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6권 - 11화
필드 보스의 위계는 보스 몬스터 중 최하위다. 네임드 보스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던전 보스나 정예 보스보다 약했다.
당연히 드롭 아이템의 수준도 낮다.
대신 리스폰 주기가 짧다는 장점이 있어서, 안정적인 자원 수급과 업적 쌓기용으로 적합한 사냥감이었다.
물론 ‘숲의 수호자’ 같은 예외도 존재한다.
호수의 거대 환상체 또한 예외에 속했다.
아주 특별한 이레귤러.
특정 주기에만 정예 보스로 진화하는 숲의 수호자와 달리, 거대 환상체는 태생부터 강력했다.
특히 레이드에 도전하는 플레이어의 수준이 높을수록 강해지는 특성을 지녀서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만큼 주는 보상도 엄청났다.
‘진짜 무조건 12장씩 드롭하네.’
오늘로 3번째 호수의 거대 환상체를 레이드한 그리드가 흡족한 미소를 그렸다.
매번 반드시 12장의 고대 강화 주문서를 드롭하는 환상체에게 애정마저 느꼈다.
잠시뿐이다.
‘아니 염병, 또 장신구 강화 주문서가 제일 많이 드롭 됐어?’
이번엔 그나마 6장에 그쳤지만 4일 전엔 8장이었다...
우연이 아닌 정해진 확률 같았다.
가장 많은 수량이 필요한 방어구 주문서가 가장 적게 드롭되고 있다는 점이 명백한 증거였다.
역시 S.A그룹이야말로 만악의 근원이다...
애초에 왜곡 된 지옥을 만든 것도 S.A그룹 아닌가?
사람들 괴롭히는 걸 목적으로 Satisfy를 창조하고 운영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심마저 들었다.
주문서 뭉치를 쥔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리드의 귓전에 비반의 음성이 스며들었다.
“오늘도 검의 위력을 제대로 시험하지 못했군. 어서 지옥에 가서 바알을 베어보고 싶네만, 지옥 원정을 이대로 계속 미뤄도 되는 겐가?”
“바알의 표적이 될 만한 초월자들과 전설들의 신변을 전부 확보한 상태입니다. 바알이 더 이상 수작을 부릴 수도 없으니 시간을 끄는 편이 도리어 나아요. 지루하시겠지만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
그리드는 꾸준히 고대의 강화 주문서를, 크라우젤은 표식을 수급하는 중이다.
지옥 원정대를 강하게 만들 수단이 차고도 넘치는 상황인 것이다.
어떤 변수가 생기면 이야기가 달라질 테지만, 아직까지 시간은 바알이 아닌 인류의 편이었다.
애초에 대륙 각지에 흩어져있는 초월자와 전설들을 라인하르트로 집결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바알의 수색 능력이 상상 이상으로 뛰어나니까. 호위 대상들을 최소 템빨계의 영역 안까진 불러들여야 해.’
호위 대상들에게도 각자의 삶이 있고, 초월자란 족속들은 워낙 성격이 괴팍한 탓에 그들을 강제로 집결시키기 힘들다는 점이 문제지만... 아무튼 필요한 절차다. 통제하기 힘들다고 대충했다가 다 된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아, 이거 받으시고요.”
그리드가 비반에게 강화 주문서 한 장을 건네주었다.
손을 떨지 않도록 노력하면서다.
비반이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
곧 고개를 끄덕인 그가 주문서를 건네받았다.
“고맙네. 잘 쓰겠네.”
“저야말로 늘 감사드리죠. 나흘마다 찾아오셔서 고생해주시는데 고작 1장밖에 못 챙겨드려서 죄송합니다.”
“자네가 챙겨야 할 식솔이 어디 한 둘인가? 이해하네.”
“전에 드린 주문서 2장은 아직 사용하지 않으신 거죠? 괜찮으시면 제가 대신 발라드릴까요? 제가 이래 뵈도 행운이 좀 따라는 편이라.”
