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754화 (1,753/1,794)

템빨 87권 - 2화

아득하게 너른 광야.

풀 한 포기 없이 황량하다.

시야가 지평선에 닿는 동안 보이는 것은 온통 잿빛의 메마른 대지뿐이었다.

방금 전까진 그랬다.

쿠르르르릉...

굉음이 울리며 땅이 흔들렸고 급기야 갈라지거나 무너졌다.

구릉지가 몹시 넓게 형성 됐다.

그러면서 색채가 더해졌다.

붉은 빛.

처참하게 훼손 된 땅의 틈새마다 용암이 흘러내리며 발하는 색채였다.

“킥킥... 어이가 없군...”

막 생긴 구릉지의 중심.

꼼짝도 못한 채 누워 용암에 잠겨가는 악마가 있었다.

본래 대악마였다.

인마대전 이후 공석이 된 9번 왕좌를 스스로의 힘으로 차지했던 한 자릿수 대악마.

바알의 부름을 받아 성으로 달려가던 중에 어떤 마법사의 습격을 받은 그는, 수세에 몰린다 싶을 때쯤 왕좌를 박탈당했다.

바알에 의해서다.

순전히 제 힘으로 차지한 왕좌.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믿었던 그것이 바알이 바라는 순간 나를 버린 것이다.

“처음부터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던 거야... 큭큭.”

대악마였던 악마, 달톤쥴이 실소했다.

자신을 이 꼴로 만든 눈앞의 마법사가 아닌 바알에게 증오를 품었다.

그의 이마를 짓밟고 선 마법사 브라함이 입을 열었다.

“악마 주제에 타인을 신뢰하고 충성을 바친 네놈이 문제다.”

명백한 조소.

그는 어딘가에서 이곳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악마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타인을 기만하고 해치길 즐기는 사악한 악마 따위가 남을 믿고 섬기는 게 가당키나 한가?”

악마는 남을 쉽게 배신한다.

자신 또한 남에게 배신당할 수 있음을 늘 염두에 둬야 옳았다.

하지만 바알을 섬기는 악마들은 죄다 바알을 신뢰했다. 군주, 부모, 스승처럼 섬겼다.

이쯤 되면 사악한 놈들이 아니라 순진무구한 놈들이었다.

세상을 엄청나게 긍정적으로 보는.

“그래... 이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어째서...”

중얼거리는 달톤쥴의 두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혼란에 휩싸인 눈치였다.

나는 왜 바알을 신뢰하고 충성했는가.

놈이 내게 어떤 호의를 베풀던 의심하고 배신을 꿈꿔야 옳았다.

한데 그러지 못했다.

모르는 사이에 강한 세뇌에 걸린 걸까?

아무리 돌이켜봐도 그런 낌새는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물끄러미 내려 보던 브라함이 뭔가를 깨달았다.

‘타고난 악이 아니군.’

지금의 지옥은 왜곡 된 것이다.

망자들의 ‘쉼터’를 마련해주겠다고 이곳을 만든 야탄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발전해왔다.

악마는 처음부터 사악한 존재였을까?

처음부터 악마라고 불렸을까?

얼마 전 그리드가 무후총에서 본 과거의 지옥은 지상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야탄의 신상이 있는 안전지대들처럼 평범했다고.

그래, 처음엔 평범했을 것이다.

지옥에서 태어난 존재들이 타고나길 악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상에서 태어난 인간들이 누구는 선하고, 누구는 악하듯이.

지옥의 마물들과 악마들 또한 저마다 다른 천성을 지녔다고 생각해야 타당했다.

‘당장 내가 증거다.’

나 브라함, 대악마 베리아체의 자식으로 태어났을지언정 선하다.

“...”

구릉지 위.

후로이, 라엘라와 함께 상황을 지켜보던 극검이 눈살을 찌푸렸다.

악마를 짓밟고 선 채 생각에 잠겨있는 브라함의 면상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냥 불쑥 짜증이 났다.

“잘생겼다고 질투하시나요?”

라엘라가 극검의 태도를 지적했다.

극검이 고개를 저었다.

“나 정도의 인물이 굳이 남의 얼굴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잖아. 그냥 뭐랄까... 갑자기 기분이 나쁜데? 브라함 눈빛이 오늘따라 되게 재수 없지 않냐?”

“역시 질투 아닐까요? 질투해야 옳은 얼굴이신데.”

“저도 라엘라 양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브라함 님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긴 하군요. 맑고 반짝인다고 할까... 안 어울리네요...”

“그치? 저 양반 이상한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가, 갑자기 또 트롤할 수도 있다는 건가요?”

“아마도?”

극검, 후로이, 라엘라를 동시에 긴장시킬 정도로.

