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744화 (1,743/1,794)

템빨 86권 - 14화

하스터.

가상현실이 상용화되기 이전의 시대에서 가장 위대한 프로게이머로 꼽혔던 인물.

그의 삶은 롤러코스터로 비유되곤 했다.

워낙 굴곡이 커서였다.

Satisfy 출시 이전과 이후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렸다.

퇴물의 대명사가 되기 직전까지 갔을 정도다.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Satisfy에서 활약하지 못한 그의 평가는 쭉 하락세였다.

템빨단에 가입하기 이전까지의 이야기다.

템빨단원이 된 이후, 하스터의 평가는 다시 상승세를 탔다

급기야 대중은 위대한 게이머가 완벽하게 부활했다고 평가했다.

그만큼 많은 활약을 펼쳤다.

특히 고대 거인족의 도시를 지키고 있던 망가진 가디언들을 휴렌트와 단둘이 휩쓸었던 모습은 대중의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됐다.

무슨 수로 가상현실에 적응해서 제2의 전성기를 되찾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리드가 훈련을 도와준 덕분이다.’고 인터뷰하는 등, 성격도 무척 겸손해서 대표적인 호감캐릭터로 자리매김했다.

하스터 본인도 인기를 실감하고 있었다.

자신을 동경하는 사람들을 재차 실망시키지 않도록 매사에 신중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목격자가 많은 현장에서 하스터의 언행은 몹시 조심스러웠다. 고풍스러운 드라마 속 배우처럼 표정과 말투를 조율했다.

“드디어 찾았구려.”

맹인 검객 카벨론.

검성 뮐러의 제자를 자처하다가 정작 뮐러가 등장한 이후 행방불명됐던 초월자.

여러모로 수상쩍은 인물이다. 사실상 경계 대상이었다.

하지만 바알에게 사냥 당하도록 놔둘 수도 없었다.

의심하는 것과 별개로 반드시 신변을 확보해야 했다.

템빨그림자단 소속 어쌔신 100명을 운용할 권한을 얻은 하스터는 지난 보름 동안 필사적으로 카벨론의 행방을 추적했고, 이 순간 드디어 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웅성웅성.

해양도시 중심가의 식당.

슈퍼스타의 등장에 술렁이는 사람들 틈에서,

“제국의 눈과 귀가 대륙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더니 과언이 아니었군. 제국 전체가 살아 숨 쉬는 드래곤마냥 작용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어.”

식탁에 앉은 맹인은 태연히 식사하며 말했다.

두꺼운 붕대로 양쪽 눈을 칭칭 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식당 주변을 둘러싼 어쌔신들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식별했다.

붕대에 가려진 그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마다 템빨그림자단의 어쌔신들이 숨죽이고 있었다.

마치 시선을 마주친 듯한 착각을 느낀 어쌔신들이 다소 긴장했다.

하스터가 곧바로 용건을 밝혔다.

“라인하르트로 모시겠소. 순전히 귀하의 안전을 위해서니 곡해 말고 협조 바라오.”

“안전? 이것 때문인가?”

피식 웃은 카벨론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자색의 천 조각.

아니, 가죽이다.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바알을 베고 얻은 가죽이다. 제1위 대악마라는 것도 별 거 없더군.”

“분신이니까. 지상에 출몰 중인 바알은 특정 자아의 파편을 영혼으로 삼아 가짜 육신을 덧씌운 것에 불과하오. 본신과 달리 몹시 허약하지.”

“아무튼 그딴 하찮은 분신을 올려 보낼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이 말 아닌가? 나 한 몸쯤이야 스스로 건사할 수 있으니 꺼져라.”

“뮐러 님께서 귀하를 만나고 싶다 하시더군.”

“...”

당당하게 지껄이던 카벨론이 입을 닫았다.

눈을 포함한 얼굴의 절반이 붕대로 휘감겨있는 까닭에 표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최소한 태연한 표정은 아닐 듯했다.

“맹인 검객도, 카벨론도 모르겠다면서.”

하스터가 전체적인 상황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주변 지형지물의 상태가 어떤지, 템빨그림자단의 포지션은 예정대로 유지 중인지, 어떤 패시브 스킬이 발동해서 특수한 상황을 알리고 있진 않은지, 물약의 수량은 충분한지 등등.

카벨론이 날뛸 것을 예측하고 전투를 대비했다.

무조건 이기고 제압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다.

목격자가 너무 많았다.

기껏 되찾은 명예를 위해서라도, 명예를 되찾아준 그리드와 템빨단을 위해서라도, 하스터는 패배해선 안 됐다.

“흠...”

뮐러의 제자를 자처해온 자.

정작 뮐러가 살아 돌아오자 홀연히 자취를 감췄던 맹인 검객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가 굉장히 예민하군.”

카벨론이 중얼거렸다.

숨죽이고 선 사람들이 침 넘기는 소리, 옷깃의 스침, 뒤로 물러나는 발걸음, 바닥에 끌리는 의자나 식탁의 소음, 심지어 창문을 통해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에 이르기까지.