헛소리가 아니다.
그리드의 행운 스탯은 굉장히 높았다. 도박으로 먹고 사는 계열의 직업군 플레이어들도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거기에 추가로 강화 확률을 높여주는 패시브 스킬도 보유했다. 파그마의 후예가 되고부터 쭉 갖고 있던 스킬이다.
“...음, 괜찮네.”
그리드의 검과 갑옷을 힐끔 살펴본 비반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드가 울컥했다.
“이건 유독 운이 나빠서 그랬던 겁니다.”
현재 역천과 염룡의 갑옷은 각 +1강이다.
처음으로 환상체를 레이드했던 날 얻은 강화 주문서로 강화를 시도했는데 딱 1강만 붙었다.
높은 행운 스탯이 무색했다.
단순히 운이 없다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가 추측하기론 장비 자체의 등급이 높을수록 강화 확률도 낮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비반 님보단 제가 강화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장담하죠.”
“알겠네. 나중에 부탁하지. 그보다 말일세.”
비반의 관심사는 영 다른 곳에 있는 듯했다.
강화와 관련 된 주제는 빠르게 넘기고 의외의 말을 꺼냈다.
“나흘 뒤엔 하야테 님과 마리로즈를 호출해보는 게 어떤가?”
“...?”
“나는 그들이 높은 확률로 나보다 강할 거라고 보네. 환상체의 수준을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릴 수 있을 거란 말일세.”
호수의 환상체는 가장 강한 적들의 모습을 복제하고 혼합한다.
현재 이곳에선 그리드와 비반이 가장 강하므로 두 사람의 모습을 복제, 혼합했지만 만약 둘보다 강한 사람을 마주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고강해질 테고 드롭하는 아이템의 수준도 높아질 가능성이 있었다.
혹시 또 아나?
12장이 아니라 20장의 주문서를 드롭할지도.
“음...”
하지만 그리드는 영 내키지 않았다.
2가지 이유다.
첫째, 하야테가 지상에서 사적인 이유로 활동하는 것을 드래곤들이 달가워할까?
미식룡과 염룡이 그리드에게 미약한 호의 비슷한 것을 보였다고는 하나.
아무튼 그리드와 하야테는 별개다.
드래곤 슬레이어를 경계하거나 욕망하는 드래곤의 입장상 하야테의 활동이 많아질수록 좌시하기 힘들 것이었다.
중요한 시점에서 괜한 분란을 조성할 우려가 있단 말이다.
둘째, 마리로즈의 입장을 고려해야한다.
그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던 바 있다.
그리드와 혼인해서 저주를 풀 수 있는 상황임에도 굳이 일정을 뒤로 미뤘다.
아무래도 자신의 앞날에 대해서 고뇌하는 눈치였다.
‘어머니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삶이 과연 자신의 삶인가에 대해서 의문을 품은 것 같았지.’
아마 그리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긴 세월 동안 품어온 의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역할에 적극적이지 않고 온갖 사건들을 방관해왔겠지.
그녀를 향한 브라함의 증오가 설명한다.
그녀가 크레이슐러에게 순순히 봉인 당했던 사건 또한 같은 맥락이고.
‘어쩌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놓인 그녀에게 주문서 노가다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잠시 후.
“듣고 보니 자네의 말이 맞군.”
내키지 않는다는 그리드에게 이유를 설명 들은 비반이 납득했다.
“애초에 좋은 생각이 아니었어. 마리로즈가 나보다 강하단 사실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됐을 때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확실히.
호수의 거대 환상체는 자연히 사람들의 ‘서열’을 정리한다.
자부심이 강하거나 호승심이 있는 사람은 환상체가 정하는 서열을 쉬이 납득 못하고 소동을 피울 확률이 있었다.
‘템빨단도 한동안 난리였겠군.’
템빨단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pvp 승급전이 최근 몇 달 동안 크게 활성화 됐던 이유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면서, 그리드는 외출할 채비를 갖췄다.
