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749화 (1,748/1,794)

템빨 86권 - 19화

아아...

아아아아...

비명이 끝없이 이어졌다.

흐느낌에 가깝다.

고통이 아닌 허무와 절망감으로 물든 절규가 거세게 흐르는 강물의 소음마저 집어삼키며 메아리쳤다.

“초조하지 않나?”

수백수천 억.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을 영혼들이 표류하는 거대한 강.

윤회의 강의 잔혹하고 슬픈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던 크라우젤이 시선을 돌렸다.

흑기사 엘리고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에 있어봤자 활약할 기회가 없을 테니 말이야.”

“...”

크라우젤이 잠시 대답을 보류했다.

애초에 그는 엘리고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타인과 교류함에 있어 색안경을 쓰지 않는 그리드와 달리 크라우젤은 다소 보수적이다. 되도록 대상의 본질을 신경 썼다.

다른 건 몰라도 선과 악을 확실하게 구분 지었다.

대상이 어떤 진영에 속해있든 쉽게 교류하고, 또는 쉽게 해치는 그리드와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

물론 썩 좋은 태도는 아니었다.

상식적인 사고와 선택은 특별한 이벤트를 불러올 기회가 적으니까.

랭커의 자세로 적합하지 않았다.

실제로 크라우젤은 그리드와 비교해서 히든 퀘스트 획득률이 많이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드 다음으로 레벨이 높고, 강하다는 게 대단한 점인 거고.

아무튼 크라우젤은 엘리고스를 의심했다.

그리드가 신뢰하는 것과 별개로 놈은 대악마.

심지어 윤회의 강을 수호해왔다.

강을 벗어나지 못한 채 표류 중인 저 수많은 영혼들의 속박을 좌시했단 말이다. 조롱해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최소한 그건 아닌가.’

크라우젤이 엘리고스가 등지고 있는 언덕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물을 떠도는 영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꼬랑지를 흔드는 켈베로스의 모습이 보였다.

코끼리 몇 마리를 합쳐놓은 것보다 커다랗고, 또한 대가리가 3개라는 점을 제외하면 영락없는 강아지다.

영혼들에게 순수한 호기심을 보일 뿐 어떤 악의나 살의를 표출하지는 않았다.

놈의 주인.

즉, 엘리고스가 영혼들을 학대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개는 주인의 모습을 닮게 마련이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한 크라우젤이 입을 열었다.

“말의 의미가 불쾌하군. 그리드가 질 거라고 보는 건가?”

크라우젤은 바알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이곳에 찾아왔다.

그리드에게 몇 차례의 죽음을 겪고 약화 된 바알이 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올 가능성을 염두에 둔 활동이었다.

한데 엘리고스는 별 일 없을 거라고 한다.

바알이 수세에 몰릴 리 없다는 듯이.

엘리고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대가 섬기는 신을 폄훼할 의도는 없다. 이건 다만... 단순한 문제일 뿐이야.”

흑(黑).

어둠, 악, 죽음 등을 의미하는 색깔이다.

지옥에서 검정색이 갖는 권위가 몹시 크다고 들었다.

실제로도 그래보였다.

칠흑으로 무장한 엘리고스의 서열은 지옥에서 20위에 불과했지만, 크라우젤이 여태껏 만나온 다른 한 자릿수 대악마와 비교해서 오히려 더 예리한 마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싸워서 이길 확신을 품지 못할 정도로 포스가 엄청났다.

바알조차 그를 섣불리 건드리지 않는다는 게 허명은 아닌 듯했다.

“그대의 신이 바알과 싸워서 이기고 지는 건 중요치 않아. 바알에게 죽음은 초월한 개념이니까. 부활 등의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이 죽는 즉시 극복하는 놈을 설령 수백수천 번 죽인다고 한들 그게 뭐가 대수일까.”

엘리고스의 시선이 절벽 아래로 향했다.

거세게 소용돌이치는 강물에서 허우적거리는 영혼들을 시야에 담았다.

“놈은, 그대의 신에게 몇 번을 패배하고 몇 번을 죽든 약해지지 않을 거다. ‘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올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무방하지.”

“본론을 말해라.”

투구 사이로 드러나는 엘리고스의 두 눈이 미묘하게 휘었다.

크라우젤의 태도가 꽤 흡족한 눈치였다.

그도 수다를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검성 크라우젤. 그대와 나쯤 되면 바알의 빈틈을 찌를 수준은 된다.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하느니 바알의 성으로 침투해서 그리드를 돕는 게 옳아. 되도록 서둘러야겠지. 지옥 전역에 이동 마법이 불가하다는 법칙이 세워진 상황에서 바알의 성으로 가기 위해선 제법 긴 시간이 소요될 테니.”

