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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56화 (1,755/1,794)

템빨 87권 - 4화

“단독으로 레이드가 가능한 대상입니까?”

핵심을 관통하는 질문이었다.

푸른 눈의 기자는 임철호 회장을 상대로 허락 된 짧은 시간을 몹시 잘 활용했다.

“혼자선 안 됩니다.”

바알 원정대가 지옥에 진입하고 6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Satisfy 안에선 반나절이 흘렀다.

아침이 밤으로 바뀌는 동안 그리드와 템빨단은 쉬지 않고 싸웠다.

언제나 플레이어의 발목을 붙잡아왔던 스태미나라는 개념조차 그들의 열정을 꺾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럼... 원정대가 승기를 잡기 위해선 템빨단원들과 사도들이 그리드 쪽으로 합류해야겠군요?”

바알 레이드.

그리드의 의지로 발생한 그 대규모 이벤트 탓에 S.A그룹은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반나절 내내 전 세계 언론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해온 것이다.

아무래도 관심도가 워낙 높았다.

그리드 불참 이후 하락세를 겪어온 국가대항전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막말로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이 바알 레이드를 시청하느라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긴 상황이었으니까.

이때 S.A그룹이 침묵하는 것도 모양새가 썩 좋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었고.

임철호 회장이 차라리 대규모 기자회견을 연 경위다.

“여럿이서도 안 됩니다.”

좌중이 술렁였다.

실시간으로 기사를 작성 중인 기자들의 타이핑 속도가 빨라졌다.

“드래곤과 같다고 보면 될까요?”

과거.

임철호 회장은 드래곤을 사냥불가 대상으로 지정한 바 있다.

못 잡으면 탈 것으로 삼으면 된다는 사실을 그리드가 몸소 실천해버리고 말았지만... 아무튼 드래곤의 위용은 여전히 대단했다.

바알도 같은 것인가?

고작 몇 초 사이에 추측성 기사가 쏟아지기 직전이었다.

임철호 회장이 고개를 저었다.

“드래곤과는 다릅니다.”

임철호 회장이 말하는 드래곤은 당연히 고룡이다.

고룡이야말로 진정한 드래곤이기에.

“바알은 플레이어가 궁극의 목표로 삼아야 할 대상이 맞습니다. 최종 컨텐츠 중 하나가 맞죠.”

다만.

“하지만 지금과 같은 형태는 아닙니다.”

바알은 인간의 공포를 힘의 근원으로 삼는다.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는 이상 소멸하지 않았다.

드래곤과 다른 의미로 레이드가 불가능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선 선행 조건을 달성할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이 바알에게 느끼는 두려움보다 더 큰 희망을 품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

그건 소수의 플레이어나 집단이 해낼 만한 일이 아니었다.

수십 억 명의 플레이어가 Satisfy의 주민들과 깊이 교류하며 신뢰를 쌓아야할 필요가 있었다.

간단히 예를 들면 그리드와 칸의 관계다.

임철호 회장이 설계한 희망은, 플레이어 대다수가 Satisfy의 주민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Satisfy를 현실과 비등하게 아끼는 것을 기점으로 싹트는 것이었다.

Satisfy라는 이름에 임철호 회장의 바람이 담겨있다.

임철호 회장은 Satisfy가 현실과 달리 아름답길 바랐다.

바알이라는 거악은 그런 세계로 도달하기 위한 일종의 관문이었다.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치게 만들 계기이자 열쇠였다.

일개 개인이 칼로 찔러 죽이라고 만든 존재가 아닌 것이다...

“어?”

임철호 회장의 설명이 이어질 때였다.

타이핑을 멈춘 기자들이 술렁였다.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임철호 회장을 바라봤다.

아니, 정확히는 회장이 등지고 앉은 초대형 스크린에 시선을 못 박았다.

덩달아 시선을 돌려 본 임철호 회장의 얼굴이 굳었다.

바알이 태초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바알 레이드의 마지막 페이즈였다.

회견장으로 이동하는 채 1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바알이 수세에 몰렸다는 뜻이 됐다.

“어떻게...?”

임철호 회장이 몹시 당황하는 그때.

크아아...

그리드에게 목을 난도질당한 바알이 비명을 내질렀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저 상태의 바알은 방어력이 최소 20배 이상 상승하는데 그리드 혼자서 유의미한 타격을 입힌 것이다...

심지어 모르페우스가 충격적인 말을 건넸다.

-플레이어 그리드가 최고 데미지 기록을 갱신했습니다.

“...”

***

지평선 너머에 솟구친 채 움직이는 그림자.

저건 도대체 얼마나 거대하기에 여기서도 어렴풋이 보이는 걸까...

멀리서 본 바알의 모습은 인간의 상상력을 극한까지 자극했다.

사도들과 단원들이 그리드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도우러 가자.”

아스카가 재촉했다.

