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761화 (1,760/1,794)

템빨 87권 - 9화

[제1위 대악마 바알을 소멸시켰습니다.]

진저리가 날 정도로 끈질기고 강한 놈이었다.

만약 놈이 최후의 순간만큼은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면, 약간이나마 존중하게 됐을 것 같다.

인류의 원수인 것과 별개로 호적수로 영원히 기억했을 수도 있다.

‘끝까지 버러지 새끼였지.’

그리드가 바알을 지웠다.

도리어 체파르데아를 마음 속 한편에 새겼다.

이족 보행하는 두꺼비.

돌이켜보면 굉장히 많이 마주쳤던 느낌이다.

엄청나게 강하진 않은데 점액을 뿌리는 능력이 까다로워서 여러모로 귀찮았다.

저놈은 대체 왜 죽지 않고 자꾸 나타나는 건가 절로 욕이 튀어나왔을 정도다.

하지만 욕해선 안 될 존재였다.

태초신 야탄에게 충성했던 전사.

야탄이 종적을 감춘 뒤로는 바알에게 저주 받고 기억을 잃은 채 농락당해왔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정신이 붕괴되지 않고 바알을 저승길 길동무로 삼았다.

그리드가 체파르데아에 대해서 아는 건 딱 그 정도다.

그리드 입장에선 스치는 악연에 불과했던 체파르데아의 서사를 제대로 알 도리가 없었고, 세상 또한 그를 기억하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잊어갈 터였다.

그러므로 그리드는 자신이 기억하기로 했다.

[바알에게 억압당했던 영혼들이 해방되기 시작합니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가 저승이었지.’

감상에 젖었던 그리드가 정신을 차렸다.

명줄이 끊어지고 쓰러진 바알의 몸이 광야에 산맥으로 뿌리내린 광경이 시야에 가득 찼다.

죽어서도 압도적이다.

몹시 거대해서 잿빛으로 산화하는 속도가 더디게 보였다.

쏴아아아아아...

바알의 시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잿빛의 기둥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지옥 각지로 흩어지기 시작한 그것들 전부가 망자들의 영혼이었다.

아마 대부분의 영혼이 중립지대의 주민으로 환생해 안락을 누리지 않을까 싶었다.

전생의 슬픔과 아픔을 잊고 평화롭게 살다가 죽어 언젠간 지상에서 다시 태어날 거다.

‘중립지대는 야탄이 직접 만든 공간인 건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대단한데.’

바알조차 어쩌지 못하고 그저 지켜보는 게 한계였던 지옥의 마을과 도시들.

야탄의 석상이 세워진 그곳들은 지옥이 어떤 난리를 겪어도 늘 평화로웠다.

외부의 상황이 어떻든 절대적인 안전을 보장 받았다.

아마 본래는 중립지대 따위가 아닌, 달리 부르는 이름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당대의 인간들은 그 이름을 알 도리가 없다.

알 필요도 없었다.

앞으로 산 자들은 지옥과 교류하지 못할 것이다.

망자들 또한 지상에 오르지 못하게 될 터였다.

지상과 지옥이 서로를 침범했던 여태까지의 상황이 비정상이었다.

왜곡 된 지옥이 만든 기형이었다.

[플레이어 최초로 1,000레벨을 달성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왜...?’

바알이 남기고 간 경험치가 무려 100개의 레벨을 한꺼번에 올려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리드는 기뻐하지 못한 채 의문을 품었다.

지옥의 왜곡이 풀리지 않는 까닭이다.

‘아.’

붉은 살덩어리.

여전히 하늘에 떠올라있는 저 ‘지옥 달의 본체’가 왜곡의 주체였다.

그래, 바알을 죽였다고 해서 끝이 아닌 것이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

[1,000레벨을 달성한 플레이어는 근력, 체력, 지력, 민첩성 총 4종의 주요 능력치를 자유롭게 재분배할 수 있습니다. 단, 능력치를 재분배 할 때마다 3시간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발생합니다.]

[최초 업적 달성 특전으로 능력치 재분배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삭제됩니다.]

[바알을 죽인 보상으로 칭호 <균형의 수호자>를 얻었습니다.]

[바알을 죽인 보상으로 <태초부터 존재해온 핵>을 얻었습니다.]

<균형의 수호자>

거악의 의지에 붕괴되어 가던 지옥과 지상, 그리고 모든 인류의 운명을 구원한 자에게 내려지는 칭호입니다.

오직 당신만이 이 칭호의 주인이 될 자격을 지닌 것입니다.

