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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60화 (1,759/1,794)

템빨 87권 - 8화

아모락트의 성은 기이했다.

규모를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하고 방은 셀 수 없이 많은데 모든 곳이 텅텅 비어있었다.

정말 아무 것도 없다.

생활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이곳 자체가 거대한 함정이 아닐까?

그런 의심까지 품던 카츠가 곧 의심을 거뒀다.

인내심과의 싸움.

반나절 이상 미로 같은 복도를 헤맨 끝에 드디어 발견한 것이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슬들을.

쇠사슬.

봉인의 형상이었다.

본래 바알을 표적으로 삼았던 베리아체의 술법이 만든.

‘이쯤인가.’

사슬이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저 사슬의 끝에 아모락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카츠는 사슬을 쫓아 걷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길을 헤맸다.

워낙 긴 사슬들이 온갖 방향으로 얽힌 탓에 자꾸 갈림길을 제시했다.

“...”

간헐적으로 떠오르는 서사시의 문구를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집중하길 또 몇 시간.

카츠가 드디어 끝에 다다랐다.

미로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대전.

모든 사슬이 그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육체를 연기로 흐트러뜨린 카츠가 천천히, 조심스럽게 대전으로 다가갔다.

거대한 문 너머.

벽에 걸린 여인이 보였다.

하얀 천으로 전신을 감싼 여인이었다.

천 탓에 도리어 더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몸과 얼굴의 윤곽이 조각상처럼 아름다웠다.

품어선 안 될 감상이다.

수천 가닥의 쇠사슬에 온 몸을 속박당한 여인의 정체.

그녀가 바로 제2위 대악마 아모락트였으니까.

겉모습에 현혹 되어선 안 될 대상인 것이다.

“...”

카츠가 숨죽인 채 아모락트를 지켜봤다.

그리드가 그에게 맡긴 임무는 2개.

아모락트를 감시하는 한편 베리아체의 영혼을 수색하는 것이었다.

현재 아모락트가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베리아체의 영혼이 그를 만나면 히든 퀘스트를 줄 확률이 높았다.

이번 원정에 대단히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게 그리드와 라우엘의 추측이었고.

‘잠잠하군.’

카츠는 새로운 서사시의 문장이 떠오를 때마다 아모락트의 반응을 살폈다.

미동조차 없었다.

서사시가 바알의 상태를 어떤 식으로 묘사하던 개의치 않고 침묵할 뿐이다.

그리드가 수세에 몰렸다는 내용이 떠올라도 마찬가지였다.

끝내 지옥의 왕이 두려움을 품게 되었다는 믿기지 않는 문장이 서술 됐을 때도, 그녀는 잠잠했다.

‘상관없다는 건가.’

지옥의 운명이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겠다는 태도...

‘정말로 이번 사건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마냥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모락트가 바알과 협력해서 베리아체를 지옥에서 추방시켰다곤 하나, 그녀가 바알과 협력한 행적은 그때 한 번이 전부였으니까.

지옥이 왜곡된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바알과 다른 길을 걸었다.

레라지에와 엘리고스가 증언했다.

야탄교라는 증거도 있었다.

야탄을 부정하는 바알과 달리, 아모락트는 대리인까지 내세워 종교를 세우고 인간들이 야탄을 숭배하도록 만들었다.

‘그리드의 말대로 바알과 대립하는 건 분명한 사실 같다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알의 위기를 방관하기엔 아모락트의 입장도 난처할 터였다.

아주 만약에 바알이 죽을 경우.

그리드의 다음 표적은 자연히 아모락트가 될 테니까.

아모락트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바알의 위기를 방관해선 안 됐다.

대놓고 바알을 돕진 않을지언정 간접적으로나마 그리드를 훼방 놓으려 시도해야 옳았다.

한데 언제까지 잠자코 있을 작정이지?

카츠의 의문이 커질 때였다.

[바알과 나는 궁합이 몹시 좋단다. 아버지께서 처음부터 짝으로 지어놓으신 게 분명할 지경이지.]

대전 전체에.

아니, 성 전체에 여인의 음성이 울렸다.

“...?”

