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6권 - 18화
“...여러모로 실망스럽군.”
저주의 사슬을 끊은 검.
그리드의 새로운 검을 빤히 바라보던 바알이 몸을 일으켰다.
높은 왕좌에서 대전까지 향하는 수천 개의 계단을 하나씩, 천천히 지르밟아 내려간다.
붉은 안광을 내뿜는 시선을 그리드에게 고정시킨 채다.
온갖 종류의 상태이상이 중첩되며 그리드를 짓눌렀다.
Satisfy에 존재하는 모든 CC기술의 표적이 된 감각.
그리드가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다.
상태이상을 저항한 것과 별개로 바알의 ‘시선’ 하나가 만든 결과에 경악하고 압도당했다.
“실시간으로 쓰이는 신화를 조작해서 흐름을 유리하게 가져간다... 저열한 사기꾼의 태도다. 전과 같지 않나?”
계단을 하나 내려올 때마다 바알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새카만 마기가 짙어졌다.
번헬리어의 거체를 담고도 광활하게 펼쳐지는 대전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번헬리어와 드래곤 웨폰에 의존하는 꼴 또한 전과 같군. 네놈은 전혀 발전하지 못했어.”
‘이런 X망겜이 있나?’
그리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점잖은 말투.
낮고 중후한 목소리.
좌중을 압도하는 등장 연출.
바알의 모습은 종전과 달랐다.
단순히 상황을 즐기며 무력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어떤 의도를 갖고 행동했다.
의도?
명확하다.
바알 또한 서사시를 의식하고 있었다.
서사시가 감히 자신을 조롱하지 못하도록 그간 좌시해온 체통을 지켰다.
사람들이 자신을 ‘당연하게’ 두려워하길 바라지 않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도록’ 언행을 정돈했다.
효과가 있었다.
사람들의 공포심이 다시 짙어져갔다.
서사시가 바알을 폄훼하지 못하고 그리드를 숭배하지도 못한 채 정체됐다.
‘진심 망겜이다.’
그리드가 속으로 연신 욕설을 토했다.
바알이 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을 거라는 사실쯤이야 예상했었다.
하지만 서사시를.
즉, 시스템을 이용하는 수준까지 진화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아무리 초네임드급 보스라도 그렇지 이쯤 되면 유저의 권리를 침해하는 거 아닌가?
‘...아.’
그리드가 문득 떠올렸다.
자신을 비롯한 일부 플레이어에게 신탁과 축복을 내렸던 과거의 레베카를.
원하는 집단을 지목해 대규모 퀘스트를 뿌렸던 환국의 한울을.
‘잠재력’을 빌미로 나의 능력을 크게 상승시켜준 유일신 치우를.
그렇다.
절대자들은 이미 진즉부터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었다.
자신이 뜻하는 대로 사람들을, 세계를 움직였다.
너무 당연해서 눈치 채지 못했을 뿐이다.
역으로 플레이어 또한 스스로 퀘스트를 생성하는 식으로 시스템에 개입해왔다.
서사시가 그 궁극에 있는 권능인 것이고.
‘세계를 움직이는 건 나만의 권리가 아닌 거야.’
그리드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세계가 멈춘다.
서사시는 여전히 침묵 중이다.
바알의 모습을 묘사한 뒤로 잠자코 상황을 지켜봤다.
그것이 그리드를 위한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어쩌지 못했다.
바알의 포스가 워낙 대단했다.
함부로 서술했다간 도리어 그리드에게 해악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제1위 대악마.
지옥을 왜곡시키고 수중에 넣은 만악의 근원.
놈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난적이다.
“...”
자각하는 그리드의 눈빛이 변해갔다.
점차로 가까워지는 바알의 모습을 시야에 고정한 채 이어질 전투를 머릿속에 그렸다.
오직 나만이 이 세계의 주인공이라는 오만을, 오직 나만이 이 순간을 준비해왔다는 착각을 버렸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해진 세계에.
“그래, 그 눈빛이다. 나를 상대로는 필사적이어야 옳지.”
바알의 스산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입가에 번져가는 미소가 놈의 심정을 대변했다.
즐거워하고 있다.
정말로 순수하게.
스슥.
바알의 모습이 사라졌다.
여태껏 계단을 하나씩 지르밟은 걸음이 무색하게도, 놈은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수천 개의 계단을 뛰어넘고 그리드 앞에 도착했다.
꽈아아아아앙!!
그리드의 몸이 한참 멀리 날아가고 나서야 폭음이 울렸다.
바알이 올려친 어깨를 검으로 막아낸 반동이 그의 위치를 수백 미터 후방으로 바꿔놓았다.
