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759화 (1,758/1,794)

템빨 87권 - 7화

바알은 천상의 절대자들과 다르다.

시간의 개념을 초월하지 못하고 얽매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강해지는 탓이다.

바알은 현재의 자신이 완전하지 못하단 자각이 있었다.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꾸준히 발전하는 중이기에.

비록 지금은 완전하지 못할지언정 언젠가 정점에 오를 거라는 확신이 그에겐 있었다.

지상에 더 많은 질투와 의심이 싹트고, 다툼과 전쟁이 반복 될수록 바알은 완성되어가는 것이다...

하여 늘 여유가 있었다.

최초에 그리드에게 죽음을 겪었을 때도 순순히 받아들였을 정도로.

다음엔 다를 거라고 여기면서였다.

하지만 오늘의 결과는 어떤가.

그리드의 성장 속도는 바알의 예측을 초월했다.

그리드가 폭발적인 성장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예측이었는데도 그랬다.

심지어 바알과 싸우는 내내 실시간으로 강해졌다.

마치 바알의 상위호환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알의 강점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고룡들이 도운 탓이다.’

특히 염룡 트라우카.

놈이 그리드에게 제 팔을 유기한 시점부터 모든 게 꼬였다.

원인을 분석하는 바알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어떤 감정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긴 세월 축적해온 영혼들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와중에도 바알은 잠자코 있었다. 그것들을 굳이 붙잡으려 애쓰지 않았다.

단 한 번의 호흡조차 뱉지 않고 검을 휘둘러대는 그리드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힘겹게 한 마디 토할 뿐이다.

[내가 하나여선... 안 되겠군.]

“...?”

네펠리나의 초월룡 지속 시간이 끝난 상황.

드래곤 나이트의 효과가 풀리고 혼자가 된 그리드는 조급해진 상태였다.

이때 바알이 내뱉는 의미심장한 말은 그를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째깍.

정체불명의 소음이 들려왔다.

시계의 시침이 움직이는 듯한 소리에 불과했지만, 갑자기 그런 소리가 들렸다는 게 문제였다.

치우의 방울소리처럼 특별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어떤 전조다.

절대자의 궁극기.

눈치 챈 그리드가 멈추고 있던 호흡을 토했다.

급히 상공으로 솟구치며 바알로부터 떨어졌다.

간격 조절.

무의미한 행동이다.

절대자의 궁극이 고작 거리의 개념에 얽매일 리 만무했다.

번쩍!

소음의 정체가 밝혀졌다.

지상에 널브러진 바알과 비행 중인 그리드 사이로 회중시계가 떠올랐다.

기괴한 문양으로 장식 된 시계였다.

표기 된 시간 단위도 상식과 거리가 멀었다.

드륵, 드르르르르륵!!

시침이 맹렬히 회전한다.

그에 따라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황량한 지옥의 광야가 초목이 무성한 평야로, 푸른 대지가 펄펄 끓는 붉은 대지로, 1초에도 수십 번씩 계속해서 바뀌었다.

그리드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는 변화.

그것은 지옥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풍경이었다.

‘내가 이 힘을 쓰게 될 줄이야.’

바알이 느끼는 분노의 저변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리드를 이기지 못할 거라는 판단에서 비롯된 두려움이었다.

모든 걸 잃게 될 것만 같았다.

명백히 수세에 몰렸단 의미다.

그래서 태초의 모습까지 되찾았건만 상황을 반전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므로 의지한다.

아버지 야탄이 내린 힘.

그 큰 몸으로 죽어 이곳에 떨어진 자들을 포용하고, 이 시계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그들의 한을 풀어주길 바란다... 라는 헛소리와 함께 내렸던 힘 말이다.

바알은 이 역겨운 힘에 굳이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곤죽이 된 야탄.

유약한 심상마냥 볼품없는 죽음을 맞이한 놈을, 바알은 정말 힘겹게 심연에 묻었었다.

놈의 의지가 남아있는 일부 중립지역을 제외하곤 지옥에서 잊히도록 의도해왔다.

야탄교라는 되도 않는 종교를 세운 아모락트 탓에 지상의 인간들은 야탄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상의 사정이다.

바알은 지옥에서 야탄이 끝내 잊히길 소망했다.

물론 잊힌다고 해서 소멸할 태초신이 아니지만.

바알이 지옥을 지배하며 군림하기 위해선 야탄이 표면에 드러나선 안 됐다.

하여 억눌러왔던 힘을,

[그리드 네가 자초한 결과다.]

꺼낸다.

쿠웅...!!

지축이 흔들렸다.

