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7권 - 5화
쿠우우우웅...
번헬리어가 전력의 마력을 담은 브레스가 바알의 몸을 한 번 흔들었고,
“우오오오오오오!!”
그리드는 위룡극파살연(爲龍極派殺聯)으로 호응했다.
짤랑.
치우의 방울 소리가 전조였다.
궁극의 무가 발동하며 바알을 재차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번헬리어의 몸통 박치기가 바알을 때렸다.
생쥐의 모습으로 숨죽이고 있다가 기습에 성공한 번헬리어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리드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화.
보통 식물계 보스가 사용하는 저 변신계열 스킬에는 명확한 장점이 2개 있다.
첫째는 능력치가 대폭 증가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질량 자체가 늘어나는 까닭에 중상을 면역하는 체질을 발휘한다.
특히 바알은 검에 찔려도 이쑤시개에 찔린 것으로 취급해도 될 만큼 거대해진 상태였다.
[서둘러라! 다 쏟아 부어!]
번헬리어의 의지가 그리드에게 의념으로 전달 됐다.
드래곤 나이트의 효과 덕분일까.
그리드와 번헬리어는 실시간으로 교감했다.
서로의 뜻을 제 뜻처럼 읽고 서로에게 호응했다.
그리드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신장 등의 능력으로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초기화시키고 6융합 검무를 재차 연계시켰다.
[대상에게 24,469,055,1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세계에 유일한 존재를 대상으로 최고 데미지 기록을 갱신합니다!]
[천상의 감옥에 갇힌 누군가가 당신의 놀라운 업적을 눈치 채고 혀를 내두릅니다.]
[“이쯤 되면 도미니언과 쥬다르도 주목하겠군...”]
그리드 입장에선 다행이게도.
바알의 거대화는 반쪽짜리 강점을 지닌 듯했다.
방어력은 도리어 취약해진 느낌.
데미지가 정말 잘 박혔다.
물론 역천과 황혼의 합일이 엄청난 시너지를 발생시키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했다.
대악마에게 입히는 추가 데미지 옵션만 해도 상승폭이 3배는 오른 상태였으니까.
게다가 약점 공격과 치명타가 기본으로 터진다.
거대화의 강점을 자연스럽게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점을 감안해도 딜이 너무 잘 박혀.’
이유가 뭘까.
그리드는 쉽게 짐작했다.
본래 바알의 강점은 망자들로부터 학습한 기술의 연쇄에 있었다.
그 기술들 덕분에 그리드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히는 한편 그리드의 공격력을 일부 상쇄시켜왔다.
하지만 거대화 된 바알은 어떤 특별한 기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마 저 큰 몸으로는 인간들의 기술을 구사하기 힘든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6융합 검무를 쉬지 않고 연계하던 그리드가 잠시 멈췄다.
검무의 쿨타임을 되돌릴 수단이 모두 소모된 까닭이다.
템빨계가 아니라 아쉬웠다.
여태껏 살아있는 바알에게 경외심을 느끼기도 했고.
크아아아아아아아아!!
6융합 검무가 멈췄다는 건 궁극의 무의 속박이 풀렸다는 의미기도 했다.
자유를 되찾은 바알이 영화 속 괴수마냥 포효했다.
이성을 상실하고 짐승처럼 구는 건 아니었다.
단지 거대해지고 다소 흥분했을 뿐.
바알은 폭주하지 않았다.
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번헬리어의 처분이었다.
거대해진 손으로 번헬리어의 목덜미를 낚아채 쥐더니 즉시 저주 마법을 전개했다.
“끄으윽...!”
지옥에서 번헬리어는 약하다.
단순히 마력과 육체적인 능력만 놓고 보면 중위룡과 상위룡의 중간쯤이었다.
번헬리어 입장에선 몹시 굴욕적일 테지만 어쩌겠나.
자업자득이다.
악마와 손을 잡고 동족을 해친 죗값을 치르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그리드 입장에서 다행인 사실은.
“놔라!”
번헬리어가 격만큼은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고룡의 격.
그 어떤 개념도 함부로 꺾지 못한다.
수백 년째 광기에 사로잡혀 배회 중인 네바르탄이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인 것처럼, 번헬리어 또한 여전히 고룡이었다.