브라함의 사색은 엄청난 파급력을 지녔다.

달톤쥴 또한 이상한 낌새를 읽었다.

“그 눈빛은 뭐냐... 설마 동정하는 거냐? 감히... 감히 높디 높은 지옥의 군주인 이 몸을 동정한다고?”

분노에 매몰 된 달톤쥴은 이성적이지 못했다.

브라함의 마법에 격추당해 추락한 신세를 잊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브라함을 당장 때려죽일 기세로 살심을 품었다.

마법으로 몸무게를 수천 배 늘린 브라함이 그의 두개골을 으스러뜨렸다.

“벌레 새끼가 시끄럽군.”

퍽!!

달톤쥴의 머리가 수박처럼 부서졌다.

그가 추락한 여파로 형성된 구릉지의 중심에 붉은 피웅덩이가 차올라갔다.

중력 마법으로 핏물을 밀어낸 브라함의 시선이 옮겨졌다.

바알의 성이 있는 방향으로다.

유독 검게 물든 하늘이 순간순간 노을이 번졌다가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드와 바알의 전투가 만드는 광경이었다.

‘만악의 근원.’

바알을 표현하는 말로 이보다 적합한 것이 또 있을까.

저 순수한 악은, 지옥의 모든 존재를 악하게 물들여온 원흉이다.

그리드가 꿈꾸는 미래를 위해선 반드시 사라져야 옳다.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하지만 쉬울까?

무한대의 목숨을 지닌 존재.

죽여도 즉시 부활하는 놈을 소멸시킨다는 건 불가능했다.

브라함의 지식으로도 방법을 강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가능과 불가능을 크게 논하지 않았다.

단순히 ‘해야 할 일’로 규정하고 전쟁을 일으켰다.

‘옳은 일이긴 하다.’

지옥의 악마들을 편하게 방치해선 안 된다.

악마가 진정으로 두려운 점은 무력이 아니니까.

그리드와 사도들이 모르는 곳에서 평범한 인간으로 위장한 채 마을이나 도시를 좀먹어가는 것.

악마들의 강점은 사회에 녹아들어 사회를 죽일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그럴 틈 자체를 주지 않는 게 중요했다.

‘최대한 많이 죽인다.’

브라함이 시선을 반대로 돌렸다.

바알의 부름에 호응한 악마와 마물들이 지평선 너머에서 또 대량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나마 처음보단 숫자가 줄었다.

피아로가 논밭을 완성하고 요람을 약화시키는데 성공한 듯했다.

스아아아악!!

브라함식 강화 마나 드레인이 발동한다.

달톤쥴의 시신에서 마나를 흡입하는 것이다.

암흑 속성 마법의 위력이 몇 배로 증폭됐다.

꽈르르르르르르르르릉!!

새카만 마력의 파도가 악마와 마물 군단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높은 마법 저항력을 기반으로 살아남은 잔당들은 극검이 요격했다.

반격이 거셌지만 라엘라의 결계 마법에 가로막혔다.

도망치려던 놈들은 후로이의 도발에 넘어가 발목을 붙잡혔다.

수천 개의 잿빛 기둥이 어지럽게 솟구쳤다.

폭죽놀이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장관이었다.

‘하나 같이 쓸모있어졌군.’

극검과 라엘라, 후로이를 제법 흡족하게 지켜보는 브라함의 귓전에 음성이 스며들었다.

여기서 들려선 안 될 목소리였다.

“원리를 익혔다.”

바알의 목소리.

달톤쥴의 죽음이 남긴 흔적에서부터 울린다.

등골이 오싹해진 브라함이 바알의 성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은, 방금 막 솟구친 잿빛 기둥들의 종착지이기도 했다.

***

번쩍!

번쩍번쩍!!

레벨업하는 플레이어를 보는 듯하다.

끝없이 떨어지는 잿빛 기둥에 휩싸이는 바알의 모습을 본 그리드의 감상이었다.

새삼스레 동요하진 않았다.

이미 몇 번이나 본 광경이니까.

잿빛 기둥.

Satisfy가 표현하는 죽음의 형상은 언제나 바알에게 도착했었다.

망자의 기억과 힘을 흡수하는 바알의 권능이 작용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딱히 경계할 필요가 없다.

평범한 존재들의 힘과 기억은 바알에게 유의미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알이 지금보다 강해지기 위해선 최소 전설이나 초월자의 힘과 기억을 흡수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들의 죽음은 그리드가 사전에 차단했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지상의 템빨단과 이종족 왕들, 그리고 발할라의 군세가 중요한 인물들을 호위하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활의 시위를 당기던 그리드가 멈칫했다.

“브라함식.”

음미하듯 천천히 입을 여는 바알.