“음.”
번헬리어가 콧김을 내뿜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침착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방금 그는 용안으로 보았다.
바알의 움직임에 맞춰 환영처럼 떠올랐던 자색의 육체를.
성문에 장식되어 있는 아수라의 머리와 닮았다.
바알이 아수라의 신체를 제 몸에 이식했다는 의미가 됐다.
“...”
번헬리어가 폴리모프를 사용했다.
거체를 버리고 흑발의 미남자로 변했다.
은밀하게 움직이기 위한 발판이었다.
한편 그리드는 극의 검무를 전개하고 있었다.
하단으로 파고들어온 바알의 전진을 멈추는 일격이었다.
‘지랄 났네.’
자칫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욕설을 간신히 삼킨다.
방금 바알의 기습을 당한 그는 전투가 예상보다 힘들어질 거란 사실을 직감했다.
수세에 몰린 바알이 윤회의 강으로 도주할 것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짠 게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피부가 조금 벗겨지는 걸로 끝났단 말이지?’
그리드가 바알의 어깨와 오른쪽 손목을 차례대로 훑어보았다.
방금 역천과 충돌했던 부위들이다.
그리드는 바알의 어깨를 역천으로 막아낼 때도, 바알의 진격을 극으로 저지할 때도 바알을 베어 죽일 작정이었다.
한데 베지 못했다.
바알의 어깨와 손목 둘 다 역천의 파괴력을 온전하게 감당했다.
환영처럼 떠오른 자색의 신체가 그리드의 검기와 조건부 검성의 권능을 억누른 여파였다.
역천의 순수한 공격력은 호신강기로 삼은 새카만 마력을 관통하는 과정에서 상당량 소실됐고, 결과적으로 바알의 단단한 살가죽은 역천의 파괴력을 쉽게 감당했다.
“야탄과는 다른 진정한 악신을 만들겠다고 하더니 네가 집어삼켜버릴 생각이었나?”
그대라는 호칭이 너로 바뀌었다.
그리드가 여유를 잃었다는 증거였다.
짧게 입을 여는 순간에도 긴장한 채 바알의 동태를 살피느라 가식을 부리지 못했다.
“새삼스럽군. 나의 분신들이 그랬듯이 잠시 빌렸을 뿐이다.”
지상에 오른 분신들조차 아수라의 신체 일부를 대동했을 정도다.
본신이라고 아수라의 신체를 다루지 못할 이유는 없다.
심지어 더 나은 형태로 다룰지언정 그게 당연했다.
꽈아앙!!
바알이 일자로 올려 찬 발차기가 그리드의 턱을 때렸다.
활성화시켜놨던 절대 방어가 깨지며 출혈을 일으킨 그리드의 몸이 다시 수백 미터 날아갔다. 이미 무너져 있던 대전의 천장과 가까워질 지경이다.
곧바로 뒤쫓은 바알이 수십 차례의 연격을 날렸다.
평생을 수련해온 무도가처럼 현란한 동작으로 그리드의 전신을 때리고, 베고, 붙잡아 던지길 반복하더니 급기야 땅에 꽂아버렸다.
“큭...”
수백 미터 상공에서부터 끌려와 지면에 얼굴을 처박힌 그리드가 신음했다.
그 꼴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지 웃던 바알이 눈살을 구겼다.
제 발목이 그리드의 손에 붙잡혔단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힘이 엄청났다. 즉시 뿌리치기 힘든 수준이었다.
‘근력의 신을 자처했어도 어울렸겠군.’
자신도 모르게 그런 감상을 품던 바알의 눈살이 한층 더 구겨졌다.
그리드가 흘린 신음이 사실은 실소였다는 걸 눈치 챈 것이다.
“잡았다, X새끼...”
서사시가 침묵하는 게 다행이었다.
덕분에 성깔대로 외친 그리드가 속이 다 후련해지는 걸 느꼈다.
어차피 방송국 카메라들은 멀리 있었다.
위치가 급격히 바뀌는 그리드와 바알을 뒤쫓지 못해서 그리드의 음성을 담지 못했다.
꽈아아앙!!
천지 뒤집기.
검신 비반마저 땅에 꽂은 전력이 있는 금나수가 그리드의 스탯에 영향을 받아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바알의 형태가 인간과 닮았다는 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본래라면 원초적인 CC기에 저항해야 할 초네임드 보스가 뒤집혀버린 것이다. 그리드와 똑같이 땅에 얼굴을 처박으며 쓰러졌다.
그 틈에 몸을 일으킨 그리드가 곧바로 역천을 내리 꽂았다.
까아아앙!!
극과 살을 기반으로 삼는 융합검무가 바알의 손톱과 얽혔다.
