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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55화 (1,754/1,794)

템빨 87권 - 3화

천 마리.

아니, 그 절반쯤 되는 숫자의 소를 도축해도 장인 소리를 듣는다.

한데 그리드가 벤 적의 숫자는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

900에 도달해가는 그의 레벨은 무수히 많은 죽음이 만든 결과였다.

인간, 괴물, 반신, 악마에 이르기까지.

그리드는 대상의 형태가 어떻든 간에 눈으로 보는 즉시 머릿속으로 해부도를 그릴 수도 있었다.

어떤 환경에서든 쉽게 치명상을 입히고 분해하는 게 가능했다.

하물며 지금 그의 손엔 역대 최강의 보검이 쥐어져 있다.

고룡의 부산물로 만든 두 자루의 드래곤 웨폰.

그것을 하나로 합쳐 만든 검은 적의 약점을 거의 무조건 찾아냈고 몹시 예리했다.

바알의 호신강기와 가죽을 베는 그리드가 ‘조금 질기다.’는 감상을 느끼는 게 전부일 정도였다.

무적에 가까운 존재로 군림하며 지옥과 지상의 운명을 주물렀던 지옥의 왕이 도축당하는 가축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푹, 서걱, 스윽.

푹푹, 스슥, 슥.

마력의 호신강기와 살가죽이 꿰뚫리고 갈라지는 소리가 연신 음산하게 울린다.

뼈가 박살나고 장기가 터지는 소리는 덤이었다.

바알은 웅웅 우는 벌떼가 머릿속을 헤집는 착각을 느꼈다.

자꾸 오싹오싹 소름이 돋으며 뒷골이 시큰했다.

“...”

재생하는 즉시 다시 갈라지는 배를 내려 보는 바알의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끔찍하게 아팠다.

상처 따위 당연하게 극복하는 입장인지라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건만.

눈앞에서 끄집어내지고 박살나는 제 장기를 몇 차례나 목격하자 고통이라는 개념이 새삼 강렬하게 뇌리를 지배했다.

“...크윽!”

물론 바알은 저항했다.

죽어 지옥에 떨어진 자들에게 빼앗은 기술을 이용해서 타고난 힘을 적극 활용했다.

하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질 않았다.

서로 손을 맞잡은 금속의 손들이 간격을 좁히며 압박해온 탓이다.

갓 핸드.

수백 개로 늘어난 그리드의 아티팩트가 만든 원형의 공간은 바알이 여태껏 체험해보지 못한 감옥이었다.

점차 좁아지며 바알의 자유를 앗아갔다.

온힘을 다해 때려도 부서지지 않는 그것들 탓에 바알은 원하는 만큼 움직이지 못했다.

처음엔 괜찮다고 여겼다.

그리드에게 베이고, 찔리며 상처를 얻는 속도보다 재생하는 속도가 더 빨랐으니까.

대부분의 검무가 봉인 된 그리드는 필시 전력이 아니었다.

설령 죽더라도 극복하면 그만이기도 했다.

이 압박이 풀릴 때까지, 바알은 언제까지고 버틸 자신이 있었다.

방금 전까지의 생각이었다.

푹푹!

“...크아아아악!!”

바알이 간신히 참아온 비명을 터뜨렸다.

그리드의 검에 담긴 위력이 전보다 한층 더 강해졌을 무렵이다.

재생이 끝나기도 전에 새로 생긴 상처들이 그를 토막 내며 더 큰 고통을 안겼다.

그때야 비로소 바알은 자신의 죽음을 자각했다.

그리드가 실시간으로 강해진 건 내가 죽었다는 의미니까.

“이... 이 새끼가...”

바알이 저급하게 지껄였다.

서사시를 의식할 여유 따위 없었다.

그는 혼란을 느꼈다.

몰랐던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른 까닭이다.

이것이 여태껏 내가 갖고 놀았던 장난감들이 심정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과 함께 떠오른 감정.

두려움이었다.

지난 수천 년.

바알은 무수히 많은 죽음을 의도하고, 목격하고, 학습해왔다.

죽은 자들이 느끼는 절망, 슬픔, 고통, 공포 따위에 익숙한 수준을 넘어서 늘 흥미롭게 음미해왔다.

하지만 직접 체험해보진 못했다.

하여 망자들의 심정에 공감하지 못하고 즐겁게 음미해온 것이다.

한데 이 순간 현실로 다가왔다.

바알은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내가 죽음을 극복할지언정 그리드에게 계속해서 살해당한다면.

