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6권 - 17화
처벅.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늪이 발을 삼킨다. 순식간에 종아리까지 잠겼다.
“좀 많이 역겨운데.”
폰이 눈살을 구겼다. 늪에서 뽑아낸 그의 발목에 커다란 거머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피와 마력을 앗아가는 마물이다. 반투명한 외피 안쪽에서 꿈틀대는 파랗고 빨간 혈관이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꽤 아파요. 도트뎀을 무슨 퍼센트 비율로 주네. 방심하다간 마나 다 떨어질 듯.”
“유페미나는 마나 거의 무한 아닌가?”
“저 말고 님들요.”
체파르데아의 산란장은 커다란 동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진입 경로가 굉장히 협소해서 비행 마법의 사용이 불가능했고, 보행이 강제 됐는데 온통 늪지대라 골치였다. 이동 속도가 너무 느렸다.
특히 마법사라 체력과 근력이 낮은 유페미나가 늪지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늪에 빠진 발을 쉽게 뽑아내지 못하고 허리까지 잠기기 일쑤였다.
“네 마법으로 늪을 통째로 증발시킬 순 없나?”
“그것뿐이겠어요? 동굴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도 있죠. 하지만 그랬다간 적들이 즉시 이변을 감지할 거 아니에요.”
하스터의 손을 붙잡고 늪에서 끌어올려진 유페미나가 대답했다.
마음 같아선 동굴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싶은 눈치였다.
선두에서 묵묵히 걷던 메르세데스가 일행을 진정시켰다.
“고릴라도 아니고 조급해하지 마세요. 행군 속도가 느릴 걸 감안하고 계획을 짰기 때문에 시간은 충분합니다. 계획대로 은밀하게 잠입하는 게 중요해요.”
“네, 알고 있어요.”
최근 유독 고릴라에 집착하는 메르세데스였다.
일행은 그 이유를 알았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일단 정지.”
몇 시간의 고된 행군 끝에 목적지에 도착한 일행.
시야를 끝없이 넓히는 공동을 마주한 메르세데스가 선두에서 명령했다.
공동의 중심엔 사람의 몸통보다 몇 배는 큰 눈 수백수천 개가 꿈틀대고 있었다.
정확히는 눈처럼 생긴 알이다.
끈적거리는 체액에 휘감긴 체파르데아의 알이 심상찮은 마기를 흩뿌리는 자색 넝쿨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알에서 흘러내린 체액들이 이 늪지대를 형성한 건가.”
폰이 혀를 내두르는 사이.
“늪 아래로 넝쿨이 깔려있을 가능성이 높군요. 발밑을 한층 더 주의하세요.”
동굴의 천장과 벽면을 모조리 휘감고 있는 넝쿨의 규모를 살펴본 메르세데스가 경고했다.
지옥의 생물은 대부분 마물이다. 식물도 예외가 아니었다.
저 자색 넝쿨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여서 침입자의 사각을 노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일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페미나와 하스터는 플라이를 전개했고 폰은 백마를 꺼내 탑승했다.
협소한 장소를 벗어난 시점부터 늪지대는 더 이상 그들을 훼방 놓지 못했다.
메르세데스의 경고대로 침입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하는 넝쿨을 멀리서 식별하고 어렵지 않게 요격했다.
“쥐새끼들이 흙탕물을 기어 숨어들었구나. 하긴, 약자에게 자존심을 지킬 여유 따윈 없겠지.”
넝쿨을 요격하면서 발생한 소음에 누군가가 반응했다.
산란장을 옮기고 지켜온 악마.
이름은 헬가르릭이었다.
유라가 바알의 측근이라고 지목한 대상 중 하나다.
뭔가를 ‘옮긴다.’는 것이 특기라고 했다.
그래서 사전에 발각당하지 않으려고 애쓴 것이다.
기껏 찾아온 산란장을 옮길 틈을 주지 않으려고.
구구구구구구!
헬가르릭이 지나온 길목 뒤편에서 무수한 발소리가 울렸다.
놈이 이끄는 군단의 진군 소리다.
지축이 떨렸다. 천장과 벽면에 얽혀있는 자색 넝쿨들이 떨어질 듯 흔들렸다.
“하지만 산란장을 옮긴 보람도 없이 침입을 허용한 건 다소 충격인데... 데빌슬레이어 그 집요한 계집이 기어코 성과를 올린 게로군.”