악마의 두개골에서 뽑아낸 손도끼를 등 뒤로 투척하면서다.

붉은 깃털이 흩날렸다.

본래 하얗다가 악마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붉게 물든 날개에서 떨어진 깃털이다.

키야아아악!!

아스카는 하나의 무기에 집착하지 않았다.

천사 임명식 당시 그리드에게 받은 드래곤 웨폰은 아직 꺼내지도 않았다. 인벤토리에서 계속 새롭게 꺼낸 무기를 휘두르거나 투척하며 악마들을 도륙해갔다.

전부 다 그리드제 아이템이다.

그리드가 원덕구를 쓸 때마다 꾸준히 강화 되어온 무기들.

‘미친 저걸 다 어디서 구했대...’

이벨린이 혀를 내둘렀다.

아스카의 재력과 집착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실감하며 굳이 그녀와 척을 지지 말자고 결심하게 됐다.

“당연히 가야죠.”

그래서 동의한 건 아니다.

아스카가 말을 꺼내기도 전부터 이벨린의 몸은 그리드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리드를 수호하는 천사들의 대장답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는 주변의 악마들을 떨쳐내는 즉시 그리드를 향해 날아갈 작정이었다.

다른 천사들도 생각이 같았다.

코크, 아스카, 그리고 은색과 금색의 가면을 쓴 2명의 사내...

그들 전부 누가 말하지 않아도 그리드에게 몸을 날릴 준비를 갖추는 중이었다.

‘저 사람들은 대체 누구야?’

영 수상쩍은 주제에 마음은 잘 통한다.

마치 오랫동안 함께 싸워온 동료처럼 듬직했다.

애초에 그리드가 천사로 임명한 사람들이다. 신뢰해야 옳다.

하지만 경계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면으로 이름과 얼굴을 가린 채 묵묵히 임무만 수행하는 자들을 마냥 믿고 의지하기엔 꺼림칙한 구석이 많았다.

아무튼 다섯 명의 템빨 천사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나아가는 그때였다.

“멈추게.”

누군가가 초를 쳤다.

비반이었다.

전투 내내 팔짱을 끼고 선 채 하품만 하던 남자.

붉은 살덩이의 비명을 듣고 지하로 진입을 시도하는 마물의 숫자가 너무 많다... 라는 보고를 듣고 달려와 열심히 싸운 다른 천사들과 달리 그는 몸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있었다.

“자네들이 어찌 해볼 상대가 아닐세. 설령 제때 도착한다고 해봤자 개죽음만 당할 거야.”

“닥쳐.”

아스카가 귓등으로 흘렸다.

지혜의 탑의 결사.

검성이었고, 검신이 된 자.

비반의 명성을 모를 리 없는데도 욕설을 토하면서다.

이벨린과 코크가 뜨악했다.

부러진 검을 허리에 걸쳐 매고 있는 등, 비반의 상태가 비록 보기엔 이상했지만 함부로 대해선 안 되는 상대였다.

아스카가 화를 입을 걸 걱정하는 게 아니다.

그리드의 귀중한 인연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무, 무엄합니다!”

“무엄은 지랄.”

사색이 돼서 외치는 코크를 비웃어준 아스카가 급기야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완전한 비행.

천사의 날개 덕에 얻은 이 능력이, 그녀는 몹시 마음에 들었다.

이제야 비로소 게임이 게임답게 보인다고 할까.

현실이 아님에도 너무 현실 같았던 Satisfy 특유의 이질감을 완전히 떨쳐낼 수 있었다.

“소문으로 듣자하니 치매 걸린 늙은이라며? 뭐라고 지껄이든 진지하게 들을 필요가 있나? 애초에 우리가 여기서 잡몹이나 잡으려고 지옥까지 온 건 아니잖아? 저 양반은 여기서 입구나 지키고 서있으라고 해. 나는 갈 거야.”

“어어...”

우리는 여기 잡몹 잡으려고 온 거 맞는데?

이벨린이 흥분한 아스카를 멈춰 세우려는 그때였다.

철썩!

어느새 아스카의 앞에 선 비반이 그녀의 뺨을 때렸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최강의 플레이어 중 한 명인 아스카가 반응조차 못하고 지상으로 추락한 것이다.

그녀가 떨어진 여파로 생긴 커다란 크레이터의 중심에서, 그녀는 거꾸로 못 박힌 채 움찔거렸다.

죽었나...?

이벨린과 코크가 상황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넋이 나간 그때였다.

“하핫! 싸우자는 거지?”

벌떡 일어난 아스카가 소리쳤다.

기운이 전보다 넘쳤다.

광전사 특성이 발동한 까닭이다.

비반에게 뺨을 맞았단 이유로 그녀의 생명력은 상당량 깎여있었다.

드래곤 아머가 아니었다면 아마 절반 이하까지 깎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급기야 그녀가 드래곤 웨폰을 꺼냈다.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은색 가면의 천사가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비반이 다시 아스카의 눈앞에 나타났다.

