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7권 - 13화
[지옥 왜곡의 원흉이 소멸하였습니다.]
[지옥의 왜곡이 풀립니다.]
[당신과 데빌 슬레이어 ‘유라’의 자취가 남은 구역들을 중심으로 지옥에 들끓던 마기가 정화되기 시작합니다.]
[불길이 흐르던 지옥의 수맥에 당신의 신성이 흐릅니다.]
[지옥의 황량한 대지에 당신의 신성이 뿌리를 내립니다.]
[지옥 도처에 푸른 새싹이 피어납니다.]
[악마들과 마물들의 악의와 광기가 서서히 가라앉습니다.]
[지옥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갑니다.]
[자칫 영겁까지 이어졌을 억압에 맞서 싸운 당신들에게 깊은 찬사를 보냅니다.]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간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결론이었다.
끝난 것이다.
바알의 죽음에 이어서 붉은 살덩어리가 소멸해버린 순간.
세계의 소망은, 그리드의 목적은 이루어졌다.
그리드가, 템빨단이, 사도들과 비반이 힘을 합쳐 만든 결과였다.
앞으로 인류에게 죽음이란 영원한 고통의 시작 따위가 아닌 안식이 되리라.
“다들...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다.”
너무 고생했다.
정말 잘 싸워줬다.
등등.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리드가 간신히 토해낸 말은 그게 전부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리드와 동료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애틋한 감정은 말하지 않아도 자연히 전달 됐다.
“쉬고 있어.”
애초에 회포를 풀기에 적절한 시기도 아니다.
아직 가장 중요한 적이 남았다.
악신 아수라.
놈을 잡기 위해 곧바로 현장을 떠나는 그리드를 유라 일행이 뒤쫓았다.
“쉬긴 뭘 쉬어? 같이 싸우고 어서 끝내야지.”
토반의 말이었다.
그리드가 피식 웃었다.
개인적으로 토반에겐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쥬다르교의 몰락과 함께 자연히 쇠락했던 토반.
이후 템빨신교 소속 성기사가 되면서 전성기보다 고강해졌다곤 하나, 아무래도 그는 십공신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
원로급 인사임에도 불구하고 직급이 다소 낮은 편이었다.
특히 체다카 길드 시절에 참모 역할을 수행했던 경험이 있던 탓에 라우엘에게 많이 착취당했다.
신입 길드원들의 지도를 책임지는 한편 각지의 영지를 관할하는 등 온갖 업무를 떠맡았다.
심지어 이번 원정엔 드래곤 웨폰도 지급 받지 못하고 참가했다.
초월자도, 천사도 아닌 탓에 드래곤 웨폰을 다루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그는 사실상 원정대 후보가 아니었음에도.
반트너 다음가는 퓨어 탱커로 토반 이상의 플레이어를 찾기 힘들었던 까닭에 끝에 가서 급히 차출해버렸다.
많이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안 그래도 많이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끝까지 살아남아 아직 현역이란 사실을 증명했다.
정말 잘 싸워줬다.
무사히 살아있는 유라가 증거다.
“그래, 함께 싸우고 함께 돌아가자.”
아무래도 유라, 페이커, 미르 모두 과묵한 편이다. 레라지에는 베리아체의 부활 소식에 영향을 받은 건지 굉장히 긴장한 모습이었고.
그나마 토반이 있어서 분위기가 이완되는 느낌이었다.
‘아수라.’
사건의 흐름상 바알보다 강하다고 봐야 옳다.
솔직히 진절머리가 났다.
바알과 싸우는 내내 힘들었던 부분들이 떠오르며 눈앞이 조금 캄캄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동료들의 면면을 떠올리자 점차 안심이 됐다.
아수라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바알과 다르다.
사람들의 공포를 이용해 죽음을 극복했던 바알과 달리 한 번 죽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아주 만약에.
바알의 능력을 고스란히 계승해 죽음을 극복한다는 설정을 지녔을지언정 설정에 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인류의 공포는 이미 지워졌으니까.
사람들은 더 이상 바알을,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드가 그렇게 만들었다.
공포의 근원을 제거해버렸다.
아수라를 상대로는 굳이 혼자 싸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있는 유라, 페이커, 미르, 토반, 레라지에와 함께.
또한 현재 아수라와 싸우고 있는 비반과 천사들과 함께.
여전히 망토 속에 숨어있는 번헬리어와, 각자의 임무를 마치고 달려오고 있을 다른 동료들과 함께.
힘을 합쳐서 싸우면 된다.
‘다구리엔 장사 없지.’
어디 보통 다구린가?
그리드, 비반, 브라함, 번헬리어.
이쪽의 전력은 절대자만 넷이다.
메르세데스, 피아로, 미르, 지크도 절대자를 노려볼 만한 잠재력을 지녔고 실제로 엄청난 속도로 발전해왔다.
나머지 템빨단원들도 대부분 초월자였다.
레라지에와 엘리고스라는 든든한 우군도 있었고.
이만한 전력의 협공은 염룡 트라우카도 감당 못한다.
‘...진짜 너무 센데?’
새삼스레 깨닫는다.
