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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62화 (1,761/1,794)

템빨 87권 - 10화

“이건... 사연이 있습니다. 혹시 곡해하실까 염려되어 말씀드리자면, 충분히 세탁을 한 뒤에 남성용으로 마름질해서 사용했고...”

베리아체의 내의.

세계관 최강의 속옷이다.

그리드는 단순히 성능만 보고 그것을 취했다. 맹세컨대 아무런 흑심도 없었다.

굳이 이딴 해명을 늘어놔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하고 서러울 정도였다.

““상냥하군. 괜한 농에 어울려주지 않아도 된다네.””

다행히 베리아체는 그리드를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리드 입장에선 당연한 결과다.

“농담을 던질 상황이 아닌데 말이죠.”

베리아체.

태초의 3악 중 하나다.

바알과 아모락트의 형제란 말이다.

그리드가 베리아체에게 예의를 차리는 이유는 단 하나.

그녀가 브라함과 마리로즈의 어머니기 때문이었다.

오직 그 이유 하나로 베리아체를 존중했다.

딱 거기까지다.

과거에 그녀가 바알과 대적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악마들의 사악함을 체험해온 그리드는 베리아체를 신뢰하지 못하고 경계했다.

그녀가 왜곡되기 전의 지옥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도, 야탄이 선한 존재였다는 사실도 그리드의 경계심을 지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보시다시피 지옥의 왜곡이 풀리지 않은 상황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원인을 수색하고 제거해야하는 이때 괜한 농으로 제 발목을 붙잡으신 저의가 궁금하군요. 그것도 바알과 아모락트의 힘을 취한 직후에.”

언제라도 출수할 기세다.

그리드의 속내를 읽은 베리아체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혈왕일세. 자네의 의도와는 달랐을지언정 나의 의지를 계승한 존재이며 내 여식의 반려이기도 하지. 인사도 나눌 겸 나름의 친근감을 표하고자 운을 떼었던 것인데 수준이 저급한 탓에 오해를 샀군. 미안하네. 내가 부족했네.””

꾸벅.

베리아체가 깊이 고개 숙여 사죄했다.

그리드를 하대할지언정 그것은 스스로 밝힌 관계 때문이고, 실제로는 마음 속 깊이 그리드를 존중하는 태도였다.

이쯤 되자 그리드도 민망해졌다.

“...”

생각해보니 예비 장모님 아닌가?

필요 이상으로 모질게 대한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 그리드가 뭐라 할 말을 찾는 그때였다.

“중요한 대답은 회피하시는군요. 그리드는 당신께서 바알과 아모락트의 힘을 취한 부분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눈치입니다만. 그 부분에 대해서 해명해주시는 게 옳아 보입니다.”

잠자코 상황을 살피던 카츠가 나섰다.

재수 없는 놈.

그리드가 기억하는 카츠의 첫인상이다.

유독 그리드만 카츠를 싫어했던 게 아니다.

누구보다 오만하고 심하게 나댔던 과거의 카츠는 전 세계적으로 안티가 많았다.

미국의 유명 잡지에선 세상에서 가장 미움 받는 인간 탑 100에 카츠를 선정했었을 정도다.

너무 많은 욕을 먹어본 경험 덕분일까.

카츠는 분위기를 읽는 능력이 탁월했다.

눈치가 엄청나게 좋단 의미다.

‘역시... 아픔을 겪어본 사람은 다르구나. 생각이 깊고 확실히 말하는 부분이 나를 조금쯤 닮았어.’

카츠보다 훨씬 많은 안티를 거느렸던 인물이 바로 그리드다.

묘한 동질감을 느끼면서 성장한 카츠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나의 전사가 내가 아닌 혈왕에게 충성하는군...””

읊조린 베리아체가 어깨를 으쓱였다.

““주인 잃은 힘이 있기에 취했을 뿐일세. 얻을 수 있는 힘을 굳이 좌시할 필요는 없지 않나? 자네가 나의 속옷을 취한 것과 경우가 같은 걸세.””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리드 곁으로 달려온 카츠와 달리 베리아체는 여전히 하늘 위에 떠올라 있었다.

실시간으로 넓게 퍼뜨리는 중인 마력과 더불어 전장의 혈액을 탐색하고 흡수할 의도 같았다.

““...뭐, 이것으론 설명이 부족하다 느낄 수도 있으니 첨언하겠네.””

그리드가 뒤늦게 깨달았다.

사람을 내려 보는 것.

베리아체에겐 몹시 익숙해 보인다.

타고난 절대자가 지니는 습성이었다.

한울, 치우, 소별왕, 바알과 아모락트, 그리고 고룡들과 마리로즈.

돌이켜보면 모두가 그랬다.

굳이 단 한 명의 예외를 꼽아 보자면, 그건 바로 빛의 여신 레베카였다.

