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7권 - 1화
꽈릉! 꽈르르르릉!!
천둥과 폭풍을 일으키며 싸우는 지상의 신과 지옥의 왕.
그들과 비교하면 몹시 작고 하찮은 검은 생쥐가 무너진 성의 잔해로 숨어들었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
찍찍! 찍!
절대자들이 폭우처럼 쏟아낸 핏물에 젖은 털을 가다듬는 생쥐의 동그란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판단과 행동에 확신이 있다는 증거였다.
당연하다.
고룡은 ‘나의 방식이 곧 진리다.’라는 신념을 지닌 존재니까.
비록 미물의 모습으로 폴리모프 했다곤 하나, 번헬리어는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았다.
수치심을 느끼지도 못했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영광이기에.
어떤 모습으로, 어떤 행위를 하든.
고룡의 가치란 불변하는 것이다...
‘바알이 내 예상보다 더 방비를 잘 갖춰놨어. 잔꾀 하나만큼은 일품이란 말이지.’
과거 바알과 협력해 네바르탄을 미치게 만드는 과정에서.
번헬리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알의 저주를 받았다.
지옥에서 온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할뿐더러 바알의 표적이 되는 즉시 속박 당했다.
나름 저항할 수단을 강구해왔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바알이 더 많은 수단과 방법을 준비해 놨다. 놈은 지옥 전체를 뜻대로 조율하는 입장이므로 상대적으로 불리했다.
아무튼 현재 상태로 바알과 정면으로 마주보는 건 자살행위밖에 안 됐다.
하여 기척을 지운 채 생쥐의 꼴로 숨어있는 것이다.
방금 전처럼.
바알의 감각이 그리드에게 집중되어 지옥달의 시야가 협소해지는 순간.
작은 번헬리어는 오직 그때만을 노리고 그리드에게 달려가 그를 등에 태울 계획이었다.
***
“번헬리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잘도 숨어들었구나!”
불쑥 환영처럼 나타난 번헬리어 탓에 또 한 번 목숨을 잃은 바알이 소리쳤다.
고작 한 번 죽었다고 평정심을 잃은 건 아니다.
번헬리어를 도발하기 위해 언성을 높였을 뿐이었다.
무의미했다.
도발이 무색하게도 번헬리어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골치 아프군. 지옥 달의 감시망에 잡히질 않아.’
지옥을 왜곡시킨 달과 감각을 공유할 경우.
바알의 시야는 지옥 곳곳에 미친다.
아모락트, 레라지에, 엘리고스의 영역과 일부 안전지대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지역을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예외다.
지옥 달의 시야를 번헬리어의 수색에 집중 투자했기 때문이다.
사실 바알은 처음부터 번헬리어를 경계했다.
명색이 고룡이니까.
하물며 그리드가 지닌 드래곤 나이트의 잠재력을 좌시할 수도 없었다.
바알은 그리드와 번헬리어의 협력을 허용하지 않는 걸 이번 전쟁의 기본 전제로 삼았다.
한데 허용하고 말았다.
어느 시점부터 지옥 달의 감시망을 벗어난 번헬리어가 조금 전 불쑥 나타나 그리드와 협력해버렸다.
‘설마 인간보다 작은 미물로 변한 건가?’
약화됐다 한들 고룡이다.
마법의 종주였다.
번헬리어에게 기척을 지우는 건 손쉬운 일이란 말이다.
놈을 찾아내기 위해선 눈으로 쫓는 수밖에 없는데 보이질 않는다.
단순히 ‘작아졌다.’고 추론할 수 있었다.
‘마물 사이에 섞여있을 확률이 높겠군.’
바알의 의식이 성문 쪽으로 향했다.
아수라의 머리와 호위 악마들이 침입자와 맞서 싸우고 있는 지점.
그곳엔 수천 마리의 마물이 있다.
번헬리어가 놈들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서 섞여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헛웃음이 나왔다.
호위 악마들이 거느린 마물들은 대개 ‘개’의 형상을 하고 있다.
명색이 고룡이 개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했다고 상상하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동정심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렇다.
천하의 바알조차도 개를 떠올리는 게 한계였다.
설마 고룡이 생쥐로 폴리모프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악룡 번헬리어... 교활한 놈답게 자존심에 집착하지 않는구나. 마물로 변해 땅을 기는 고룡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오직 네놈 하나밖에 없을 거다.”