오늘 우리가 원정을 무사히 끝내고 지상으로 돌아가면.
우선 고룡을 포함한 세상 모든 드래곤이 기척을 지울 것이다.
템빨계가 건재한 이상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리라.
‘아스가르드의 신들 또한 숨죽인 채 우리를 주시하겠지.’
지상과 대적해온 지옥이 멸망해버렸다.
템빨계의 자멸을 바랄 수 없게 된 아스가르드는 명백히 긴장할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칠악성.’
일곱 선인은 아스가르드의 치부다.
신들이 저지른 죄를 증명하는 존재들이었다.
나의 서사시가 지옥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똑똑히 지켜본 천상의 신들은 아마 칠악성과 관련 된 모든 것을 지우려고 애쓰지 않을까?
내게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
막아야한다.
“...?”
유라 일행이 분투했던 지하.
그곳은 지옥을 왜곡시킨 원흉을 숨겨놨던 장소답게 지옥에서 가장 깊고 은밀한 장소였다.
길이 워낙 좁고 구불구불해서 순보를 쓸 수도 없었다.
하여 부득이 긴 시간을 달려 간신히 지상에 도착한 그리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끝났나.]
악신 아수라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은색 가면을 벗어던진 천사 레가스와 금색 가면을 벗어던진 천사 하오.
또한 검신 비반에게 둘러싸인 채 잿빛으로 산화해갔다.
[바알... 놈의 잔꾀가 도리어 내 발목을 붙잡고 말았군.]
피 섞인 호흡을 간신히 토하는 레가스를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던 아수라가 이내 그리드를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뭐, 다 핑계다. 근원을 확보하지 못한 시점에서 내 패배는 필연이 되었으니.]
아수라의 근원.
붉은 살덩어리였다.
아수라의 진정한 힘은 그것과 결합됐을 때 비로소 발휘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합을 이루지 못했다.
완전하지 못한 상태론 유일신 그리드와 검신 비반이라는 강적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뻔히 알기에 싸움을 피하고자 했던 것인데 그리드 저놈의 경계심이 너무 강했다.
[하지만 곧 재회하게 될 거다.]
“...?”
실시간으로 소멸하는 아수라를 목격하고 안도하던 그리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재회하게 될 거라니?
아수라의 의미심장한 말이 무척 거슬렸으니까.
“무슨 근거로 하는 말이지?”
[...큭큭.]
천천히.
아주 간신히.
죽음에 이르러 축 늘어진 손을 들어 올린 아수라가 하늘을 가리켰다.
지옥의 달이 사라지고 맑게 갠 하늘.
그 위로 지상이, 더 너머엔 천상이 존재한다.
[하늘의 부름을 받았거든.]
“뭐?”
“...!!”
아수라의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늘.
천상.
아스가르드.
그곳엔 한 가지 권한이 있다.
망자를 소집해 천사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설마 신을.
심지어 지옥에서 태어난 악신을 데려가려할 줄이야?
[성녀를 불러봤자 소용없다. 야탄의 무의식이 낳은 존재 따위론 야탄을 초월하기 위해 탄생한 나를 억압하지 못해.]
그리드의 낌새를 읽은 아수라가 피식 웃었다.
더 빠른 속도로 잿빛으로 산화해갔다.
아스가르드의 부름에 호응한 결과였다.
[안심해라 그리드. 가장 위대한 신아.]
가장 위대한 신.
아수라는 그리드를 진심으로 인정했다.
천상의 그 어느 신보다 더 나은 존재로 보았다.
그리드가 바알을 쓰러뜨리기까지 보여준 과정을 바알의 곁에서 직접 목격했던 까닭이다.
[나는 본래 투귀다. 바알과 달라. 쓰레기들에겐 관심 없다. 나의 표적은 오로지 너를 비롯한 강자들이다.]
내가 천상에 올라 어떤 존재가 될지언정.
바알과 달리 지상을 위협할 일은 없다.
아수라가 굳이 이와 같은 사실을 밝히는 이유는 단순했다.
언젠간 자신의 도전장을 받게 될 상대가 안심하고 정진하길 바라서였다.
물론 그리드는 전혀 믿지 않았다.
바알에 의해 태어난 악신을 신뢰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천상의 신들이 내게 바라는 건 아마도 치우...]
바알과 아모락트의 힘과 지식, 그리고 정보를 계승한 아수라.
어떤 추측을 내놓던 그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작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천상으로 솟구쳤다.
“...치우.”
그리드는 대천사 메타트론을 떠올렸다.
놈 또한 치우에게 집착했었다.
어쩌면 천상의 신들 모두가 그럴지 몰랐다.
그들에게 치우란 한울의 도주를 도운 역적이자 레베카를 위협하는 유일한 변수였으니까.
‘아수라의 배경을 고려하면 치우의 대항마로 삼기에 적합하겠지.’
또한 제라툴의 입장을 헤아려야한다.
죄인으로 전락해 감옥에 갇혀버리지 않았나.
그로 인해 천상의 무신은 공석이 되어버렸다.
만약 무신이라는 존재가 천상에 꼭 필요한 것이라면.
