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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51화 (1,750/1,794)

템빨 86권 - 21화

우웅. 우우우웅.

마검에 응축 된 마력이 땅과 하늘을 격동시킨다. 당장 폭발해서 일대를 초토화시킬 기세였다. 연신 토하는 굉음이 주인을 재촉하는 듯했다.

“...”

바알은 여전히 침묵했다.

섣불리 검을 휘두르지 않고 잠자코 서있었다.

시선은 그리드에게 거둔 채다.

차라리 명상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실제로 바알의 눈꺼풀은 반쯤 감겨있었다.

제 심장을 손가락으로 겨누며 도발하는 그리드를 애써 외면하는 것이다.

똑똑히 보고도 좌시했다간 서사시가 어떤 개소리를 지껄일지 몰랐기에.

‘장난감의 심정인가?’

바알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드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음을 자각한 여파다.

타인의 운명을 뜻대로 휘두르며 선택지를 강요해온 그가 반대의 입장이 되고 말았다.

온갖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불쾌하군.’

미소를 거둔 바알이 호승심을 억눌렀다.

그리드가 내민 선택지에 뻔한 해답을 내밀었다.

우선 <악마들의 요람>을 가동시켰다.

악마들의 요람.

지옥에 서식하는 마물과 악마들은 대부분 그곳에서 태어난다.

바알은 새롭게 태어난 마물과 악마들을 즉시 곁으로 불러들여 그리드를 공격할 수단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

“어? 저기 갑자기 꿈틀대는데요?”

템빨신교 교주 데미안.

임신한 이사벨의 초상화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가 긴가민가하며 말했다.

오염 된 땅을 개간하고 있던 일행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무저갱처럼 크고 새카만 구멍.

마물과 악마들을 간헐적으로 토해내던 요람의 입구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잎사귀 따위를 씹는 애벌레의 주둥이마냥 하찮은 움직이었지만 분명한 변화였다.

“힉! 악마! 악마가 쏟아집니다!!”

데미안과 함께 멀뚱멀뚱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제드노스가 기겁했다.

콰아아아아아앙!!

요람이 폭발했다.

활화산이 용암을 분출하듯 대량의 마기를 사방에 흩뿌렸다.

일대를 물들이는 새카만 안개 사이로 수천수만 개의 붉은 구슬이 번쩍였는데, 그것들 전부 막 태어난 악마들의 안광이었다.

그래, 악마다.

마물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함을 간직한 녀석들.

종종 ‘정예’ 판정을 받는 놈들은 대악마와 마찬가지로 고유의 권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갑자기 뭐냐고!”

본래 마물과 악마를 일정 간격마다 쏟아내던 요람이 대량의 악마를 한꺼번에 쏟아내자 당황한 제드노스가 사색이 됐다. 잔뜩 긴장해서는 닥치는 대로 마법을 쏘아 됐다.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별개로 결과는 엄청났다.

클래스를 바람술사로 시작한 마법사답게 광역 마법에 특화 된 그는 마법을 중첩시킬 때마다 공격 대상을 수십 단위, 수백 단위로 늘려갔다.

공격하는 대상이 늘어날수록 마법 공격력이 상승하는 지팡이가 찬란한 마력을 흩뿌리며 그를 도왔다. 드래곤 웨폰이다.

“저 요람... 마치 지능을 지닌 생물처럼 생각하고 판단하는군. 논밭이 완성되면 골치 아플 거라고 판단한 눈치야.”

휴렌트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러로 빚은 수백 개의 호미로 땅을 찍으면서다. 피아로가 흩뿌린 씨앗들이 그 안으로 쏙쏙 들어갔다.

“조금 더 서둘러주실 순 없겠습니까?”

“이미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땅에 영양분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속도가 더딘 건 이해해줘야지.”

피아로의 급성장조차 농작물을 즉시 만개시키지 못했다.

지옥의 땅이라는 게 그만큼 척박했다.

땅뿐만 아니라 자연 전체에 에너지가 없었다.

피아로가 자연경을 써도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제드노스가 한층 더 초조해지는 그때였다.