체파르데아의 산란장.
이곳의 위치는 이미 아그너스와 베티에게 발각 됐었다.
하여 기껏 위치를 옮겼는데 또 다시 침입자가 찾아온 것이다.
한숨 쉰 헬가르릭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상관없다. 이번엔 내가 직접 이곳을 지키고 있으니까. 네놈들을 죽여 없애고 이곳을 표적으로 삼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데빌슬레이어에게 똑똑히 가르쳐주도록 하지.”
“유라 님을 언급하지 마세요.”
“...?”
“그 더러운 입에 그분의 이름을 담는 게 불쾌해서요.”
“...인간치고 상당히 괴팍하군. 그리드의 사도는 다 너와 같은가?”
헬가르릭이 혀를 내두르는 사이 군단이 도착했다.
놈의 뒤로 중무장한 악마 군단 수백이 도열하였는데 군기가 범상치 않았다. 마치 템빨제국의 기사들처럼 순식간에 진형을 구축하고 주인의 명령을 기다렸다.
“무장 상태도 꽤 훌륭한데? 저만한 병기와 갑옷을 어디서 구한 거지?”
“지상에 올라 약탈한 게 아닐까 싶군.”
폰과 하스터가 다소 놀란 반응을 보였다.
지옥.
지상과 비교해서 문명의 수준이 크게 떨어지는 원시적인 차원이다.
지상을 비교적 자유롭게 넘나드는 고위급 악마가 아닌 이상에야 복식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악마가 태반이었다.
애초에 대장장이도 1명인 세계에서 무엇을 바라겠나.
한데 헬가르릭과 놈의 군단은 지상의 귀족이 이끄는 사병들처럼 훌륭한 무장을 갖춘 것이다.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헬가르릭이 콧방귀 뀌었다.
“무지한 인간들아. 설마 네놈들은 지상의 문명이 지옥보다 뛰어나다고 믿어왔던 거냐. 그럴 리가 있나.”
부글부글!
헬가르릭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늪지대가 용암처럼 끓어오른다.
축구장을 몇 개나 붙여놓은 것처럼 넓은 동굴 전체가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저항 불가의 뜨거운 열기가 일행을 괴롭혔다.
“바알 님의 권능을 떠올려 봐라. 신보다 위대하신 그분께선 망자들의 지식과 기술을 포식하신다. 인간들의 문명 따위야 언제든지 따라잡고 발전시킬 수 있단 거다.”
‘확실히...’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아낸 폰이 공감했다.
애초에 지옥엔 거대한 성들이 존재한다.
대악마가 기거하는 성들.
지상에서도 보기 드문 엄청난 규모와 복잡한 구조를 지녔다.
지옥의 문명이 어떤 면에선 인간의 문명을 초월했다는 증거였다.
그렇다.
지옥의 문명은 발전하지 못한 게 아니다.
굳이 필요가 없어서, 혹은 오히려 필요에 의해서 억제됐을 뿐.
“네놈들의 습격은 진즉부터 예측하고 대비했다. 네놈들이 늪을 기어 잠입한 태도를 보면 나름 은밀하게 작전을 준비했다고 믿는 눈치다만, 착각이야. 도리어 함정에 빠진 격이지.”
허풍이 아니다.
군단의 숫자가 증명했다.
실시간으로 상황을 목격 중인 시청자들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
메르세데스가 이끄는 1파티는 물론이고 다른 대부분의 파티들이 작전 지역에서 적에게 둘러싸인 형국을 맞이하고 있었으니까.
지옥의 악마들은.
템빨단이 무엇을 노릴지 정확히 간파하고 있던 것이다.
명백한 위기였다.
“이거 잘하면...”
“...실패할 것 같은데?”
악마들의 대응이 너무 좋다.
시청자들이 불안에 휩싸였다.
서사시가 상황을 서술하고 있었다.
[신과 신의 사자들이 강림한 지옥의 어귀마다 더럽고 흉악한 계략이 도사리고 있었다.]
딱히 부정적인 서술은 아니다.
다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할 뿐이다.
그럼에도 파장이 컸다.
지상의 인간들이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다. 무의식에 뿌리내린 공포에 영향을 받았다.
[인류가 잠시 잊었던 공포를 상기합니다.]
