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6권 - 10화
지난 나흘.
템빨단이 호위 대상으로 삼은 초월자와 전설들은 대부분 안전한 장소로 피신을 마쳤다.
반면 템빨단이 파악하지 못한 극히 소수의 초월자는 바알에게 목숨을 빼앗겼고 그때마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오늘도 그랬다.
한 명의 초월자가 목숨을 잃었다.
그 과정에서 도시 하나가 박살이 났다.
“방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동대륙, 초국 도시의 한 객잔.
점소이로 일하던 밝은 청년이 사람들 앞에서 처참하게 죽었다.
갑자기 난입한 바알에 의해서다.
객잔의 규모가 워낙 컸던 탓에 목격자가 많았다.
식사를 해결하거나 스태미나를 회복하기 위해 객잔을 방문했던 플레이어 상당수가 바알의 출현을 목격했다.
이젠 하다하다 제1위 대악마가 밥 먹으러 식당을 찾아오는구나.
황당한 상황을 섣불리 이해하지 못하던 플레이어들은 곧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평범한 청년인 줄 알았던 점소이가 잠시나마 바알과 호각지세를 펼치다가 살해당하는 광경이었다.
바알이 별도로 운용하는 자색의 투명한 손이 특히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마치 그리드의 갓 핸드처럼 스스로 움직인 그것은, 점소이의 기세를 순식간에 앗아가 버렸다.
근처에 있던 플레이어들도 마나가 순식간에 고갈되는 현상을 체험했다.
자원의 활용을 금하는 손.
스킬이나 마법을 사용함에 있어서 반드시 자원이 필요한 Satisfy에서 바알의 새로운 무기는 가히 사기적인 권능을 발휘했다.
그 누구도 바알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나마 그리드는 괜찮지 않을까요? 그리드는 스킬보다 템빨을 위시하니까요.
-대표적인 편견이죠. 그리드가 상시 운용하는 스킬이 남들보다 배는 많습니다. 보스를 잡을 때는 늘 검무에 의존해왔고요.
-맞아요. 그리드에게 템빨이라고 하는 건 그리드를 잘 모르는 겁니다. 스킬빨, 스탯빨, 템빨을 죄다 갖춘 인물이니.
-그러므로 더더욱 그리드가 남들보다 유리한 입장인 건 맞아요. 스킬이 봉쇄된다고 해도 스탯과 아이템은 남아있으니까. 단지 그것만으로 바알과 싸워서 이길 수 있냐면 그건 또 아니겠지만...
세계 각국의 방송사들이 긴급 토론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바알의 전투 영상을 송출하며 이번 사태의 원인과 해결책을 논의했다.
그 과정에서 그리드의 이름이 자연히 언급 됐다.
직접 지상에 강림해 강자들을 찾아 죽이는 바알의 행보를 통해 제2의 인마대전을 예측한 전문가들.
그들은 짧았던 평화가 곧 끝날 거라고 경고하며 그리드와 템빨단에게 최대한 협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파장이 컸다.
템빨단으로 플레이어들의 문의가 쏟아졌다.
악마들과 싸울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냐면서, 자신들도 돕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랭커가 아님에도 그랬다.
인마대전 당시엔 마냥 두려워하고 혼란해했던 사람들이 어느덧 성장해서 도움을 주려하는 것이다.
“저들이 나보다 낫군.”
이벨린이 혈기왕성한 사람들의 행렬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두 눈이 퀭했다.
패기로 똘똘 뭉쳤던 젊은 시절의 눈빛과는 전혀 달랐다.
템빨단의 미래라고 평가 받으며 승승장구했던 시절과, 망캐가 되어 벽에 가로막혀버린 지금은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의욕마저 상실한 건 아니지?”
누군가가 불쑥 물었다.
“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무력감을 느끼는 이유는 노력에 비해 얻는 성과가 적어서지, 의욕을 잃어서가 아니...”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하던 이벨린이 문득 입을 닫았다.
곁으로 다가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사내.
그리드였다.
“혀, 형이 여긴 웬 일이에요?”
“선물 주려고 왔다. 자, 받아.”
그리드가 이벨린에게 한 자루의 검을 건네주었다.
플람베르그.
물결을 이루는 칼날을 지닌 검이다.
통한의 가시와 닮았지만 특이하게도 칼날의 색이 붉었다.
재료로 사용 된 금속이 염룡 트라우카의 비늘이었으니까.
‘드래곤 웨폰...!’
아이템 정보를 살펴보는 이벨린의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저, 이 검 진짜로 잘 다룰 자신이 있어요.”
이벨린이 자신감을 내비쳤다.
드래곤 웨폰의 공격력이 다른 신화 무기보다 2배 가까이 강력해서?
틀렸다.
이벨린이 자신감을 보이는 이유는 무기의 위력에 의존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 아니었다.
약소 브레스.
그는 검에 내장 된 광역 마법에 주목했다.