“이번엔 설명이 적다. 내가 그리드의 뜻을 거역하면서까지 전투에 개입해야 할 이유가 뭐지?”

“바알을 완벽한 수세에 몰아넣기 위해서다. 그대도 알다시피 바알의 목숨을 끊는 방법은 단 하나. 놈을 향한 인류의 공포를 제거해야하는데 사실상 이건 불가능해. 내가 긴 세월 고민해본 끝에 내린 결론은, 인류에게 기대할 게 아니라 바알에게 직접 공포를 선사하는 것이다.”

엘리고스가 고작 20위의 서열을 고수하며 윤회의 강의 책임자로 머물러온 이유는 단 하나다.

상징.

그는 지옥의 표상이 되고자 했다.

하여 수천 년의 세월을 이곳에 머물렀다.

신화에 족적을 남긴 켈베로스의 본신과 함께 윤회의 강을 지키며, 죽은 자들의 영혼에 자신의 모습을 새겼다.

두 번 다신 되찾지 못할 삶을 갈구하는 영혼들의 절규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보아라.

들어라.

내가, 지옥이다.

원대한 야망인 것이다.

그에게 바알은 걸림돌에 불과했다.

그 누구보다 바알의 죽음을 열망했다.

“공포를 공포로 꺾겠다는 말인가?”

“그렇다. 바알이 공포라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 놈을 지탱해온 공포가 놈을 배신할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독제독의 논리였다.

크라우젤은 제법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지. 우리는 이곳을 지킨다.”

“...섬기는 신의 뜻을 거역할 순 없다는 건가?”

“역으로 묻지.”

크라우젤은 변화무쌍하다.

선한 자들에겐 항상 밝은 미소로 화답했고, 그렇지 않은 자들에겐 늘 냉담했다.

지금처럼 확고한 신념을 내비칠 때는, 꺾이지 않을 의지를 두 눈에 담았다.

“어차피 죽음을 초월한 대상에게 위협을 가한다고 해서 공포를 느낄 거라고 보나?”

“...물론 쉽지 않을 거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드와 협력해서 놈을 극한까지 몰아넣어야...”

“틀렸어. 바알은 벼랑 끝까지 몰리면 기꺼이 벼랑으로 몸을 날릴 놈이다.”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방법 외엔 없지 않은가.

엘리고스는 반론하고 싶었지만 섣불리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당대의 검성.

어느새 애송이의 티를 완전히 벗은 크라우젤의 눈빛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압도당했다.

“단순한 무력은 바알을 공포에 빠뜨리는 수단이 못 돼. 놈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선 절망이라는 감정을 먼저 학습해야 한다.”

문득.

크라우젤은 영혼들의 절규가 옅어진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저들이 자신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세계관의 중심.

바로 그리드가 살아온 세계다.

이곳에선 찰나조차도.

또한 작은 행동조차도.

무수히 많은 존재들에게 희망을 줄 수도, 절망을 안길 수도 있다...

자각하는 크라우젤의 목소리에 한층 더 강한 의지가 실렸다.

“그리드 또한 그걸 알기에 단독으로 바알을 찾아간 거겠지. 우리보다 강력한 비반 공과 사도들을 대동하지 않고서.”

“...”

나보다 강하다?

엘리고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크라우젤의 일방적인 평가에 반발심을 품었다.

잠시뿐이다.

그리드를 마중 나갔을 때 목격했던 검신 비반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건... 괴물이었지.’

굳이 부러진 검을 허리에 매고 있는 걸 봐선 제정신 같진 않았지만.

기량을 놓고 보면 그리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느낌이었다.

만약 그리드가 비반을 대동했다면.

그리드는 바알과의 싸움을 한층 더 유리하게 가져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홀로 바알을 찾아갔다.

크라우젤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리드는 바알을 죽일 유일한 방법을 이해하고 있다.”

순간.

영혼들의 절규가 완전히 멎었다.

윤회의 강이 수천 년 만에 고요해졌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만이 울릴 뿐이다.

크라우젤은 수백수천 억의 영혼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들 모두가 그리드의 이름에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리드가 기대에 배반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알에게 절망을 선사할 거야.”

단독으로 바알을 압도하는 방식으로.

물론 객관적으로 봤을 땐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그리드를 믿었다. 믿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

“아...”

세계 곳곳에서 탄식이 울렸다.

광야마냥 드넓은 성을 종횡무진하며 공방을 나누던 그리드와 바알.