목소리의 주인이 아모락트라는 사실을 카츠는 잠시 눈치 채지 못했다.

아모락트는 처음 모습 그대로 쇠사슬에 묶여있었으니까.

입을 움직이는 기척이 없었다.

한데도 말하고 있다.

의념이다.

[내가 분쟁을 일으켜 더 많은 다툼을 일으킬 때마다 죽음은 해일처럼 밀려오고 바알은 고강해지니까. 나의 활동이 즉 바알을 위하는 일이 되는 격이니 바알은 내게 위해를 끼치지 않는다.]

바알은 자신을 제외한 존재를 해하길 즐긴다.

한데 정작 자신과 대립각을 세우는 아모락트를 좌시해왔다.

그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또한.

[내가 이 속박을 풀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지.]

태초의 3악 중 하나.

바알과 같은 지옥의 절대자 중 하나인 아모락트는 그간 너무 조용했다.

사람들이 야탄을 숭배하도록 야탄교를 세웠을 뿐, 정작 표면에 나서 적극적으로 인간에게 위해를 끼치진 않았다.

심지어 야탄교가 붕괴될 때도 방관했을 정도다.

인간에게 호의적인 걸까, 혹은 무관심한 걸까.

그런 희망적인 관측을 양산하는 태도였다.

진실은 달랐다.

아모락트는 다만 바알을 돕기 싫었을 뿐이다.

[제1위 대악마 바알이 사망하였습니다.]

마침 충격적인 메시지가 떠올랐다.

설마, 설마 했건만.

그리드가 정말로 바알을 쓰러뜨려버렸다.

단독 레이드에 성공했다.

카츠가 무지막지한 전율에 휩싸이는 순간이었다.

절그럭.

아모락트가 고개를 들었다. 사슬이 그녀를 옥죄기 위해 팽창했지만 소용없었다.

촤르르르르륵!!

아모락트가 천천히 허리를 펼치며 상체를 젖히자 그녀를 속박해온 쇠사슬이 모조리 풀어지기 시작했다.

[이젠 속박 당할 이유가 사라졌구나.]

아모락트 역시 돌연변이다.

망자들을 위로하고 보호하기 위해 자식을 낳았던 절대신 야탄의 바람과 달리 선하지 못했다.

바알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바알과 협력해서 베리아체를 추방시켰다.

부친을 사랑하는 마음과 별개로 지옥을 왜곡시킨 바알을 도왔다.

순수한 악.

속박을 푼 그녀가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발을 내딛는 순간.

““그녀를 막아야 해.””

웅웅 울리는 음성이 카츠의 귓전에 스며들었다.

영혼의 음성이었다.

가녀린 소녀의 모습을 한 영혼.

여러 마리의 드래곤을 무력으로 규제하고 그리드를 도운 지상의 절대자.

결과적으로 바알 레이드를 성공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가 고스란히 어려진 듯한 모습이었다.

“베리아체...!”

급박한 상황에서도 애써 침착하기 위해 노력하던 카츠가 조금 안도했다. 난국을 타개할 기회를 엿봤다.

[전생의 주인을 목격하였습니다.]

[직업 <베리아체의 전사>가 각성합니다.]

[베리아체를 충성 대상으로 지목하여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일부 스킬의 기능이 변경되고 재사용 대기 시간이 조정됩니다.]

연기로 흐트러뜨렸던 육체를 되돌린 카츠가 혈류로 검을 빚었다.

오른손에는 그리드가 만든 드래곤 웨폰을, 왼손에는 베리아체의 권능을 기원으로 삼는 혈검을.

쌍검을 쥐고 <지옥 최후의 수호자를 지키는> 기수식을 취했다.

본래 <주인을 찾아 멈추지 않는>이라는 이름의 스킬이었다.

방어력 상승, 치명타 면역, 무기 위력 상승, 공격 속도 상승, 무조건 치명타 발생과 치명타 데미지 상승 등등.

온갖 버프가 전보다 더 강력해진 상태로 카츠를 켜켜이 감쌌다.

발밑으로 생긴 피의 웅덩이는 카츠의 의지에 호응할 준비를 갖췄고, 공기를 붉게 물들인 혈무는 적의 시야와 감각을 교란하기 위해 차츰 더 짙어져갔다.

