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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42화 (1,741/1,794)

템빨 86권 - 12화

‘긴장 같은 것도 할 줄 아네.’

라인하르트로 돌아온 그리드의 표정이 밝았다.

마리로즈와 데이트하면서 느낀 감정들이 여러모로 기분 좋았던 까닭이다.

마리로즈가 내민 손.

처음에 맞잡았을 땐 얼음처럼 차갑던 그녀의 손은 점차로 따스하게 변해갔다. 급기야 땀에 젖어 끈적거렸다. 기분 좋은 끈적임이었다.

그녀 또한 나처럼 긴장하고 있단 사실을 알게 돼서 묘한 동질감이 형성됐다.

어색해하고 긴장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하게 구는 모습이 꽤 순수하게 다가왔다.

범접할 수 없는 절대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똑같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게다가 그녀의 체액에선 좋은 향기가 났다.

예전에 입술을 빼앗겼을 때부터 알게 된 사실이다.

피비린내 사이로 아찔한 고통과 쾌락이 몰려왔던 키스는 여전히 그리드의 뇌리에 강렬히 각인되어 있었다.

손에서 꽃향기가 난다...

마리로즈의 땀이 밴 손에 코를 묻고 킁킁 냄새 맡던 그리드가 이내 다짐했다.

‘바알을 죽이고 돌아오면 자주 만나러 가도록 하자.’

마리로즈를 괴롭히는 고뇌의 원천은 바알에게 있다.

그녀는 자신이 바알을 적대하는 행위 자체가 어머니를 위한 일이 된다고 생각했고, 거기에 대해서 어떤 불안을 느끼는 눈치였다.

불안의 원인은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리드가 바알 토벌에 성공하면, 마리로즈의 번뇌도 자연히 끝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마리로즈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를 되찾았다.

‘베리아체의 딸’이 아닌 ‘나’로서 세상을 마주할 수 있게 됐다.

그리드가 바알을 없애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기쁜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아로였다.

예쁘장한 소녀를 목말 태운 채다.

피아로와 베니야루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 엘프.

인간에 비해서 성장속도가 느렸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육체적인 관점에서의 이야기다. 피아로의 딸은 앳된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강력한 마력을 체내에 간직하고 있었다.

인간과 엘프의 종족 효과를 겸비한 탓인지 각종 스킬과 마법, 능력치의 성장력이 일반적인 범주를 초월하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신님!”

부친의 몸에서 냉큼 뛰어내린 소녀가 배꼽 위에 손을 얹고 공손히 인사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 그리드가 빙그레 웃어주었다.

“잘 지냈니, 세실? 몇 달 못 본 사이에 부쩍 컸구나. 부모님 말씀 잘 듣고 밥도 열심히 먹었나보네.”

“이, 일 센티미터밖에 안 자랐는데...”

소녀 세실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안 그래도 또래보다 키가 작아 콤플렉스인 그녀에게 그리드의 인사치레가 다소 상처로 다가왔다.

“...일 센티미터나 자랐으니까 많이 자란 거지. 대단한 거야. 뭐든지 한 걸음이 위대한 법이란다.”

“그런가요?”

“그럼. 나도 너희 아버지께 배웠어.”

이젠 너무 먼 과거처럼 느껴지는 옛날이야기.

에트날 왕국의 공작으로 임명됐을 당시 그리드는 피아로와 함께 사막을 횡단하며 검술을 배웠었다.

그때 피아로가 늘 말했다.

넌 참으로 재능이 없지만 아무튼 어제보다 조금은 나아졌음을 위안으로 삼으라고.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나아간 걸 다행으로 여기라고.

사실상 비꼰 것에 가까웠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싶어서, 그리드는 과거의 피아로에게 다소 동정심마저 느꼈다.

“크흠...”

옛 기억을 떠올린 피아로가 민망해서 헛기침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감히 그리드를 가르치려했다는 것도, 그리드의 재능에 탄식했던 것도 모두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리드에겐 추억이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도 좋을 것 같았다.

그때의 나는, 소중한 이들을 잃어본 경험 없이 오직 찬란한 미래만을 꿈꿨었으니까.

지옥의 악마들과 천상의 신들에 대해선 꿈에도 몰랐던 시절이기도 했다.

하루하루 근심 없이 행복할 수 있었다.

‘아니, 돌아가도 좋다는 건 취소다.’

그 시절의 피아로는 오직 복수를 위해 연명했었다.

깊은 분노와 슬픔으로 점철 된 그의 마음은 넝마였다.