주먹과 발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천지를 격동시키는 그들의 모습은 상상 속 신들의 전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차원이 달랐다.

몹시 치열한 공방이 영원히 이어져도 이상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제라툴을 신에서 내리고 바알을 신으로 올려야 한다는 우스개가 나돌 정도였다.

한데 균형은 의외로 금방 깨졌다.

바알의 마검이 그리드의 심장을 꿰뚫었고, 사람들은 여태껏 상상해본 적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리드가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바알 앞에 무릎 꿇은 형국이 됐다.

늘 상대를 무릎 꿇려온 그리드가 반대의 입장이 된 것이다.

일부 몰지각한 언론사는 ‘영웅의 패배’, ‘몰락한 신’ 따위의 표제를 내걸고 속보를 벌써부터 쏟아내고 있었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했다.

안 그래도 이미 불사가 빠진 거 아닐까 의심이 생길 정도로 치열한 공방을 나눈 직후에 입은 치명상이다.

이건 진짜 위험하다.

제1위 대악마 바알.

그리드 혼자서 도전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애초에 왜 굳이 혼자서 도전했단 말인가?

지독한 오만이었다.

급기야 그리드의 판단력을 의심하는 여론이 형성 될 무렵이었다.

“신살. 오직 신을 죽이기 위해 가공 된 힘이다.”

바알이 그리드의 심장에 꽂혔던 마검을 비틀어 뽑으며 말했다.

“네게도 익숙한 기운일 거다. 네 손으로 죽인 한울의 실패작에게서 흡수한 기운이니까.”

바알의 입가에 점차로 미소가 번졌다.

신살.

지긋지긋하게 버텼던 가람의 영혼에게 빼앗은 뒤로 극한까지 연마한 기운이다.

이쯤 되면 아스가르드를 표적으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품으면서다.

그만큼 강력했다.

바알은 이미 신살자의 자격을 갖췄다.

타고난 절대자가 권능과 노력을 토대로 후천적인 절대자의 권한까지 쟁취한 것이다.

여태껏 없던 존재로 거듭났다.

바알이 자부하기로, 현재 자신은 절대자 중의 절대자였다.

언젠간 태초신조차 초월할 만한.

유일신이라는 이레귤러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을.“이 기운은 네 죽음을 필연으로 만든다.”

바알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미 죽음의 문턱을 넘고 있을 그리드의 모습을 음미하며 감상하기 위함이었다.

그리드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오르고 있었다.

[죽음에 이르는 일격을 당했습니다.]

즉사기를 허용했을 때 떠오르는 문구.

[신을 죽이는 기운이 침투했습니다. 불사와 긴급 탈출 패시브 스킬이 봉인 됩니다.]

신살의 기운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주는 문구가 뒤따른다.

천만 다행이었다.

[<+1염룡의 갑옷>의 옵션 효과로 피해를 면역합니다.]

그리드가 무장하고 있는 드래곤 아머는.

단순히 고룡의 비늘과 가죽을 재료로 삼아서 강력한 게 아니다.

반드시 그리드를 지키겠다는 소중한 이의 염원이 담겼기에 비로소 완성 됐다.

★즉사 및 암살 계열 스킬에 면역.

염룡의 갑옷에 귀속 된 옵션 중 하나.

바알이 하필 즉사기로 연마한 신살의 기운에 절대적인 카운터로 작용했다.

“...뭣이?”

서사시를 의식해서 경거망동하지 않던 바알이 당황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리드의 검은 눈동자.

초점을 잃었야할 그것이 여전히 명확하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반응이 멈췄던 서사시를 다시금 움직였다.

지상의 인간들은 물론이고 윤회의 강의 영혼들마저 이 순간을 주목했다.

“약해.”

바알은 절대방어를 무색하게 만드는 절대자였으나 실상은 그리드의 불사를 빼지 못했다.

염룡의 갑옷에는 모든 종류의 데미지를 ‘대폭’ 경감시키는 <충격 완화> 옵션이 존재했으니까.

치열한 공방을 펼친 직후 신을 죽이는 일격에 심장을 꿰뚫려 놓고도.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그리드의 안색은 너무 멀쩡했다.

“네가 죽음을 극복해서 불사라면, 나는 죽지 않아서 불사다.”

“...”

바알의 심상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마력으로 빚은 호신강기와 마검의 형상이 한 순간 흐트러졌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그리드가 <또 하나의 무덤>을 전개했다.

지난 20초 동안 입은 피해를 대상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주는 대규모 폭격 스킬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