재차 도발하는 바알의 의지를 따라 지옥 달의 눈들이 움직인다.
수만 개의 눈동자가 바알 성 입구의 마물들을 주시했다.
“...”
잠자코 상황을 살피는 그리드의 표정이 편치 못했다.
바알의 허를 찌르기 위해 생쥐로 변하는 수모를 감수한 번헬리어의 희생을 실감하면서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을 떠올리고 수행하는 번헬리어에게 존경과 감사를 느꼈다.
‘나도 최선을 다하자.’
그리드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바알은 최소 20번 이상 죽어야했다.
하지만 바알은 예상보다 더 강해졌고 고작 5회밖에 죽이지 못했다.
바알의 멘탈을 흔들기엔 턱없이 부족한 횟수였다.
하여 초조해지던 차에 번헬리어의 희생을 목도했다.
고룡 중 최약, 최악.
여러 가지 의미에서 번헬리어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는데 고룡은 고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위대하게 다가왔다.
본받고 싶어졌다.
초조했던 마음을 신중하게 가다듬었다.
‘5융합 이하의 검무는 무의미한 상황.’
템빨계라면 모를까.
오직 6융합 검무 하나에 의존하기엔 부담이 크다.
기본적으로 동작이 너무 많다.
6개의 검무를 모두 적중시켜야 비로소 융합 검무가 완성되니까.
도중에 차단당하면 6융합 이하의 검무로 판정 받는 것이다.
이때 바알은 면역해버렸고.
그리드는 검무 외의 스킬들을 떠올렸다.
각종 퀘스트를 완수하고 얻었던 스킬들과 무신의 비급을 통해 얻은 스킬들.
브라함에게 배운 마법들과 아이템에 귀속 된 스킬들의 종류와 기능을 일일이 점검했다.
바알은 여태껏 그리드가 죽였던 존재들의 힘을 이용해 그리드를 압박하고 있었지만.
즉, 그리드가 걸어온 길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리드가 바알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선 자신이 걸어온 길을 믿고 의지해야했다.
단순한 난투극이 아닌 것이다.
그리드의 인생을 시험 당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인류의 미래가 걸렸다...
스스슥.
소집 명령.
수백 개의 갓 핸드가 모조리 그리드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무장하고 있던 검과 방패가 그리드의 인벤토리로 회수됐다.
촤르르르륵.
황금색 태양이 떠올랐다.
서로 결속 된 갓 핸드들이 원을 이루며 만든 태양이다.
바알의 마력이 만들었던 검은 태양과 달리 찬란했다.
태양의 중심에 선 그리드가 <황혼>을 변신시켰다.
포효하는 트라우카의 대가리와 닮은 대궁.
지슈카에게 만들어준 드래곤 웨폰이었다.
<염룡의 포효>
등급:신화
내구력:무한 공격력:25,020
★시위를 당길 때마다 마력 화살 생성. 마력 화살의 공격력은 사용자의 근력, 민첩성, 지력, 그리고 투자 자원의 총량에 영향을 받음.
★시위에 걸치는 화살의 개수가 적을수록 추가 공격력 상승.
★시위에 걸치는 화살의 개수가 많을수록 절대 명중률 상승.
★시위를 당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추가 공격력 상승.
★시위를 당기는 시간이 짧아질수록 연사 속도 상승.
★상시 절대 명중률 증가.
★상시 연사 속도 증가.
등등.
본래 염룡의 포효의 기본 옵션은 궁사에게 최적화 되어 있다.
하지만 그리드가 황혼으로 재현한 염룡의 포효에는 각종 옵션이 추가로 붙었다.
무한으로 판정 받는 내구력이 증명하듯 ‘탐욕’이라는 소재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대상의 방어 스킬, 마법, 권능을 85퍼센트 확률로 무력화.
★대악마, 대천사, 신, 드래곤에게 공격력 추가 적용.
★어두운 장소에서 무기 공격력 80퍼센트 상승.
★공격 시 확률적으로 디스인티그레이트와 메테오 발생.
그리드가 <아이템 변신>으로 재현하는 무구는.
이제 원본보다 강력하다.
탐욕의 성장이 만든 결과다.
브라함과 함께 만든 결과였다.
꽈아아아아아앙!!
주황색 신성으로 빚어진 화살.
한껏 팽창 된 시위에 걸친 채 바알을 조준한 그것이 굉음을 토하며 쏘아졌다.