아수라를 새로운 무신으로 삼아도 납득이 됐다.
‘...그럼 제라툴은 완전히 버려지는 건가?’
제라툴에게 도움(?) 받았던 순간이 떠올라 마음이 썩 편치 못한 그리드였다.
하지만 잠시 뿐이다.
지금은 기쁨을 만끽해야 할 상황이었다.
아스가르드가 아수라를 수거한 것은 예상치 못한 변수였지만, 어째선지 불안감은 적었다.
아수라가 호락호락하게 이용당할 성격 같지도 않았을 뿐더러, 아스가르드가 어떤 개수작을 부리던 우리가 거기에 흔들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템빨계는 강했으니까.
마침 피아로 일행과 메르세데스 일행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임무를 깔끔하게 완수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또한.
[파그마의 영혼과 조우하였습니다.]
[알렉스의 영혼과 조우하였습니다.]
그리드와 유라에게 개인적인 만남이 찾아왔다.
전직 퀘스트.
평범한 사람들은 몇 년 전에 진즉 끝낸 퀘스트였지만 전설 클래스 유저들은 사정이 달랐다.
하나 같이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난이도가 높았기 때문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그리드와 유라의 전직 퀘스트 난이도가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무려 바알에게 붙잡혀있던 파그마와 알렉스의 영혼을 해방하는 게 퀘스트의 목표였으니까.
지금 봐도 미친 퀘스트였다.
일개 전설 나부랭이가 무슨 수로 바알을 없애고 파그마와 알렉스의 영혼을 해방시킨단 말인가?
심지어 파그마의 후예는 대장장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론 어떤 발악을 해도 바알을 죽일 도리가 없었다.
‘...염병.’
서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어이가 없어서 실소하는 그리드에게 파그마가 손을 내밀었다.
“나의 하찮은 재주가... 귀하께... 도움이 될지... 모르겠소... 하지만 이외엔 감사를 표할 길이... 없구려...”
파그마의 음성은 뚝뚝 끊겼다.
애초에 영혼의 형태 자체가 흐렸다.
알렉스의 영혼도 마찬가지였다.
절대자인 베리아체와는 명백히 다른 것이다.
영혼의 형태를 유지할 만한 능력이 그들에겐 없었다.
곧 윤회의 강에 도착하면 형태를 완전히 잃고 새로운 모습으로 환생을 준비하리라.
[영원토록 고통 받던 숨겨진 영웅의 영혼을 해방시켰습니다.]
[<파그마의 후예>의 전직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새로운 검무를 습득하였습니다.]
참 길었다.
새삼 느끼며 감회에 젖은 그리드가 어느새 한층 더 흐려진 파그마의 영혼에게 말했다.
“이만 푹 쉬십시오.”
더 이상 무엇을 말할까.
파그마는 필시 영웅이었다.
하지만 마냥 찬사 받아선 안 될 입장이었다.
심할 경우 누군가는 그를 악인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었다.
다 상관없는 이야기다.
비록 파그마의 의지는 아니었을지언정.
그는 그리드의 은인이었다.
그리드에겐 그를 평가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칭찬도, 비난도 없이 오직 존경만을 담아 인사했다.
“...”
그리드의 속내를 읽은 파그마가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형태가 점점 옅어졌다.
빛바랜 낡은 도포가 급기야 완전히 투명해졌다.
그러자 드러났다.
도포 속에 긴장한 채 숨어있는 소녀의 영혼이.
랜디와 꼭 닮은 모습의 소녀였다.
“아.”
파그마는 죽어서도 누군가를 지켜왔다.
자신이 생전에 저지른 죄를 조금이나마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
그 사실을 깨달은 그리드가 결국 참지 못하고 외쳤다.
“당신 덕분에... 당신 덕분에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았습니다.”
당신 앞에 서있는 내가 가장 큰 증거다.
그리드가 거기까지 말하는 순간.
파그마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끝내 입을 열지 않고, 쓸쓸한 표정만을 남긴 채 흩어졌다.
그건 분명히 죄인이 지을 만한 표정이었다.
나라는 존재가 그에게 작게나마 위안이 되었기를.
그리드가 애도하며 랜디를 소환했다.
소중했던 친구와 해후하고 이번엔 제대로 작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줬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였다.
웬디의 영혼 또한 사라졌을 무렵.
“그리드!!”
극검과 후로이, 그리고 라엘라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브라함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크라우젤 또한 감감무소식이다.
“여기서 마냥 기다리기보단 수색에 나서는 편이 좋겠어요.”
마침 알렉스와 작별을 나눈 유라가 빠르게 판단하고 의견을 냈다.
어떤 대화를 나눈 걸까.
그녀의 눈시울 또한 붉어져 있었다.
“...?”
메르세데스가 건네준 손수건을 받아들고 잠시 의아해하던 그리드가 그것을 유라에게 건네며 말했다.
“가자.”
한 자리에 모인 그리드와 사도들, 그리고 템빨단.
고룡들이 경악하고 천상의 신들이 긴장할 전력이다.
그들이 푸른 초목으로 뒤덮여가는 지옥을 엄청난 속도로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