기껏 옅어지게 만들었던 인류의 공포가 재차 싹트는 그때였다.
“예상했다.”
그리드가 입을 열었다.
마침 바알의 성 앞에 도착한 시점이었다.
갑작스러운 혼잣말에 반트너와 마안족 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크, 지슈카, 반트너, 마안족 왕으로 구성 된 5번 파티.
우선 그리드와 함께 활동하는 그룹이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들의 시선을 의식한 그리드가 다소 민망함을 느끼면서도 말을 이었다.
“악마란, 한없이 약해 지옥의 어둠에 기생하는 무리다. 감히 우리에게 대적하지 못하고 흉계를 쓸 것을, 나는 미리 예측했다.”
그리드의 발언이 서사시에 기록 됐다.
서사시의 흐름에 대응하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어느덧 27번째 서사시를 써본 그리드는 자신이 어느 타이밍에 말하고 행동해야 서사시에 영향을 주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여전히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마안족 왕의 안경을 벗겼다.
동시에.
쿠와아아아아아앙!!
파괴 광선이 쏘아졌다.
바알 성의 성문을 장식하고 있는 거대한 머리.
조각상 따위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아수라의 머리를 정확히 표적으로 삼았다.
점처럼 보일 정도로 거리가 굉장히 멀었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는 광선의 위력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
“아그그그그그극!!”
다소 웃기는 신음소리가 천둥처럼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파괴광선에 주둥이를 짓눌린 아수라의 머리가 흘리는 신음이었다.
악마들이 혼비백산했다.
“습격이다! 인간들이 도착했다!!”
“저 광선은 뭐냐...! 아수라의 머리가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
혼비백산하는 악마들.
그들을 빤히 내려 보던 그리드가 마안족 왕을 반트너에게 넘겼다.
지슈카는 이미 화살을 쏘고 있었다.
룬어에 휘감긴 화살이었다.
안 그래도 사악한 존재들에게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파마의 화살이 지크의 도움을 받아 몇 배나 강력해졌다.
쿠콰콰콰콰콰콰콰쾅!!
지슈카가 쏜 화살세례가 혼란에 빠진 악마들을 폭격한다.
굳건하게 닫혀있던 바알 성의 높은 성문이 순식간에 허물어져갔다.
그 모든 과정이 서사시로 서술 됐다.
사람들의 공포심이 처음보다 오히려 한층 더 옅어졌다.
만족한 그리드가 지슈카에게 눈짓했다.
“다녀올게.”
“응, 무슨 일이 있어도 뒤를 지킬 테니까 앞만 봐. 모조리 다 부숴버려.”
“그래.”
언제나처럼 밝고 활력이 넘치는 지슈카.
그녀를 보고 기분이 좋아진 그리드가 웃고 말았다.
적진 한복판.
심지어 제1위 대악마 바알의 성을 눈앞에 두고 짓는 미소다.
시사하는 바가 컸다.
사람들의 그리드를 향한 믿음이 한층 더 깊어졌고, 바알을 향한 공포는 옅어졌다.
마침 각 파티의 수장들이 그리드를 돕고 있었다.
쏴아아아아아...
산란장의 메르세데스는 서리여왕의 심장을 발동시켰다.
지독한 한기가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늪지대를 순식간에 얼려버리며 헬가르릭을 당황시켰다.
미르는 붉은 살덩이가 소환한 전대의 전설을 즉시 베어버렸고, 브라함은 바알 성으로 지원을 가고 있던 대악마를 뒤쫓아 한껏 농락한 뒤 죽였다.
그 모든 과정이 인류에게 전달 됐다.
잠입이 들키지 않기 위해 잠시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했던 번헬리어도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날개를 활짝 펼쳤다.
지슈카의 화살 폭격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악마들의 머리 위를 지나 그리드와 함께 바알 성 내부로 진입했다.
이제 인류는 용기를 얻는 수준을 넘어서 기세가 등등해졌다.
잠시뿐이었다.
“미련한 천상의 신들조차 네가 번헬리어와 협력할 것을 예측했을 거다.”
[제1위 대악마 바알이 출현하였습니다.]
어두운 대전.
높디높은 왕좌에 앉은 바알이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그야말로 마왕, 마신의 위용이었다.