공격 대상에게 ‘생명력에 비례하는 피해’를 입히는 이벨린에게 있어서 한꺼번에 다수의 적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건 엄청난 메리트였으니까.
그리드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반드시 이벨린을 천사로 임명하고 지옥 원정의 주축 중 하나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벨린이 성장을 잘못해서 망캐가 됐다?
그리드가 생각할 땐 틀린 말이었다.
이벨린이 일반적인 검사보다 못한 점은 딱 하나.
네임드급 이상의 NPC나 몬스터를 상대로 무력하다는 점 하나뿐이다.
생명력 비례 데미지에 저항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존재에게 이벨린은 오히려 카운터로 작용할 만했다.
양학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한단 의미다.
그리고 Satisfy는 팀 게임이다. 다양한 역할군이 필요했고 이벨린의 가치는 몹시 높았다.
“자, 일단 이것부터 입어.”
그리드가 이벨린에게 3개의 방어구를 건네줬다.
셋 다 신화 등급의 아이템이었는데 성능이 압도적이진 않았다.
착용 제한을 낮추기 위해 기능을 조절한 까닭이다.
“네가 내 첫 번째 천사다.”
3개의 신화 아이템을 소유하고 있을 것.
템빨계의 천사가 되기 위한 조건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몹시 까다롭다.
하지만 그리드는 예외였다.
신화 아이템쯤이야 손쉽게 만드는 지금의 그리드에게 있어서 특정 대상을 천사로 임명하는 건 무척 간단한 일이었다.
[유일신 그리드가 플레이어 ‘이벨린’을 템빨계의 천사로 임명합니다.]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다.
번쩍!
이벨린의 몸이 주황색 빛에 휩싸였다.
그리드의 신성을 품은 것이다.
웅성웅성.
각종 문의를 위해 라인하르트를 방문했던 사람들.
광장에 가득 모인 인파가 빛으로 물든 궁전을 목격하고 술렁인다.
플레이어가 임명한 플레이어 천사의 탄생.
템빨계가 아스가르드와 동급의 차원으로 발전해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뜻 깊은 순간이었다.
“뭔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느낌인데.”
감격한 템빨단원들이 미소 짓는 그때.
[이벨린은 ‘양학의 천사’입니다.]
“...”
이어진 월드 메시지가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아니, 진짜 왜 그러세요? 정 그런 느낌의 칭호를 주고 싶었으면 학살로 줄 것이지 양학이 뭡니까?
라우엘이 그리드에게 곧바로 귓속말을 보냈다. 그리드의 무성의한 태도를 맹렬히 비판했다.
그리드는 억울했다.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안 된대. 내가 볼 땐 미카엘 때문인 것 같아.
과거 그리드에게 패배하고 루비에게 소멸 당했던 제3위 대천사 미카엘.
놈이 바로 학살의 대천사였다.
그 탓인지 ‘학살’이라는 칭호는 수여할 수 없다고 시스템이 못 박았다.
하여 그리드는 차선책으로 양학이라는 칭호를 수여한 것이다.
애초에 이벨린에게 학살의 칭호를 주려고 했던 이유도 양학을 잘한다는 점을 고려했던 거니까.
-아무튼 이벨린이 불쌍하군요.
-좋아하는데 뭘.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까칠한 줄 아냐?
자꾸 투덜거리는 라우엘을 잠시 차단한 그리드가 ‘천사의 갑옷’을 펼쳐보고 있는 이벨린에게 말했다.
“그 검, 사실은 실패작에 가까워. 고룡의 비늘을 쓰고도 고작 약소 브레스밖에 재현하지 못했다는 게 증거지.”
약소 브레스는 하위룡의 비늘로 만든 아이템에도 활성화는 스킬이다.
이벨린의 드래곤 웨폰에는 분명한 결함이 있었다.
“하지만 결함이 생긴 이유가 특별해. 구조 자체가 보통의 검과 다르다. 칸과 헥세타이아가 설계 단계부터 궁리했지.”
그리드가 이벨린에게 <플라리안의 눈>을 건넸다.
아이템의 숨겨진 기능을 이벨린에게 직접 확인해보라는 배려였다.
이벨린이 플라리안의 눈을 사용해서 검을 감정했다.
그리고 두 눈을 부릅떴다.
“이거...”
웅웅.
이벨린이 플람베르그에 검기를 주입하자 물결 형상의 칼날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힘으로 검기를 진동시켜 예기의 범위를 확장하고 흩뿌리는 검.
스스로를 검으로 벼려갔던 비반의 이야기를 접한 칸과 헥세타이아가 영감을 얻고 만든 기능이다.
쉽게 말해서, 이벨린의 검은 스플래쉬 데미지를 발생시켰다.
평타가 광역 공격으로 적용된단 말이다.