뱀파이어의 도시.
마리로즈가 기거하는 성에 찾아갈 계획이었다.
안 그래도 번뇌에 빠진 그녀를 고독하게 놔둬선 안 된다는 의무감을 느껴서다.
‘이래 뵈도 약혼자니까.’
앞으론 서로에게 의지해야 할 관계다.
더군다나 마리로즈는 그리드를 몇 번이나 위기에서 구했었다.
은혜도 모르는 짐승이 아닌 이상에야 그리드가 그녀를 외면해선 안 됐다.
“그럼 나흘 뒤에 다시 뵙겠습니다.”
비반과 작별한 그리드가 워프 게이트에 올라탔다.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마리로즈의 성과 가장 가까운 도시.
산업도시 레이단으로 1차적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
웅성웅성.
온갖 공업시설이 모인 레이단은 시끌벅적했다.
드래곤의 침공을 받아 한 차례 무너졌던 도시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기가 넘쳤다.
단, 조금만 자세히 살펴봐도 사람들 모두 조심하는 게 보였다.
일이 바빠 서둘러 움직이는 와중에도 일정한 경로를 따라서만 이동했고 곳곳에 선 망루 위 병사들은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언제 또 갑자기 드래곤이 나타나지 않을까 경계하는 것이다.
저쯤 되면 조심성이 몸에 뱄다.
‘그럴 만도 하지.’
최초에는 제논의 습격을 받고, 이후에는 제논을 추격해온 드래곤들의 싸움에 휩쓸리고, 또 최근에는 염룡 트라우카의 출현을 목도해버린 도시.
레이단에게 드래곤이란 신화나 전설로만 접해온 괴물이 아니다.
몇 차례나 체험한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실제 피해자와 유족이 많았다. 레이단의 주민 상당수가 PTSD에 시달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템빨단도 대책을 세웠다.
주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해서 주둔시켰다.
또한 꼭 필요한 기술자들을 제외한 주민들을 다른 도시로 이주시킬 계획을 짰다.
하지만 주민들이 도시를 떠나는 걸 원치 않았다.
본래 사람이라는 게 그렇다.
고향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흐음.”
괜한 소란이 생길까.
투명후드짚업을 써서 모습을 가린 채 도시를 살펴보던 그리드가 피식 웃었다. 기분 좋은 미소였다.
아스카와 블랙테디 듀오를 목격한 까닭이다.
제논이 레이단을 습격했을 당시.
주민들을 지켜준 인연으로 템빨단에 가입하게 된 그들은 레이단 근처에 서식하는 환상체를 사냥하는 게 좋다는 핑계로 레이단을 주거지로 선택한 바 있다.
누가 봐도 거짓말인데 말이다.
최상위 랭커인 아스카와 블랙테디에게 레이단 근처에 있는 사냥터는 다소 수준 미달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레이단에 머무르기를 고집했다.
‘주민들과 함께 목숨을 바쳐 싸웠던 과정에서 정이 든 거겠지.’
거기에 추가로.
“드래곤 개새끼들 오늘도 안 오는 건가?”
“아가씨, 말씀을 좀 삼가십시오. 드래곤의 청력은 대륙 전역에 미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아니, 당하기만 하고 끝나면 열 받잖아? 다음에 만나면 딜 한 번은 넣고 죽을 자신 있어. 꼭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겠다고.”
“사람들이 휩쓸리면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머리 좋은 거 빼면 시체인 라우엘 놈이 그 정도 대책도 안 세워놨을 것 같아?”
...아스카의 자존심이 워낙 세기도 했다.
크라우젤에게 듣기로, 그녀가 여태껏 군소리 없이 굴복한 대상은 그리드가 유일할 거라고 했다.
‘크라우젤한테 족히 10번은 지고도 여전히 눈만 마주치면 덤빈댔지.’
지난 수 년 동안.
