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6권 - 9화
<고대의 장신구 강화 주문서>
대상 아이템을 최소 1에서 최대 3까지 강화합니다.
강화 실패 확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재 보유 수량:6
‘하필이면 효율이 가장 낮은 주문서가 제일 많이 나와서는.’
그리드는 사기적인 장신구 또한 다수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보통 사기라고 불리는 장신구들은 기본 능력치가 높아서가 아니라 옵션 효과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템빨 왕관.
그리드가 엘리자베스와 협력해서 만들었던 그 레전드리급 장신구도 기본 방어력은 33밖에 되지 않는다.
다만 각종 스탯과 저항력을 올려주고, ‘착용자를 응시하는 대상 전부’에게 ‘현혹’이라는 CC기를 걸어주기 때문에 가치가 높은 것이었다.
‘물론 장신구도 강화 단위가 3이 될 때마다 옵션 효과가 강화되긴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장신구를 강화하는 것보단 당연히 무기와 방어구를 강화하는 게 훨씬 더 이득이다.
그리드의 무기와 방어구는 무려 드래곤 웨폰과 드래곤 아머였으니까.
기본 능력치가 원체 높은 까닭에 강화 수치가 하나 오를 때마다 상승하는 능력치의 폭이 무지막지했다.
‘기왕이면 무기 강화 주문서와 방어구 강화 주문서가 가장 많이 나오는 게 좋았을 텐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그리드가 라우엘에게 질문했다.
“여태까지 이곳의 환상체는 레이드하지 못했던 건가?”
만약 템빨단이 호수의 환상체를 이미 레이드 했었다면.
고대의 강화 주문서가 드롭됐다는 소식이 그리드에게 가장 먼저 전달됐을 것이다.
하지만 여태껏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아니요. 나흘 간격으로 꾸준히 레이드했습니다. 다만 난이도에 비해 드롭 아이템의 가치는 평범해서 극검님은 늘 삽질하는 것 같다고 투덜거리셨죠.”
“그런데 이번엔 고대의 주문서가 드롭됐다라...”
“환상체가 복제하는 대상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드롭 아이템의 가치도 덩달아 상승한 것 같네요.”
이번 환상체는 무려 유일신과 검신을 복제했다.
필시 역대 최강 필드 보스의 면모를 선보였고, 위용에 어울리는 아이템을 드롭한 셈이다.
비록 한 방에 죽기는 했지만...
“나흘에 한 번씩 리스폰 되는 거지?”
“네.”
“그럼 비반 님,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고 앞으로 나흘마다 이곳에서 뵙도록 하죠.”
잠잠한 호수를 바라보며 라우엘과 대화하던 그리드가 불쑥 비반을 지목했다.
마안족 왕이 뜨악 놀랐다.
저만한 괴물에게 사적인 이유로 오라 가라 명령하다니...
사달이 벌어질 것만 같아서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헥세타이아 역시 내심 긴장했다.
그들의 염려와 달리.
“알겠네. 새벽 일찍부터 와서 대기하겠네.”
비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그리드의 입지다.
***
‘운이 오지게 없지 않은 이상 8일에 1번씩 무기나 방어구 하나를 풀강하는 게 가능하단 거네.’
말이 그렇다는 거다.
실제로 10강화 아이템을 우선적으로 만들 생각은 없다.
하나의 아이템을 10강화하는 것보다 여러 개의 아이템을 조금씩 강화하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이었으니까.
강화 수치가 높을수록 능력치 상승폭이 커진다지만, 드래곤 웨폰과 아머의 기본 능력치가 너무 높다는 점을 고려해야했다.
‘내 아이템 하나 풀로 강화하는 것보단 사도들하고 비반의 아이템까지 주문서 1장씩 발라주는 게 낫지. 풀강은 그 이후에 시도하고.’
캡슐에서 나온 영우가 TV부터 켰다.
고정 된 채널에서 Satisfy 관련 소식이 쏟아졌다.
염룡 트라우카가 바꿔놓은 세계.
전보다 미스터리해지고 위험천만해진 세상을 사람들은 만끽하고 있었다.
개벽은 사람들의 잠잠해졌던 모험심에 재차 불을 지폈으니까.
시즌2의 시작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드와 템빨단은 마지막 단계로 향하는 싸움을 준비 중인 것과 별개로, Satisfy는 제2의 전성기를 누리는 것이다.
‘...비반은 최소 2장은 발라줘야 양심의 가책이 덜 하려나? 가장 이상적인 그림은 주문서 4장으로 10강 하나 띄어놓고 시작하는 거긴 한데... 관둬. 욕심은 버리고 처음 계획대로 한다.’
신화 등급 아이템의 풀 강화.
분명히 엄청난 업적으로 인정받고 보상이 들어올 거다.
하지만 서두를 이유가 없다.
효율을 따지는 게 옳았다.