당신이라는 존재가 세계의 균형을 유지합니다.

그 어떤 법칙과 의지도 감히 당신을 억압하지 못합니다.

유일 칭호.

효과는 무지막지했다.

★각 차원의 고유 효과를 무시합니다.

차원 고유 효과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간단히 예를 들면 아스가르드의 페널티를 무시한단 말이다.

그리드라는 한 명의 존재가 하나의 세계보다 위대하다는 증거였다.

‘이런 걸 보면... 세계 자체를 만든 장본인 레베카는 당연히 템빨계의 영향을 받지 않겠군.’

그리드는 조금도 들뜨지 않았다.

강력한 권한의 실체를 토대로 도리어 냉정하게 분석했다.

최악의 사태를 염두에 두고 대응할 방법을 궁리했다.

바알이라는 강적과 싸운 경험이 그를 한층 더 신중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리드도 사람이다.

늘 냉정할 순 없었다.

<태초부터 존재해온 핵>

본래 야탄의 소유물이었다가 바알의 손에 들어간 물건으로 끝 모를 에너지를 품고 있습니다.

사용자의 소망을 이뤄줍니다.

야탄은 이것의 힘을 빌려 ‘파괴’의 권능을 ‘창조’의 권능으로 바꾸고 망자들의 쉼터를 만들었습니다.

바알은 야탄이 만든 망자들의 쉼터를 지옥으로 왜곡시켰습니다.

사용 가능 횟수:1회

“...?”

태초신의 권능마저 바꿔버리는 물건.

소망을 이뤄준다는 설명에 과장은 결코 없어 보인다.

그리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칸과 그의 아들이었다.

칸을 인간으로 되돌리고 싶었다.

기왕이면 젊은 나이에 죽어 칸을 슬프게 만들었던 그의 아들도 함께 부활시키고 싶었다.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그리드는 소중한 자들의 아픔과 후회를 전부 없애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스모펠이 야탄의 종의 마수에 빠지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피아로와 아스모펠을 비롯한 적기사들의 삶과 가족을 지켜주고 싶었고, 나태의 저주를 극복하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동족을 해치고 모친에게 버림받았던 브라함에게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주고 싶었으며, 제국에게 일족을 몰살당한 카심 또한 돕고 싶...

“...아.”

그리드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주변에 불행하지 않았던 사람이 적다지만 그들의 과거를 되돌려선 안 된단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를 바꾸는 순간 모든 게 꼬인다.

예를 들어서 카심이 일족을 지키는데 성공한단 것은 제국의 침공을 막아낸다는 뜻이다. 당시 늘 제국의 선봉에 섰던 피아로의 적기사단이 패배를 겪어야한다는 의미가 됐다.

브라함의 과거를 바꿔버릴 경우 브라함은 인간의 삶을 체험하지 못한 채 그리드와 완전히 적대하는 역할을 맡을 수도 있었다.

‘애초에 다 끝난 일이다.’

정작 당사자들은 아픔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섰다.

내가 그들의 과거를 끄집는 건 잘못 됐다.

게다가 이 핵이 소망을 들어준다고 해서 정말 모든 게 가능할 리도 없었다.

절대자고, 황제고, 균형의 수호자고 나발이고 간에 플레이어의 권한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리드가 직접 몇 번이나 체험했다.

‘...다 떠나서 사용 가능 횟수도 고작 한 번이다.’

딱 1번만 사용 가능한 만큼 정말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는 게 아닐까?

문득 다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리드는 관심을 거두기로 했다.

이것의 사용처는 반드시 따로 존재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확신에 가깝다.

그간 쌓아온 경험을 근거로 삼았다.

“...”

등 뒤에서 마력의 기척이 느껴졌다.

직접 보지 않아도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기척이 느껴진 지점의 거리가 가늠이 안 되는 걸 봐선 공간이 뒤틀렸다.

워프 게이트가 열린 것이다.

[고생했노라, 유일신 그리드.]

기억에 남는 목소리다.

제2위 대악마 아모락트.

그리드는 마침 잘 됐다 싶었다.

‘민첩에 올인.’

굳이 어떤 명령어를 입력할 필요가 없었다.

시스템이 그리드의 의지를 즉시 읽고 호응했다.

푸욱!

연신 뭐라고 지껄이는 아모락트에게 그리드는 주저 없이 검을 찔렀다.

분쟁의 대악마.

처음부터 신뢰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어떤 달콤한 제안을 내놓으며 협력을 제안했어도 죽일 생각이었다.

화근은 미리 잘라놓는 편이 좋으니까.