기껏 벗들을 되찾고 새로운 가족까지 얻은 지금의 피아로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 고통 받는 모습 따위 보고 싶지 않다.

“정말요? 아빠가 신님께 가르침을 주셨어요?”

“세실, 주군께선 바쁘시니 그만...”

“그럼. 네 아버지가 나의 스승이셨는걸.”

“우와아아!!”

“...”

결국 피아로가 입을 다물었다.

차근차근 과거를 회상하는 그리드의 얼굴이 태양처럼 밝아서, 그를 바라보는 딸아이의 눈빛이 별처럼 반짝여서.

차마 두 사람을 훼방 놓을 수가 없었다. 잠자코 두 사람의 시간을 지켜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과거를 통틀어 생각해 봐도.

그리드가 근심걱정 하나 없는 사람처럼 저토록 밝은 모습을 보인 경우는 몹시 드물었다는 사실을.

최초로 악마를 마주쳐 절망하기 전에도.

천상의 신들에게 실망하고 분노하기 전에도.

인류는 죽어서도 안식을 얻지 못한단 사실을 알고 슬퍼하기 전에도.

그리드는 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치열하게 살았었다.

실제로 항상 위협을 받았다.

사막의 몬스터들에게, 적국과 조국에게, 종교에게, 브라함에게, 사하란 제국과 여러 사회의 인간들에게.

‘한시도 편했던 적이 없기에 지금의 당신이 되셨군요.’

고행.

그리드가 걸어온 길을 요약해본 피아로는 최근의 자신을 떠올렸다.

너무 편하지 않았나 싶었다.

농부가 되고, 벗들을 되찾고, 오명을 벗고, 가족을 얻게 된 뒤로.

삶에 만족해 버렸다.

분노에 매몰되어 오직 복수를 위해 살았던 시절과 비교하면 치열하지가 못했다.

그러므로 뒤쳐진 것이다.

‘...아니, 그럴 리 없다.’

피아로가 고개를 저었다.

삶에 만족했다고 해서 발전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런 논리면 사람은 불행해야만 비로소 발전할 수 있다는 게 됐으니까.

애초에 그리드도 불행하지 않았다.

그의 고행은 행복한 삶을 지키기 위한 발판이었지, 불행을 견디기 위한 발악이 아니었다.

“...허.”

피아로의 마음에 여태껏 없던 것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집의 형태였다.

부인과 딸이 기다리고 있는 집.

집 주위론 논밭이 펼쳐졌다.

거대한 성벽에 둘러싸인 논밭이다.

성벽 너머로는 우뚝 선 그리드의 성이 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피아로가 지켜야할 것들이었다.

피아로를 살아가게 만드는 원천이었다.

자각할수록 마음 속 풍경이 또렷해졌다.

지켜야한다는 책임감이 하염없이 커져갔다.

마음이 단단해졌고, 육신의 근육들이 마음에 호응하듯 꿈틀거리며 단단하게 조여졌다.

“...농기구를 다시 만들어야겠군.”

어느새 시간이 이만큼 지난 거지?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피아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땅거미가 내렸다.

그리드의 등에 엎인 딸아이가 작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피아로에게 그리드가 주먹을 내밀었다.

“축하한다.”

심상세계의 개방.

그리드는 일상 속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룬 피아로가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피아로의 가슴도 뛰었다.

그리드와 주먹을 맞부딪치며 밝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평범한 인간.

태생부터 남다른 그리드의 사도 중에서 피아로는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자연경을 습득한 덕분에 잠재력은 크게 밀리지 않았지만 성장속도가 확연히 뒤쳐졌다.

비록 느릴지언정.

꾸준히 발전하며 아슬아슬하게 격차를 따라잡아간다.

그리드는 지금의 피아로가 과거의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늘 믿고 있어.”

“...부응하겠나이다.”

***

“세실 양도 슬슬 성장시켜야하는 거 아닙니까? 로드 황태자의 모험에 동참시키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황태자 곁이면 안전도 충분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피아로 부녀의 뒷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라우엘이 말했다.

그리드가 진저리쳤다.

“됐어. 자식교육은 부모한테 맡겨야지. 우리가 고사리 손이 필요할 정도로 힘든 입장도 아닌데 왜 그러냐?”

“힘든 입장이긴 합니다. 고사리 손을 빌릴 정도까진 아니지만요.”

“...음, 전력이 부족하긴 하지.”

제국 전체로 놓고 봤을 때, 그리드가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은 무려 수천 만 단위였다.

하지만 지옥 침공에 대동할 수 있는 병력은 많아봐야 백 단위에 불과했다.