안 그래도 초월의 격과 맞물려 위용을 자랑했던 고대 클래스가 한 차원 더 높은 경지로 진화한 것이다.

[베리아체 네가 직접 만들었던 쓰레기보다 그 아이가 훨씬 더 훌륭하구나.]

““쓰레기가 아니라 갸벨리였어.””

[굳이 기억할 필요가 가치가 없는 이름이었지. 반면 저 아이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할 것 같군.]

콰르르르르르릉!!

아모락트가 등지고 있는 벽이 허물어졌다.

대전의 입구를 지키고 선 카츠의 포지션을 무의미하게 만들 작업이었다.

카츠가 즉시 몸을 날렸다.

무너진 벽 너머로 빠져나가려는 아모락트에게 쇄도했다.

[지옥의 도처마다 속박 된 영혼이 존재했던 건 순전히 바알 때문이었다. 바알이 죽은 지금 영혼들은 모조리 자유를 되찾았다고 봐야 옳지. 아이야, 베리아체의 영혼이 무슨 수로 너를 도울 지 모를 상황에서 굳이 너와 어울려줄 생각은 없단다.]

“내가 널 보내줄 생각이 없다.”

[후훗, 필시 넌 훌륭하지만 그런 말을 하기엔 주제 넘는다. 현재 지옥에서 나를 강제할 수 있는 건 그리드가 유일하지. 검신 비반으로도 안 돼.]

처음 침입자들의 기척을 느꼈을 때.

아모락트는 긴가민가했다.

검신으로 거듭난 비반과 유일신 그리드.

둘 중 누가 우위에 있는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둘 모두 대단했기에.

하지만 이젠 확실해졌다.

바알과 싸우는 과정에서 실시간으로 성장한 그리드가 비반보다 명백히 강하다.

도리어 편해진 것이다.

아모락트의 권능은 분쟁을 일으키는 것.

특히 약자가 강자에게 반기를 들도록 만드는 게 아모락트의 특기였다.

인간의 저변에 깔려있는 추악한 감정들.

질투, 욕망 따위를 자극하는 건 몹시 쉬운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마침 바알이 남긴 쓰레기가 비반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아수라.

악신, 이라고 했던가?

황당해서 실소만 나올 뿐이다.

지옥의 신은 아버지가 유일하다.

다른 존재가.

하물며 바알이 만든 벌레 따위가 감히 지옥에서 신을 자처해선 안 된다.

스륵.

워프 게이트를 연 아모락트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바알이 태초의 모습을 되찾은 시점부터 약해져갔던 이동 마법 불가의 법칙이 바알의 죽음과 함께 소멸해버린 것이다.

“...”

아모락트에게 도달하기 직전 쏟아진 마력의 창 탓에 그녀를 놓치고 만 카츠였지만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제 몸을 꿰뚫었던 마력의 창들이 흩어지는 광경을 유심히 지켜봤다.

물론 흩어진 마력은 형태도, 빛도 잃는다.

하지만 혈향은 남았다.

카츠는 제 피를 묻힌 마력의 잔재가 주인에게 회귀하기 위해 향하는 방향을 파악하는 게 가능했다.

플레이어 중에서 이런 일이 가능한 건 카츠와 유페미나를 포함해 몇 명 없다.

“혹시 워프 게이트를 열어주실 수 있습니까?”

혹시 몰라 물어보긴 했지만.

카츠는 베리아체가 고작 영혼에 불과하단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제대로 된 마법을 쓸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물어보면서도 이미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앞길에 워프 게이트가 열렸다.

““쉽다.””

***

“이럴 수가...”

“진짜다...”

끝났다.

이번엔 정말로 끝났다.

그리드가 무슨 수를 써도 죽지 않고 일어서길 반복했던 바알이.

만악의 근원으로 영원불멸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할 것만 같았던 지옥의 왕이.

그리드에게 베이고 침묵한다 싶더니 잿빛으로 산화해버렸다.

현실에서는 뉴스 속보가, Satisfy에서는 서사시가 바알의 죽음을 온 세상에 알렸다.