‘이론적으로 4장의 고대 강화 주문서만 써도 10강화에 성공할 수도 있지만, 최악의 경우엔 10장을 써야할 수도 있는 거니까. 괜히 하나에 집착했다가 눈 돌아갔다간 진짜 끝장이다.’
신영우는 자신의 자제력이 다소 부족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과거 황금 마차의 뽑기 시스템에 중독됐을 때 여실히 실감했다.
물론 그때의 상처를 교훈 삼아 성장할 수 있었고, 덕분에 부인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도 몇 달째 참고 인내할 수 있었지만...
다시 도박에 손을 대는 순간 기껏 연마해온 인내심이 순식간에 바닥날 거란 예감이 들었다.
‘Satisfy에서 확률에 기대느니 라스베가스를 간다.’
고대의 강화 주문서는 물론이고 평범한 강화석도 돈 주고 못사는 실정이다. 원체 귀했다.
아이템 강화에 도박을 거느니 계좌에서 산더미처럼 불어나고 있는 현금을 갖다 버리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무엇보다 나흘에 한 번씩 고대의 강화 주문서를 수급할 수 있게 된 상황이다. 시간은 내 편이야. 천천히 가면 돼.’
어느새 샤워를 마친 영우가 집을 나섰다.
유라에게 지금 출발한다고 전화를 건 뒤 차량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오늘 탈 차는 대진 자동차에서 만든 최신형 세단이다.
유라의 조부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으니까.
광고 모델 계약 기간을 연장하자는 핑계로 손녀사위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진명 회장의 속셈에 어울려주는 것이다.
[속보입니다.]
시동을 켜자 흘러나오는 라디오에서 Satisfy 소식이 흘러나왔다.
[지옥의 왕 바알이 서대륙 각지에서 목격되고 있습니다. 일부 플레이어의 증언에 따르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은둔고수들을 표적으로 삼아 살해하는 중이라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은둔고수들.
공교롭게도 템빨단에서 파악하지 못한 초월자들을 뜻할 것이다.
어떤 인연을 맺어 그들과 함께 생활해온 플레이어들이 그들의 죽음을 목격했을 테고.
‘곧바로 소문을 퍼뜨렸겠지.’
바알이 재차 지상을 노리기 시작했단 사실을 템빨단에게 어서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
‘이번엔 우리가 친다. 걱정 말고 애도에 집중하기를.’
초월자와 인연을 맺은 플레이어들은 당연히 막대한 이익을 얻어왔을 것이다.
마치 과거에 피아로와 만나 큰 도움을 받았던 그리드처럼 말이다.
물질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귀중한 인연이었을 터.
그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했을 사람들의 충격과 슬픔을 영우는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여 멀리서나마 위로했다.
이를 갈면서다.
‘바알 X새끼.’
***
“자동차는 역시 대진이야. 승차감이 무슨 구름을 타는 줄 알았네.”
호텔 앞.
유라와 함께 차에서 내린 신영우가 제법 큰 목소리로 혼잣말했다.
파파라치들의 시선을 의식한 것이다.
Satisfy에서 인외의 감각을 갖고 살아가는 탓에 현실에서도 예민해진 그의 감각은 곳곳에 숨어있는 기자들의 기척을 정확하게 감지했다.
“할아버지의 작품이겠죠.”
상황을 눈치 챈 유라가 한숨 쉬었다.
오늘 이곳에 그리드가 찾아올 거라는 정보를 흘린 장본인은 이진명 회장이리라.
그리드가 대진 그룹의 회장인 나, 이진명이를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만으로 상당한 경제 효과를 얻을 테니까.
“제가 두 번 다신 이러지 말라고 주의 드릴게요.”
“됐어. 겸사겸사 우리 둘이 같이 찍히는 사진이 늘어나면 좋지, 뭐. 인터넷에 뜨면 다운로드 받아서 액자에 걸어놔야겠다.”
“...”
기분 좋게 말하는 재주가 늘었다.
나날이 발전하는 영우를 유라는 마냥 반기지 못했다.
영우가 여러 여자들과 많은 경험을 쌓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하지만 어쩌겠나.
마냥 좋은 걸.
“가자.”
“네.”
영우가 내민 손을 붙잡고 팔짱 끼는 유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늘 하루 지옥에서 쌓인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느낌.
기쁘고 들뜬 마음에,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 못하고 영우의 뺨에 입을 맞춘다.
할아버지를 꼭 혼내주겠다고 다짐하면서.
***
“사람들 다 죽어 가는데 데이트나 하고 앉았네.”
백요가 투덜거렸다.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미국 커뮤니티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는 그리드와 유라의 데이트 사진이 그녀를 자극했다.
단순한 화풀이에 불과했다.
그리드와 유라에게 악감정은 없다.
다만 지금 그녀가 처한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저절로 원망하게 됐다.
