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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64화 (1,763/1,794)

템빨 87권 - 12화

붉은 살덩어리.

그 외엔 달리 그것을 칭할 만한 이름이 없다.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고.

“안 끝나? 진짜로?”

바알이 소멸했다는 월드 메시지가 떠오른 순간.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에 환호하던 토반이 식은땀을 흘렸다.

붉은 살덩이는 바알의 소멸과 무관하게 무사했을 뿐더러 새로운 악신이 탄생했다는 소식이 연달아 들려와 절망적이었다.

‘저 역겨운 놈을 언제까지 마주하고 있어야하는 거냐.’

붉은 살덩이는 원구의 형태를 이루고 있으나 표면이 울퉁불퉁했다.

무수히 많은 인면을 외피마냥 두른 까닭이다.

살덩이 전체에 빼곡히 박혀있는 망자들의 입과 코, 눈썹 따위가 실시간으로 꿈틀거렸다.

하나 같이 절규하는 모양새다.

어서 구해달라고.

이곳에서 나를 꺼내달라고 외치는 듯했다.

꿈틀꿈틀!

붉은 살덩이에 박힌 인면 중 하나가 조금씩 돌출된다 싶더니 급기야 사람의 형상이 하나 토해졌다.

이번에도 양반 가람이었다.

조금 전 미르에게 죽임을 당하고도 재차 부활했다.

붉은 살덩이의 살점으로 빚어낸 육신을 토대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건 몹시 편리한 일이군.”

히죽 웃은 가람이 미르에게 쇄도했다.

자신의 육신과 마찬가지로 살점으로 빚어진 장도를 휘두르면서다.

쩌어어어어엉!!

섬전과도 같은 검광이 연신 번쩍였다.

수십 차례의 공방이 교환되며 미르가 몇 걸음 뒤로 밀려났다.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최초에 미르는 가람을 가볍게 압도했었으니까.

신살의 기운에 상처를 입되 가람과 양반들을 쉽게 감당했었다.

하지만 가람은 부활할 때마다 강해졌고 어느덧 미르의 검술을 받아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유독 가람만 그랬다.

다른 양반들은 몇 번이나 부활해도 미르의 일검에 베여 죽기 일쑤인 반면 가람은 실시간으로 고강해졌다.

순수한 재능의 차이다.

똑같은 죽음을 겪고도 유독 가람만이 패착을 즉시 깨닫고 해결책을 빠르게 도모했다. 미르의 검술이 자신을 어떤 방법으로 무력화시키고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는지 통찰하고 배우길 반복했다.

어느덧 붉은 살덩이는 다른 양반들을 부활시키지 않게 됐다.

자신의 살점으로 오직 가람만을 빚었다.

그 과정에서 가람의 팔과 다리가 조금 더 길어졌다.

목과 발목이 두꺼워지고 발가락과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였다.

전신의 근육이 전과 다른 형태로 새롭게 짜였다.

가람이 미르를 초월하기 위해 필요한 신체 조건들을 깨닫고 열망할 때마다 붉은 살덩어리가 호응한 결과였다.

순전히 재능으로 미르의 검술을 따라잡기 시작한 가람에게 붉은 살덩이가 진화한 신체라는 축복까지 내리고 있단 말이다.

“신을 멸하는 검.”

파지직!

꽈아아아아아아아앙!!

신살의 기운.

가람의 의념이 만든 기운을 받아들이고 백열한 장검이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미르의 드래곤 웨폰, <하나>에 깃든 절대적인 요소들을 일부 상쇄시키는 위력이었다.

쩌엉! 쩌엉!! 쩌저저저저정!!

여태껏 하나와 충돌할 때마다 쉽게 부러졌던 가람의 검이 처음으로 멀쩡했다. 무려 수십 합을 견디며 창백한 기운을 흩뿌렸다.

가람은 만족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신을 멸한다고 칭하기엔 아직 손색이 크군. 이름을 달리 지어야겠어.”

푸른 도포가 펄럭이며 휘장처럼 펼쳐진다.

하나가 가람의 가슴을 꿰뚫는 순간 발생한 충격파가 만든 광경이었다.

“쿨럭... 한 치 더 꺾었어야 했군.”

손목을 아주 조금 덜 비틀었다.