“최대한 버텨볼 테니까 걱정 말고 페이스 유지하세요.”

이사벨의 초상화를 품에 넣은 데미안이 앞으로 나섰다.

행동의 결과가 상식을 초월했다.

그는 단지 몇 걸음을 내딛었을 뿐이건만, 비행하며 쇄도해온 악마들의 몸이 산산조각나며 잿빛으로 산화했다.

템빨신교 교주 데미안.

모든 걸음걸이에 검무의 묘리를 담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의 검무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끝없이 완성되고 순환됐다.

일본을 대표하는 천재다웠다.

“휘유.”

감탄한 휴렌트가 휘파람을 불었다.

최악의 경우.

개간은 순전히 피아로에게 맡기고 자신이 참전할 각오였는데 데미안의 실력이 상상 이상이었던 것이다.

이쯤 되자 라우엘에게 다소 미안할 지경이었다.

피아로, 나, 데미안, 제드노스.

사실 처음에 파티원 목록을 봤을 땐 영 미덥지 못했다.

피아로 님이야 여전히 내 마음 속 최강자지만.

데미안은 갑옷과 방패마다 이사벨의 사진을 붙이고 다니는 오타쿠였고, 제드노스는 매일 라엘라에게 바가지 긁히는 반푼이었으니까.

세간에서 그들을 칭송하는 것과 별개로 휴렌트가 봤을 땐 그리 대단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논밭을 만들면서 여러 제약이 생기는 피아로 님께 저런 자들을 호위로 붙인 라우엘의 저의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솔직히 속으로 욕도 조금 했다.

‘이제 보니 순전히 내 편견이었다.’

아무래도 휴렌트는 템빨단원들과 공동 전선에 뛰어든 경험이 적었다.

템빨단에 가입한 시기가 너무 늦기도 했고, 가입한 이후에도 대부분 피아로를 쫓아다니거나 크리스, 하스터와 별도의 임무를 수행했으니까.

그래서 동료들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다.

다소 민망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피아로가 한 가지 진실을 알려줬다.

“데미안이 자네 선배일세.”

“...예?”

“자네보다 먼저 내게 밭일을 배웠지.”

“아... 그래서 실력이 출중했던 거군요.”

농부들만의 공감대가 형성됐다.

휴렌트는 데미안의 밭일 솜씨도 궁금해졌다.

“...?”

문득 등골이 오싹해진 데미안의 검이 미묘하게 느려졌다.

악마들을 사냥하는 속도를 의도적으로 늦췄다.

어째선지 뜨거운 휴렌트의 시선을 느껴서다.

‘저러다가 밭일까지 시킬 기세인데.’

그리드가 새로운 무기를 만들 때마다 샌드백 역할을 수행해온 데미안이다.

자신도 모르게 눈치가 엄청 빨라졌다.

‘템빨신교 교주가 손에 흙을 묻혀선 안 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데미안이 스킬들이 쿨타임에 걸린 것처럼 연기를 시작했다. 사냥 속도가 계속 느려졌다.

***

‘...안정 되었나.’

요람에서 막 태어나기 시작한 악마들이 갑자기 몰살당하기에 내심 당황했던 바알.

그리드가 어떤 수작을 부려놨음을 깨닫고 눈살을 찌푸리던 그가 안도했다.

요람에서 태어나는 즉시 사라지길 반복하던 악마들의 기척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시작한 까닭이다.

그리드가 준비한 함정을 악마들이 파훼했다는 뜻이 됐다.

안심한 바알이 요람에서 관심을 거뒀다.

다음으로 붉은 살덩어리와 교신했다.

붉은 살덩어리.

지옥 달을 투영해서 지옥을 왜곡시킨 원흉이자 아수라의 생산 재료다.

어쩌면 바알이 유일하게 신뢰하고 의지해온 대상이었다.

‘그리드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것들을 보내라.’

바알이 붉은 살덩이에게 의지를 전달했다.

곧바로 반응이 나타났다.

바알의 그림자를 통해 ‘문’이 열리더니 어떤 인물의 정수리가 솟구쳐 올랐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그것.

양반 가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생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기운을 발산하면서다.