‘근력 몰빵.’

그리드의 의지가 보다 간결하고 직관적이게 바뀌었다.

말 그대로 실시간으로 스탯이 바뀌었고 아모락트는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제2위 대악마 아모락트를 소멸시켰습니다.]

[레벨이 17 올랐습니다.]

‘...그만 좀 올라.’

아니 젠장.

안 그래도 플레이어의 레벨은 999가 한계일 것 같다고 주변에 말하고 다녔는데 1,000레벨을 달성해버렸다.

그런데 또 계속 오른다고?

다소 민망하다...

이쯤 되면 모르페우스가 일부러 내 예측의 반대로 시스템을 수정하고 있는 게 아닐까?

여전히 S.A그룹을 신뢰하지 못하는 그리드가 의심을 품는 한편 스탯을 다시 민첩성에 분배했다.

초고속 이동을 위해서다.

현재 유라와 미르 파티가 붙잡고 있을 붉은 살덩이가 표적이었다.

전리품을 살필 여유 따위 없는 것이다.

아직 나타나지 않는 파그마의 영혼을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고.

‘바알이 흡수해온 영혼이 너무 많았어.’

바알의 시체에서 솟아나 하늘을 별빛처럼 수놓는 잿빛 기둥들.

한도 끝도 없이 많다.

직업 퀘스트를 끝내기 위해선 파그마의 영혼을 해방해야만 했는데, 먼저 해방되는 영혼이 워낙 많다보니 차례가 늦어지는 눈치다.

‘이제 와서 직업 퀘스트를 끝낸다고 해봤자 큰 의미는 없겠지만...’

현재 그리드에게 있어서 파그마의 후예는 근원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

어떤 일이든 마무리가 중요한 법이니까.

츠츠측.

순보를 쓰려던 그리드가 멈췄다.

상공에서 새로운 마력의 움직임이 감지 된 까닭이다.

상당히 강력한 마력이었다.

‘아수라인가?’

경계하던 그리드가 멈칫했다.

곧 완전히 개방 된 워프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인물의 정체.

카츠였다.

하지만 경계심을 풀진 못했다.

카츠를 바로 뒤따라 나온 소녀 탓이다.

정확히는 소녀의 형상을 한 영혼이었다.

베리아체.

바알, 아모락트와 같은 태초의 3악이자 브라함과 마리로즈를 비롯한 직계들의 어머니.

그녀가 나타나자마자 지면 곳곳에 스며들어있던 핏물이 모조리 허공으로 부유했다.

수천수만 개의 붉은 보석이 풍경을 가꾸는 느낌.

아름다웠다.

“...!”

잠시 상황을 살피던 그리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허공에 떠올라 작은 방울을 이뤘던 핏물들이 베리아체에게 스며들기 시작하자 죽은 바알과 아모락트의 기척이 느껴진 까닭이다.

베리아체로부터 느껴졌다.

전율적인 현상이었다.

‘만마의 힘...!’

강자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특정 조건을 갖췄을 때’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지는 유형이 있는데 바로 베리아체가 그랬다.

흡혈한 대상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권능.

바알조차도 힘을 축적한 베리아체를 혼자선 어쩌지 못해서 아모락트에게 협력을 요청했었다고 알려졌다.

그래, 그리드도 익히 아는 이야기다.

하지만 직접 보는 건 느낌이 달랐다.

이미 죽은 바알과 아모락트의 힘을 고스란히 품어버리다니...

그것도 고작 그들이 죽으면서 흘린 피를 매개로.

““경계할 필요 없네. 자네와 대적하기 위함이 아니니까.””

겉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말투.

마리로즈의 어머니가 아니라 오히려 딸 같은 베리아체에게 그리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럼 그만한 힘을 축적하신 이유가 뭡니까?”

““힘이야 가지고 있으면 무조건 좋지. 이미 한 번 실패한 삶을 겪은 내가 늘 경계하는 마음가짐을 갖는 건 자연스러운 태도가 아닐까 싶은데. 그보다...””

베리아체의 시선이 그리드의 하반신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사타구니다.

자연스럽게 다리를 오므리는 그리드를 빤히 바라보던 베리아체가 피식 웃었다.

““어째서 자네에게 나의 체취가 나는가 싶었는데 과연... 취향이 독특하군. 여태껏 마리로즈가 잉태하지 못한 이유를 대번에 알겠어.””

“...”

퍼펑.

퍼퍼퍼퍼펑.

곳곳에서 작은 폭음이 발생했다.

갓 핸드가 방송국 카메라들을 모조리 터뜨리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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