지옥에 입장하려면 몇 가지 전제가 붙기 때문이다.

우선 헬가오를 수차례 레이드하고 지옥의 디버프를 무시하는 칭호를 얻었을 것.

다음은 바알에게 ‘원 킬’당하지 않을 정도의 능력치를 보유하고 있을 것.

솔직히 대부분의 인간은 바알은커녕 평범한 대악마의 공세도 한 차례 버티기 힘든 실정이다.

지옥에서의 대악마는 강력했으니까.

그리드야 대악마고 나발이고 쉽게 썰어버릴 수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리드의 입장이다.

아무튼 바알 토벌전에 참가하는 인원이 수십 단위로 압축 된 이유는, 위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동시에 ‘죽어도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그리드의 엄포 때문이었다.

괜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고, 사람이 죽을수록 강해지는 바알의 특성을 좌시해서도 안 됐다.

결국 죽어도 부활하는 사도들과 플레이어만 지옥 원정에 참가할 수 있다.

그 외에는 ‘자력으로 죽음을 모면할 수 있는 강자’ 즉, 비반 정도를 추가할 수 있었고.

그 수십 명으로 바알과 수십 마리의 대악마들, 또한 놈들이 거느릴 수백 만 마리의 마물들을 감당한다는 건 여러모로 벅찬 일이었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힘들었다.

새로운 인재를 빨리빨리 육성하길 바라는 라우엘의 심정을 그리드도 십분 이해했다.

“너무 초조해할 건 없어. 우리가 지옥을 침공하는 순간 레라지에와 엘리고스가 호응해줄 거고 그들도 꽤 많은 군단을 거느리고 있으니까. 애초에 내가 바알을 죽이는 동안 나머지 인원은 대악마들과 마물의 진격만 저지해주면 돼.”

그리드가 원하는 상황은 바알과의 1대1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1대2.

물론 이쪽이 2다.

번헬리어에 탑승한 채일 테니까.

“바알을 죽일 수 있는 건 확실한 거겠죠?”

라우엘이 오랫동안 품어온 걱정을 간신히 입 밖으로 꺼냈다.

어쩌면 최후가 될 수도 있는 전쟁.

Satisfy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투가 될 이번 작전은 라우엘이 아닌 그리드가 계획한 것이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라우엘에게 의존했던 그리드가 가장 중요한 시점에 이르러서 자신의 판단을 우선시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오직 그리드만이 바알을 죽일 수 있다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 일전에도 말했듯이 서사시로 인류의 공포심을 지우면 바알의 목숨도 유한해질 거야.”

“하지만 만약 실패하면...”

“실패할 리 없어. 이건 바알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데 통하지 않는다? 그럼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바알을 죽일 수 없다는 뜻이 되는 거고, 인류의 삶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돼.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데, 죽어서 바알의 노리개가 되는 엔딩밖에 없으면 그 삶에 어떤 의미가 있지?”

오직 절망뿐인 세상은 사람들을 포기하게 만들 것이다.

플레이어들도 하나둘씩 떠날 테지.

S.A그룹이 확률 조작 등을 통해 사람들을 괴롭히는 변태일진 몰라도, 그런 엔딩을 바라지는 않을 거라고 그리드는 장담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노파심에 한 번 더 여쭤봤을 뿐이죠.”

천재 라우엘의 생각도 같았다.

그러므로 그리드는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주군께선 서사시의 마검사가 됐던 시점부터 용사로 선택 받으셨던 거네요.”

서사시.

바알을 죽이기 위한 열쇠다.

물론 그런 안배가 서사시 하나일 리는 없다.

서사시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시스템이 다수 존재할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그걸 손에 넣은 플레이어들이 아직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단계에 있거나, 자신이 바알을 죽일 열쇠를 손에 넣었다는 사실을 상상도 못한 채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게 문제였다.

“맞아. 만약 내가 신이 되지 않았어도 언젠간 반드시 바알과 싸웠을 거다.”

평범한 초월자였든, 용살자나 신살자 같은 절대자가 되었든.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리드는 바알에게 강렬한 이끌림을 느꼈다.

어차피 족쳐야할 놈, 어서 만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직은 조금 이르다.

정말로 조금.

흥분을 억누르기 위해 대장간으로 발걸음을 돌린 그리드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아, 심상세계를 개방하는 조건 말인데. 이번 원정에 참가하는 사람들 정도 되면 전부 다 조건은 충족하고 있을 거다. 다만 어떤 계기를 통해서 확실하게 자각해야 시스템이 호응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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