“우와아아아아아아!!”

“흑...! 흑흑흑!!”

현실은 환희의 함성이 빗발치는 반면 Satisfy에선 눈물이 강을 이뤘다.

죽음은 끝이 아닌 영원한 고통의 시작이다...

이와 같은 진실을 알고 절망밖에 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구원 받은 것이다.

자식의 운명을 걱정하며 잠 못 이루던 부모들, 자신보다 앞서 떠날 부모님의 안식을 위해 온갖 방법을 찾아 헤매온 자식들, 희망 없는 운명을 전가하고 싶지 않아 자식을 낳지 않던 젊은 부부들, 혼자이기에 더욱 고독하고 불안했던 총각들과 처녀들 등등.

막말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드 덕분에 구원을 얻고 감격해서 눈물을 쏟았다. 환호하기엔 감동이 너무 커서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실감이 안 되는 것도 컸다.

사람들은 그리드가 유일한 희망이라며 믿고 따라왔지만, 설마 자신들 세대에서 이토록 빨리 믿음에 보답해줄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었다.

부끄럽게도 믿음이 부족했다...

지금이 꿈이 아닌 현실이란 사실을 재차 확인한 사람들이 슬슬 그리드에게 죄책감마저 품기 시작하는 그때였다.

[고생했노라, 유일신 그리드.]

순백의 여인.

새하얀 천을 뒤집어 써 순결하고 성스럽게 보이는 존재가 그리드의 등 뒤에 강림했다.

[바알과 사투를 벌인 직후라 많이 지쳤을 거라고 예상은 했다만 이토록 쉽게 등을 내줄 줄은 몰랐구나. 내 입장에서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으니 네가 회복하지 못하도록 제약을 걸겠다.]

존재는 겉모습과 달리 악이었다.

제2위 대악마 아모락트.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가 몹시 평온한 말투로 그리드를 위협했다.

이미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비반을 이곳으로 꾀어낼 동안 그리드를 압박하고 약화시킬 술식을 곧바로 완성시켰다.

천에 감싸인 얼굴이 분명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바알.

상성상 이길 수 없던 놈이다.

아모락트는 놈을 없애준 그리드가 너무너무 사랑스러웠다.

그리드가 만들어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옥의 왕으로 군림할 생각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드는 바알과 싸우는 과정에서 그녀의 상상 이상으로 강해졌다.

정확히는 바알을 죽였다는 결과 덕분에 급격히 성장했다.

전혀 지치지 않았다.

바알과 싸우는 과정에서 소모 된 모든 것이 완벽하게 회복된 상태였다.

아니, 회복을 넘어선 진화다.

100레벨 단위 레벨 상승.

이는 플레이어를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스탯의 효과를 각성시키는 가치를 지녔으니까.

“...어?”

아모락트가 신음했다.

입으로 직접 토하는 신음이었다.

당황하는 그녀의 심장에 역천이 꽂혀있었다.

9차 각성.

그리드는 바알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리는 과정에서 900레벨을 돌파했고,

“...무, 무슨... 쿨럭!”

10차 각성.

바알을 완전히 소멸시킨 결과로 1,000레벨을 달성했다.

그것이 지옥의 왕이 지닌 가치였다.

왕의 그늘에 가리어 죽은 척 지내왔던 2인자 따위에게 그리드를 농락할 자격은 없었다.

[능력치를 재분배합니다.]

아모락트를 기습할 때 모든 능력치를 민첩성에 분배했던 그리드가 실시간으로 스탯을 재분배했다.

공용 특성의 활용이다.

1,000레벨을 달성한 플레이어는 능력치를 원할 때마다 재분배할 수 있고, 그 횟수에는 제약이 없다... 라는 사실을 오늘 그리드가 최초로 밝혀냈다.

게다가 최초 업적 달성 특권으로 스탯 재분배 때마다 발생하는 재사용 대기 시간의 제약도 없었다.

[모든 능력치를 근력에 투자합니다.]

푸화하하하하하학!!

아모락트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드의 검에 담긴 위력을, 타고난 절대자의 신분으로도 전혀 감당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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