털썩!

자신의 검을 종이 한 장 차이로 비끼고 들어온 하나를 다소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던 가람의 몸이 허물어졌다.

아름다운 육신이 순식간에 쪼그라진다 싶더니 더러운 붉은 살점으로 변했다.

주먹 크기의 살점.

고작 그것이 반신의 육신을 빚은 재료다.

붉은 살덩어리의 가능성은 가히 무한했다.

“이쯤 되면 바알이 한울보다 위대한 거 아닌가 싶다만.”

저벅.

가람이 재차 걸어 나왔다.

이번에도 역시 작은 살점을 재료로 삼아 빚은 육신이다.

새롭게 빚은 육신답게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너와 나를 제외하면 모조리 쓰레기에 불과했던 양반 수십 명을 창조하는 게 한계였던 한울과 달리, 바알이 만든 이것은 ‘영혼’이라는 재료만 있으면 대상을 무한히 창조하고 진화시킬 수 있잖냐. 안 그래?”

치우의 시험.

양반은 그 시험을 볼 자격을 얻기 위해서, 또한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 오직 스스로 공부하고 발전해야한다.

마치 인간마냥 노력해야했단 말이다.

태초신의 피조물이라기엔 하찮았다.

그러므로 가람은 삶에 만족하지 못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완전했던 절대자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스스로의 신세에 회의를 느낄 뿐이었다.

물론 그리드를 만난 뒤엔 바뀌었지만.

아무튼 지금은 세상이 쉽고 편하게 느껴졌다.

타고난 재능이 붉은 살덩어리 덕분에 간단히 만개했으니까.

“아주 좋은 기분이야... 미르 너도 이것에게 먹히지 그래?”

“...”

미르는 대꾸하지 않았다.

가람.

양반 중에서도 유독 공부와 단련을 게을리 했던 사내다.

미르는 그의 재능이 낭비되는 것에 대해 늘 아쉽게 생각한 바 있지만, 그건 아주 먼 과거의 이야기였다.

가람의 성격이 몹시 뒤틀려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턴 그의 천성이 게으른 것을 도리어 다행으로 여겼다.

솔직히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가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내심 안도했었을 정도다.

한데 눈앞에 살아서 돌아왔다.

지독한 재능과 무시무시한 가학성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저 붉은 살덩이를 파괴하지 못하는 이상.’

가람 같은 괴물들이 몇 번이고 되살아나 제2의, 제3의 바알이 되지 않을까.

그리드 님께서 기껏 끊어놓은 공포의 근원이 언젠가 다시 부활하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미르가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심상에 하나의 각오를 새겼다.

그 각오란,

“기도가 바뀌었군. 이번엔 또 어떤 가르침을 주려고?”

“기대하지 마라.”

가람의 재능을 억압하는 것.

방법이야 간단하다.

배움을 얻을 틈조차 주지 않고 죽이길 반복하면 된다.

예를 들면,

“...?”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죽이는 식으로.

털썩!

미르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뒤에야 가람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져 죽었다.

최강의 양반 미르.

그리드를 만나기 전까지 그의 꿈은 단 하나였다.

무신 치우의 염원을 이루고 새로운 무신이 되는 것.

오직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진했다.

타고난 재능에 감사하면서.

그렇다.

미르는 모든 면에서 가람보다 우월했다.

그러므로 한울은 바알과 리파엘의 대척자로 미르를 지목했다.

악마의 힘을 빌린 가람이 편법으로 진화를 반복해봤자 미르의 수백 년 노력을 넘어설 순 없었다.

그리드 또한 미르의 가치를 알았다.

그렇기에 주저 없이 자신의 사도로 삼았고, 이번 원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

붉은 살덩어리.

바알을 통해 흡수한 영혼들의 힘을 모조리 구사하는 한편 악마로 부활시켜 수족으로 부리는 괴물.

놈은 몹시 다재다능하다.

특정 대상을 손쉽게 카운터치는 게 가능했다.

예를 들어 메르세데스는.

망자들의 힘을 분석하고 대응하여 무력화시킬 순 있겠지만 그만큼 많은 정신력을 소비한다.