연속해서 바뀌는 풍경 속에서부터 나타난 거인의 발걸음 탓이다.

초목이 우거진 평야에서 걸어 나온 거인.

놈의 정체는 바알이었다.

정확히는 과거의 바알이다.

현재의 바알과 비교하면 한없이 온순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과거의 나와.]

비틀비틀.

커다란 몸을 간신히 일으키기 시작한 바알의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가 번졌다.

[미래의 내가, 나와 함께 너를 도륙할 거다.]

미래의 바알.

그것은 바알 본인조차 가늠하기 힘든 궁극이었다.

인류가 다툼을, 전쟁을, 멸망을 겪을 때마다 극단적으로 강해지길 반복했을 미래의 나는 필시 지상의 고룡들을 멸하고 천상마저 정복했으리라.

상상하며.

바알은 미래의 자신을 기다렸다.

상황을 눈치 챈 그리드의 낯빛은 급격히 어두워진 상태였다.

과거, 현재, 미래의 바알을 동시에 대적해야한다고?

말도 안 되는 권능이다.

간신히 거머쥔 줄 알았던 승리가 한없이 멀어지는 느낌.

패배와 실패라는 단어가 그리드의 뇌리에 연달아 새겨졌다.

“안 돼...”

멀찍이서 상황을 지켜보던 네펠리나가 좌절했다.

찍찍.

기회를 엿보던 번헬리어 역시 주저앉아버렸다.

벽에 등을 기대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생쥐가 한숨 쉬었다.

“이건 못 이긴다. 찍.”.

태초부터 존재해온 번헬리어.

그에게도 바알의 권능은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바알의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이상의 탈력감에 휩싸였을 지경이다.

그리드는 오죽하겠는가.

지난 몇 달 동안의 준비와 오늘의 치열한 사투가 모조리 덧없는 것이 됐으니...

아마 다시 일어서기 힘들지 않을까?

번헬리어는 그리드가 이대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지옥을 정화하고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허황 된 꿈을 포기하는 계기가 될 거라고 봤다.

분위기가 한없이 암담해졌다.

“...괜찮아.”

정작 그리드는 주저앉지 않았다.

일말의 절망감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애써 태연한척 연기하는 거라기엔 두 눈에 깃든 의지가 너무 강렬했다.

“이보다 더한 시련을 수도 없이 겪어왔다. 극복할 수 있어.”

본래 그리드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평범하게 공부하고 일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부러워하는 게 고작이었던, 평범 이하의 인간이었다.

한데 지금에 이르렀다.

이제와 어떤 절망을 마주할지언정 과거보단 나은 것이다.

[...?]

바알이 의아해했다.

당혹감을 느끼는 수준을 넘어 초조한 기색을 드러냈다.

예상치 못한 그리드의 태도에 위축 된 게 아니다.

미래의 내가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놈이?]

바알의 머릿속에 한 가지 광경이 떠올랐다.

레베카를 의자 대신 깔고 앉은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를 비웃으며 감상하는 광경이었다.

[...둘로 충분하다.]

이를 간 바알이 과거의 자신에게 눈짓했다.

드래곤 없이 혼자인 그리드.

전투 내내 많은 걸 소모해서 기세가 약해진 놈을 협공해서 죽이자는 신호였다.

[...]

하지만 과거의 바알은 협력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현재의 바알을 바라보다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초목의 풍경 속으로 사라져갔다.

협력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과거의 바알은 아직 순수했으니까.

야탄이 내린 의무를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시절이다.

딸깍.

급기야 회중시계가 멈췄다.

풍경 또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왔다.

“너는 너 자신조차 배신하는 놈이구나.”

어느새 다가온 그리드가 바알의 심장에 검을 꽂았다.

오늘 중 최고의 일격이었다.

6융합 검무의 모든 동작이 매끄럽게 연계됐다. 그리드가 그려온 이상을 완벽하게 구사한 수준이었다. 약점 공격과 치명타가 모든 타격마다 적용됐다.

[큭...! 크아아아아아아악!!]

바알이 참지 못하고 비명을 터뜨렸다.

억눌러온 감정들이 담긴 비명이었다.

죽음.

평생토록 농락해온 개념이 자신을 덮쳐오고 있음을 직감하면서다.

‘실수... 실수였다.’

바알이 죽음을 극복해온 이유는 그가 공포의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초의 바알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리드가 두려워서.

그리드를 반드시 없애기 위해.

결과적으로 더 큰 힘이 필요해서 되찾은 태초의 모습에 발목을 붙잡힌 셈이다.

지금의 그는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

죽으면 정말로 끝이었다.