놈이 생뚱맞은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대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일대의 마나가 일제히 바알에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리드의 체내에 있는 마나조차 역행하며 분출됐다.

마치 저곳이 내 본래 자리라는 듯이, 바알을 향해갔다.

“강화 마나 드레인.”

완성 된 주문이 마나를 한층 더 강제했다.

그리드의 마나를 포함한 일대의 모든 마나가 바알에게 흡수됐다.

적해와 무저갱의 마나를 모조리 흡수했던 브라함처럼, 바알이 몸에 두른 마기는 하염없이 강해졌다.

급기야 휘장처럼 펼쳐진 마기의 중심에 선 바알이 미소 지었다. 상어의 것마냥 뾰족한 이빨이 모조리 드러날 정도로 큰 미소였다.

“이런 거였나. 시간을 압축시켜 강해지는 기분은.”

바알이 인류의 대적이듯.

그리드는 바알의 대적이었다.

그리드가 바알을 각성시켰다.

권능으로 흡수한 망자의 힘이 소화되고 온전한 자신의 것이 될 때까지 본래 기다릴 뿐이었던 바알은, 이제 마냥 기다리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리고 효율적으로 소화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강구했다.

그 과정에서 그리드의 검무에 면역하는 체계를 갖춘 것이다.

그리드에게 살해당한 존재들의 기억을 토대로 그리드의 검무를 학습하고 낱낱이 분석한 결과였다.

브라함의 마법을 재현한 것도 같은 원리다.

바알은 지난 몇 시간 동안 브라함에게 살해당한 악마들과 마물들의 기억을 토대로 브라함의 마법을 분석하고 학습했다.

그리드와 마찬가지로 실시간으로 강해졌다.

콰아아아아아앙!!

바알이 손을 휘젓자 쏘아지는 마기의 탄이 방금 전보다 수십 배는 거대해졌다. 눈과 입으로 쏘는 마기의 빔은 수십 배 더 쾌속했다.

그만큼 위력이 강력해졌고 피하기도 힘들어졌다.

갓 핸드가 만든 태양의 비호가 다소 무력해졌을 지경이다.

본래 태양 속에서 바알의 공세를 견뎠던 그리드가 달리기 시작했다. 섬전처럼 쏟아지는 마력의 빔을 피해 움직였다.

바알에게 활을 조준하는 속도가 자연히 느려졌다.

약간의 차이였으나, 전황을 크게 바꿨다.

화살 세례를 비교적 손쉽게 회피한 바알이 그리드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디스인티그레이트는 훨씬 더 두꺼워진 마기의 호신강기로 막아내고, 메테오는 빔으로 갈라버리면서 그리드를 따라잡았다.

“죽어라.”

콰직!

방금 전보다 수십 배는 커진 마검이 태양을 벤다.

갓 핸드의 결속을 물리적인 힘으로 풀어버리며 태양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드의 턱밑까지 마검이 도달했을 때.

“짐은 너의 안락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태까지와 다른 안광을 번쩍인 그리드가 선언했다.

마력의 양과 위력을 늘리는 마나 드레인.

버프 판정을 받는다.

<거세안>에 허물어졌다.

덥썩!

마검의 크기가 축소되자 간격이 무너진다.

어정쩡한 자세가 된 바알의 틈을 노리고 손목을 낚아챈 그리드가 그대로 바알을 태양 속으로 끌어당겼다.

아이템 변신을 풀어 활을 버린 채다.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황혼이 역천과 결합되고 있었다.

푸우욱!!

합체해서 위력이 몇 배나 증폭 된 드래곤 웨폰이 바알의 목을 꿰뚫었다.

끔찍한 고통에 놀란 바알이 벗어나려고 했지만 힘들었다.

경직이 풀리고 재차 손을 맞잡은 갓 핸드들이 만든 태양에 도망칠 구멍 따윈 없었다.

갓 핸드들이 한층 더 간격을 좁혔다.

바알이 똑바로 운신할 수 없도록 압박했다.

작은 링.

갓 핸드가 만든 완벽한 그리드의 영역 안에서.

푹푹!

푹푹푹푹푹!!

바알은 계속해서 꿰뚫렸다.

심장을 비롯한 급소를 모조리 차례대로 난도 당했다.

주륵...

주르르륵...

시청자들은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는 금속 태양.

그리드와 바알을 가둔 채 연신 움찔거리던 그것이 핏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양이 엄청났다.

시뻘건 폭포수 같았다.

수백 명의 인간이 흘리는 피보다 많은 양의 피가 쏟아지는 것이다.

찬란하고 신성했던 금색의 태양이 지옥의 달보다 음산해지는 순간이었다.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

적어도 그리드는 바알만큼 잔인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가장 높은 곳에 섰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