붉은 살덩이가 방출하는 망자들의 힘에 일일이 대응하는 사이에 악마로 부활한 망자들의 협공을 받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힘이 아무리 세도 결국엔 마법사인 브라함도 접근전에 취약한 게 사실이었고, 지크는 룬어를 쓰지 못하는 순간 전투력이 급격히 하락하는 약점을 지녔다.

붉은 살덩이가 망자들의 힘을 십분 활용하면 어떻게든 공략당할 여지가 있는 대상들이란 말이다.

그리드와 라우엘이 논의한 결과 붉은 살덩이를 상대로 가장 승률이 높을 만한 사도는 단언컨대 미르였다.

무신을 꿈꾸는 과정에서 무예에 통달했고 사방신의 힘을 자유롭게 다루는 존재.

미르는 모든 형태의 공격에 적절한 수준의 내성을 갖춘다.

메르세데스보단 못해도 대상의 약점을 파악하는 통찰을 겸비했다.

순간적으로나마 브라함과 비슷한 화력을 발휘할 수도 있었고, 지크처럼 다재다능할 수도 있었다.

물론 붉은 살덩어리를 ‘죽여 없애버릴’ 가능성을 지닌 브라함과 비교하면 기대치가 다소 낮긴 했지만, 유라가 붉은 살덩이의 공략법을 찾아낼 때까지 ‘안정적으로’ 시간을 벌어줄 확률은 미르가 가장 높았다.

쿠와아아아아아!!

붉은 살덩이는 필시 살아있는 존재였다.

가람이 반응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점에 명백히 경계심을 품고 망자들의 힘을 끄집어냈다.

자신이 품고 있는 영혼들의 고통과 슬픔, 절망을 미르에게 집중적으로 전가했다. 마법, 스킬, 물리력, 저주, 재앙 따위의 형태로.

미르는 백호와 현무, 그리고 주작의 힘으로 버텼다.

백호의 힘으로 지면을 조작해 물리적인 공격들을 막아내고, 현무의 독과 저주로 같은 저주와 재앙을 상쇄했으며, 어쩔 수 없이 허용한 마법에 입은 상처는 주작의 힘으로 빠르게 치료했다.

“사신들은 그리드가 해방시킨 거 아니었나?”

켜켜이 떠오르는 사방신의 환영을 목격한 가람이 눈살을 찌푸렸다.

과거.

가람이 살아있던 시절.

양반들이 사방신의 힘을 다뤘던 건 사방신이 봉인되고 약해졌기 때문이다.

사방신이 자유의지를 되찾는 순간 언제라도 빼앗길 힘이었다.

한데 미르는 다루고 있다.

하물며 모든 사방신의 힘을.

“...그리드 덕분에 사방신과 친분을 맺고 힘을 지킨 건가? 큭큭, 네놈에게 자존심 따윈 없는 거냐? 조금이라도 더 많은 걸 누리기 위해 한낱 인간에 불과했던 그리드에게 빌붙어 지내는 꼴이 역겹다.”

가람이 여태까지완 다른 기수식을 취했다.

동시에 무형지기의 운영 방법을 바꿨다. 미르를 타격하고 교란하는 용도로 쓰지 않고 제 몸에 둘러쳤다.

호신강기와는 달랐다.

넓게 펼치지 않고 응축시켜 특정 부위에 겹쳐놓았다.

일단 발밑.

퍼엉!!

도약과 동시에 응축시킨 무형지기를 폭발시키고 무지막지한 가속력을 얻는다.

미르의 검에 미약하게 남아 흐르는 전류를 의식하면서다.

가람은 방금 전 자신이 ‘청룡의 힘’을 일으킨 미르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보다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소용없었다.

가람이 할 수 있는 건 미르도 할 수 있으니까.

붉은 살덩이의 공세를 막아내는 한편 청룡의 기운을 일으킨 미르가 팔꿈치 아래로 응축시킨 무형지기를 폭발시켰다. 거기에 맞춰 손목을 꺾자 무지막지한 속도로 검이 솟구쳤다.

“이 개새끼가...”

보고 따라했다고?

미르가 무슨 짓을 벌인 건지 깨달은 가람이 욕설을 지껄였을 때.

그의 위치는 다시 붉은 살덩어리의 곁이었다.

“...?”

잠시 의아해하던 가람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자신이 또 모르는 사이에 죽었단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허? 이런 개 X 같은 경우가 있나?”