“...바알이 얼마나 많은 마물을 소환하든, 제가 다 쓸어버릴게요. 양학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그리드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벨린은 정확히 눈치 챘다.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겠노라 선언했다.
그리드를 미소 짓게 만드는 태도였다.
***
“정말이군. 표식의 재료가 가득해.”
뇌래의 언덕.
온통 노란 풍경 속에 떠다니는 흰색 나비들을 살펴본 사백이 히죽 웃었다. 새카만 두 눈에 탐욕을 가득 담은 채다.
“내 말만 들으면 손해를 보는 법이 없다고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소?”
황길동이 우쭐댔다.
봇짐에서 새로이 꺼낸 짚신을 신으면서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족히 10켤레의 짚신을 갈아 신었을 거다. 그만큼 길이 험했다.
“짚신을 고수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멀찍이서 황길동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크라우젤이 질문했다.
노검마가 설명해주었다.
“짚신을 신어야 발소리를 제대로 숨길 수 있다더군. 분신술을 쓴 직후에 내딛는 첫 걸음에서 발소리를 흘렸다간 본체의 위치를 간파당할 우려가 커서 조심하는 눈치일세.”
“그렇군요.”
여기까지 오는 길에, 크라우젤 또한 황길동의 분신술을 몇 차례나 목격했다.
본체와 분신의 구분이 유독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이유가 있던 것이다.
‘하지만 신발을 비롯해 무장 상태가 너무 간소해. 방어력은 사실상 포기했다고 봐야 무방해 보이는군.’
황길동이 몸을 사리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매번 싸움이 날 때마다 노검마를 전위에 세우고 사라졌던 황길동의 모습을 떠올린 크라우젤이 노검마에게 측은지심을 품는 그때였다.
“한데 네놈, 표식의 재료가 구름나비라는 사실을 무슨 수로 알아낸 거지?”
도사 사백이 으르렁거렸다.
황길동을 노려보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적의를 넘어서는 살의가 담겨서 당장 적으로 돌변해 죽일 기세였다.
황길동이 손사래 쳤다.
“내가 이래 뵈도 활빈당의 당주요. 아는 것이 많아야 옳다 보니 당신이 만들어온 표식에 대해서도 꽤나 조사했지. 어떤 다른 의도는 없었소이다.”
“믿기 힘들다. 네놈 또한 표식의 제조법을 노리는 거 아니냐?”
“내가 노린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잖소? 어떻게 만드는 건지 물어보면 대답해줄 거요?”
“만드는 모습을 염탐할 셈이겠지.”
“여기서 안 만들면 그만 아니오? 그런 식으로 의심하면 한도 끝도 없... 어이쿠!”
개판이 따로 없다. 도사 사백이 황길동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태껏 몇 번째인지 세기도 힘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샛노란 언덕의 풍경을 감상하며 질겅질겅 육포를 씹는 노검마와 달리 크라우젤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사백 님.”
“말리지 마시오. 저놈이 건들거리며 말하는 꼴을 내 더 이상 좌시하지 않...”
“표식 말입니다. 이곳에 표식의 재료가 충분한 거라면 20장 정도만 우선 만들어주실 수 없겠습니까?”
“...뭐?”
크라우젤의 무위를 목격한 뒤로 예의를 갖춰온 사백이 눈살을 찌푸렸다.
“합당한 대가는 지불하겠습니다.”
“내 작품에 가치를 매기겠다? 거만하군. 억만 금을 줘도 싫다.”
사백의 말이 급기야 짧아졌다.
표식은 그의 가치를 결정 짓는 시그니처다. 섣불리 거래의 도구로 써먹었다간 자신의 가치마저 떨어뜨릴 우려가 있었다.
하여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 크라우젤은 노력해야만 했다.
“인류를 위해서입니다.”
“내 알 바인가?”
“20장이면 됩니다. 그리드도 기뻐할 테고요.”
“내게 그대가 섬기는 신을 기쁘게 만들 의무 따위 없다.”
“제게 목숨을 빚지지 않으셨습니까? 은혜를 갚는다고 생각해주십시오.”
“...치졸한.”
“저를 치졸하게 만든 건 당신입니다.”
크라우젤이 끝까지 사백을 몰아붙였다.
동료들에게 도움이 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결국 사백도 백기를 드는 수밖에 없었다.
“좋다. 대신 조건이 있다. 황길동의 눈과 귀를 가려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크라우젤이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노검마와 나란히 선 황길동은 이쪽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황길동 님, 잠시 저와 함께 자리를 비켜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소.”
흔쾌히 대답하는 황길동.
그를 보는 노검마의 표정이 불편했다.
황길동의 혼잣말을 들은 까닭이다.
“여기까지 전부 다 계획대로군.”
‘...이거 백퍼센트 분신이다.’
노검마가 장담하건데, 오늘 이후로 표식의 제작법이 유출 될 것이다.
어쩌면 조만간 템빨국의 연금술시설에서 생산을 시작하지 않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