물리적인 법칙을 무시하고 움직이는 놈답게, 바알은 어떤 상황에서도 공격에 대응이 가능했다.
거의 누운 모습으로 그리드의 연속되는 공격을 맞받아쳤다.
몇 차례의 충돌 끝에 훼손 된 손톱을 재생시켜 복구한 바알이 히죽 웃었다.
“즐겁다. 역시 살아있다는 건 좋은 거야.”
대개 절대자간의 싸움이 그렇듯.
그리드와 바알의 전투 역시 본래는 제대로 성립되지 않았다.
서로의 궁극기를 허용하는 순간 전투를 지속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에 거의 순식간에 결판이 났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리드도, 바알도.
상대방의 압도적인 공격력을 견딜 만한 내구력을 갖춘 상태였다.
충분히, 마음껏 즐길 수 있단 의미다.
진정으로 신명이 난 바알을 그리드가 죽일 듯이 노려봤다.
역겹다.
타인을 쉽게 해치는 악마 새끼가.
삶에 감사를 느끼다니.
“너... 남들도 너와 같을 거라고 생각 못해본 거냐? 다른 사람들에게도 삶은 소중한 거다.”
“궤변이군.”
바알이 즉시 부정했다.
“유한한 삶은 무가치하다. 어차피 죽음으로 도달할 뿐인 삶에 어떤 의미가 있지? 차라리 빨리 죽어 지옥에 떨어져야 옳아. 이곳에 와야 비로소 가치를 찾을 수 있으니까.”
대화 성립 불가.
바알의 본질을 재차 상기한 그리드가 5융합 검무와 6융합 검무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과거 바알에게 몇 번의 죽음을 안겼던 기술들이 연달아 펼쳐졌다.
“...!”
바알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혔다.
쇄도해오는 칼날에 맺힌 검기와 신성, 그리고 권능이 아수라의 신체와 가까워질 때마다 흩뜨러졌지만 별 의미가 없던 까닭이다.
[크리티컬!]
[대상에게 79,554,405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크리티컬!]
[대상에게 120,623,8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301,889,777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676,244,05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검기, 신성, 권능.
다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드의 힘은 순수한 위력에 있었다.
플레이어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하는 스탯.
그 강력한 스탯을 증폭시키며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템빨.
스탯과 더불어 강력해진 무기 데미지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스킬.
스킬의 위력을 배가시키는 온갖 칭호들.
그리드는 순수하게 강력했다.
“...크악!”
급기야 바알이 비명을 질렀다.
드래곤 웨폰을 견디는 피부와 드래곤 아머를 꿰뚫는 손톱.
분신들의 경험과 지식을 기반으로 연성한 신체가 처참하게 박살난 여파였다.
라스트 보스?
그리드에겐 익숙하다.
어떤 지역이든 최종 보스쯤 되는 녀석들이 그리드의 앞길을 가로막곤 했으니까.
놈들의 최후는 대부분 비슷했다.
그리드의 딜 미터기를 확인하는 샌드백으로 전락한 끝에 잿빛으로 산화했다.
...그리고 잿빛의 종착지는 늘 바알이었다.
“...!?”
계속, 계속, 계속.
조금 더.
한 걸음만 더.
이를 악 문 채 바알을 베고, 찌르고, 갈라놓길 반복하던 그리드가 대번에 굳었다.
[제1위 대악마 바알이 낙룡극살파(落龍極殺派)를 면역합니다.]
황당한 알림창이 그렇게 만들었다.
검무의 흐름이 끊겨 잠시 드러난 그리드의 빈틈을 찌른 바알이 초고속 재생을 진행했다.
순식간에 완전하게 회복해선 갓 핸드들과 검극을 나누는 마검을 손끝으로 회수했다.
파스슥!
칠흑의 마검이 백열한다.
신살의 기운이다.
푸욱!
그리드의 심장에 새하얀 마검이 박혔다.
환호하던 시청자들을 거짓말처럼 침묵시키는 일격이었다.
“혹시 알고 있나?”
휘청거리는 그리드의 귓전에 바알의 음성이 스며들었다.
“나보다 네가 더 많은 존재를 죽여 왔다는 걸.”
그리드가 걸어온 길.
지금의 그리드를 만든 모든 여정이,
“놈들의 영혼을 찾아 지식과 정보를 흡수하고 연마하는 건 제법 귀찮은 일이었다만, 이렇게 되고 보니 꽤 보람이 있군.”
이 순간 처음으로 그리드의 발목을 붙잡았다.
제1위 대악마 바알.
만악의 근원이 지상의 신을 무릎 꿇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