지에 그쳤던 파그마가 검술로 크라우젤에게 보탬이 되기엔 무리가 있었을 뿐더러, 파그마가 올려준 스탯은 전투에 큰 도움이 안 되는 손재주에 불과했다.
“...”
잘못 된 퓨전.
내심 동요하는 크라우젤의 심상을 읽은 파그마가 급히 수습했다.
크라우젤의 인벤토리 속에 존재하는 다수의 검을 살펴보더니 숨겨둔 비기를 발동시켰다.
“아이템 합체.”
“...!”
크라우젤이 전율했다.
2개 이상의 아이템을 하나로 합쳐 위력을 증폭시키는 기술.
그리드의 궁극기 중 하나다.
그것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수차례 목격해온 크라우젤의 기대감이 극도로 솟구쳤다.
그렇다.
그는 몰랐다.
본래 아이템 합체에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따앙! 따앙! 따앙!!
“...미친 건가?”
눈앞에 적을 앞두고 쪼그려 앉은 크라우젤이 그리드제 수리용 망치와 모루를 꺼내 검을 두드리기 시작하자 엘리고스가 전에 없던 위기의식에 휩싸였다.
같은 시각, 지옥 엘리베이터 입구.
“...”
타고난 절대자.
하물며 바알과 아모락트의 힘을 흡수하고 완벽한 자태를 뽐내는 어머니께 감탄하고, 전율하고, 압도당하며 전의가 꺾여가던 브라함의 눈빛이 살아났다.
어떤 개자식의 기척이 몹시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파그마.
그리드의 입을 통해 놈의 숨겨진 이야기를 수차례 들었고, 어떻게든 놈을 이해하고 용서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역시 불가능했다.
기척을 직접 느끼는 순간 잊으려고 노력했던 원한이 들끓었다.
놈이 환생이라는 편리한 기능에 편승해 모든 걸 잊기 전에 반드시 만나 죗값을 치르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당장 눈앞에 직면한 위기를 넘겨야한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마리로즈를 포기해주실 순 없겠습니까?”
““그래서야 내가 그 아이를 낳은 이유가 없단다.””
“...자칫 죽일 각오로 싸우겠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어머니.
추방당했을 때조차 감히 그녀를 원망하지 못했던 브라함이 과거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결의를 다졌다.
마리로즈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어서가 아니다.
오직 그리드를 위해서였고, 파그마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듯 연신 되뇌는 브라함의 마력이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브라함식 강화 마나 드레인.
바알조차 탐냈던 그 권능과도 같은 마법이 주변의 모든 마력을.
즉, 베리아체의 영혼이 품은 마력까지도 흡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