“바알...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고개를 푹 숙여 긴 머리를 늘어뜨린 흑요가 연신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오늘.
그녀의 스승이자 연인이 죽었다.
그녀에게 있어선 현실보다 훨씬 더 소중한 Satisfy에서 얻었던 인연이다.
바알에게 살해당했다.
긴급 퀘스트가 발생해서 달려왔을 땐 이미 늦었다.
바알에게 심장을 꿰뚫리고 목을 잘린 상태였다.
“엠마...”
동생의 이름을 부르는 백요의 얼굴이 왈칵 구겨진다.
인마대전 이후.
선악의 기로를 넘나든 여파로 혼란에 빠진 자매는 정처 없는 여행을 떠났었다.
정말로 많은 생각을 했다.
남들보다 강한 힘.
이 힘으로 누군가를 해쳤을 때보다 구했을 때 느낀 감정이 훨씬 더 즐거웠기 때문이다.
이참에 쭉 그리드처럼 살아가도 좋지 않을까.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의 변화를 순순히 인정해줄까?
또 괜히 원치 않던 관심을 받고 비난을 시달리게 되는 건 아닐까.
고민을 거듭하며 걷고, 몬스터를 베고, 또 걷고, 적을 만나고, 다시 또 걷던 자매는 어느새 작은 마을에 이르러 있었다.
히든 피스라도 숨어있지 않는 이상 이런 곳에 누가 방문할까, 그런 의문이 들 정도로 산간 오지에 있는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자매는 우연히 한 사내를 만났다.
태양처럼 밝고 따뜻한 사내였다.
때 묻지 않은 미소가 몹시 보기 좋았던.
순전히 마을을 지키기 위해 산과 산을 넘나들며 몬스터를 사냥해왔다는 사내는, 타고난 재능에 환경이 보태져서인지 무척 강력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초월자.
더러운 세상과 단절 된 채 살아온 까닭에 순수한 사내였다.
자매도 덩달아 솔직해지게 만들었다.
자매는 어느덧 사내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관계로 발전했다.
현실에선 250킬로그램이 넘는 체중 탓에 외출조차 힘든 그녀들은, 가족 외의 타인과 이토록 깊이 교감해본 것이 너무 오랜만이었다.
순수하되 현명해서 영감을 주는 사내를 순식간에 동경하게 됐고 급기야 사랑에 빠졌다.
비록 백요는 동생을 위해 그 사랑을 마음속에 묻어뒀지만.
그녀의 희생 덕분에 자매는 모두 행복할 수 있게 됐다.
흑요는 사랑을 얻었고, 백요는 평온을 얻었으니까.
그녀들은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점차 배워나갔다.
자매에겐 너무 가혹한 현실을 살아가며 품었던 마음 속 독기를 서서히 정화시켜갔다.
그리드처럼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지금와선 다 부질 없는 일이다.
“우리도 지옥에 갈까?”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응, 갈래.”
연인과 함께 바알에게 몰살당한 주민들.
그들이 남긴 핏자국을 염료로 삼은 자매가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과거 야탄의 종과 관계를 맺었을 때 배운 악마 소환진이다.
““어떤 가여운 자가 나를 소환하였느냐.””
꽤나 고위의 악마가 소환됐다.
지상의 달콤한 공기를 한껏 만끽한 놈이 절실해 자신을 불렀을 인간들에게 자애로운 미소를 그렸다.
곧장 일그러지는 미소였다.
“우리를 지옥으로 데려가. 카오틱 수치는 충분하잖아?”
한때 그리드와 함께 태양급 강자로 분류 됐던 자매.
현재는 그리드의 그림자도 밟지 못하는 입장이 됐다지만, 그녀들은 여전히 강력했다.
악마를 손쉽게 힘으로 제압하고 업보를 쌓아 얻은 자격을 제시했다.
멱살을 붙잡힌 채 자매의 심연을 엿본 악마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놈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인간을 죽인 거냐...?””
“앞으로는 악마를 더 많이 죽이게 될 거야.”
““큭...! 크하핫!! 좋다! 어디 한 번 해봐라!!””
자매가 지옥으로 투신했다.
곧바로 바알에게 찾아가 개죽음을 당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의 공적이 되고도 오랜 세월 무사했던 것이 그녀들의 영리함을 증명한다.
자매는 그리드에게 몇 번이나 당하며 학습한 바 있다.
천천히, 신중하고 철저하게 움직일 계획이었다.
“일단 바알을 섬기는 악마들부터 찾아서 죽이자.”
“응, 팔다리를 끊어버리자.”
“그러다보면 언젠간 그리드가 와서 조져주겠지.”
“맞아. 그 모습을 꼭 지켜볼 거야. 웃으면서 지켜볼 거야. 그러다가 나도 한 번쯤은 바알을 죽일 거야.”
유라 홀로 파수 섰던 지옥에 2마리의 광견이 난입했다.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변화였다.