크라우젤과 아스카는 하이랭커답게 우연히 마주친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때마다 아스카는 크라우젤에게 도전했고, 패배했으며, 또 다시 덤비길 반복했다고.
그녀의 도전은 늘 죽어야 멈췄다고 한다.
크라우젤은 적당히 제압만 하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아스카가 고작 게임에서 뒤지는 게 대수냐며 죽을 때까지 덤벼대는 통에 내심 질렸다고 고백했었다.
‘싸울 땐 귀신같은 크라우젤을 질리게 만드는 집념...’
역시 그녀 또한 천사 후보로 둘만 하다.
저벅.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새 그리드는 마리로즈의 성에 도착했다.
깊고 어두운 복도.
지옥의 풍경을 담은 그림들을 지난 끝에 그는 관 놓인 대전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낭군이 먼저 나를 찾아올 줄은 몰랐구나.”
고혹적인 음성이 그리드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스르륵.
어느새 관 위로 드리운 인영.
다리를 꼬고 앉아 그리드를 내려 보는 마리로즈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오늘이야말로 나를 잉태시킬 셈이냐.”
“...그런 건 혼인 후에.”
얼굴을 붉힌 그리드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를 만들기 위해선 정기를 모아야한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을지, 단순히 걱정이 되어서 찾아왔습니다.”
“걱정...?”
영문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마리로즈가 이내 싱긋 웃었다.
초승달처럼 휘는 두 눈이 어떤 요술이라도 부리는 것 같았다.
그리드의 심장이 터질 듯이 폭발했으니까.
“그래, 그렇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마리로즈가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그리드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바닥에 끌릴 때마다 스륵스륵 소리를 내는 드레스가 그녀의 흰 살결처럼 부드러울 것만 같았다.
“나 또한 낭군을 걱정하고 있었단다. 곧 지옥으로 떠날 예정이지?”
“네.”
“노파심에 재차 말하지만 아모락트를 조심하렴.”
“아모락트는... 바알의 수중에 떨어질 뻔한 베리아체의 영혼을 중간에 가로채는 등 바알을 훼방 놓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게도 동맹을 요청했을 정도라 진심으로 바알과 적대할 눈치던데요.”
그리드는 아모락트와 협력할 계획도 짜고 있었다.
물론 신뢰할 생각은 없었다. 잠시나마 한 배를 탄다는 느낌에 불과했다.
마리로즈는 그조차도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그녀가 낭군을 위해 목숨을 바칠지언정 협력해선 안 된단다. 작은 틈도 보이지 마렴. 분쟁의 대악마는 낭군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위험하니까.”
“...예.”
그리드는 긴 말하지 않았다.
애초에 아모락트와의 관계를 설명한 이유도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였지, 마리로즈의 말에 반박하려던 게 아니었다.
마리로즈가 흡족하다는 듯이 웃었다.
“후훗, 낭군이 뻔한 위험에 다가가는 사실을 알면서도 함께하지 못하는 나를 너무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여러모로 생각할 것이 많다.
자신의 손으로 바알을 죽인다는 건 즉 어머니의 염원을 이루는 것.
왠지 그래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근거는 없다.
본능적인 무언가다.
그리드에게 일일이 설명하진 않았다.
그녀가 그리드와 나누고 싶은 건 사랑일 뿐, 고민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타인과 어떤 문제를 두고 논의하는 일 자체가 그녀에겐 낯설었다. 떠올리기 힘든 개념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성을 구경시켜주지 않겠습니까?”
“...이 캄캄한 성에서 무엇을 보겠다고.”
그리드의 제안이 마리로즈의 눈을 잠시 동그랗게 만들었다.
드물게 당황한 기색이 그녀의 고운 얼굴에 스쳤다. 찰나지간이었다.
곧 여유로운 미소를 되찾은 그녀가 그리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아가 되고 싶지 않다면 잡으렴.”
이날.
그리드는 마리로즈와 함께 고요하고 캄캄한 성을 산책했다.
의외로 평온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