하스터가 그 모든 ‘소리’에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즉시 출수할 수 있도록 상시 준비하는 느낌인데... 너 또한 나처럼 맹인인가?”

“...”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이곳에 들어올 때 네 보폭이 어땠는지 똑똑히 기억한다. 뭐냐, 설마 맹인 행세하는 변태라도 되는 거냐?”

카벨론이 짓궂게 웃었다.

순간.

좌우로 시원하게 벌어지며 흰 이를 드러낸 그의 입처럼 식당의 한쪽 벽면이 반으로 갈라졌다.

카벨론의 발도술이 만든 결과다.

무너진 벽면 너머로 뻗어진 대로 곳곳에서 미약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간신히 삼키는 신음.

상처를 입은 와중에도 위치를 발각당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템빨그림자단 소속 어쌔신들이 흘리는 소리였다.

“꺄아아악!!”

이번 사태와 무관한 시민들의 비명소리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뒤따랐다.

갑자기 반으로 갈라진 식당을 보고 놀라서 까무러치는 사람이 많았다.

하스터가 주변에 있는 플레이어들에게 부탁했다.

“시민들을 피신시켜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 예!”

현장에서 템빨단원은 하스터가 유일했다.

그의 부탁을 받은 플레이어들은 단순히 우연히 이곳에 있던 제3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하나 같이 하스터의 부탁대로 움직였다.

하스터가 등에 업고 있는 템빨단의 위명에 짓눌린 것도 있었지만 하스터를 존중하는 마음이 컸다.

“목을 노렸는데 단 한 명도 베이지 않았군... 정말 괴물 같은 나라란 말이지. 인재가 기형적으로 많아. 내가 동대륙으로 떠날 무렵쯤만 해도 사하란 제국이야말로 역대 최강의 국가라고 평가 받곤 했었는데 당대의 제국과 비교하면 격차가 너무 커.”

감탄하는 것치고 카벨론은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그럴 수밖에.

건물 내부에서, 보이지도 않는 각도에 있는 외부의 적들을, 그것도 수십에서 수백 미터 거리를 유지한 채 엄폐물에 숨은 적들을 발도 한 번으로 베어버린 놈이다.

심지어 무고한 시민은 한 명도 베지 않고 정확히 어쌔신들만 노렸다.

가히 천재지변급의 괴물인 것이다.

현장의 모두가 눈치 챘다.

만약 이대로 하스터가 저 괴물과 싸우게 된다면.

하스터가 필패할 것임을 알았다.

단 한 명.

하스터 본인만 제외하고.

‘청각 싸움이다.’

방금.

카벨론은 어쌔신들의 호흡을 통해서 그들의 위치를 식별했다.

어쌔신들의 호흡이 평범한 사람은 코앞에서도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가늘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것이다.

하지만 하스터에겐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하스터가 전투에 앞서서 어쌔신들의 포지션을 점검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스터 또한 어쌔신들의 호흡을 감지할 수 있어서였다.

하스터가 여전히 FPS계의 전설로 숭배 받는 이유는 일반인이 상상하지 못할 사운드 플레이를 구사하기 때문이었으니까.

하물며 Satisfy에서 하스터는 초월의 격을 쌓아 인외의 경지에 오른 육신을 지니고 있다.

그의 청력은 카벨론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

“...”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주보고 선 두 사내.

서로의 청력을 경계하며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그들의 손이 검파 위에 달라붙어 있다. 처음부터 함께 조각 된 마냥.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쨍그랑!

비스듬히 기운 천장에 위태롭게 매달려있던 샹들리에가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 조각났다.

신호였다.

카벨론의 청각이 소음에 집중되는 사이 하스터가 보폭을 내딛었다.

<바람의 춤>을 추면서다.

자신과 타인의 마나를 자유자재로 컨트롤해 온갖 수단으로 활용하는 붉은 현자의 스킬 중 하나였다.

자연풍과 구분할 수 없는 바람이 하스터가 아닌 카벨론의 마나를 자원으로 발현됐다. 처참하게 어지럽혀진 식당 내부를 무척 자연스럽게 환기시켜 카벨론이 의식하지 못하도록 유도했다.

하스터의 발걸음에선 소리가 사라져 있었다.

은은한 바람이 집어삼켰다.

마치 페이커의 암행과 닮았다고, 외부에서 상황을 주시 중인 어쌔신들은 생각하며 감탄했다.

“...”

하스터의 눈동자에 비치는 카벨론의 모습이 급격히 커졌다.

호흡마저 멈춘 하스터가 카벨론을 손쉽게 자신의 공격 범위 안에 넣은 것이다.

힘줄이 꿈틀거리는 손에 쥐어진 드래곤 웨폰이 카벨론의 어깨로 꽂혀 들어갔다.

한 번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힌 후 마나를 진탕시켜 저항할 수 없는 스턴을 유도, 일거에 제압할 요량이었다.

순간.

“목을 노렸어야지.”

카벨론의 음성이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바람의 춤이 만든 미약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감싼 붕대를 풀어놓고 있었다.

두 눈이 드러났다.

눈꺼풀에 짙은 검흔이 아로새겨져 있는. 아주 오래 전에 입은 상처 같았다.