흥분한 그녀의 멱살을 붙잡더니 새롭게 몰려오는 중인 마물 군단이 있는 방향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

“...”

광기에 사로잡힌 천사.

얼떨결에 마물 군단을 학살하기 시작한 아스카의 모습은 언젠가 레베카교의 교황청에 나타났던 미카엘보다 잔혹했다.

‘광란의 천사’라는 칭호를 얻은 이유가 새삼 납득이 될 지경이었다.

“참 쓸 만한 친구군.”

비반이 흐뭇하게 말했다.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다.

사람을 반쯤 죽여 놓고 적진 한복판에 던져놓은 사람이 보일 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어이없어하는 이벨린에게 비반이 경고했다.

“적어도 전장에선 부하에게 휘둘리지 말게.”

“...예.”

사실 전혀 휘둘리지 않았다.

아스카가 나서지 않았어도 이벨린은 당장 그리드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숨겼다.

아스카와 같은 취급을 받고 싶진 않았으니까.

어색하게 대답하는 그에게 비반이 재차 말했다.

“임무에 집중하게. 그리드가 나나 그대들에게 각자 다른 임무를 맡긴 이유는 그것이 최선이기 때문일 테니.”

강한 신뢰가 담긴 말이었다.

이벨린은 눈앞의 사내가 그리드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본받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벨린에게 미소지어준 비반의 시선이 전장의 한복판으로 돌아갔다.

아스카가 활개 치는 지점.

그보다 살짝 위였다.

비반의 시야에 담긴 하늘에 어떤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마법?

경계하던 이벨린이 곧 두 눈을 의심했다.

광속으로 다가오는 빛.

그것은 무언가의 팔과 다리, 몸통이었다.

“우리가 이곳을 떠날 만큼 여유롭지가 않아.”

유라 일행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지하.

그곳으로 향하는 입구를 막고 선 비반이 부러진 검을 뽑아 쥐었다.

그는 눈치 채고 있었다.

바알이 거인화 되면서 분리 된 아수라의 파편들.

붉은 살덩이와 결합을 시도할 작정이다.

좌시해선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

직각으로 솟은 능선을 달리는 느낌이다.

봉우리가 시야의 끝에 간신히 닿는다...

아득히 큰 바알의 몸을 질주하는 그리드의 감상이었다.

짧게 끝났다.

능선이 출렁인다 싶더니 시야가 360도 회전하길 반복했다.

그리드가 딛고 선 바알의 팔이 움직인 여파다.

그리드에게 난도당한 목덜미를 쥐었던 손을 떨쳐낸 바알이 팔을 마구잡이로 흔들어댔다. 그리드를 떼어내기 위해서였다.

꽈앙! 꽈앙!! 꽈아앙!!

바알이 팔을 휘두를 때마다 터지는 폭음이 그리드의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그리드가 몸에 두른 주황색 신성이 꺼질 듯 흔들렸다.

순식간에 미약해졌다.

그리드는 이를 악 물고 버텼다.

바알의 살가죽에 꽂아 넣은 검을 기둥삼아 붙잡고 늘어졌다.

그의 몸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바알의 손바닥이 덮쳐오며 만든 그림자였다.

사람의 피를 빨다가 최후를 맞이하기 직전의 모기가 보는 풍경이 지금과 닮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자들을 품고 위로해줄 거인.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온 바알은 순전히 거대한 크기로 그리드를 압도했다.

하지만 정작 그보다 작은 존재는 압도당하지 않았다.

그리드가 모기라면 티끌.

검은 생쥐 모습의 번헬리어였다.

바알이 거대해진 덕분에 운신이 한층 더 자유로워진 그가 어느새 그리드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었다.

“...반대가 된 거 아닌가?”

그리드가 헛웃음을 흘렸다.

반가움에 짓는 미소였다.

“타라!!”

찍찍!

그리드의 어깨에서 뛰어내린 번헬리어가 소리쳤다.

동시에 몸을 부풀려가는 그에게 그리드가 몸을 날렸다.

번쩍!

번헬리어가 본체를 드러냈다.

고룡 중에선 왜소한 편인 까닭에 바알과 비교하면 다소 작은 몸.

하지만 충분히 컸다.

자유롭게 비행하는 까닭에 그리드와 바알의 눈높이가 얼추 맞아졌다.

“가라!!”

“우오오오오오오!!”

전력의 마력을 분출하며 돌진하는 번헬리어.

그의 머리 위에 솟아난 뿔을 등지고 선 그리드가 분기충천해서 기합을 내질렀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마치 두 마리의 거대 괴수가 충돌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장르가 바뀐 느낌.

서사시가 웅장하게 묘사했다.

인류가 바알에게 품은 공포가 계속해서 옅어져갔다.

임철호 회장의 의도와 다르게 그리드라는 단 한 명의 인간이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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