임팩트가 엄청났다.
진짜 드래곤이 브레스를 쏘는 듯한 광경이었다.
세상이 경악하는 반면 바알은 콧방귀만 뀌었다.
“활 따위로 뭘 하겠다는 거냐.”
기본적으로 투사체는 절대자와 상성이 나쁘다.
투사체가 아무리 빨라봤자 절대자의 반응속도를 뛰어넘을 순 없으니까.
물론 염룡의 포효에는 절대 명중률이 붙어있다.
그리드가 쏜 화살은 유도탄마냥 바알을 뒤쫓아서 회피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부질없었다.
쩌어엉!!
애초에 바알은 화살을 피하지 않았기에.
마검을 가볍게 휘둘러서 받아냈다.
표적에 적중하지 못하고 마검에 베인 신성의 화살이 반으로 갈라진다.
빛을 흩뿌리며 맥없이 추락해갔다.
『원거리 딜러의 단독 레이드 성공률이 낮은 이유죠. 적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극명하게 나타나는 약점입니다.』
전투 내내 잠자코 그리드를 응원하던 전문가들이 조심스럽게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공감하는 시청자가 많았다.
굳이 활 병기를 꺼내든 그리드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단 한 명.
지슈카를 제외하고.
“최고라니까?”
번쩍!
인공위성처럼 전장을 관조하는 지슈카의 시야 끄트머리에 빛이 번쩍였다.
마력으로 빚어진 창이 떨어지며 만든 궤적이었다.
디스인티그레이트.
그리드의 공격이 발생시킨 마법이다.
“흥.”
머리 위로 떨어지는 마력의 창.
바알이 쉽게 반응했다.
앞선 전투에서 이미 수차례 당했던 수법이다.
그리드의 공격이 디스인티그레이트와 메테오를 확률적으로 발생시킨단 사실을 바알은 학습하고 있었다.
쉽게 당해줄 리 없는 것이다.
물론 그리드도 바알이 쉽게 당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굳이 활을 들었다.
파팡!
파파파파파파파팡!!
웨폰 마스터리와 보우 마스터리의 결합.
그리드의 연사 속도가 계속해서 가속했다.
지슈카가 직접 구해온 설계도로 만든 활골무와 염룡의 포효의 결합이기도 했다.
궁술의 최대 장점은 거리로부터 자유롭다는 것.
대상을 ‘간격’에 넣은 뒤에 휘둘러야 표적에게 닿는 검술과 달리 원거리에서도 마음껏 표적을 노릴 수 있다.
적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이상.
검을 10번 휘두를 시간에 화살은 수십 발도 더 쏘는 게 가능했다.
또한 탐욕이 발생시키는 디스인티그레이트와 메테오는 공격 횟수가 늘어날수록 발동 확률도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콰쾅!
쿠콰콰콰콰콰콰쾅!!
전 방위로부터 쇄도해오는 화살의 비.
그것을 쳐내고, 피해내는 바알의 머리 위로 투척되는 마력의 창과 운석이 급기야 지상을 그림자로 뒤덮었다.
숫자가 워낙 많았다.
피한다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지경이 돼서 바알은 마검이 아닌 호신강기에 마력을 집중했다.
꽈르르릉...!!
디스인티그레이트와 메테오도 바알의 호신강기를 꿰뚫진 못했다.
하지만 메테오의 작동 원리는 우주의 운석을 끌어내리는 것이다.
‘무게’가 존재했다.
중첩되는 무게를 감당 못한 바알의 몸이 짓눌려 지상에 처박혔다.
그리드가 노렸던 상황이다.
모든 종류의 이동 스킬을 차단하는 결계 탓에 순보를 쓰진 못했지만.
그는 순수한 속도로 빠르게 달려 바알에게 도달했다.
바알이 몸을 일으키는 틈에 6융합 검무를 완성시켰다.
새카만 호신강기가 갈기갈기 찢어진다.
역천으로 휘두르는 6융합 검무의 위력은 바알의 방어력을 웃돌았다.
치명타와 약점 공격 발생 확률이 높다는 점이 특히 위협적이었다.
[신께서 쏜 화살을 맞고 추락한 지옥의 왕이 죽었다.]
서사시의 문장이 추가된다.
궁사로서의 역량조차 GOAT.
바알의 목을 벤 뒤 물러나 재차 화살을 장전하는 그리드의 고고한 모습이 전 세계를 격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