내가 강해지는 속도보다 한 발 앞서 성장하는 놈.

두 번째다.

미르에게서 그리드를 겹쳐 본 가람이 두 눈을 부릅뜬 채 히죽거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을 때 짓게 되는 표정이었다.

“일단 너를 죽여야 그리드에게 도전할 자격이라도 생기겠구나.”

억양이 가라앉았다.

집중하려고 노력하는 모양새.

급기야 입을 완전히 다문 가람이 저 빈틈없는 미르를 어찌 공략할지 궁리하던 와중에 주저앉았다.

하반신의 뼈와 살이 다짜고짜 뭉개진 여파였다.

“뭐지?”

몇 번을 죽어도 크게 개의치 않던 가람이 적잖게 동요했다.

거대한 붉은 살덩어리의 표면을 뒤덮은 인면들이 요란할 정도로 꿈틀거린다싶더니 살덩어리가 뒤룩뒤룩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까닭이다.

이내.

퍼엉!!

살덩어리의 한 지점이 폭발했다.

유라의 총탄에 의해서다.

붉은 살덩어리가 전투 내내 분출한 망자들의 힘을 축적한 총알.

쏘아진 방식도 평소와 달랐다.

페이커가 살덩어리의 몸에 총알을 직접 쑤셔 넣었다.

유라에게 몇 번의 저격을 당한 뒤, 유라를 경계하는 면역체계를 갖춘 살덩이의 허점을 파악하고 정확하게 노린 것이다.

“네놈들...”

가람이 상황을 눈치 챘다.

몇 번을 베이고 부서져도 간단히 재생했던 붉은 살덩어리를 공략하는 방법.

‘과도한 에너지’를 ‘단번에’ 주입해 허용량을 초과시키고 자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실제로 붉은 살덩어리는 무너지고 있었다.

본래 바알을 거쳐 서서히 힘과 영혼을 흡수해왔던 살덩이의 입장에서, 자신이 방출했던 에너지를 한꺼번에 되돌려 받는 건 낯설고 위험한 경험이었다.

살점을 떼어내 다른 존재를 빚을 때마다 생기는 빈틈을 유라, 페이커, 미르, 레라지에에게 공략당하고 누적된 상처가 사실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도 컸다.

끄어어어어...

물을 흠뻑 머금은 진흙처럼 허물어지기 시작한 살덩이의 비명이 길게 이어진다.

놈이 빚은 가람의 육신 또한 영향을 받아 더욱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는 지금쯤 분명히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겠죠.”

그리드.

기껏 바알을 해치우고도 쉴 생각 따위 없으리라.

동료들을 돕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거란 사실을 유라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도착하기 전에 끝내야 해요. 쉬게 해줘야하니까.”

유라는 일행을 격려했다.

효과가 컸다.

고개를 끄덕인 페이커와 토반, 그리고 미르와 레라지에가 그녀가 바꿔놓은 흐름에 편승해서 분투했다. 붉은 살덩이를 허물어갔다.

곧.

“유라!!”

그리드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지옥의 왜곡이 풀립니다.]

상황은 끝났다.

바알마냥 무수히 축적해온 영혼을 흩뿌리며 죽어가는 붉은 살덩어리의 끔찍한 비명이 지하를 뒤흔들었다.

같은 시각, 지상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앞.

“어머님...”

브라함이 베리아체를 맞이했다.

그 어느 때보다 슬픈 표정을 지은 채다.

“이곳에 홀로 오시지 않길 바랐습니다.”

쿠르르르르...

브라함의 마력이 신성과 혼합되어 들끓었다.

명백한 신력이다.

베리아체가 씁쓸히 웃었다.

“너를 보니 마리로즈를 낳지 않아도 되었겠구나.”

그럼 이토록 어그러질 일도 없었을 터인데.

베리아체의 손에 새카만 장검이 쥐어졌다.

온전히 흡수한 바알의 마력으로 빚은 마검이었다.

“그나마 안심이다. 동생을 지키려는 모습이 장해.”

“...”

그게 아니다.

나는 다만 그리드의 반려를 지키려할 뿐이다.

브라함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애써 억눌렀다.

자칫 입을 열었다간 눈물이 흐를 것 같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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