죽어선 안 됐다.

콰르르릉!!

바알은 상상 이상으로 끈질겼다.

6융합 검무에 벌써 몇 번이나 난도질당하고도 죽지 않고 버티며 태초의 모습을 되찾은 이유를 증명했다.

놈이 발악적으로 휘두르는 주먹과 놈이 비명을 토할 때마다 쏟아지는 마력의 광선이 그리드를 넝마로 만들어갔다.

염룡갑의 절대방어와 충격 완화 옵션이 점차 한도를 초과해가는 충격을 감당 못했다.

‘버텨. 버텨라.’

적진 한복판이다.

아수라와 아모락트 등의 변수가 남은 상황에서 불사를 소모해선 안 된다.

그리드도 바알만큼이나 필사적이었다.

바알과 자신의 피를 뒤집어 써 붉게 물든 눈을 단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집중했다.

어떻게든 덜 맞고 더 때리기 위해서 인공 감각을 적극 활용하며 머리를 쉴 새 없이 굴렸다.

그 모습이 바알을 한층 더 절망시켰다.

죽는다.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막연히 상상만 해왔던 개념이 턱밑까지 다가왔다.

죽음이, 소멸이 실감나기 시작한다...

그때였다.

“주군...! 바알 니임!! 개굴!!”

이족 보행하는 두꺼비가 뒤뚱뒤뚱 달려왔다.

바알의 최측근 체파르데아.

충신 중의 충신이다.

놈이 허공의 그리드를 향해서 끈끈한 체액을 연신 토했다.

긴 혀를 뻗어 어떻게든 그리드의 발목을 붙잡기 위해 노력했다.

‘저 병신이...!’

안 그래도 전 방위 공격을 일삼는 바알 탓에 그리드는 혼란 직전이었다.

인공 감각이 전달하는 신호가 워낙 많은 탓에 일일이 반응하기 힘들던 차였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중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때 훼방꾼의 난입은 굉장한 골치였다.

대상의 움직임을 제약하는 체파르데아의 끈적끈적한 체액을 갓 핸드는 실제적인 위험으로 판단했다.

그것이 날아오는 방향조차 모조리 그리드에게 전달하는 까닭에 그리드의 뇌가 폭발하기 직전까지 갔다.

결국 빈틈을 드러내고 말았다.

바알에게 반격을 허용했다.

쉬지 않고 공세를 퍼부어야 죽일까 말까한 놈에게 숨 돌릴 틈을 줬다.

“바알 님!! 제가 어떻게든 시간을 벌 테니 어서 피신하십시오...!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보중하셔야 합니다!!”

바알 앞에 도착한 체파르데아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수십수백 번.

아니, 어쩌면 수천수만 번을 바알에게 농락당한 끝에 살해 당해온 놈이 끝내 진실을 모른 채 바알에게 충성했다.

[체파르데아...]

덕분에 희망을 엿본 바알이 체파르데아에게 그윽한 애정이 담긴 눈길을 보냈다.

체파르데아가 감격해서 분기충천했다.

바알과 비교하면 티끌보다 작은 주제에 두 팔을 벌리고 바알을 보호하듯 섰다.

“유일신 그리드...! 이 앞으론 한 발자국도 못 나아간다!!”

“너...”

그리드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덥썩.

집게를 만든 바알의 커다란 손가락이 체파르데아의 퉁퉁한 몸을 붙잡아 들어올렸다.

“어? 어어?”

붕 떠오른 체파르데아가 순식간에 바알의 얼굴 앞에 도달했다.

놈이 짧은 팔다리를 휘저으면서 외쳤다.

“주군...! 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 따윈 버리고 어서 도망치십시오...!”

눈물까지 글썽인다.

위기의 순간에서 자신을 외면하지 못하고 함께하려는 바알에게 감동했다.

놈에게 바알이 히죽 웃어보였다.

[매번 네놈 덕에 웃는구나.]

“...하하? 다, 다행이십...”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호응하던 체파르데아의 얼굴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놈의 배를 붙잡은 바알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 까닭이다.

감당 못할 압력 탓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체파르데아의 모습이 바알의 커다란 눈동자에 적나라하게 투영됐다.

[가엾고 어리석은 야탄의 심복아. 내게 수만 번을 배신당하고 살해당해도 매번 날 즐겁게 해주는 네놈을, 나는 진정으로 사랑한다.]

“...!”

튀어나오기 직전까지 부푼 체파르데아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단순히 살가죽과 내장이 뭉개진 충격 때문만이 아니라 진실을 떠올린 여파였다.