악마의 함정에 빠져 농락당했다거나 생쥐로 변해 연명했다는 사실 따위가 그의 가치를 훼손하지 못했다.
드래곤 나이트의 효과는 온전하단 의미다.
번헬리어의 목을 그대로 뽑아 버리려는 바알에게 그리드가 맹공을 퍼부었다. 원덕구를 전개해서 바알의 거대한 손을 저격했다.
드래곤 나이트 효과까지 등에 업어 몹시 강력했다.
위력을 감당 못한 바알이 손을 놓고 말았다.
덕분에 번헬리어의 숨통이 트였지만 하늘에선 저주 마법이 떨어지는 중이었다.
“다시... 다시 돌아오마.”
번헬리어는 그리드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았다.
즉시 생쥐로 변하더니 현장을 빠져나갔다.
덕분에 허공에 덩그러니 남겨진 그리드를 저주 마법이 덮쳤다.
[1,333,333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강력한 마력의 속박이 당신을 억압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염병.’
얼떨결에 화살받이가 된 그리드가 저절로 욕설을 토했다.
애초에 번헬리어를 겨냥했던 속박이야 당연히 저항했지만 데미지가 상당히 아팠다.
바알이 팔을 휘두르거나 포효할 때마다 도트뎀을 입는 것마냥 생명력이 깎여나가는 상황에서 이건 꽤 부담스러웠다.
[저딴 놈과 협력한 네 판단력을 원망해라.]
설마 마물보다 작은 미물로 변신한 건가?
...진짜로?
눈앞에서 불쑥 사라져버린 번헬리어 탓에 잠시 당황하던 바알이 이내 히죽거렸다.
피투성이가 되기 시작한 그리드의 모습이 꽤나 흡족한 눈치였다.
연달아 큰 피해를 입고 비명을 지르는 추태까지 보였던 놈치고 굉장히 여유롭다.
그리드가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눈치 챘다.
‘죽질 않아?’
인간형일 때의 바알은.
아이템 합체로 하나가 된 역천과 황혼의 평타 공격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몇 번의 죽음을 겪었다.
한데 거인이 된 놈은 인간형일 때보다 더 큰 데미지를 입고도 죽질 않았다.
6융합 검무를 무려 9번이나 연달아 얻어맞고도.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거인이 된 이후 생명력 게이지 자체가 사라져버려서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다.
정확히는 사라진 게 아니라 식별이 어려웠다.
바알의 머리가 아득히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으니까.
그 위로 둥둥 떠있을 생명력 게이지를.
심지어 바알의 머리에 비해선 한없이 작을 게이지를 가까운 거리에서 식별한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순보를 못 쓰니까 여러모로 불편하군.’
혀를 차는 그리드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바알이 입으로 토해낸 마력이 덮쳐온 까닭이다.
해일이 몰려오는 듯했다.
땅과 하늘이 격동하며 그리드의 시야를 한층 더 어지럽혔다.
‘안 돼.’
갓 핸드를 결집시켜 막으려던 그리드가 도중에 판단을 바꿨다.
해일 뒤로 쫓아오고 있을 바알의 손을 의식한 것이다.
갓 핸드로 태양을 빚고 몸을 감싸는 순간.
바알의 거대한 손에 붙잡혀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될 것을 염려했다.
‘한 번 더 죽일 방법부터 찾아야 돼.’
전력으로 비행해서 바알과 거리를 벌린 그리드가 생각했다.
레벨을 올리고 싶다...
능력치가 오르면 조금 더 싸우기 편해질 터였다.
하지만...
“큭!”
전세는 빠르게 기울고 있었다.
바알이 토하는 숨결과 대수롭지 않은 손짓 하나하나가 전부 그리드를 압박했다.
태초의 모습을 되찾은 바알은 여러모로 까다로운 상대였다.
일단 거대하다는 이유 하나로 그리드의 강점을 여럿 무력화시켰다.
서사시가 그러한 상황을 서술했다.
그리드의 명백한 위기.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외면하지 못하고 기록했다.
애써 숨겼다가 그리드가 죽게 될 경우.