바알이 신살의 기운을 가공할 때 가람의 도움을 받았으니까.

물론 가람이 원해서 준 도움은 아니었다.

바알은 가람의 영혼을 낱낱이 분해해서 영감으로 삼았고, 그 과정에서 가람도 자연히 발전했을 뿐이다.

“그리ㄷ...”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던 가람이 그리드를 발견하고 환희에 찼다.

눈을 크게 반짝이더니 사라졌다.

그래, 사라졌다.

문으로 다시 빨려 들어갔다.

“...?”

의아해하는 바알.

그의 발밑 그림자에 열렸던 문이 흔적도 없이 닫힌다.

그 너머 지하에서 템빨단원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살덩어리가 끝없이 생산하는 망자들을 유라가 저격하고 페이커가 암살한다.

유라를 우선 공격 대상으로 삼는 살덩어리의 원거리 공격은 레라지에와 토반이 어떻게든 막아내며 버텨냈다.

미르는 간신히 발목을 붙잡아 끌어내린 가람과 오래간만에 재회하고 있었다.

“미르 네놈... 그리드의 부하가 된 거냐? 한울을 배신한 거야 그렇다 쳐도 그리드의 부하가 된 것만큼은 납득할 수가 없군. 기껏 얻은 자유를 무가치하게 소모한 셈 아닌가?”

“온 누리를 뒤져봐도 그리드 님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다.”

“하핫...? 광신도가 따로 없구나. 애초에 신을 위한 꼭두각시로 태어난 놈답게 하찮다.”

꽈아아아아아아앙!!

미르와 가람이 충돌했다.

두 사람의 몸에서 동시에 핏물이 솟구쳐 올랐다.

순수한 검술 실력은 미르가 월등하게 우위에 있었지만 신살의 기운이 문제였다.

가람이 난사하는 무형지기에 담긴 신살의 기운이 단지 스치는 것만으로 미르의 몸과 영혼에 상처를 새겼다.

똑같이 상처를 입으면 당연히 미르가 손해였다.

현재 가람의 육신은 붉은 살덩이의 파편으로 구성 된 상태.

상처를 입어봤자 붉은 살덩이에 의해서 즉시 재생한다.

“어이, 소시지. 기왕이면 다른 양반들의 영혼도 소집하지 그래?”

가람이 붉은 살덩어리를 재촉했다.

움찔.

이성을 지닌 것일까?

불쾌하다는 듯이 몸을 떨던 붉은 살덩어리가 이내 새로운 육체들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과거에 죽은 양반들의 육체였다.

천천히 눈을 뜬 그들이 가람의 뒤편으로 도열했다.

“많이도 죽었네. 죄다 그리드에게 죽은 거겠지. 우리를 보고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나?”

양반들의 적의와 살의가 미르에게 집중된다.

악마와 비슷한 개념으로 부활한 그들은 하나 같이 고강했다.

반신과 악마의 결합.

전에 없던 존재로 거듭난 만큼 특별한 면이 있었다.

“미르가 위험해 보인다. 우선 양반들을 정리해야할 것 같은데.”

“아니요.”

페이커의 의견에 유라가 고개를 저었다.

데빌 슬레이어.

홀로 지옥을 공략해온 그녀의 남다른 안목은 붉은 살덩어리의 약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다른 존재를 빚기 위해 살을 분리하고 크기를 줄일 때마다 저것의 공세가 잠깐씩 멈추고 있어요.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수행하지 못한다고 보기엔 살을 다시 회수할 때의 공세는 멈추지 않죠. 태도가 소극적으로 바뀐다고 해석해야 옳을 것 같아요.”

붉은 살덩어리는 제 살을 떼어내서 망자들의 육신을 빚는다.

그때마다 태도가 소극적으로 바뀌는 이유?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이때 공격을 당하면 위험하다는 판단으로 몸을 사리는 것이다.

유라의 설명을 들은 페이커가 납득했다.

두 사람이 집중한다.

오롯이 붉은 살덩어리를 주시하다가, 그것이 새로운 존재를 빚어내는 순간을 노리고 궁극기를 꽂아 넣었다.