늘 죽음 직전에야 떠오르는 진실이었다.

“...네...노옴...”

[오늘로 영원히 작별이겠구나. 심히 아쉽다.]

멋대로 작별을 고한 바알이 체파르데아를 입속에 던져 넣었다.

자신의 입장에선 좁쌀보다 작은 그것을 굳이 우물우물 씹어서 꿀꺽 삼켰다.

철저히 소화시키기 위해서다.

본인이 낳은 수천 개의 알과 영혼, 마력, 육신을 공유하는 악마.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야탄의 수호자를 자처할 정도로 강력해지는 놈을, 바알은 온전히 섭취함으로써 진화를 꿈꿨다.

산란장에 걸어놓은 술식을 작동시켜 그곳에 있는 알들을 모조리 체파르데아에게 전이시키고 한꺼번에 소화시켰다.

[...하아.]

의외로 진화의 징조는 즉시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의 위기를 넘기기엔 충분했다.

급한 상처들이 빠르게 회복됐다.

그리드 저 지긋지긋한 놈을 뿌리치고 윤회의 강으로 피신할 정도의 체력과 마력을 확보한 것이다.

[내가 괜한 놈을 곁에 뒀던 게 아니지.]

“혐오스러운 새끼...”

그리드가 서사시를 의식하지 못했다.

바알에게 극도의 혐오를 느끼며 욕설을 토했다.

바알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콧방귀 뀐 놈이 그리드를 등지고 비행하기 시작했다.

윤회의 강을 향해서다.

순식간에 도달할 터였다.

쿠구구궁...

뱃속에서 천둥이 울리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뭣...]

야탄이 천상을 떠날 때 호위했던 전사.

바알이 체파르데아의 힘을 온전히 흡수하기 위해 알을 전이시킨 건 최악의 실수였다.

자신도 모르게 수천 개의 알에 마력을 분산시켜왔던 체파르데아가 이 순간 알을 품고 과거의 힘을 되찾았다.

바알의 뱃속에서 마력을 분출하며 놈의 장기를 모조리 진탕시켰다.

자신 또한 위액에 실시간으로 녹아내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죽어 갈 곳 잃은 자들의 쉼터를 처참하게 망가뜨린 죄인이여, 오늘 기필코 신벌을 받으리.]

[네놈의 신은 사라진지 오래다...!]

뱃속에서 활개 치며 지껄이는 체파르데아에게 바알이 외쳤다.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간신히 쥐어짜는 게 느껴졌다.

어울리지 않는 희열이 미약하게 깃들어 있었다.

순수한 악.

바알은 이 순간에도.

체파르데아에게 절망적인 소식을 알렸다는 점에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의외로 체파르데아는 절망하지 않았다.

도리어 피식 웃었다.

바알의 위액에 녹아가며,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눈앞에 있는 신을 외면하지 마라...]

지상의 신 그리드를 칭함이다.

정신을 차린 바알이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쥐새끼처럼 다시 나타난 번헬리어의 위에 선 그리드가 주황색 신성을 펄럭이며 쇄도해오고 있었다.

조금 전 체파르데아가 말했던 신벌의 형상이다.

“바아아아아아아아알!!”

[...바퀴벌레 같은 놈이...]

바알의 유언은 하찮았다.

만악의 근원이 남길 말로 적합하지 않을 정도로.

그리드는 오히려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저 금수보다 못한 놈은 세상에서 가장 하찮게 죽어 영원토록 조롱받아야 마땅했으니까.

푸화하하하하하학!!

하늘을 끌어내릴 검이,

[제1위 대악마 바알이 사망하였습니다.]

지옥과 지상을 뒤덮어온 암운을 우선 베었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바알은 깨달았다.

미래의 내가 응답하지 않았던 이유.

존재하지 않아서였다.

분노였다.

분노.

일을 뜻대로 풀지 못하는 하찮은 존재들이나 품을 만한 감정이다.

무수히 많은 운명을 조롱하고 입맛대로 조종해온 지옥의 왕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큭큭!]

가슴을 짓밟고 선 그리드에게 연거푸 난도질당하면서.

바알은 자신이 진즉부터 평정심을 잃었단 사실을 눈치 챘다.

‘질 만했다.’

분신들이 가져온 데이터 속 드래곤 웨폰과 아머.

그것들의 위력을 월등히 초월하는 그리드의 검과 갑옷에 낭패를 겪은 무렵부터 나는 초조함을 느꼈고 이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하찮은 존재들마냥...

이길 자격이 없었다.

스아아아아...

죽음을 상징하는 잿빛.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