서사시가 오직 진실만을 담은 경전이 아닌 왜곡 된 마서쯤으로 취급 받을 우려가 있었으니까.
그간의 기록들이 모조리 신빙성을 잃고 그리드의 격이 하락할 수도 있었다.
한데.
[인류의 공포가 옅어집니다.]
사람들은 그리드의 위기를 전달 받으면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다.
거인이 된 바알의 모습을 사실대로 묘사하는 서사시의 내용을 확인하고도 겁에 질리지 않았다.
여전히 그리드를 신뢰했다.
당연하다.
그간 그리드가 보여준 모습이 워낙 많았으니까.
지상 곳곳에 모인 사람들이 외쳤다.
그리드는 새로운 재앙조차도 극복할 거라고.
설령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할지언정 재차 도전할 거라고.
그들의 믿음에 호응하는 존재가 있었다.
“그리드으으!!”
네펠리나였다.
“허억! 허억! 젠장! 고X라냐? 저거 뭐야, 대체! 왜 저렇게 커!?”
레이더스에 탑승한 채 그녀를 뒤따르는 지발의 욕설이 확성기를 타고 천지사방에 울려 퍼졌다.
지슈카와 지크 파티가 전투 중인 바알 성의 입구.
그보다 먼 곳에서 전장을 주시하던 네펠리나와 지발은 진즉부터 이곳을 향해 달려왔다.
덕분에 제때 도착할 수 있었다.
“네펠리나!”
바알의 주먹을 막아낸 여파로 또 다시 큰 데미지를 입은 그리드가 충격의 반동을 이용했다.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날아가 네펠리나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초월룡.]
바알은 광룡의 딸을 단순한 헤츨링 취급하지 않았다.
아비의 재능을 물려받은 그녀가 일시적으로나마 한계를 초월한다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다.
하여 경계했다.
크게 벌린 입에서 새카만 마력의 광선을 쏘았다.
몸이 거대해진 여파로 광선의 크기도 무지막지하게 컸다.
단순히 크기만 놓고 보면 고룡의 브레스보다 컸다.
역대 최강의 스킬로 보일 만한 스킬 이펙트였다.
시청자들은 저것에 함께 휩쓸린 그리드와 네펠리나가 나란히 소멸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빌어먹을 일이었다.
벌써 몇 시간 동안 방송을 시청하며 간절히 응원했는데 이런 결과라니.
제1위 대악마 바알.
과연 최종보스 후보답게 강력하다.
아직은 넘지 못할 산이 분명했다.
모두가 생각할 때였다.
“꺄악!”
네펠리나가 비명을 질렀다.
워낙 거대하고 빠르게 밀려오는 마력의 광선.
피할 수 없었고, 피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광선을 등진 채 날아오는 그리드를 등에 태울 의무가 있었다.
하여 마력의 방벽을 세웠다.
광선의 진격을 잠시나마 멈추고 그리드를 무사히 등에 태우기 위해서였다.
한데 마력의 방벽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마법의 종주답게 빈틈없이 설계한 방어 마법의 얼개가 단순히 무식하게 강력한 광선의 위력을 견디지 못했다.
휩쓸린다.
설령 살아남을지라도 그리드를 등에 태우는데 실패하고 만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광선에 압도당한 네펠리나가 직감하는 순간이었다.
꽈아아아앙!!
은색의 마장기가 그녀의 앞으로 떨어져 광선을 막아냈다.
아니, 막았다고 표현하기엔 너무 처참한 광경이다.
광선에 닿는 순간부터 부서지더니 급기야 잿더미로 변해갔으니까.
그 안에 탑승하고 있던 지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 세월 함께해온 동료를 잃고도 굳건한 표정이다.
그리드에게 선물 받은 드래곤 웨폰으로 스킬을 전개, 레이더스를 잿더미로 만들고도 여전히 강력한 광선의 위력을 조금이나마 더 줄여놓은 그가 히죽 웃었다.
미국의 소년소녀들에게 우상인 사내가 짓는 미소였다.
“영웅은 어린 아이를 외면하지 않는 법이지.”
네펠리나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은 인간의 등이 저토록 커 보일 수 있다는 걸 태어나 두 번째로 깨달았다.