처참했지만, 의외로 멀쩡하게 뜨였다.

명확한 초점을 지닌 눈동자가 경악한 하스터의 얼굴을 담는다.

‘보석?’

의안 계열의 아티팩트인가?

이런 정보는 없었...

푸우우욱!!

당황하는 하스터의 칼이 카벨론의 어깨를 베었고, 반면 카벨론의 칼은 하스터의 목을 꿰뚫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갈라진 승부.

만약 하스터가 카벨론의 목을 노렸었다면.

최소 동귀어진을 이뤘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승부가 결판나는 순간이었다.

“저런...!”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돌아와 상황을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템빨그림자단의 어쌔신은 이미 전원 몸을 날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이미 늦었지만 하스터를 구출하기 위함이었다.

불필요한 도움이었다.

“...허.”

카벨론이 탄식했다.

용장.

하스터가 계승한 칠악성의 힘.

그것은 조건부 최강의 방어 스킬이다.

자원을 소모하고 2분 내에 피해를 입을 경우, 그것이 ‘스킬’과 ‘마법’으로 인한 피해라면 데미지를 면역한다.

우습게도 일반 공격을 대상으론 아무런 효력도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지만, 방금 카벨론이 날린 카운터는 ‘스킬’로 구분되는 검술이었다.

그러므로 하스터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정녕 미친 나라다. 고작 나 하나 잡겠다고 네놈만한 괴물을 한낱 사냥개로 부리다니. 너, 그쯤 되면 뮐러와도 호각지세 아니냐? 뮐러의 검도 너를 쉽게 베진 못할 듯한데.”

드래곤 웨폰의 위력을 감당 못하고 주저앉은 카벨론이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결과에 승복한 것이다.

저항할 의지를 상실하고 되는대로 지껄였다.

파장이 컸다.

누가 봐도 초월자인 네임드 NPC가 하스터를 검성 뮐러와 비견된다고 평가한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했지만, 플레이어의 신분으로 절대자가 된 그리드라는 선례가 있었던 까닭에 사람들은 마냥 헛소리로 치부하지 못했다.

하물며 하스터 아닌가.

레전드 중의 레전드인 프로게이머.

한때 ‘그리드의 후예’로 전직한 거 아니냐는 오해를 샀을 정도로 그리드와 친분이 두텁기도 했다. 무려 그리드의 갓 핸드를 수족처럼 다루는 모습이 포착 된 적도 있었다.

그리드가 아무에게나 갓 핸드를 맡길 리도 없었으니, 사람들은 하스터가 정말로 절대자에 근접해가고 있는 거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

하스터는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사실상 운빨이 승리 지분의 90퍼센트를 차지한 상황이라 굉장히 민망했다.

하지만 처음 말했던 대로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야하는 위계에 있었다.

카벨론의 억측을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카벨론이 그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방어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소리를 없애고, 타인의 마나를 역이용하는 능력을 통틀어서 고평가했다.

아무튼 어느 정도 실력이 반영 됐단 말이다.

“글쎄. 뮐러 님께서 그리드 신을 섬기기로 결정하신 이상 내가 그분과 칼을 나눌 일은 없겠지.”

“뭐? 그 뮐러가 타인을 섬긴다고? 잠시 의탁했던 게 아니었나? 그럴 리가 없다.”

“못 믿겠으면 직접 가서 확인해보시오. 어서 라인하르트로 돌아갑시다.”

카벨론을 포박한 하스터가 귀환 주문서를 사용했다.

어쌔신들도 하나둘씩 그 뒤를 따랐다.

식당 주인에게 변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기껏 지원 요청 보내셔놓고 혼자서 일을 처리하신 겁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군...”

하스터가 턱수염을 긁적였다.

자랑스러운 업적을 이뤄놓고 민망해하는 그를 다소 의아하게 바라보던 라우엘이 이내 피식 웃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에겐 부진만이 있을 뿐, 몰락은 없다죠. 존경합니다.”

카벨론의 확보는 힘든 난제였다.

행방을 찾는 것부터 힘들었고 정작 찾아낸다고 해도 제압하기가 쉽지 않은 상대였으니까.

카벨론은 크라우젤도 인정하는 실력자였다.

하스터에게 카벨론을 발견했다는 연락을 받은 라우엘이 그 즉시 최고의 실력자들을 파견했던 이유다.

단독으로 카벨론을 제압한 하스터의 성과는 라우엘의 기대를 아득히 넘어서는 것이었다.

마침 도착한 검성 뮐러가 구석에 앉아있는 카벨론을 발견하고 두 눈을 치켜떴다.

“유적 사냥꾼? 내 제자를 사칭하고 다녔다는 자가 자네였나? 이럴 수가. 설마 자네가 여태껏 살아있었을 줄은...”

“뮐러 네놈도, 적야의 대도 그 늙은이도 살아있는 마당에 나 혼자 죽으란 법은 없지.”

콧방귀 뀌는 카벨론.

그의 모습을 재차 확인한 뮐러가 라우엘에게 말했다.

“자네들 엄청난 보물을 건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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