부서진 천장 위로 뻗어진 새카만 하늘에 뇌운이 가득했다.
한참이나 떨어진 장소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브라함이 눈살을 구겼다.
‘마법.’
심지어 긴 시간에 걸쳐서 준비한 저주 마법이다. 깊이가 엄청났다.
화르륵!
브라함이 드물게 서둘렀다. 지팡이를 뽑아 신성을 방출했다. 저 먼 하늘을 침잠하고 있는 불길한 저주 마법을 즉시 분석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서둘렀다.
아슬아슬하게 늦었다.
정말로 한 끗 차.
거리가 엄청나게 멀어서 실패했다.
꽈르르르르르르르릉!!
뇌운의 형상을 한 바알의 저주 마법이 벼락을 토했다.
그리드가 아닌 번헬리어를 노리고 떨어졌다.
마법 따위, 본래라면 당연하게 저항할 고룡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사슬처럼 엮이며 다가오는 벼락을 의지와 달리 순순하게 허락해버렸다. 그 큰 몸을 꽁꽁 묶였다.
“이런 치욕을...!”
번헬리어가 몸부림치며 포효했다.
여전히 왕좌에 등을 기대고 앉아 턱을 괸 바알이 히죽 웃었다.
“악룡 번헬리어. 고룡 중에서 유일하게 저급한 평가를 받는 이유가 있구나. 이미 한 번 지옥에서 내게 무력화된 경험이 있으면서 뭘 새삼스레 지껄이는 거냐. 귀여울 지경이다.”
엄청난 대사건이었다.
세계가 급격히 혼란에 빠졌다.
의외로 철저한 바알의 준비성에 당황한 건 그리드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넋을 잃었을 정도다.
그가 정신을 차리게 만든 건 한 줄의 알림창이었다.
[인류가 잠시 잊었던 공포를 상기합니다.]
결국.
“...이조차도 예상했다.”
서둘러 평정을 되찾은 그리드가 입을 열었다.
“호오...? 예상했다?”
바알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반면 번헬리어의 얼굴은 썩어 들어갔다.
물론 드래곤의 형상을 하고 있는지라 표정을 읽는 게 힘들었지만, 왠지 그런 것 같았다.
“번헬리어가 무용해질 것을 뻔히 알고도 동행한 것은 무슨 오만이냐? 내가 저놈을 어찌 요리해서 네놈을 수세에 몰아넣을지 알고?”
스릉.
그리드가 역천을 뽑았다. 동료들의 장비를 한 번씩 업그레이드해주고 남은 고대의 주문서를 모조리 쏟아 부어 +6까지 강화시킨 역천이다. 주황색 신성에 은은한 오러가 더해져서 우주의 은하처럼 신비로운 기운을 내뿜었다.
“오만이 아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번헬리어 때문에 더욱 큰 압박감을 느낀 그리드가 대충 대답했다.
뭐라고 딱히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말이 아닌 행동에 집중했다.
번헬리어의 몸을 압박하고 있는 벼락의 사슬을 역천으로 베었다.
‘끊어낼 수 있을까?’
확신은 없었다.
그리드가 봐도 방금 발동한 저주 마법의 깊이는 엄청났다.
바알이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마법을 물리적인 힘으로 끊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드래곤 웨폰의 위력과 조건부 검성의 권능에 기대를 걸어봤다.
설령 못 베도 그만이다.
최대한 태연하게 넘기고 서둘러서 다음 수를 생각하자...
“멍청한 짓을...”
그리드의 의도를 읽은 바알이 콧방귀 뀌다가 말문을 닫았다.
서걱.
그리드가 대충 휘두른 검에 마법의 사슬이 끊어진 까닭이다.
작은 새장 안에 갇힌 새처럼 쭈그리고 있던 번헬리어가 자유를 되찾았다.
‘이게 된다고? 강화의 힘인가?’
물론 운도 따랐겠지만 아무튼 미친 대박이었다.
환호를 간신히 억누른 그리드가 잠시 넋이 나간 바알과 번헬리어의 시선 속에서 태연하게 말했다.
“바알, 그대가 어떤 흉계를 꾸미던 내겐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한껏 내려 보는 말투.
바알이 앉은 높은 왕좌를 무색하게 만드는 태도다.
[사람들의 공포심이 크게 옅어집니다.]
세계가 그리드의 뜻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