그것을 과연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매번 죽을 때마다 이런 고통을 느껴야하는 건 싫다...

“제길...! 제기랄!!”

꽈아아아아아앙!!

바알이 몸에 두르고 있던 마력의 호신강기를 폭발시켰다.

몸을 지켜야 할 수단이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했으니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다.

어차피 죽어야한다면 그리드도 같이 죽여 버리겠다는 심상을 품은 채, 지닌 모든 마력을 공격의 수단으로 삼았다.

쩌적! 쩌저저적!!

폭발이 반복할 때마다 그리드의 절대방어가 균열을 일으켰고 급기야 녹아내렸다.

안 그래도 바알의 피를 뒤집어써 한층 더 시뻘개진 갑옷이 마력의 열기에 달아올라갔다.

갑옷 속 몸통이 통째로 익어갈 터였다.

한데 그리드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 어떤 더위와 추위도.

지옥의 업화와 서리여왕의 입김조차도.

그리드의 몸을 불태우거나 얼릴 수는 없으니까.

체온 유지.

칸의 의지가 비호하는 까닭이다.

“대장장이 칸...! 그놈을 지옥으로 끌어내렸어야 옳다...!”

그리드의 갑옷에 담긴 의지를 읽은 바알이 치를 떨며 외쳤다.

저 갑옷에 담긴 의념에 벌써 몇 번의 낭패를 겪는가.

이쯤 되면 그리드가 아닌 칸이 모든 사태의 원흉처럼 느껴졌다.

그리드에게 칸을 빼앗긴 천상의 무력한 놈들에게 분노를 품었다.

“...”

그리드의 눈빛이 변했다.

가축을 해체하듯 무미건조한 표정을 짓고 있던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꿀꺽.

바알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인간들의 작은 눈동자에 투영됐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면서다.

인류가 떠올려온 궁극의 공포.

바알의 눈에 비치는 그리드의 모습이 그것과 닮았다...

“허억...!”

잠시 넋을 잃었던 바알이 헛숨을 토했다.

목이 잘리고 또 다시 죽었다가 부활한 것이다.

그리드의 일그러진 얼굴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바알, 이제 네겐 그 누구도 저주할 자격이 없어.”

그리드의 음산한 음성이 좁은 공간을 꽉 채웠다.

“저주할 틈도 없이 내게 죽길 반복할 테니까.”

바알이 상상했던 가장 최악의 상황을 현실로 만들겠다는 선고였다.

서걱!

곧바로 이어지는 고통 속에서.

바알은 아주 먼 과거에 품었던 의문을 떠올렸다.

태초신의 자식일지언정 신이 아니다.

왜?

야탄은 왜 굳이 천상을 떠나 망자들의 쉼터 따위를 만들고 이곳에 나를 싸지른 것인가...

“...왜. 어째서 나는 죽음만을 실감해야하는 거냐...”

심장에 박힌 검 탓에 초점을 잃고 흐려진 바알의 눈동자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아니, 악의가 깃들었다는 표현이 적합했다.

뭐든지 뜻대로 되는 삶이 내심 무료했던 걸까.

어떤 의미론 초탈한 듯이 늘 같았던 바알의 눈빛이 분노, 원망, 살의 따위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출했다.

동시에 거대해져갔다.

눈동자도, 눈도, 얼굴도.

급기야 몸 전체가 수십 수백 배는 거대해지며 갓 핸드가 만든 감옥을 격동시켰다.

쿠르르르릉!

쩌어어어어어엉!!

결국 갓 핸드들의 결속이 풀렸다.

연신 핏물을 쏟아내던 금속의 태양이 산산이 조각나 흩어졌다.

거인.

지옥 어디에서도 볼 수 있을만큼 거대해진 바알의 모습이 지옥 중심에 우뚝 섰다.

그리드는 마리로즈의 성.

본래 베리아체의 성이었던 그곳에서 본 신화의 기록들을 떠올렸다.

지옥의 탄생 과정을 그림으로 그린 기록들이었다.

다섯 번째 그림부터 태초의 3악의 모습이 담겼었다.

‘아모락트는 적색, 베리아체는 녹색, 그리고...’

바알은 거인이었다.

마치 지금처럼.

그렇다.

보는 이의 인식에 따라 다르게 비추어졌던 바알의 모습이 처음으로 온전하게 드러난 순간이었다.

평소의 상태와 신살의 기운을 꺼냈을 때의 상태, 브라함의 힘을 흡수했을 때의 상태를 지나 아마 4번째 페이즈일 것이다.