과거 소수의 플레이어와 교류했던 그녀는 늘 플레이어의 입장을 헤아렸다.

자칫 플레이어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상황에 맞는 퀘스트만 신탁의 형태로 내려 도움을 ‘부탁’했다.

그것도 순전히 지상의 인간들을 위해서.

‘...이제 보니 가장 비정상적이었군.’

그래서 돌아버린 건가.

아니, 돌아버린 까닭에 비정상이었던 건가.

그리드가 새로운 의문을 품는 사이 베리아체의 설명이 이어졌다.

““본래 우리는 소멸하지 않아. 우리가 특별한 게 아니라 세계의 법칙일세. 죽은 자는 영혼으로 회귀해 윤회를 준비한다는 법칙에 우리들 또한 자연히 얽매인다네.””

그녀가 말하는 ‘우리’란 태초의 3악을 뜻한다.

그리드는 바알과 아모락트가 죽은 순간들을 떠올렸다.

둘 모두 ‘소멸’했다는 판정을 받았었다.

윤회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세계에서 지워졌다.

본래 평범한 대악마도 루비가 없이는 소멸시키지 못했는데 말이다.

그리드는 굳이 왜? 라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야탄에게 신벌이라도 받은 게 아닐까, 그냥 그렇게 넘겼다.

귀찮아서 대충 넘긴 게 아니라 굉장히 합당한 추측이었다.

태초신인 어버이를 배신한 자식들.

어떤 꼴을 당해도 납득이 됐으니까.

하지만 베리아체는 다른 진실을 말했다.

““그러나 바알과 아모락트는 죽는 순간 소멸해버렸고 내 생각에 그건 바알의 안배일세.””

“...안배, 말씀입니까? 바알 본인의?”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바알 본인이 스스로의 소멸을 설계했다고?

최후의 순간까지 죽음을 두려워하며 발버둥 쳤던 놈의 태도를 돌이켜 보면 믿기지가 않았다.

““물론 본인이 죽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겠지. 바알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반쯤 장난으로 저지른 일이 아닐까 싶네. 단순한 심심풀이로 ‘절대 일어나지 않을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최선의 해결책을 설계하는 식으로.””

절대 일어나지 않을 최악의 상황.

바알에게 그것은 죽음이었다.

그리고 오늘 진짜로 죽어버렸다.

하필 그리드의 서사시가 그의 최후를 상세히 기술했다. 온 세상에 널리 알렸다.

절대자에겐 치명적인 사건이다.

어떤 수를 써서 부활해봤자 무지막지한 격의 하락을 겪고 전성기에 미치지 못하게 될 터였다.

바알쯤 되는 존재에게 부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알은 최선을 설계했다.

놈에게 최선이란 무엇이었을까.

그리드는 쉽게 떠올렸다.

“아수라... 설마 놈은 자신의 죽음을 아수라에게 바친 겁니까?”

““나는 그렇다고 보네. 신에게 공양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법이니까. 하물며 태초신의 자식을 공양한 걸세.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질 테지.””

바알이 염원한 악신.

놈은 지금쯤 급격히 강해졌을 것이다.

바알의 죽음이 만든 결과였다.

마침.

꽈르르르르르르르릉...

저 먼 곳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지슈카 일행이 싸우고 있는 성문 방향이었다.

마안족 왕의 마안이 아수라의 머리를 더 이상 속박하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리드가 즉시 순보를 썼다.

베리아체가 뒤따랐다.

그녀에게 그리드가 물었다.

“아모락트 또한 제물이 됐다는 것은 그녀가 바알의 장난질에 어울려줬다는 의미가 됩니까?”

““그건 아닐세. 아모락트가 바알을 적대했던 건 진심이었어. 교류 자체를 지양했는데 굳이 바알의 뜻에 어울려줄 이유가 없지.””

“그럼 바알이 강제로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바알이 제물로 바칠 대상을 바알 자신이 아닌 ‘우리’로 지목했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나 또한 위험하단 말일세. 내가 과거에 죽었을 당시엔 아수라가 존재하지 않았고, 바알 또한 우리를 누군가의 제물로 바칠 상상조차 못했겠지만 이젠 상황이 바뀌었어. 현재 상태에서 내 영혼이 파괴될 경우 나 역시 아수라에게 바쳐질 걸세.”

“...”

베리아체의 영혼이 소멸해선 안 된다...

그리드가 상황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순간이었다.

번쩍!

마안족 왕의 파괴 광선이 휩쓸고 있는 성문 방향에서부터 이질적인 빛이 번쩍였다.

자색의 빛이었다.

한 쌍.

안광이다.

그리드가 즉시 역천을 뽑아 쥐었다.

다가오는 아수라의 머리를 요격할 요량이었다.