“지발...!”
네펠리나의 외침은 닿지 않았다.
광선의 잔재에 집어삼켜진 지발의 청각은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다.
그나마 드래곤 아머로 버티며 광선의 위력을 자신이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 애쓸 뿐이었다.
급기야.
꽈아아아아앙!!
지발의 스킬에 붙잡혀 얽힌 광선이 지발을 꿰뚫지 못하고 폭발했다.
자욱하게 번지는 연기 사이로.
“용서 못해!!”
네펠리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개를 활짝 펼친 채 바알을 향해 돌진했다.
볼품없었다.
헤츨링의 한계다.
성장이 덜 된 용은 바알보다 수십 배 이상 작았다.
하지만 그녀의 등 위엔 그리드가 서있었다.
몸에서 피어나는 주황색 신성을 망토처럼, 장발처럼 흩날리는 지상의 신.
그가 네펠리나의 존재감을 무지막지하게 키워놓고 있었다.
하지만 바알은 동요하지 않았다.
사람들도 어떤 큰 희망을 엿보진 못했다.
조금 전.
그리드는 고룡의 등에 타고도 바알을 어쩌지 못했다.
하물며 헤츨링과 함께한다고 해서 승기를 잡진 못할 터였다...
그리드의 생각은 달랐다.
“초연살파극(超聯殺派極).”
5융합 검무.
연살화극락(聯殺花極落).
낙룡극살파(落龍極殺派).
회룡낙극살(回龍落極殺).
연살회극참(聯殺回極斬).
그리드가 6융합 검무를 얻기 전까지 평생을 애용해왔던 궁극기다.
근본이라 할 수 있었다.
6융합 검무보다 5융합 검무로 벤 적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
4융합 검무, 3융합 검무, 2융합 검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6융합 검무가 봉쇄 된 상황에서 그리드는 근본으로 돌아갔다.
‘괜찮아. 통할 거다.’
그리드는 2가지 사실에 주목했다.
바알이 거대화 된 시점부터 특별한 기술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자신의 공격을 허용할 때마다 더 큰 데미지를 입었다는 점.
‘거대화한 대가를 치른 거야.’
본래 바알은 드래곤 웨폰의 위력에 저항하는 체질을 연마한 상태였다.
하지만 거대화 된 이후.
바알은 연마한 체질이 무색하게도 그리드의 최고 데미지 기록을 몇 번이나 갱신시켜줬다.
체질 자체가 다시 바뀌었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신살의 기운이나 무패왕의 검술 등.
기껏 습득해온 기술들을 구사하지 않았다는 점도 근거를 뒷받침 해줬다.
즉,
[크아아악!!]
거대화 된 바알은 검무에 대한 면역 체계마저 상실한 상태였다.
태초의 모습.
놈 또한 근본으로 돌아간 상태니까.
지금부턴 근본과 근본의 격돌인 셈이다.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바알의 근본은 타고난 힘을 휘두르는 것인 반면.
그리드의 근본은 연마한 기술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리드는 타고난 게 쥐뿔도 없는 평범한 사내였으니까.
근본 자체가 연마되어 있었다.
꽈아아앙!!
네펠리나의 작은 몸이 이점으로 작용했다.
바알의 가랑이 사이를 빙글빙글 비행하며 허점을 찔렀다.
그리드가 연계하는 융합 검무가 바알의 두 다리를 쉽게 난도질했다.
바알의 몸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이때 그리드는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눈치 챘다.
초고속 재생.
바알의 상처를 거의 즉시 회복시켜온 그 사기적인 권능이 작동하질 않고 있었다.
이건 거대화의 여파가 아니다.
초고속 재생은 망자에게 빼앗은 힘이 아니라 바알 고유의 권능이었으니까.
한데 약해졌다.
재생의 권능이 사람들의 공포를 자원으로 삼아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현상이었다.
그렇게 해석해야만 바알의 회복 속도가 현격히 느려진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다.
‘바알은 죽지 않게 된 게 아니야.’
죽어선 안 되는 입장이 되고 만 것이다.
놈은, 필사적으로 죽음에 저항하고 있다...
그리드의 눈에 비치는 바알의 모습은 거인이 아닌 모래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