정황상 최종 형태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리드는 끝의 도래를 떠올리지 않았다.

본래 어떤 레이드든.

최종 페이즈는 끝이 아닌 시작을 의미했으니까.

들떠선 안 됐다.

지금부터 진짜다.

장장 반나절 동안 싸우며 소모 된 체력과 집중력을, 그리드는 이를 악 문 채 끌어올렸다.

[왜... 어째서 모든 게 내 머리 위에 있는 거냐...]

거대한 몸이 무색하게도.

바알은 태어난 순간부터 늘 하늘을 올려봐야만 했다.

하늘 너머에 지상이 있었으니까.

그곳에서 죽은 자들이 이곳으로 떨어지는 거였으니까.

마냥 올려보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큰 몸으로 죽음이라는 상실을 겪고 슬퍼할 망자들을 보듬어주거라.”

야탄의 역겨운 목소리가 바알의 귓전에 맴돌았다.

“아스가르드? 지상 너머에 있다. 이곳에서 가장 멀어 굳이 보지 않아도 된단다.”

하늘 위에 지상.

그 위로 또 천상.

태어난 순간부터 모든 것이 나의 머리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나 또한 태초신의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거대한 몸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무색하게도 닿지 않는 것들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아야했다.

[부조리하다...]

억압.

바알은 자신이 타고난 모든 환경을 억압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을 낳은 야탄을 자연히 원망하게 됐다.

세계를 증오하게 됐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지옥으로 끌어내리려하는 거악은, 그렇게 탄생했다.

일종의 반전이었다.

본인이 선하여 아스가르드를 떠났던 야탄과 달리 그의 자식은 타고나길 선하질 못했다. 야탄의 바람에 어긋났다.

[유일신 그리드.]

쿠와아아아아앙...

폭풍이 휘몰아쳤다.

바알이 주먹을 쥐자 대기가 일그러지면서 만들어진 폭풍이다.

쿠르르르르르릉...

지진이 일어났다.

바알이 한 걸음을 내딛자 폐허가 된 대전이 통째로 주저앉으며 일어난 지진이다.

[절망해라. 나를, 두려워해라.]

그것은.

언제나처럼 이곳을 굽어보고 있을 신들을 향한 외침이기도 했다.

바알은 오직 세계의 파괴를 열망해왔다.

본래 자신보다 낮거나 같은 눈높이에 있어야할 신들을 지옥으로 끌어내리는 게 궁극의 목적이었다.

고작 지상의 신 따위에게 발목을 붙잡혀선 안 되는 것이다.

꽈르르르르르르릉!!

수천 번의 천둥이 겹쳐졌다.

바알이 내지른 주먹에 의해서다.

무너진 성벽 너머로 드러난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파괴가 그리드를 덮쳤다.

공격 면적이 워낙 넓은 까닭에 피하기 힘들다.

판단한 그리드가 아껴온 종횡무진을 전개했다.

방어하면서 적의 수준을 가늠하기보다 곧바로 반격을 택한 것이다.

기선 제압.

유리한 흐름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츠카카카카칵!!

아이템 합체를 유지한 채 펼친 6융합 검무.

축구장 수십 개를 붙여놓은 것처럼 넓은 바알의 목덜미를 질주하며 난도질하는 그리드 탓에 붉은 폭우가 쏟아졌다.

바알의 목에서 솟구친 핏물이 지옥 전역을 적셔갔다.

[대상에게 58,012,600,339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세계에 유일한 존재를 대상으로 최고 데미지 기록을 갱신합니다!]

[천상의 감옥에 갇힌 누군가가 당신의 놀라운 업적을 눈치 채고 애써 태연하게 중얼거립니다.]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 아마도...”]

푸화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학!!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 바알은.

손짓 한 번으로 그리드를 위협할 정도로 강력해진 반면 방어력은 취약해진 상태였다.

당연하다.

지금의 그는 인류의 공포를 쌓아올려 만들어진 개념이 아닌 거인에 불과했으니까.

한때 신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과정에서 얻은 이점을 상실한 것이다.

그리드에게 품은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기껏 태초의 모습을 되찾은 게 도리어 독이 됐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지상까지 닿는 바알의 커다란 비명이 방아쇠가 되었다.

[인류의 공포가 옅어집니다.]

[인류의 공포가 옅어집니다.]

[인류의 공포가...]

....

...

사람들이 실감하기 시작했다.

바알도 고통을 느낀다.

비록 거대하나 인간과 닮은 거인이다.

일생 동안 두려워해온 만악의 근원은, 사실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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