“...!”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수라.

몸이 조각조각 나뉜 채 바알의 뜻대로 움직여온 허수아비가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낸 까닭이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우리가 굳이 대적할 이유가 존재하나?]

심지어 말을 한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의념이었다.

하지만 의념이 분명한 목소리를 구현했기 때문에 말로 들렸다.

[굳이 앞길을 막겠다면 어울려주마. 하지만 여기선 아니다.]

급속도로 가까워지던 아수라의 얼굴이 선회했다.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놈이 어딘가에 있을 육신과 만나 결합하려는 의도를 읽은 그리드가 순보로 쫓았다.

하지만 누차 말했듯이.

마음먹고 도망치는 ‘절대자’를 사냥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상대방 또한 순보를 쓰기 때문.

그리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자신 역시 순보를 써서 거리를 벌린 아수라의 머리가 어느새 점이 됐다.

““이곳의 상황을 살필 여유는 없을 듯한데.””

마안족 왕은 괜찮을까.

죽어도 부활하는 템빨단원들과 지크야 걱정할 필요가 없다지만 마안족 왕의 목숨은 하나뿐이다.

아주 잠시 망설이다가 아수라의 머리를 놓치게 생긴 그리드에게 누군가가 소리쳤다.

“포르노는 괜찮다!! 지슈카가 대신 죽었어!!”

반트너의 목소리였다.

그리드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마안족 왕의 이름은 포르노가 아닌 포로노 어쩌구일 뿐더러 탱커는 반트너다.

대신 죽어야할 건 지슈카가 아니라 반트너였단 말이다.

그리드의 불만을 뻔히 읽은 반트너가 덧붙였다.

“미안하다! 포르노를 잠깐 방패로 착각했다!!”

“뭔...”

뭔 되도 않는 핑계냐 싶다가도 납득이 됐다.

장장 16시간.

그리드가 바알과 격전을 치르는 동안 반트너는 한 손에 방패를, 다른 한 손에 마안족 왕을 거머쥔 채 아수라의 머리를 묶어뒀다.

그래, 마안족 왕을 방패와 나란히 거머쥐고 있었단 말이다.

마침 바알이 죽고 긴장감까지 느슨해졌으니 손에 쥐고 있는 게 마안족 왕인지, 방패인지 잠시 헷갈렸을 만도 했다.

갑자기 전에 없던 힘을 발휘해서 광선을 뚫고 덤비는 아수라의 머리를 마안족 왕으로 막으려했어도 충분히 이해됐다.

솔직히 나였어도 그랬을 것 같았으니까.

‘젠장.’

반트너의 입장을 이해하는 내 자신이 밉다...

한탄한 그리드가 즉시 아수라의 머리를 추적했다.

뒤쫓아 오는 지크의 기척을 느꼈지만 기다려줄 여유가 없었다.

바르바토스의 시야에도 간신히 걸릴 정도로 아수라의 머리는 멀어져있었다.

아무튼 시야에 포착됐단 말이다.

그리고 순보의 기능은 ‘시야에 닿는 곳’까지 단번에 이동하는 것이다.

[이러면 어떨까?]

기껏 벌린 거리가 무색하게도.

재차 추격해온 그리드에게 히죽 웃어준 아수라의 머리가 흩어졌다.

눈, 코, 입, 귀, 심지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분리되어 사방팔방으로 퍼졌다.

각자가 순보를 썼다.

그중 ‘눈’은 잠시 그리드를 주시했다.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네겐 ‘닿아야’ 되겠군.]

‘뭐 저딴 자식이?’

아수라가 자꾸 지껄인 탓일까.

그리드는 ‘입’에 꽂혀서 입을 쫓았다.

그게 한계였다.

갓 핸드와 랜디, 노에, 템빨골들의 수준으론 아수라를 추적할 수가 없었고 그리드는 입을 제외한 모든 걸 놓쳤다.

[담소라도 나누고 싶은 거냐.]

입이 지껄였다.

[네가 고작 입 하나에 묶여있는 동안 나는 목적을 이룬다.]

“...!”

그리드가 멈췄다.

이곳과 완전히 반대의 방향에서.

비반의 검이 여태껏 본 적 없는 규모로 커지는 광경을 어렴풋이 목격한 까닭이다.

덕분에 아수라의 위치를 파악하고 선회하는 그리드를 이번엔 입이 뒤쫓는 형국이 됐다.

[베리아체는 왜 쫓아오지 않았을까?]

쓸데없는 화두를 던지면서다.

의미심장하게 지껄이는 입을, 그리드는 무시했다.

비반의 커진 검이 부러지는 광경이 그의 새카만 눈동자에 투영되고 있었다.

[파그마의 영혼이 해방되었습니다.]

새로운 소식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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