-...키야아아아아아아아!!

처음으로 유의미한 데미지가 들어갔다.

***

“...”

폐허가 된 대전으로 새어 들어오는 적색 빛이 비스듬히 꺾였다.

새카만 지옥의 하늘을 장식하는 달이 흔들린 여파다.

지옥 달을 투영하는 붉은 살덩어리가 흔들렸다는 증거였다.

모르는 사이 지하에 잠입한 인간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네놈... 이번에는 철두철미하게 준비했구나.”

애써 태연한 얼굴로 지껄이는 바알에게 그리드가 이죽거렸다.

“밥상은 유라가 차린 거야. 나는 그냥 숟가락만 얹는 거고.”

“데빌 슬레이어...”

어느 시점부터 알렉스를 초월한 당대의 데빌 슬레이어 유라.

놈이 알렉스보다 까다로운 부분은 신중하다는 점에 있었다.

자신이 악마를 상대로 월등히 강력하다는 착각에 빠져 스스로 바알을 찾아왔던 알렉스와 달리, 유라는 절대로 바알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알렉스의 실패를 교훈 삼아 늘 뒤에서 수작만 부렸다.

더러운 벌레 한 마리가 온 집안을 헤집는 느낌.

진정으로 거슬리는 놈이었다.

“뭐 됐다... 오늘 내가 네놈을 죽이고 한 차원 더 진화하면... 겁 많은 데빌 슬레이어도 어렵지 않게 찾아내서 소거할 수 있을 테지.”

붉은 살덩어리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됐다 한들.

바알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악마들의 요람은 물론이고 자신을 섬기는 대악마들에게도 모조리 소집 명령을 내려놓은 차니까.

각자의 군단을 이끌고 곧 이곳에 도착할 지옥의 왕들이 그리드를 소모시킬 것이다.

자신은 지친 그리드를 마무리하면 그만이었다.

그리드가 진짜로 무적일 가능성?

없다.

태초신들과 고룡조차도 무적은 아니니까.

악마들이 그리드에게 창칼과 마법을 꽂아 넣을 때마다 그리드는 반드시 약해질 것이었다.

우웅. 우우우웅...

여전히 강대한 마력이 응집 된 마검을 거머쥔 채.

바알은 잠자코 때를 기다렸다.

곧 도착할 원군을 보고 위축 될 그리드를 뭐라고 조롱해주면 좋을지 즐겁게 고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주변은 잠잠했다.

원군이 도착할 낌새가 전혀 없었다.

“혼자서만 강해져온 너와, 함께 강해져온 나의 차이다.”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는 바알에게 그리드가 쐐기를 박았다.

바알의 두 눈이 무섭게 치솟았다.

시간을 압축시켜 강해져온 놈이.

당장만 해도 실시간으로 강해진 놈이 염치없게 지껄이고 있었으니 살심이 솟구쳤다.

“...성장에도 한계가 있겠지.”

마검을 고쳐 쥐는 바알의 손등 위로 핏줄이 꿈틀거렸다.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마검의 표적은 그리드의 목이었다.

“내가 네놈을 죽인 대가로 죽음을 겪고, 그로 인해 네놈이 강해지길 반복한다 한들 결국에는 한계가 있을 거다.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나?”

‘왜 갑자기 급발진을?’

또 하나의 무덤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오려면 아직 한참 남은 상황.

지금 정말로 바알이 공격했다간 반격 데미지를 입히지 못하고 약점을 간파 당한다...

그리드가 바짝 긴장하는 순간이었다.

“짜잔. 원군 등장이랍니다.”

대악마 로제가 현장에 도착했다.

너무 하찮은 까닭에 브라함의 견제를 받지 않고 바알의 부름에 호응한 것이다.

“...흐음.”

덕분에 바알이 진정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마검을 거뒀다.

“...”

그리드가 십년감수했다.

로제에게 미약한 호감마저 품었다.

그리드의 속내를 알 리 없는 바알이 선언했다.

“나의 권한으로 로제 네게 9번째 왕좌를 주마.”

새로운 한 자릿수 대악마의 탄생.

심지어 플레이어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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